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자이신 강산 선생님과 동행하신 노길남 선생님이 바라보시는 순수한 북한 동포에 대한 동족애와 사랑 그리고 그 측은지심을 이해하고 북한에 대한 이해의 차원에서 두 분의 생각이 담긴 글을 이곳에 소개를 하지만, 북한 정권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는 점이 있음을 밝힙니다. 북한정권의 독재와 세습왕조 그리고 여러 경로로 이미 알려지고 확인된 인민에 대한 탄압은 손가락질의 대상이며 살인마 전두환과 함께 인류의 양심 앞에 처단되어야 할 공적임을 알리고자 합니다.]]
[오늘은 시애틀에 사시며 "25년 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를 운영하시는 웹페이지 "사람 사는 시애틀 한마당"에 2014년 9월 24일부터 2014년 12월08일까지 총 30차례에 걸쳐 게시하신 강산 선생님의 일운동을 도와드릴 만한 게 내 블로그와 페이스북을 통해 통일에 대한 그분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메시지를 드렸습니다. 강산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그분의 방북기를 제 블로그에 제 게시합니다. 강산 선생님의 방북기를 통해 북한을 이해하는 좋은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모든 볼드체는 원문이 링크되어 있습니다.]
[펌]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V / 강산에서 이어집니다.
만경대협동농장을 찾아서 1
9월 초순의 해는 길어서 조금 늦은 오후였지만 만경대협동농장을 향하여 출발했다. 우리가 처음으로 지나는 조금 낯선 길가에 찻집도 보이고 영화관도 있는데다 지은 지 좀 된 아파트들이 즐비하다. 지나는 지역의 이름을 대변하는 듯 상점의 이름에 창광이 붙기도 했고, 락원이란 명칭이 붙기도 했다. 기차역으로 건국역을 지나나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광복역도 있다.
아주 깔끔한 아파트 단지
락원영화관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이곳 낯선 거리로 우리가 탄 차가 지나게 된 것은 만경대협동농장으로 우리를 안내할 이 지역 담당 여성일군을 광복역 앞에서 태워서 함께 가기로 했기 때문이라고 안내하는 미향동무가 말해주었다. 그러니까 농장을 방문하기로 결정했다고 해서 중앙의 제법 높은 위치에 있는 안내원인 미향동무가 우릴 그냥 데리고 가는것이 아니라 지역의 담당 공무원과 미리 상의하고 그 공무원과 동행해서 찾아가는 것이 북의 방식인 듯하다. 물론 방문객들이 아주 자주 찾는 장소에서 언제든지 방문객을 맞을 준비가 된 곳이라면 이런 절차가 필요없겠지만 보통 관광객들이 찾지 않는 농업현장을 우리는 찾아가는 것이고, 우리 운전수 영호동무가 이곳은 잘 모르는 듯하니 이곳을 잘 아는 안내해줄 분이 필요한 것이 이치에도 맞는 일이다.
광복역에서 만경대협동농장으로 우리를 안내해줄 여성일군을 차에 태우다
대대적으로 안과 밖을 현대식으로 수리중인 만경대소년학생궁전
광복역 광장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여성일군은 키가 크고 시원스런 인상의 말수가 적으면서 아주 겸손한 분이었다.운전사 영호동무에게 목적지로 갈 방향을 알려준다. 차는 김정은 원수의 지시로 새로 안팎으로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있다는 만경대소년학생 궁전을 지나서 얼마 되지 않아 포장된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길가의 논밭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벼를 비롯하여 콩이나 옥수수 등이 심겨져있다. 협동농장을 찾게 되는 일에 마음이 설렌다.
만경대협동농장으로 들어가는 포장된 길
내가 보았던 북부조국의 어떤 영화에서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70년대 쯤의 농촌의 한 가정에서 돌잔치를 하게되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였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나서서 하는 이야기였다. “아 옛날 같으면 우리가 집도 사고 땅도 사기 위해서 돈을 모으려고 하였겠지만 이젠 그런 걱정이 없으니 이렇게 좋은 날이면 모여서 기금으로 잔치를 열고 함께 즐기게 되어 얼마나 좋습네까?”
