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6_北韓과中國

[펌]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III / 강산

忍齋 黃薔 李相遠 2014. 11. 22.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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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자이신 강산 선생님과 동행하신 노길남 선생님이 바라보시는 순수한 북한 동포에 대한 동족애와 사랑 그리고 그 측은지심을 이해하고 북한에 대한 이해의 차원에서 두 분의 생각이 담긴 글을 이곳에 소개를 하지만, 북한 정권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는 점이 있음을 밝힙니다. 북한정권의 독재와 세습왕조 그리고 여러 경로로 이미 알려지고 확인된 인민에 대한 탄압은 손가락질의 대상이며 살인마 전두환과 함께 인류의 양심 앞에 처단되어야 할 공적임을 알리고자 합니다.]] 


[어제는 시애틀에 사시며 "25년 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를 운영하시는 웹페이지 "사람 사는 시애틀 한마당"에 2014년 9월 24일부터 2014년 11월 18일까지 총 25차례에 걸쳐 게시하신 강산 선생님이 페이스북 친구를 신청하셨습니다. 그분의 페이스북을 방문하니 통일운동을 하시는 분입니다. 도와드릴 만한 게 내 블로그와 페이스북을 통해 통일에 대한 그분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메시지를 드렸습니다. 강산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그분의 방북기를 제 블로그에 제 게시합니다. 강산 선생님의 방북기를 통해 북한을 이해하는 좋은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모든 볼드체는 원문이 링크되어 있습니다.]


[펌]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II / 강산에서 이어집니다.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12 14-10-16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12


동무와 동지


아침 식사 후 잠깐 휴식을 취하고는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북부조국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보고 듣고 배우게 된다.   김미향 안내원이 기다리고 있다가 우릴 맞아준다. 호텔 밖으로 나오니 주차장에 빼곡하게 들어찬 차들 사이로 우릴 발견하고는 어제 만났던 김영호 운전사가 차를 몰고 다가왔다.   김미향 안내원은 앞자리 오른편, 나는 뒷자리 왼 편에 앉았고 노길남 박사는 오른편에 앉았는데 우리가 평양에서 머무는 동안 늘 그곳을 자신의 자리로 삼았다.


만경대 가는 길 창밖 풍경


아침 안개가 완전히 걷혀져 오늘은 날씨가 아주 화창하다.  오늘 오전은 만경대를 답사하게 된다. 달리는 차 안에서 노길남 박사가 어제 김미향 안내원에게 부탁한 안건에 대해서 꼭 이뤄졌으면하고 다시 그 일을 거론한다.  다름이 아니라 지난번 방문기에서 거론한 적이 있는 인민군부대를 찾는 일과 또 다른 한가지다.  북에는 인권이 없다고 서방세계에서는 계속 북을 비난하고 공격하는데 이번 기회에 그 흉측하다고 소문난 요덕수용소를 방문하여 그들이 말하듯이 정말 거기 쥐들이 들끓는 가운데 사람들을 가둬서 때리고 먹을 것을 주지 않고 온갖 고통을 가하는지 확인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인권을 귀하게 여기는 북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니 있는 그대로 서방세계에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미였을 것이다.  



김미향 안내원은 가타부타 대답이 없다.  그 표정을 살피지는 못했지만 조금 난감한 모습이었으리라.  본인이야 어디든 모시고 가고 싶겠지만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므로 박사님의 의사를 전달하는 역할은 하지만 결정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이미 말했었다.  한편으로 이후에 내가 방문기에서 그 이야기를 쓰겠지만 북에는 요덕 수용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우린 며칠 후에야 알았다.  김미향 안내원이 이미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존재하지 않는 수용소를 찾아가겠다고 하였으니 더더욱 난감했으리라.  


만경대 가는 길에 대동강 푸른 물가로 달리며


이때 노 박사님이 북에는 조선말에 불가능이란 없다는 뜻의 말이 있지 않느냐고 하면서 정확하게 그 말이 어떻게 되는지를  운전사에게 묻는다.  그러자 김영호 운전사가 말하길 “무엇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조선말이 아니다”라고 지도자 동지가 말씀했다고 한다.  그러자 노 박사님은 김미향 안내원에게 절대로 자신이 요청한 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말처럼 밀어붙여보라고 한마디 던진다.  김미향 안내원이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는데 나도 그 말이 이런 일에 사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니란 것을 알기에 속으로 웃었지만 하도  노 박사님이 그 일을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이뤄졌으면 하는 마음임을 알기에 아무 말도 않고 바깥만 내다보며 사진을 찍는다.  결국 한참만에 김미향 안내원이 한마디를 한다.  “그 말을 말입니다, 아무 일에나 그렇게 갖다붙여서 사용하는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인민들이 힘을 모으면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이뤄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라고 해서 결국엔 참고 있던 웃음을 모두들 소리내어 크게 한바탕 웃었다.


노 박사님이 안내원과 운전기사를 부를 때 이름 뒤에다 동무라고 불러서 내가 질문을 했다.  “어떤 경우에 동무라고 부르고 누구에게는 동지라고 합니까?”  김미향 안내원이 대답하기를 동무는 자신과 직책이 비슷하거나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이 편안하게 서로 부르고,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도 그렇게 부른다고 했다.  동지는 직책이 높거나 존경하는 사람, 혹은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을 대할때 부른다고 했다.   그래 내가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도 그렇게 부르면 되는가 물어보니 당연하다고 말해준다.  그래 바로 박원심 접대원, 김영호 운전사, 김미향 안내원하고 부르는 것보다 더 친근하게 원심 동무, 영호 동무, 미향 동무”하고 불러도 되겠느냐고 물어보니 우리가 여기 있는 동안 날마다 함께 지내게 되는 사이니 그렇게 불러달라며 훨씬 친숙하게 느껴진다고 말해준다.  김미향 안내원은 내가 기억하기로는 김일성대학을 나온 인텔리 여성 안내원으로 나보다 나이는 더 젊지만 그 인격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조심스럽게 대해야겠다는 마음이 컷다. 그런데 이렇게 동무라는 호칭을 부름으로 서로 더 가까워지고 편안해질 수 있다 생각하고는 이후에 미향동무라고 종종 부르게 되었다.


동무란 호칭으로 부르기로 한 김미향 안내원과 김영호 운전기사, 활짝 웃는 얼굴이다.


북에서는 거기서 편안한 호칭을 쓰는 것이 좋다.  내가 접대원을 부를 때나 안내원을 부를 때 매번 접대원, 안내원하는 호칭을 부르는 것보다 이름에다 동무를 붙여서 부르면 편하기도 하고 더욱 친근감도 생기는 것 같다.  이렇게 좋은 호칭을 우린 금기시하는 사회에서 살았기 때문에 내가 지금부터 동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조차 오해하는 사람들도 가끔 있겠지만 이렇게 동무와 동지에 대해서 배운 후에 나도 편안하게 동무라는 호칭을 사용했고, 이 방문기에서도 동무라는 호칭은 앞으로 종종 등장하게 될 것이다.


어려서 우리들은 동무들과 함께 놀았었다.  동무들과 어깨동무도 했고 자치기도 했고 얼음위에서 썰매도 탓다.  ‘동무들아 오너라 같이 놀자’라는 노래도 불렀다.  그런 것이 어느 때부터 친구라는 단어로 그 동무가 바뀌어버린 것이다.  의도적으로 동무를 못쓰도록 학교에서 강요하지는 않은 듯하다.  그냥 그 단어가 책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 전부인 듯하다.  아무래도 매스컴에서 동무라고 부르는 호칭은 북에서 널리 사용하는 것을 보여주는 바람에 남에서는 민중이 자발적으로 동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게 된 듯하다.  내가 어렸을 때 방송에서 우스개소리로 북에선 ‘아버지 동무, 어머니 동무’, 심지어는 ‘할아버지 동무’ 하고 자기 부모도 몰라보고 동무라고 부른다고 북을 매도하고 막말을 하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간접적인 영향으로 동무라는 말이 남한에서 자취를 감춰버린 것같다.


아무튼 남쪽에서 요즘 이름 뒤에다 님 자를 넣어서 많이들 부르는데 그것처럼 북에서는 오래전부터 편안하게 동무로 불러온 것이다.  동무란 단어 안에는 너와 내가 똑같은 인격체로 평등한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느낌이 있지 않은가?  참 좋은 우리말이다. 그 동무를 다시 남쪽에서 사용한다면 북에서 널리 사용하는 호칭이라해서 탄압하게 될까?  길가다가 ‘영식이 동무’하고 불러도 괜찮을 날은 언제 오려나?  통일이 그보다 먼저 오는 것은 아닐까?  