그러니까 북부조국은 땅을 사지 않아도 되는 사회이고 집도 사지 않아도 되는 사회다. 영화의 줄거리는 산골의 협동농장의 주민들이 여러가지 난관을 뚫고 온갖 노력을 다하여 가뭄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제쳐놓은 땅에 물을 끌어올리는 이야기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기계화를 이루어 부족한 노동력을 해결해나가는 이야기였다. 개인이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큰 사업을 어떤 리더격인 여성이 숱한 고난을 극복하며 먼저 구상하고, 여러 시련 가운데 집단이 함께 의논하고 결정하고 협동하여 이루어나가는 것이었다.
기름진 땅이 많은 남한에서 농촌의 생산성은 높지만 농사를 지어도 수지가 맞지 않아 젊은이들은 모두 농사를 포기한지 이미 오래다. 한마디로 돈벌이가 되지 않는 것이다. 농기계와 비료와 농약, 그리고 노동력은 비싸게 들어가는데 반하여 수확한 농장물의 가격이 형편없다면 농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지 않은가? 농촌이 황폐화하고 농가의 빚은 늘어만 가고, 농촌의 총각은 장가를 들 수도 없는 상황이 된 지도 이미 오래 되었다.
내가 북부조국 방문기를 쓰는 동안 평양에 비해서 시골은 훨씬 못살지 않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았다. 그럴지도 모른다. 평양이 수도인데 당연히 잘 살고 인민이 문화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도 많을 수 있다. 땅이 좁고 평야보다 산악이 많은데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농촌인구가 총인구의 40% 정도 된다는 북부조국의 농촌이 잘 살 수 있다면 그건 정말 기적같은 일이 될 것이다. 위에 거론한 것과 같이 땅이 기름진 남한의 농촌도 농사를 계속할 수 없는 곳이 되고 말았는데 그 조건이 더욱 열악하다고 여기는 북한의 농촌은 아주 못살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북의 지방도시나 농촌을 우리의 지방처럼 여기고 우리식으로 판단하는 것은 오류다. 북부조국은 국가에서 농촌을 구호로만 지원하지 않고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제도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농촌이 잘 살 수 있도록 나라에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뒷받침을 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위의 영화에서처럼 땅에 대한 지대를 내지 않고 집세도 내지 않는데다 자식들 교육비도 들지 않는다. 거기다 국가에서 무료로 비료도 지원하고 기계도 무료로 제공한다면 우리의 농촌과 그 상황은 아주 다르지 않겠는가? 북의 농촌이 살기 어려울 것이라고 미리 판단하고 지레짐작을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남의 농촌에서 농부로 살아남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먼저 생각하면서 그것에 비해서 북의 농촌의 형편은 어떠한지를 이 글을 읽으면서 함께 생각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만경대협동농장 광장에 그려진 벽화.
북부조국 농촌의 현실과 농촌에 대한 제도적인 국가의 지원에 관하여 나의 관심이 남달리 큰 것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내가 미국에 이민온 후 대부분의 남한에서 온 이민자들과는 달리 20년 동안 미국땅에서 농업에 종사했기 때문이었다. 농사를 지으면서 그걸로 생계를 유지하고 돈을 잃기도 하고 벌기도 하면서 주변의 여건이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을 때까지 젊은 시절을 농장에서 보냈었다. 그런 연유로 자본주의 제도 아래서의 농사일이 어떻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그것과 비교하여 사회주의 북부조국의 협동농장은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를 비교해서 살펴보고 싶었고, 북에 도착하였을 때 바로 협동농장 방문을 꼭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그렇게해서 방문하게 된 만경대협동농장의 이야기는 나의 방북기 가운데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아마 독자들도 나만큼 북부조국의 농촌이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는지에 대해서 궁금해할 것이다. 평양방직공장을 답사하면서 노동자들의 삶을 어느 정도 이해한 것으로 북의 수많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삶을 대략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이곳 협동농장의 방문을 통해서 북의 농민들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지를 알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북부조국의 농촌을 바로 알게 됨으로 북부조국 정부는 농촌을 어떻게 대우해왔고, 수많은 인민들은 무엇을 추구하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게 되리라 여겨진다.
광장에는 두 지도자의 현지지도를 기념하는 글이 새겨져있었다.