근래에 인터넷 페이스북 친구들 사이에서 동무라는 호칭을 서로 사용하자고 한 사람이 있었는데 수많은 친구들이 거기에 좋아요를 눌러주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면서도 아직은 서로에게 동무라고 불러주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제법 진보적이라고 스스로를 여기는 사람들끼리도 이건 쉬운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우리들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우리 자신이 알게 모르게 아주 깊숙하게 반공으로 세뇌되어 있는 증거의 하나가 바로 이 동무라는 단어를 편안하게 사용하지 못하는 것으로 증명되어지는 것은 아닐까?


만경대 고향집 입구의 잘 조성된 잔디밭


내가 종종 페이스북으로 알게된 사람들 가운데 나이가 비슷하면서도 사회적인 이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친구들에게 동지라고 부르곤 하는데 그 말에 대해서 딴지를 거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  그런데 나이가  좀 더 많은 분을 동지라고 부르면 존경의 표시이니 그분이 좋아해야 하는데 아마 이 글을 읽지 못하였다면 우리가 남한에서 사용하는 동지라는 말이 북의 동무처럼 비슷한 나이끼리 부르는 호칭으로 알고 있을 것이니 싫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동지는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에게 부르는 존칭이고 아무에게나 부르는 것이 아님을 염두에 두고 누가 나에게 동지로 불러주면 행복해하면 될 것 같다.  한때 내가 더 젊은 친구들에게 서로 동지로 부르기로 하자고 한 적이 있는데 동지도 사용하고 동무도 사용하는 것이 어떨까?  동지는 괜찮은데 동무는 아직도 많이 어색한가?  나 스스로도 북의 인민에겐 동무라고 불러보았지만 여기선 그렇게 부른 적이 없어서 참 생소함을 느낀다.  우리의 세뇌된 머릿속은 그렇게 씻어버리기가 어려운 것 같다.


만경대 고향집의 황윤미 해설선생의 안내를 받으며


대동강변을 달리던 차가 어느새 만경대에 도착했다.  약간 못미처 차를 세우고 걷는다.  25년 전에 북부조국을 처음 찾았을 때에도 첫 밤을 지낸 후 만경대를 찾는 것으로 그 일정을 시작했었다.  주변의 잘 정돈된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약간 오르막을 오르면 김주석이 탄생한 초가집이 나오는데 예전의 모습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듯하다. 입구에서 우리를 맞이한 사람은 황윤미 해설선생으로 외국어대학을 졸업했다고 한다.  여러 나라에서 오는 관광객을 안내하기 위해서 외국어가 필수일 것이다.  자주 오신 노 박사님에게 카메라를 맡기고 해설선생으로부터 만경대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고향집으로 들어간다.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13 14-10-18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13


만경대 고향집에서 1 


황윤미 해설선생의 안내로 고향집으로 들어선다.  오른편이 본채이고 왼편이 사랑채다.  이곳 만경대 고향집엔 김일성 주석의 증조할아버지 대부터 살아왔는데 그분은 이곳 만경대 일대의 넓은 땅을 소유한 대지주의 산당지기였다고 한다.  그 지주의 조상들의 묘들이 이곳 만경대에 있었고 그 묘들을 지키고 돌보는 일을 김주석의 증조 할아버지대부터 했다는 것이다.  연도로는 1862년부터 1959년까지 4대에 걸쳐서 가족들이 이 집에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김 주석은 1912년 4월 15일에 이 집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김형직 선생, 모친은 강반석 여사다.  이곳 뒷산 만경대는 김 주석이 동네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던 놀이터였다.  이미 5살 때 부친 김형직 선생께선 식민지 시대의 일제에 대한 혁명투쟁으로 검거되어 평양 감옥에서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반일지하조직인 ‘조선국민회’를 김형직 선생이 조직하였다가 잡힌 것이다.  아버지가 온 몸에 멍이 든 모습을 보고는 그렇게 만든 일제에 대해서 김 주석은 어려서부터 원수로 여겼다.  



1919년 3.1 인민봉기가 일어나자 주석은 7세때에 그 시위에 앞장서서 참여했다고 한다.  거기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하고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고, 일제는 전체 조선민족의 원수다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후 부모와 함께 중강으로 이사했는데 그곳에서도 일제의 식민지배는 마찬가지여서 조선 전체가 왜놈 감옥이라며  다시 만주 통화성 림강을 거쳐 장백현 팔도구로 가서 거기서 부친은 반일투쟁을 하였고, 주석은 그곳 소학교를 졸업하였다고 한다.


부친 김형직 선생이 주석에게 ‘먼저 조국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에 따라 12세 되던 해인 1923년에 ‘배움의 천리길’을 혼자서 걸었다고 한다.  3월 16일에 출발하여 이곳 만경대 고향집에 3월 29일에 도착하기까지 노상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었고, 30리 떨어진 칠골의 외가로 가서  2년 동안 창덕학교에서 공부했다.  



1925년 1월 중순에 아버지가 다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원수를 갚기 전엔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조국광복의 큰 꿈을 품고 ‘광복의 천리길’을 다시 떠나 중국 동북지방의  무송제1소학교에 편입하였다.  다음해인 1926년에 부친 김형직 선생이 감옥에서의 고문 후유증으로 30세의 젊은 나이에 서거하였다.   주석은 화성의숙에 입학하여 그때부터 첫 혁명조직인 ‘ㅌ ㄷ (타도제국주의 청년동맹)’을 조직하였고,  이후 1927년에 길림 육문중학교에 입학하여 거기서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을 조직하면서 일제와의 투쟁을 전개해나갔다.


이곳 고향집에 남아있던 할머니를 일제는 주석이 항일투쟁을 하던 시절 16년 동안이나 끌고 다니면서 괴롭혔다고 한다.  빈손으로 떠났던  주석이 나라를 되찾고 돌아왔지만 이곳 고향집은 바쁜 일정에 바로 찾지는 못하고 두어달 후에야 찾았다고 한다.



사랑채엔 여러가지 농기구들과 물레, 독 등속이 진열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멍석엔 김 주석이 해방후 이곳 고향집을 찾았을 때 사용했다는 팻말이 붙어있다.  고향집을 찾은 그날 이미 부모님들은 서른과 마흔의 나이로 모두 이국에서 돌아가셨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이 집에서 반겨 맞아주었을 때의 감회가 어떠했을까?  모두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한편으로 이미 세상을 떠난 부모님과 눈밭에 묻고 온 숱한 동지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내가 25년 전에 찾았을 때 보았기에 기억에 뚜렸한 쭈그러진 독이 그대로 있는데 황윤미 해설선생이 다시 설명해주어서 보다 정확하게 그 독의 유래를 알게 되었다.  1874년 주석의 증조할머니가 이른 새벽에 독을 구입하러 나갔다가 저물어서야 돌아오면서 구입해온 독이다.  집에 꼭 필요한 독을 장만해야 하겠는데 수중에 있는 돈으로는 도저히 구입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래 결국에 저 쭈그러진 독을 보고는 왜 그렇게 된 것인가 물어보니 불을 너무 세게 주어서 열을 많이 받아 오무라졌다는 것이었다.  증조할머니는 당시 짚신 한 컬레 값으로 그 독을 구입하면서 ‘독이 쭈그러졌다고 장맛이야 변하겠느냐’하고 그 독을 구입하였는데 지금까지 140년 동안이나 그 독을 보존하게 되었다고 한다.  



25년 전 내가 방문했을 때 해설선생은 당시에 이런 말을 한 것을 기억한다.  사람들이 저 독을 구입한 것을 보고는 모두가 웃었는데 당시 증조할머니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저 독을 보고 비웃을 때 내 가슴속에는 피눈물이 났다’라고.  그렇게 주석의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하였다는 것을 저 쭈그러진 독이 오늘까지 증명하는 것이다.  


주석의 가난한 인민에 대한 사랑은 이렇게 가난을 대대로 물러받아 오면서 가난의 고통을 뼈저리게 겪어보았기 때문이리라.  그 가난은 개개인 스스로가 못나서가 아니라 나라의 제도의 잘못에 있다는 것을 일찍부터 깨닫고, 그것을 해방된 조국은 나라가 해결해줘야 한다는 결심을 하였으리라.  주석은 자신의 가난만을 극복하는 길을 택하지 않고 온 나라의 가난을 해결해낼 방도를 위해 고심했다.


북부조국이 해방후 토지개혁을 혁명적으로 실시한 것은 김 주석이 이렇게 가난한 집안 출생이었다는 것도 크게 작용하였으리라 생각해본다.  대부분의 인민이 농업인구인 시절에 정의롭지 못한 토지의 소유제도로 인하여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지주로, 그리고 대부분의 인민들은 소작농 혹은 소작조차 할 수 없는 처지의 상황이었다.  이 문제를  새로 되찾은 조국땅에서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지주가 가진 그 넓은 땅이 조선왕조때부터 소유했던지 아니면 친일파가 되어 일제에 협력하여 큰 땅을 차지하였던지간에 광복을 한 마당에 그 지주들의 소유를 그대로 두면서 새 나라를 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새 나라는 너와 내가 평등하게 모두가 함께 어울어져 사는 나라였어야 했던 것이다.

 

나중에 내가 북의 학자와의 인터뷰를 통하여 들은대로  토지개혁과 그 이후의 일에 대하여 자세하게 서술하게 되겠지만 북은 1946년 3월 5일에 토지개혁법령을 공포하여 3월 한 달 동안에 북에서 모든 지주들은 없어졌다고 했다.  지주들의 토지는 무상으로 몰수하여 땅이 없는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한 것이다.  우리들은 소련군이 북한 전역을 통치할 시기라고 여긴 이 시절에 이미 북한은 자주적으로 이렇게 중요한 토지개혁 문제를 해결해내었던 것이다.   인민들이 공평하게 먹고 사는 문제가 바로 이 토지개혁의 성패에 달렸던 것인데 그것을 한 달만에 성공시킨 것이다.  


김 주석을 북의 인민들이 떠받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여러가지 이유 가운데 이렇게 토지개혁을 이뤄낸 것 하나만 보고서도 우리는 이제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가난은 개개인이 못나서가 아니라 이땅위에 있는 재화와 물질을 독점하는 자들이 있고, 그것을 법으로 만들어 합법화하고 권력을 이용하여 지키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북은 그 악법을 깨어버리고 서로 나누는 법을 만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논밭이 없던 나에게 배불리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땅을 나라에서 공짜로 준 것이다.  북의 인민들이 이것 하나만으로도 어찌 김 주석을 위대한 수령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일에 무관심했고 이후에 마지못해 북을 따라 흉내를 약간 내었지만 제대로 토지개혁을 이뤄내지 못한 남한의 당시 상황과 비교하여 이 문제는 우리들이  깊이 생각해볼만한 문제다. 


해설선생이 이제 본채 안에 걸려있는 사진들로 안내해준다.   첫 번째 방엔 조부모님들의 사진과 주석이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와 고향집을 찾아 조부모님과 만나 기쁨의 상봉을 하는 사진들이 걸려있다.  얼마나 기뻤는지 당시엔 사진을 찍을 때 일부러 웃으며 찍을 시기가 아닌데도 할머니가 환하게 웃고 있다.  주석의 표정도 아주 밝고 자신에 찬 모습이다.  



이곳 고향집이 지어진 이후 저 날은 살아남은 가족들의 가장 기쁘고 행복했던 날이었을 것이다.  또한 주석이 고향집을 찾는 것을 알고 찾아온 이웃들과 인민들도 그 기쁨을 함께 나눴을 것이다.  그런 연유로 이곳은 북부조국의 모든 인민이 직접 찾아보고 싶어하는 마음의 고향집이리라.   그래  주석의 고향집을 북의 인민들은 자신의 고향집으로 삼고  애타게 그리워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리라.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14 14-10-20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14


만경대 고향집에서 2.


두 번째 방은 주석이 부친 김형직 선생과 모친 강반석 여사의 사진과 나란히 하고 있다.  부친은 항일투쟁을 하다 일제에 다시 체포되어 신의주로 이송되는 중 탈출하였으나 감옥에서의 고문과 동상으로 인하여 무송에서 30세의 나이에 돌아가셨다.  모친은 지독한 가난 가운데서도 주석의 항일투쟁을 도왔는데 40세의 나이에 만주 소사하에서 병고로 인하여 제대로 치료를 받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다.  당시 주석은 빨찌산으로 산 속에서 싸울 때였다.  이국에서 그렇게 돌아가신 부모님의 묘는 1947년에 만주에서 평양으로 모셔왔다고 한다.  



주석은 회고록을 통하여 부친으로부터 네 가지 큰 유산을 받았다고 했다.  첫째는 지원의 사상, 즉 뜻을 고상하고 원대하게 갖는 것이었다.  둘째는 3대 각오로 항일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아사, 타사, 동사를 각오하라는 것이었다.  세째는 동지를 구하는 것이었다. 즉 투쟁을 위해서는 동지가 꼭 필요하고, 한 사람의 동지를 구하기 위해서는 천리를 함께 가라는 것이었다.  네째는 권총 두 자루였다.  부친이 죽기 전에 ‘성주’가 크면 주라고 유언을 남기며 어머니에게 맡겼었다.  주석이 이후 항일유격대를 창설하여 일제에 대항하여 무장항쟁을 시작했을 때 이 두 자루의 권총으로 시작했다.  두 자루의 권총으로 무장한 일제 관동군의 총을 빼앗아 무장을 늘려감으로 유격전의 발판을 만들었던 것이다.


 

나의 가장 존경하는 스승인 고 홍동근 목사님은 그의 책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읽고”라는 독후감 책을 통하여 방대한 분량의 주석의 일대기를 잘 요약해 놓았다.  홍동근 목사님에 관한 이야기는 따로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 책에서  김 주석이 어머니 강반석 여사를  회고하는 글을 여기 옮겨 본다.


1997년 해외에서 발행한 홍동근 목사님의 저서 '세기와 더불어를 읽고'


“어머니가 순수한 모성애만을 갖고 있었다면 나는 이처럼 뜨거운 애정을 가지고 어머니를 회고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가 나에게 기울인 사랑은 단순한 모성애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식을 자기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기 전에 나라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며  자식들이 부모에게 효도하기 전에 나라에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준 진실하고 혁명적인 사랑이었다. 어머니의 온 생애는 그대로 나의 가슴에 참된 인생관, 혁명관을 심어준 하나의 교과서와 같은 생애였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대를 이어가며 싸워서라도 기어이 나라의 광복을 이룩해야 한다는 불요불굴의 혁명정신을 심어준 스승이라면 어머니는 일단 혁명을 시작한 사람은 인정에 끌리거나 곁눈을 팔지 말고 끝장을 볼 때까지 오로지 목적한 바를 실현하기 위해서만 노력해야 한다는 이치를 깨우쳐준 고마운 선생이었다.” (김주석 회고록 제 2권, 428쪽)


마지막 방의 사진 셋은 주석의 삼촌 김형권의 사진과 동생 철주, 그리고 사촌동생의 사진이라한다.  삼촌은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31세에 옥사하여 거기서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한다.  동생 철주는 빨찌산으로 일제와 싸우다 19세의 어린 나이로 희생되었는데 그 시체조차 찾을 길이 없고,  사진의 사촌동생은 해방은 맞이했지만 고문의 후유증으로 해방후 3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고 한다.  주석의 온 일가가 항일투쟁에 나섰지만 막상 해방 후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주석 혼자뿐이었다. 


김 주석의 삼촌, 동생, 사촌동생의 사진.  항일혁명의 노상에서 모두 죽었다.


위의 홍동근 목사님의 같은 책  ‘세기와 더불어를 읽고’의 서문에서 서술한 김 주석의 항일혁명에 관한 것을 발췌하여  몇 문장으로 여기 옮겨본다.