협동농장 광장에 세워진 영생탑
우리 일행을 안내하는 김태현 생활구현농장
우리를 태운 차가 만경대협동농장에 도착하자 이곳에서 25 년간 일해왔다는 아주 잘 생기고 훤칠한 분이 우리를 맞이한다. 생활구현농장이란 직책을 가진 김태현 씨다. 우리를 환영하면서 잠깐 주변을 둘러보게 한다. 이곳 만경대협동농장은 다른 이름으로 만경대남새전문농장으로 부른다고 한다. 논 농사와 밭 농사는 반반 정도라고 했다. 남새란 말은 북부조국에서 채소를 부르는 말이다. 이곳에도 영생탑이 세워져있고 주변은 아주 넓은 광장으로 조성되어 있다. 잠깐 걸어서 이동하는 동안 살펴보니 이곳도 주위에 힘찬 구호들이 적혀있다.
우리가 찾은 곳은 농장회관으로 문화회관이라고 적힌 건물이다. 입구에서 들어서니 아주 큼직하게 백두산 천지의 벽화가 우리를 반겨준다. 열려진 문을 통하여 들여다보니 아주 넓은 강당이 있는데 그 안에서 갑자기 와하고 한꺼번에 외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잠깐 살펴보니 강당 앞쪽에 백여 명의 젊은이들이 주욱 앉았는데 거기서 나는 소리였다. 모두들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데 하얀 운동복에 흰 모자를 쓰고는 조화로 된 꽃을 들고 있다. 안내원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물어보니 지금 응원연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농장의 젊은 청년들이 논밭에 나가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응원연습이라니 참 이상한 일이다하고 생각하는데 천천히 그걸 설명해주었다.
문화회관 안에 그려진 대형 백두산 벽화
추석때 벌어질 운동경기 결승전을 위해 연습중이라는 농장원들. 대부분 아주 젊은 사람들이라 북부조국 농촌의 미래는 밝아보인다.
이곳 농장의 전체 농장원은 950여 명인데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운동을 어울려서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실력이 보통이 아니어서 주변의 다른 농장들과 시합을 하곤 하는데 이곳 만경대남새전문농장은 그 시합에서 축구와 농구, 그리고 씨름을 특별히 잘했고 이제 곧 추석이라 그 세가지 종목의 결승전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그래 농장원들이 이렇게 모여서 결승전에서 할 응원을 미리 연습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응원 연습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바로 사진만 멀찌기서 찍고 대강당을 나오며 살펴보니 응원연습에 참여하고 있는 농장원들이 대부분 20-30대 남여 청년들로 보인다. 그렇다. 북부조국의 농촌은 젊은이들의 삶의 터전이다. 참으로 신선하고 활기찬 농촌이 아닌가?
토지개혁은 농민들에게 천지개벽이었다.
강당에서 응원연습을 하는 농장원들을 잠깐 들여다보고는 왼편에 위치한 제법 넓은 방으로 안내되어 들어갔다. 그 방의 사방 벽면은 사진과 그림과 도표들로 가득한데 바로 이곳 만경대협동농장의 지난 역사를 잘 설명해놓았다. 나처럼 북부조국의 농촌을 제대로 공부하려는 마음으로 찾은 사람에겐 아주 중요한 자료들이어서 사진으로 그 현장을 잘 남겼다.
만경대협동농장은 이름 그대로 김일성 주석이 태어난 만경대 주변에 위치한 농장이다. 이곳 농촌이 김 주석의 고향이라는 조건과 농민들의 자발적인 개혁의지는 해방후 처음부터 이곳이 전체 북부조국 농촌의 혁명적인 변화를 선도해서 이끌어나간 모범이 되는 역할을 하였던 것 같다. 김 주석이 이곳을 1945년부터 1985년까지 40년 동안 모두 44차례나 현지지도를 한 것으로 보아 농촌의 발전과 농민들의 생활 향상을 위한 김주석의 깊은 관심과 배려의 정도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이곳을 모두 15번 찾았고, 김정숙 여사도 6번을 찾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서 1985년 이후엔 북의 지도자가 이곳을 방문하지 않은 것을 고려해보면 이때쯤은 이곳 만경대협동농장이 이미 북부조국의 모범이 되어 이후의 30년 동안은 다른 필요한 곳을 현지지도한 것으로 고려할 수 있을 것 같다.