“주석의 항일무장유격대원들은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만주이민의 자녀들이며 부모가 일본 토벌대에 맞아죽거나 가족이 끌려간 빈농, 소농, 머슴의 10대 젊은이들이었다.  공부는 소학교도 가보지 못한 자가 대부분이었다.  망국민의 한과 보복의 분노로 가득찬 애국청년들이었다. 주석이 그들에게 한글부터 가르치고 아동단, 소년단, 공청 등에서 구국의 사상을 주어 의식화시켜 연락병으로, 소년중대로 그리고 정규 유격대전사로 훈련하여 백두의 빨지산을 만든 것이다. “


“영하 40도의 눈보라 속을 기아와 동상과 싸우며, 조국광복의 일념에 꽃다운 청춘을 모두 바쳤다.  많은 전사자들이 묘비석도  없이 광야의 눈서리에 또 산기슭 나무밑에 묻히었다.  살아남은 자들이 광복후 조국에 돌아와 북의 공화국을 세우고 무적의 조선인민군 전통을 만들었다.  최헌, 김책, 강건, 안길, 최춘국, 김일, 오진우, 박성철, 황순희, 김옥순은 그 대표적 빨지산들이다.  이들이 일제의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천황의 군대를 백두에서 무찌르고 광복후 조국해방전쟁에선 세계최강의 미군을 맞받아치고 신생조국을 보위하였다.  이것은 세계 어느 나라 군사학과 전쟁사에도 없는 기적이요, 신비이다.  여기 주석은 위대한 교사요, 창조자이다.   갈릴리의 불학무식한 어부와 농민을 불러 하나님 나라 운동의 혁명당을 만든 예수의 지도자적 천재성을 주석의 항일무장유격대 혁명에서 본다면 지나친 말일까?  이 김일성 사령과 빨지산 영웅들을 가짜와 악당으로 50년 욕하고 저주해온 남한의 ‘반공’의 허구가 슬퍼진다”


“김일성 항일무장유격대의 최대의 민족사적 의미는 1930년대 민족이 사멸하는 가장 암흑한 때 항일구국의 횃불을 들고 일어난 것이며, 어느 외세의 군사적 지원도 없이 자체로 적의 군경을 쳐서 무기를 획득하고 자기 인민과 연대하여 유격전쟁 15성상을 수행한 것이라 하겠다”


“김사령이 유격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보천보를 쳤을 때 동아일보는 두 번이나 호외를 내어 1937년 6월 5일자에 보도했고, 미국의 신한민보(조선국민회 기관지)는 ‘김일성장군, 룡같이 범같이 비략활동!’이란 큰 제호 아래 ‘김일성씨의 무장부대가 잇어 갑산보천보를 습격하다 (1937,7,29,  9,30)’라고 대서특필하여 온 조선동포가 만세를 불렀다고 했다.  여기 김일성장군 민족신화는 세워졌다!”



“그들이 장개석, 모택동 또는 스탈린에게서 소총 한 자루 받은바 없이 오직 자기 인민의 도움으로10여성상을 싸우고, 끝내 1945년 8월 소련군과 연합하여 일제를 치고, 조국에 개선하였다.  무장한 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조국에 돌아왔다.  이 주체의 혁명전통위에 주석은 나라를 세우고 광복 50년 자본주의 대국에도, 공산주의 대국에도 어느 큰 자에게도 종속함이 없이 자주하는 나라, 주체조선을 견지하고 있다.”


“오히려 제3세계 신생국인민들과 연대하여 반제비동맹 자주해방의 길을 가고 있다. 자주평화의 길이다. 이 항일무장유격대의 혁명전통을 북의 인민은 민족의 신화로, 존엄으로 또 민족정통성으로 자랑하고 계승하고 있다.  이 혁명전통의 이해 없이 북의 나라는 바로 알 수가 없다. 그들은 오늘도 ‘학습도 생산도, 생활도 항일유격대식으로!’하고 외치고, ‘80년대의 김혁, 차광수가 되자’고 다짐한다.”



고향집에서 한참 동안 설명을 들으며 둘러보고 나오니 밖엔 남여 인민군인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이곳 북부조국을 고향으로 둔 저 인민군인들이 고향집에서 김 주석을 느끼는 마음은 과연 얼마나 뜨거울까?  마음 깊이 흠모하는 주석의 태어나고 자란 곳을 찾는 그 마음을 내가 과연 얼마만큼 이해할 수 있을까?  


남한에서 내가 교육을 받을 때 당시 고등학교 교과서에선 북의 김일성 주석은 가짜라고 했었다. 항일무장독립항쟁을 한 김일성 장군은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어야 하는데 막상 평양의 군중대회에 나타난 김일성은 나이 서른 셋의 젊은이여서 군중들이 크게 실망했다는 이야기였다.  김일성 장군은 따로 있었다고 교과서에 실렸었는데 그렇다면 지금 그 진짜 김일성 장군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밝혀진 것이 하나라도 있어야 하는데 나는 이후에도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그런 거짓에 우리들은 세뇌되었던 것이다.  그런 거짓을 꾸며서 온 나라와 민중을 세뇌한 자는 누구인가?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란 남한의 세대들이 북한을 바로 알고 바로 볼 수는 없다.  처음부터 그렇게 머릿속을 세뇌당하고 나면 살아가면서 어떤 일로 인하여 큰 충격을 받으면서 스스로를 돌이켜보는 계기가 없는 이상 평생을 진실과는 동떨어진 거짓을 진실로 믿고 그럭저럭 살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란 것이 스스로의 유지를 위해서 교육과 매스컴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주입하는  것들로 대부분의 우리들의 생각은 이뤄져있다.  그런 연유로 나이가 들어서도 내가 새로운 것을 들으면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내 생각과 다른 소리를 듣는 것에는 거부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 북의 인민과 남의 민중이 서로 생각하고 믿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래 먼저 진실을 바로 알고, 그 차이를 좁혀나가며, 서로 이해하는 것이 통일운동의 시작이 아닐까?  나의 방문기가 그렇게 진실을 바로 알게 되는 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해설선생이 고향집 밖의 넓은 마당 건너편 그늘로 가서 잠깐 쉬자고 한다.   오늘부터 동무로 부르기로한 안내원 김미향 동무가 우물가에서 두레박을 내린다.  아마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줄 생각이었나보다.  내가 얼른 두레박을 받아들었다.  여성에게는 제법 크고 묵직한 두레박이다.  내가 옛날 한때 이것보다 더 큰 것으로 깊은 우물에서 수없이 두레박질을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그 누가 알랴.  능숙하게 물을 길어올려 곁에 있는 표주박에 옮겨 모두에게 마시기를 권한다.  참 좋은 물맛이다.  바로 주석과 온 가족들이 오래전에 마셔온 그 물맛이리라.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15 14-10-22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15


평양에 핀 무궁화와 옥류관의 선생님들


만경대 고향집 답사를 마친 후 차를 타고 점심식사를 위해 평양시내의  옥류관으로 향한다.  얼마쯤 달렸을까, 차는 길이 막혀 더 이상 달릴 수가 없다.  끝이 보이지 않는 버스 행렬들이 느릿느릿 움직이며 앞길을 막아섰는데 교통안내원이 이 길로 지나가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한다.  운전사 영호동무가 여기서 길이 트이기까지 기다리기 보다는 다른 길로 가겠다고 결심을 하고는 차를 돌린다.




조금 되돌아서 가는 길가에 울타리로 된 낯익은 꽃나무가 보인다싶어 살펴보니 무궁화 꽃이다.  내가 무궁화 꽃이야 어려서부터 보아서 알고 있지만 고향과 조국이 그리워 미국에서 십여년 전에 화분을 구입하여 심었었다.  이사를 하면서도 뒤뜰에다 옮겨심은 탓에 올해도 여름 동안 활짝 꽃을 피웠기에 너무도 익숙해서 멀리서 얼핏 보아도 알 수 있는 꽃이다.  얼른 사진으로 남겼다.  



아, 무궁화 꽃을 평양에서도 보게 되다니.  남부조국에서 국화로 부르는 무궁화꽃을 북부조국에서도 천대하고 괄시하지 않고 이렇게 가꾸기도 하는구나 생각을 하니 가슴이 뭉클하다.  차안의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역시 북부조국의 인민들은 통이 크다 싶다.  모든 인민이 한결같이 말로만 통일을 소원하는 것이 아니라 남부조국의 국화를 무시하지 않고 심기도 하고 가꾸기도 하는 것으로 너무도 동족을 사랑하고 하나가 되길 소원하는 그 진심을 엿볼 수 있지 않은가. 


옥류관 인근의 모습.  길 너머 수십대의 버스들이 늘어서 있다.

옥류관 입구.  평양에서 제법 많아진 택시도 보인다.


옥류관에 가까이 가니 아까 만났던 그 버스 행렬들이 모두 이곳으로 모였다.  그때문에 길이 막혔던 것이다.  멀찌감치 차를 대어놓고 운전기사 영호 동무도 함께 옥류관으로 걷는다.  옥류관 앞에는 한복을 입은 중년 여성들과 양복 차림의 중년 신사들이 구름처럼 여기저기 모여있다.  수십대의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이다.  알고 보니 북부조국 곳곳에서 선생님들이 전국교육일군대회에 참여하기 위해서 평양으로 모였고, 오늘 이곳 옥류관에서 점심으로 냉면을 드시기로 한 것이다.  어떤 선생님들이 이번 행사에 참석하게 되었을까?  각 학교에서 모범이 되는 선생님들이 오셨으리라.  북부조국이 선생님들을 귀하게 여기고 잘 대접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게 된 셈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아버지가 내가 여섯살 쯤 되던 때에 거제도의 작은 섬인 칠천도에 자원하여 발령받아 근무하며 살았는데 그때 서울로 교육을 받는다며 출장을 가서 며칠동안 집을 비웠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후에 아버지를 포함한 이삼백 명쯤의 선생님들과 당시 윤보선 대통령이 함께 찍은 사진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4.19 혁명 이후 잠깐이었지만 새로운 민주 정권이 들어서면서 모범적인 선생님들을 서울로 초대하여 격려하는 그런 대회였을 것 같다.  


당시 아버지가 참 교육자로서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학생들의 입학금을 몇 달치 월급을 털어서 대신 내어주었다는 이야기를 자라면서 듣곤 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부산에서 살 때 그렇게 아버지께서 도와준 어떤 여학생이 장성하여 어머니를 우연히 만나서는 자신이 당시 아버지의 도움을 받은 한 사람으로 이렇게 성공한 삶을 사노라고 그 이야기를 다시 해주어서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내가 크게 위로를 받은 적이 있다.   



지금 북부조국에서 훌륭한 선생님이라면 어떤 선생님일까?  학생들에게 자상하고, 열심을 다하여 가르치고, 조금 뒤떨어지는 제자들에게 보다 헌신적으로 가르치고, 혹시라도 잘못되는 제자가 있으면 만사 제쳐두고 그 제자를 위해서 시간과 정성을 들여 옳은 길을 가도록 노력하는 분일까.  12년제 의무교육 제도가 확립되어 있으니 나의 아버지처럼 박봉을 털어서 진학할 수 있도록 하지는 않겠지만 제자를 위해서 필요하다면 자신의 월급을 사용하기도 하리라.  이후에 북부조국의 선생님들에 대하여 내가 좀 더 공부해야 할 것 같다.


한편, 지금의 남한의 선생님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남한에서 요즈음 저렇게 참 교육자들을 초대하여 대회를 갖는가?  오히려 내가 귀하게 여기는 전교조 선생님들을 현정권에서는 탄압하고 있는 시절이다.  참교육을 위해 애쓰는 선생님들을 배척하는 세상인 것이다.  과연 지금의 입시위주와 무한경쟁 속의 교육을 받고 자라난 후세들로 이뤄질 미래의 사회는 어떠할까?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다.  이미 그런 교육을 받고 자라난 지금의 대학생들은 예전보다 훨씬 자유로운 가운데서도 사회 정치적인 문제에 참여하지 않는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살아가는 것이다.  옛날엔 대학생들이 먼저 참여하고 시위를 했는데 이제는 40대 50대의 중년들이 줄기차게 외치고 시위를 하여도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본척도 않는다.


세상에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 어디에 있는가?  엄청난 금액의 등록금도 정치적인 것이고 졸업 이후의 직업을 갖고  사회인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도 정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내가 참여하지 않고 개혁하지 않는다면 함께 살아가야할 이웃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자신들이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만은 열심히 노력해서 혹은 잘나서 현상태의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입시와 경쟁위주의 교육은 이런 이기적인 인간을 양산하고, 이렇게 기본적인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자질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결국 제대로 된 인격을 갖추지 못한 상태로 세상에 내보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젊은이들이 어떻게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고 온 민족이 함께 잘 살아가는 꿈을 꿀 수가 있으랴.  참으로 통일일군들의 앞길이 험난하다.


옥류관은 아주 아름다운 대형 건물이다. 수백명이 한꺼번에 식사할 수 있기에 충분한 규모로 보인다.

수많은 선생님들이 모인 자리라 우리도 그 유명한 옥류관의 냉면을 먹기 위하여 기다려야 하는가하고 편안하게 마음을 먹고 있는데 건물 왼편의 제법 넓은 별관으로 안내를 한다.  오늘같은 날은 북부조국에서 손님으로서가 아니라 인민들과 똑같은 자리에서 기다리다 함께 식사를 해도 나는 괜찮은데 멀리서 찾아온 동포라고 이렇게 각별하게 대접을 하는가보다.



나의 북부조국 방문기 16 14-10-25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16


옥류관의 냉면


옥류관 건물은 엄청난 규모의 크기다.  내가 지금까지 본 식당 건물 가운데 가장 큰 건물이 바로 이 옥류관인 듯하다.  크기만 웅장하고 큰 것이 아니라 참 아름답게 지어진 현대식 건물이다.  지붕이며 처마가 조선식이어서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건물 왼편으로 올라가 제법 넓은 방으로 들어가니 제법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식사를 하고 있다.  빈 자리에 안내받아 앉으니 봉사원이 어떤 냉면을 주문할지를 물어본다.




내가 좋아하는 냉면은 우리가 평양냉면으로 부르는 물냉면이고 여기가 평양에서도 유명한 옥류관이니 당연히 물냉면으로 주문하는데 자주 이곳을 찾은 노 박사님은 쟁반냉면을 주문한다.  비빔냉면은 나도 좋아하지만 매운 것이 먹은 후 속을 아리게 해서 잘 먹지 않는데 쟁반냉면이 남한의 비빔냉면과 같은 것이 아닐까해서 나는 물냉면을 고집했다.  함께 한 안내원 미향동무와 운전기사 영호동무도 물냉면을 주문한다.  한데 그냥 주문을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몇백 그램을 주문하겠느냐고 다시 봉사원이 물어온다.  보통 200 그램이 표준인데 영호동무가 건장한 체격이라 300 그램을 주문하는지라 나도 따라서 300 그램을 주문했다.  그러고보니 그 전날 저녁 평양호텔에서 주문할 때에도 내가 워낙 냉면을 좋아해서 300그램을 주문했었고 여기 옥류관까지는 귀한 음식이라 300 그램으로 했지만 며칠 지나면서 매일 점심을 냉면으로 여기저기 가는 곳마다 먹다보니 나도 표준형으로 200 그램만 먹게 되었다. 



맛이 세계적이라는 대동강맥주


이렇게 평양의 옥류관을 찾았는데 그 유명한 대동강맥주도 한 잔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노 박사님의 말씀에 맥주도 한 병 주문을 했다.  대동강맥주의 맛이 국제적으로도 고급이라는 이야기를 나는 이번에야 들었고 한때 남한에도 대동강맥주가 수입되어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제법 알려진 것도 이번에 알았다.  수년 전 남북관계가 나빠지는 바람에 수입이 금지된 모양인데 다시 나아지면 다시 대동강맥주를 남한의 민중들이 편안하게 구입해서 마실 수 있으리라.   


평양 배추김치


북에서 냉면을 주문하면 밑반찬을 따로 내놓지 않는데 김치가 없어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그래도 배추김치는 따로 주문하기도 하는 것이 이곳의 방식인 것을 알고는 김치도 추가해서 주문했다.   김치는 너무 맵거나 짜지 않으면서 내 입에는 아주 잘 맞게 담아진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봉사원이 서비스로 접시에 무색의 정갈한 떡을 내어오는데 노 박사님이 쉬움떡이라고 말해준다.  김 주석이 만주에서 항일투쟁 가운데 이 떡을 맛본 후 그 맛을 잊지 못하였다는데 나도 회고록에서인지 어렴풋이 읽은 것 같다.  쉬움떡은 향이 샹큼하고 부드러워 냉면을 먹으러 온 것이 아니라면 이것으로 점심을 때워도 좋을 것 같은 맛이다.  내가 전혀 먹어보지 못한 맛은 아니고 이름만 기억하지 못할뿐 한두번  이런 종류의 떡을 미국에서 어떤 식당에서 혹은 동포들 가운데 누가 만든 것을 맛본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입안에서 살살 녹는 쉬움떡



내가 이 글을 준비하면서 인터넷에서 쉬움떡에 대하여 설명한 것을 찾아 발췌하여 약간 옮겨본다.