김 주석은 해방 후 일이 바빠 고향을 바로 찾지 못하고 1945년 10월 14일에야 만경대를 찾아 조부모님과 감격적인 상봉을 하였고 그 다음날인 10월 15일에 남리 인민들과 상봉하였다고 한다. 내가 만경대 고향집에서 마주하지 못했던 자료들도 여기에 있다. 당시의 신문기사로 인민들이 열렬히 환영한 것과, 김주석이 인민들에게 만경대를 살기좋은 고장으로 만들고 새나라를 세우는데 힘써주길 당부하는 내용, 만경대 고향집을 1946년 크게 보수한 것과 1959년 5월 9일에 원상대로 복구한 내용, 그리고 김형직 선생과 강반석 여사의 유해를 고향땅으로 이장한 내용도 적혀있다.
내가 크게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싶은 부분은 1946년의 토지개혁이었다. 토지개혁은 북부조국 전역에서 동시에 결정되고 실행되었는데 1946년 3월 한 달 동안에 모든 지주의 땅을 무상으로 몰수해서 인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였다고 들었는데 그 현장 가운데 핵심적인 곳을 지금 찾아와 당시의 상황을 공부하게 된 것이다.
이곳 만경대 일대의 지주가 소유한 토지는 전체의 85%가 되었고 그외 부농, 중농, 빈농, 반소작 반자작으로 구분되는 토지가 나머지를 차지했는데 그 가운데 지주 소유의 562정보를 포함하여 578 정보를 무상으로 몰수하였다고 한다. 몰수한 토지 가운데 570 정보를 380여 농가에 무상으로 분배하였으니 이건 천지개벽과도 같은 일이다. 조상 대대로 지주의 땅을 붙이며 가혹한 지대와 세금에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시절을 살아왔던 농민들이 해방이 되고 바로 다음 해인 3월 한 달 동안 이렇게 나라에서 농사지을 땅을 주었으니 그 기쁨이 어떠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라. 이제 새봄이 와서 논밭에 씨뿌릴 때가 되었는데 지금까지와는 달리 지주의 땅이 아닌 자신의 땅에 파종할 수 있게 된 것이니 농민들은 그야말로 해방의 기쁨과 동시에 새로 땅을 갖게 된 기쁨까지 함께 누리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 토지개혁이야말로 북부조국 농민들에겐 천지개벽을 맞이한 것과 같은 기쁜 일이 아니었을까?
한 농가당 대략 1.5 정보의 땅을 분배받았는데 이는 4,800 평에 해당한다. 논으로 환산하면 200평이 한 마지기니 한 농가당 24마지기의 땅이다. 내가 어렸을 때 보통으로 사는 친구들의 세대당 보통 10마지기 정도의 땅을 갖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이 정도의 땅을 갖게 되는 것은 중농 혹은 부농에 속한다. 북부조국 전체로 보아서 만경대는 인구밀도가 높았으므로 인구밀도가 낮은 지방에선 더 많은 땅을 분배받았을 것이다. 우리 역사상 나라에서 이렇게 넓은 땅을 인민들에게 그저 준 적이 있었던가? 그야말로 천지개벽의 일이 아닌가? 토지개혁으로 토지를 몰수당한 지주들에게도 일반 농민들과 마찬가지로 그 토지는 똑같은 넓이로 공평하게 다시 분배했다고 한다.
이런 토지개혁이 위에서 지시한다해서 저절로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도표에서 그 비밀을 얼마간 알 수 있어 여기 옮겨본다. 먼저 당세포와 인민위원회를 조직한 것이다. 1946년 1월에 남리에 공산당세포를 조직하였고, 이후 1946년 3월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다고 적혀있다. 이어서 추자리, 송산리, 내리에도 당세포와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다고 되어있다. 또한 도표에 의하면 1946년 3월 8일에 6명의 위원으로 농촌위원회를 조직하였고, 토지개혁을 실질적으로 집행한 것은 농촌위원회에 의한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으로 농촌위원회가 그 일을 할 수 있기까지는 김주석의 뜻을 받들어 온 나라의 당세포와 인민위원회가 뒤에서 받쳐주었고 저 도표에서 '토지개혁을 위한 투쟁'이란 제목이 보여주듯 그 일에는 인민들의 단합과 투쟁이 있어 가능하였을 것 같다. 새로 나라를 세워나가면서 이렇게 미리 온 나라의 토지를 지주들로부터 몰수하는 일은 제법 큰 저항이 따랐을 것이기에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을 한 달만에 이뤄낼 만큼 이미 북부조국 전역에서 김주석은 인민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신임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본다.