쉬움떡 

북한 조선말대사전은 "쌀가루의 4분의 1을 익반죽하고 나머지는 감주로 반죽해 섞은 다음 설탕과 중조물을 두고(섞어) 쪄낸 떡"을 쉬움떡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또 만들기 쉬운 떡이라 하여 쉬움떡 혹은 기지떡이라 하며 상화떡, 증편이라고도 부른다고 설명하고 있다. 쉬움떡은 말 다듬기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북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주로 기지떡•상화떡으로 통용되고 있으며 증편이란 말은 아예 쓰지 않는다.  

쉬움떡, 기지떡, 상화떡은 우리에게 매우 생소한 떡이름이지만 남한에서 입말로 쓰이는 '술떡'과 같은 것이다.  남한 국어사전에는 '술떡'이란 어휘가 등재돼 있지 않고 대신에 같은 의미의 상화떡이란 용어가 기록돼 있다.  남한 사전은 상화떡을 "밀가루를 누룩과 막걸리 따위로 부풀려 꿀팥소를 넣고 빚어 시루에 쪄낸 여름 음식"이라고 설명해 북한의 상화떡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쉬움떡은 북한 사람들이 매우 좋아하는 고급 떡 종류의 하나로 지난 15일 평양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남측 이산가족 방문단을 환영하는 만찬에도 등장했다.  (이상 인터넷에서 옮김)


옥류관의 쟁반냉면


옥류관의 물냉면과 쟁반냉면이 나오자 사진부터 찍어 기록으로 남긴다.  내가 주문하지 않았지만 박사님이 쟁반냉면의 맛을 보길 권한다.  쟁반냉면은 전혀 남한의 비빔냉면과는 다른 모양이고 맛도 맵지 않고 아주 구수한 맛이다.  특히 냉면을 좋아하지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오히려 더 어울릴 수 있는 요리였다. 


옥류관 물냉면


물냉면은 그릇에 담긴 모양부터 예술이다.  이렇게 정성들여 내온 냉면을 세상에 싫어할 사람이 있으랴.  옥류관 물냉면은 어제 맛본 평양호텔에서의 면발과는 비슷한데 옥류관의 냉면이라는 생각에서인지 더욱 맛있다.  긴 면발을 가위로 잘라주지 않으니 결국 입안에서 먹으며 잘라야 하는데 나는 앞니로 잘 자를 수 없어 송곳니 쪽에서 오히려 잘 잘라지는 것을 냉면을 먹으면서 터득하는데 아무래도 그 모양새가 좋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상관 않고 내게 주어진 옥류관에서의 이 소중한 시간을 오로지 냉면에 집중하여 그 맛 속에 빠져들었다.  남한이나 미국의 식당에서 먹게 되는 달콤새콤한 냉면 맛과는 많이 다르지만 이 오묘한 평양냉면의 맛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으랴.  그저 빨리 통일을 이루어 옥류관을 직접 찾아가 먹어보라는 말을 할 수 있을뿐.




식사를 마치자 미향동무가 우리를 대형 식당방으로 안내한다.  벽의 전면을 금강산 폭포를 그린 대형 벽화로 장식하였고 천정에도 대형 샹델리어가 아름답다.  이 방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바로 거기서 건물 뒤편으로 난 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오라고 한다.  한 발작 바깥으로 내딛는 순간 갑자기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대동강이 아닌가.


우리를 테라스로 나오도록 하고는 손전화 통화에 여념이 없는 미향동무

옥류관 맞은편의 동평양

동평양의 살림집들.  맑은 물속에 두루미들이 한가롭다.

노길남 박사님과 서로 사진을 찍어주다.

필자도 기념으로 한 장


오늘따라 날씨가 참 화창한데 대동강 물빛도 너무 푸르다.  저 멀리 맑은 물 가운데  두루미인지 하얀 새들이 노니는데 그 모습이 참 평화롭다.  옥류관이 냉면으로 유명한 줄만 알았지 이렇게 훌륭한 경관을 갖춘 곳인지는 미처 알지 못했었구나.  푸른 강물 너머 주로 살림집들이 많다는 동평양과 주체사상탑이 아주 선명하고 깨끗하게 다가온다.


글을 좀 더 길게 썼는데 나눠서 다음 회에서 계속해야 할 것 같다.  오늘은 옥류관의 냉면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조금 더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는 이야기는 다음 회에 하기로 하자.  오늘의 방문기는 북의 인민과 남의 민중이 모두 좋아하는  평양냉면 하나로 우리 서로 마음을 트고 통일을 염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서울에서 맛있는 옥류관 냉면을 먹으러 친구들과 함께 신나게 평양행 열차를 타고 가는 그날을 꿈꾸어보자.  통일만 이뤄진다면 빚을 내어서라도 나의 페이스북 친구들 수백 명 분을 미리 예약했다가 평양역에서 저 선생님들이 타고 온 버스를 대절하여 내가 크게 한턱 내리라.  그날 잔치에 참석하고 싶은 분들은 미리부터 신청을 받으려 한다. 신청하는 분들은 모두가 통일꾼이다.



나의 북부조국 방문기 17 14-10-28


25 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17


능라도 5.1 경기장과 통일의 꽃 임수경 학생


대동강을 내려다보는 옥류관 테라스의 오른편으로 가니 옥류관의 이 멋진 조선식 건물의 처마와 지붕들이 뒤편의 현대식 건물들과 아주 잘 어울어지는 조화를 이루고 있어 한동안 그 아름다움에 눈을 뗄 수가 없다.  바로 우리의 고유 문화를 소중히 여기면서 또한 해외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오늘의 북부조국의 모습을 여기서 보는 듯하다.  북부조국 지도자가 ‘발은 내 땅에 딛고 세계를 보라’고 했던가.  소중한 우리의 것을 가꾸고 지키면서 한편으로 세계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내 것으로 만들려는 북의 인민들의 의지를 여기서 본다.  


옥류관 뒤편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조선식 건축과 현대식 아파트의 조화


그렇다.  내가 만난 북의 인민들은 모두 고립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해외에서 온 우리들을 모두가 반갑게 대해주었고 모두 우리의 조국이 통일을 이루기를 소원했다.  우리가 미국에서 왔다는 것에 거부감을 보이는 동포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미국이 전쟁때 북을 땅 위에 서 있는 집 한 채도 온전히 남아있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고 수백만의 인민들을 폭격으로 죽인 철천지 원수지만 지금 북은 미국과 친구가 되고 싶어한다.



북이 세상 어떤 나라와 수교를 하며 교류하지 않으려고 한 나라가 있었던가?  미국과도 수교하길 원하고 일본과도 그렇게 하길 원한다.  그런 북부조국을 일방적으로 고립시키고 외부와 단절시키려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 아닌가?  이제 그 단절을 풀어야 한다.  우리 민중이 그것을 요구해야 한다.  정치권에서 하지 않는 일을 이제 민중이 나서서 주장하여 듣도록 해야 한다.


나라들이 서로 교류하고 평화롭게 지내고 나면 핵무기가 무슨 위협이 되던가?  이미 구 소련과 미국의 핵무기가 온 세상을 수십번이나 파멸시킬 정도가 되었지만 서로 수교하고 교류함으로 이 지구가 핵전쟁의 위험을 벗어난 것을 기억하자.  그 핵무기들은 감축되긴 했으나 아직 대부분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렇지만 두 나라가 원수되지 않는 이상 핵전쟁의 걱정을 우린 별로 하지 않고 살고있지않는가? 마찬가지로 미국이 북과 평화롭게 지낸다면 북의 핵무기가 그 무슨 위협이 될 것인가?  작은 나라지만 북이 또한 강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미 한국전쟁 때 그렇게 우세한  무기의 힘으로도 이기지 못한 상대가 북이 아니던가?  북이 가진 그 신념을 그대로 인정해주고 존중해주어야 한다.  이제 미국이 북의 핵무기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서로가 살아남는 길이기도 하다.


총기소유가 자유로운 미국에선 집집마다 총이 있다.  수천만개의 총들을 소지하고 있지만 이웃끼리 총을 들고 서로 싸우진 않는다.   총은 오직 자신의 가정을 외부 침입자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북과 미국이 서로 수교를 하고 평화롭게만 지낸다면 북은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되어 미국의 핵무장을 북이 염려하지 않아도 되고, 북의 핵무기를 미국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북부조국에게 핵을 먼저 폐기하는 조건으로 대화를 하자는 것은 이렇게 말도 안되는 이치이다.  대화는 상대방과 서로 대등한 상태에서 가능하고 또 필요한 것이다.



저멀리 왼편으로 능라도 5.1 경기장이 보인다.  바로 1989년 제13차 평양세계청년학생축전의 개막식이 열렸던 곳이고 지금은 남한의 국회의원이 된 통일의 꽃 임수경 학생이 15만 군중의 열화같은 환영을 받으며 입장했던 곳이다.  바로 내가 거기서 25년 전에 평양축전 참가를 위해 북부조국을 처음 방문하여 그 역사적인 현장을 지켜보았다.  



그날 저 5.1 경기장은 동구 유럽을 비롯한 세계 수십개의 나라에서 온 젊은이들과 수많은 재미 재중 재소 동포들, 그리고 15만 좌석을 가득 메운 인민들이 화려한 개막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은은한 레이저 빛이  캄캄한 허공 가운데 수를 놓는 그 기상천외의 기술에 탄복하는 동안에 하늘에서 선녀가 하강하는 모습이 지금도 인상에 남는다.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입장과 퇴장을 번갈아하면서 북부조국에서만 볼 수 있을 율동과 체조와 매스게임을 펼쳤고  평양축전 개막식의 분위기가 고조되었을 때 바로 남한의 ‘전국대학생대표자협회(전대협)’에서 파견한 임수경 학생이 전대협기를 높이 들고 입장한 것이다.


임수경 학생은 당시 한국외국어대 불어학과 4학년에 재학중이었는데 전대협에서 평양축전에 누구를 파견할지에 대하여 심사숙고 끝에  학생운동에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게 활동해온 임수경 학생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건장한 남학생이 아니라 겉보기로는 예쁘고 평범한 여대생처럼 보인  임수경 학생을 선정한 것은 당시 남한 정부가 전대협 학생들의 방북을 적극적으로 막는 상황에서 아주 지혜로운 결정이었다.  이에 임수경 학생은 당시 남한의 모든 대학생을 대표하여 남한 민중의 통일의지를 북의 인민들에게 전달할 책임을 맡았었다.  북으로 오게 된 여행 경로로 그녀는  먼저 일본으로 건너가서 거기서 서 베를린으로 갔다가 다시 동베를린을 통하여 평양에 입국하는 방식으로  지척의 거리를 돌고 돌아서 몇 번의 비행기를 갈아 타고 평양으로 온 것이었다.


평양 시가지에서 온 인민의 열렬한 환호를 받는 통일의 꽃 임수경


그날 낮에 호텔에서 지참했던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나는 임수경 학생이 평양에 성공적으로 들어온 소식을 듣고는 미주지역에서 평양축전에 함께 참가했던 동포들과 함께 크게 기뻐했었다. 우리들은 미국에서 난생 처음의 어려운 걸음으로 북부조국을 방문하였지만 남한에서 그것도 여린 여학생이 이곳 평양으로 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임수경 학생을 보러 나온 인민들로 평양 공항에서부터 대로변에는 인민들이 장사진을 치고 기다리며 환영했다고 한다. 


이제 안내방송과 함께 임수경 학생이 직접 전대협기를 높이 들고 하얀 바지에 하얀 상의 차림으로 평양축전 개막식에 저쪽 대운동장 왼편 모서리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천천히 전대협 기를 휘두르며 15만 군중의 열화같은 환영을 받으며 운동장을 한 바퀴 돌며 마주보고 손을 흔드는데 그것은 너무도 감격적인 장면이었다.  그날 우리 모두는 남과 북이 통일을 절반쯤 이룬 것처럼 그 일을 반기고 흥분하여 기뻐했었다.   온 땅을 뒤흔드는 우렁찬 환호와 함께 북의 모든 인민들이 임수경 학생을 환영했다.  바로 ‘통일의 꽃’이란 별명이 붙었다.  ‘조국은 하나다’라는 깃발을 들고 그녀가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의 물결로 뒤덮였다.  얼마나 많은 북의 인민들과 악수를 하였는지 손이 아파 더이상 손을 맞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되었다고 했다.


평양의 학생들과 함께 어울려 춤추는 임수경 학생


임수경 학생이 평양축전 개막식에 입장하는 장면과 또 어떤 장소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둘러싸여 사인을 하는 모습을 내가 보고는 사진으로 남겼는데 이사를 몇 번 하는 와중에 어디로 갔는지 지금은 그 사진을 찾을 길이 없다.  내가 지참했던 비디오 카메라로 평양축전의 수많은 동영상을 찍었는데 그 또한 오랜 세월에 유실되고 25년 세월에 얼마 안되는 사진들만이 내가 경험한 평양축전을 증언하고 있다.  


25년 전 평양축전에 참가했던 시절의 필자. 학생, 청년들이 춤추던 광장에서.


북의 인민들이 그 얼마나 통일을 원하고 있는지를 우리들은 임수경 학생을 환영하는 인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깊이 느꼈다.  어디 인민들만 통일을 원하랴.  북의 인민들이 통일을 원한다면 그것은 바로 북의 정권이 원하는 것이다.  이미 김 주석이 오래전에 고려연방제를 구상하여 통일로 나아갈 방법을 제시했었다.   모든 북의 인민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진실로 통일을 갈망하고 있으며 북의 정권 또한 진정으로 통일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나의 북부조국 방문에서도 북의 인민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은 25년 전의 그날과 변함없이 그대로인 것을 확인했다.  


평양축전 당시 김일성 경기장에서 5만명이 출연하는 매스게임의 한 장면 


아, 그런데 지금 임수경 학생을 파견했던 그때의 전대협은 어디로 간 것인가?   통일을 꿈꾸면서 비민주 독재와 앞장서서 싸우던 그 대학생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어떻게 남한에서 이제 통일을 말하고 통일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은 이리도 적어졌는가?  그 무엇이 우리 민족의 통일보다 더 중요하단 말인가?   


1989년 평양축전 당시 5만 명이 출연하는 매스게임의 한 장면 


지금 일어나는 저 수많은 크고작은 사건들의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 민족의 분단에 있는 것이 아닌가?   통일을 말하지 않고 통일을 꿈꾸지 않을 때 우리 사회가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를 냉철하게 살펴보라.  통일과 민주주의는 함께 가야 한다.  선민주 후통일을 주장하던 때가 있었지만 이미 민주와 통일은 함께 가야 한다고 오래전에 운동하던 선배들은 깨달았었다.   민주주의 없이는 통일을 이루기도 어렵겠지만 통일을 이루지 못하면 분단을 악용하는 저 간악한 무리들에 의해서 민주주의조차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우린 깨달아야 한다.  


사람들이 통일을 말하지 않는 지금 이렇게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신자유주의가 활개를 치고, 민영화의 이름으로 국가 공공재가 모두 재벌의 수중으로 들어가는데 그래도 통일을 말하지 않고 통일을 꿈꾸지 않으려는가?  통일없이 과연 1%를 제외한 우리의 후세들은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겠는가?  전쟁이라도 벌어지는 날 과연 우리와 우리 후세들은 이 땅에 살아남기라도 할 수 있겠는가?


저만큼 5.1 경기장이 보이는 가운데 비친 대동강 물빛이 너무도 파랗고 깨끗하다


이제 통일을 다시 꿈꾸어야 한다.  국회의원이 된 임수경 의원을 북의 모든 인민들은 지금도 통일의 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미 10월 초에 잠깐 방한했던 북의 고위층 3명도 임수경 의원을 반갑게 맞은 것을 기억하자.  임수경 의원을 방북특사로 이제 당당하게 판문점을 통하여 북으로 보내어 통일을 의논하게 하는 날 우리는 다시 절반의 통일을 이룬 것같은 감격을 누릴 수 있으리라.   통일은 꿈꾸지 않는 동안은 이뤄지지 않는다.  꿈꾸고 요구하고 행동하여 통일을 이뤄나가야 한다.