토지개혁이 이뤄진것이 46년 3월이니 이 시기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된 지 겨우 7달 만의 일이다. 이렇게 짧은 기간 동안 소련의 군대가 주둔해있는 상황에서 소련식이 아닌 김주석의 뜻대로 북부조국이 토지개혁을 달성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북부조국은 처음부터 그곳 인민들에 의한 참 민주주의를 이뤄나가도록 소련은 도와주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미군정하의 남한에서는 혼돈으로 가득한 시절이었고 이런 토지개혁은 꿈도 꾸지 못한데다 이후 유상으로 몰수하고 유상으로 분배하려했던 것마저도 흐지부지된 것과 크게 비교해볼 만하다.
내가 만경대협동농장을 방문한 지 며칠 후에 김철주사범대학의 정기풍 교수가 평양호텔로 찾아와 면담을 하였다. 정기풍 교수로부터 내가 들은 북부조국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토지개혁에 관하여 대화한 것을 여기 미리 옮겨본다. 정기풍 교수에 의하면 북부조국이 해방후 토지개혁을 실시할 때 처음부터 소련식의 꼬르주라 부르는 집단농장으로 하자는 의견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김일성 주석은 우리나라의 농민들이 조상대대로 자기 땅을 소유하지 못하고 지주의 소작농으로 한많은 삶을 살아왔는데 이제 농민들에게 새나라는 무상으로 땅을 주어서 일단은 그 한을 풀게 하자고 했다고 한다. 당시 제대로 각성하지 못한 농민들의 입장을 헤아린 것이었다. 아무런 농자금도 없고 농사를 지을 도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농민들에게 낮은 이자로 나라에서 돈과 비료를 대부해주고 농사를 지을 도구들도 제공해주었는데 자신의 땅이 생기자 농민들은 그야말로 열심히 농사를 지어 크게 수확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해 가을의 작황에 따라 나라에 20%-30%만 바치고 나머지로 곳간이 가득하게 되자 모두들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정기풍 교수가 토지개혁과 협동농장으로 발전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름이 김재원이라는 한 농부는 너무 기쁘고 고마운 나머지 소달구지에다 쌀을 가득 싣고는 김일성 장군의 집으로 찾아갔다고 했다. 그 집에서 어떤 여성이 맞아주어서 함께 그 많은 쌀을 모두 내려놓고는 그 농부가 말하기를 나는 여기까지 온 김에 꼭 김정숙 여사를 만나뵙고 가야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자신과 함께 힘들게 쌀을 옮겨놓은 분이 바로 김정숙 여사였다는 것을 알고는 이렇게 겸손한 분이 있는가하고 감동하였다면서 여기저기 그 일을 알렸는데 거기서 '애국미'가 탄생했다고 하였다. '나라가 우리 인민에게 이렇게 잘 살도록 해주는데 우리 인민이 가만히 있어서는 되겠는가? 지금 나라를 새로 건설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도 많고 할일도 많은데 우리들이 먹고 남는 쌀을 나라에 바치자'면서 애국미 운동이 전국적으로 불타올랐다는 것이다. 인민들이 스스로 나서서 일으킨 이 애국미 운동이 새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토지개혁을 통하여 농민들에게 땅을 무료로 나눠주어서 개인농으로 시작한 북부조국의 농촌은 이후 농민들 각자의 필요와 나라의 권유에 의하여 협동농장으로 바뀌게 된다. 이 부분은 내가 미국 땅에서 개인농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겪었던 여러가지 애로사항이 있었고 개인농의 한계를 너무도 잘 알기에 협동농장으로 진화하고 발전해나간 북부조국 농촌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다음 회에서 그 이야기를 이어가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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