나의 북부조국 방문기 18 14-10-30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18


연극 ‘승리의 기치따라’ 공연을 보다


내가 25년 전 평양축전에 참여하였을 때는 가극 ‘꽃파는 처녀’를 비롯하여 여러 공연들을 감상할 수 있었는데 이번 방문에서도 북부조국의 공연을 보고싶다고 하였더니 얼마후 안내원 미향동무가 연극관람을 하겠느냐고 미리 물어왔었다. 여기서 연극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싶어 바로 그렇게 해달라고 하였다. 평양호텔에서 걸어서 금방 갈 수 있는 거리에 국립연극극장이 있는데 마침 이번에 새로 연극을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아침 산책길에 찍은 국립연극극장의 모습


아직은 햇살이 뜨거운 오후인데 슬슬 걸어서 극장에 도착하니 벌써 사람들로 빼곡하게 찼다. 관람객들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남여노소들로 보인다. 직장에서 단체로 관람하기도 하는지 노동자들과 학생들, 젊은 청춘 남여, 그리고 군인들도 보인다. 모두 624석의 좌석이 관람에 적합하도록 잘 배치되어 있다. 내가 이후에 듣기로 이곳 인민들은 관람료가 아주 저렴하다고 하는데 우리는 외국인이라 입장료로 거금 27달러를 들여서 표를 구입하였다. 이 금액이면 해외에서 연극 입장료로 받는 금액과도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다. 북부조국 최고의 국립연극 극장에서 올려지는 무대이니만큼 기대가 컷다.



어디나 마찬가지듯이 연극공연은 절대로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나는 아예 사진을 찍을 생각도 않았는데 옆에 앉았던 노 박사님이 연극이 시작되기 직전에 일어나 저쪽의 담당자를 만나 몇 마디를 나누더니 촬영을 허락받았노라고 하신다. 역시 ‘무엇이 불가능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조선말이 아니다’란 말씀을 이번에도 믿고 밀어부친 것이 성공한 모양이다. 그래 이곳 북부조국을 노 박사님 만큼 홍보해줄 사람이 그 어디 있으랴.


이곳 국립연극극장의 책임자가 원리원칙만 따지지 않고 그 상황을 잘 판단하여 노 박사님에게 사진촬영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이 고마우면서 또한 그가 아주 현명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노 박사님이 민족통신의 기자로서 사진을 찍되 아무 조명이나 소리 없이 찍었으니 공연에 방해를 하지도 않았거니와 그 담당자가 비록 당시엔 알지 못하였겠지만 이렇게 그 사진들을 내가 이용하여 방문기를 통하여 북의 예술작품을 세상에 알리게 하였으니 그 결정은 칭찬을 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연극의 제목은 ‘승리의 기치따라’로 한국전쟁 때 강원도 철령 고지가 그 배경이었다. 지재룡 원작, 길낙전 각색, 리단 연출로 원래 1990년대의 작품인데 20여년이 지난 지금 후세들이 새롭게 각색하여 무대에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기치’라는 단어가 낯설었지만 깃발이라는 뜻으로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남한의 사전에서 ‘기치’라는 단어는 없는 것 같다. 그래 북에서 사용하는 문귀를 살펴본바로 깃발이라는 뜻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막이 오르자 전쟁터를 배경으로 한 조명과 음향, 무대장치들이 아주 완벽한 수준으로 보는 이들의 시선을 집중하게 만든다. 수십 명의 배우들이 출연하는데 남여 인민군으로 분장한 배우들의 연기력도 대단하다.




철령 전투가 그렇게도 치열하였던 것인지 우리들은 들은 바 없지만 북의 인민들은 모두들 알고 있었으리라. 엄청난 화력을 바탕으로 미군의 폭격이 계속되지만 그 가운데서도 인민군들이 어려움을 헤쳐나가며 고지를 지키고, 심지어 전장에서의 공연을 준비하는 낙천적인 장면을 보여주는 한편 이런 급박한 순간에 필요없이 그런 공연을 준비한다고 나무라는 사람도 꼭 등장하게 만들어서 얼마간의 갈등도 보여준다.




미군이 이곳을 크게 공격할 것이니 미리 철수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잡혀온 미군 포로의 이야기를 듣고는 약간 동요하기도 하였지만 오히려 전투를 이길 작전을 계획한다. 결사대에 서로 나가겠다고 지원하여 목숨을 내어놓고 맡은바 임무를 다한다. 서로 사랑하면서도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하였지만 서로의 마음만은 간절했던 군인이 결국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자 여인이 오열하고 온 부대가 통곡하고 온 관중도 함께 울게 만든다.




‘조국의 촌토를 목숨을 걸고 지키자’는 바위벽에 쓰여진 구호처럼 미군의 공격을 지혜롭게 막아낸 후 영도자의 전략에 모두가 기운을 얻고 합심하여 마지막 싸움을 벌인 결과 오히려 이전의 전선을 훨씬 넘어서 잃었던 땅을 수복하고 휴전을 맞이하여 모두가 기뻐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전투 가운데서도 서로 어울려 춤추고 노래하는 장면


내가 이번에 본 이 연극을 포함하여 북의 영화를 비롯한 모든 예술작품들 안에는 절절히 흐르는 것은 사랑이다. 인민들의 지도자와 나라에 대한 사랑이 있고, 지도자의 인민에 대한 사랑이 있다. 인민들이 서로 함께 단결하여 이뤄나가는 서로간의 신뢰와 사랑이 있고, 스스로를 희생하면서 동지들을 지켜주는 깊은 사랑이 있고, 또한 사람사는 세상 어디에나 있는 남여간의 절절한 사랑이 있다. 사랑이란 참으로 고귀한 것이다. 우리가 그런 숭고한 사랑을 작품 속에서 접하면서 감동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인간들은 언제나 그런 차원 높은 사랑에 굶주리고 있기 때문이며, 인간 본성이 그런 고귀한 사랑이 실현된 세상을 꿈꾸고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북부조국이 그런 아가페적인 사랑을 예술작품 속에서 드러내는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여기는 그런 세상을 추구하는 사회이고 이미 그것을 이뤄나가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각자 생존을 위해서 경쟁해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살아남기 위해서 이기주의가 판을 칠 수밖에 없지만 사회주의 세상에서는 나 자신의 이기적인 모습을 버리고 함께 서로 어울려 단결하고 사랑하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나가야 하기 때문인다. 예술작품들이 그것을 주제로 하여 인민들을 감동하게 만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곳 북부조국은 세상이 따로 있고 예술작품이 따로 있는 곳이 아니다. 실제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바로 예술작품 안에 연연히 흐르는 그 사랑이 그대로 일어나는 곳이다. 예술작품을 통하여 인민들이 스스로 지녀야할 고귀한 성품을 보고 익히고 따르게 되는가하면 또한 북의 예술은 이미 현실에서 일어나는 인민들의 참 인간으로서의 귀한 모습을 다시 작품으로 승화시켜 널리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고귀한 사랑이 연연히 흐르는 북의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감동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북에서 예술인들을 귀하게 여기고 대접하는 것도 바로 이때문이리라.


우리 세상에 가난한 예술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간혹 예술인들 가운데 그가 가진 능력과 자본의 필요가 맞아떨어지는 1%는 예술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예술인들은 가난하게 살 각오가 없으면 그 길을 걸을 수 없다. 한데 북의 예술인들은 아무도 의식주 걱정을 할 필요 없이 자신의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나라에서 배려해준다고 한다.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자신이 어떤 일을 꼭 하고 싶은데 그 직업을 선택하게 되면 평생을 스스로 고생하며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들은 지금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 스스로는 원하지만 그 길을 걸을 수 없어 다른 길을 걷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시인, 소설가, 가수, 배우, 영화인.. 그 외에도 수많은 직업들이 돈벌이와는 별로 인연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관객이 연극이 끝나자 기립박수를 보낸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무리 귀한 일을 한다해도 돈을 벌지 못하면 불행하게 살아야 하는 세상이다. 돈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세상에서 쓸모없는 것인가? 돈이 되지 않아도 귀한 시를 쓰는 사람은 있어야 하고, 좋은 소설을 쓰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영화에 조연이나 엑스트라로 출연하는 사람들도 의식주 걱정 없이 그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복지가 확장되어 모든 사람이 어떤 일을 하던지 누구나 평등하게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도록 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은 그 주인인 민중을 위하는 정치를 해야만 한다. 가난하다고 알려진 북부조국이 그 부분에선 세상 어떤 나라보다 앞장선 나라다.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19]가 시작되는 [펌]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IV / 강산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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