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6_北韓과中國

[펌]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V / 강산

忍齋 黃薔 李相遠 2014. 12. 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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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자이신 강산 선생님과 동행하신 노길남 선생님이 바라보시는 순수한 북한 동포에 대한 동족애와 사랑 그리고 그 측은지심을 이해하고 북한에 대한 이해의 차원에서 두 분의 생각이 담긴 글을 이곳에 소개를 하지만, 북한 정권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는 점이 있음을 밝힙니다. 북한정권의 독재와 세습왕조 그리고 여러 경로로 이미 알려지고 확인된 인민에 대한 탄압은 손가락질의 대상이며 살인마 전두환과 함께 인류의 양심 앞에 처단되어야 할 공적임을 알리고자 합니다.]] 


[오늘은 시애틀에 사시며 "25년 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를 운영하시는 웹페이지 "사람 사는 시애틀 한마당"에 2014년 9월 24일부터 2014년 12월08일까지 총 30차례에 걸쳐 게시하신 강산 선생님의 일운동을 도와드릴 만한 게 내 블로그와 페이스북을 통해 통일에 대한 그분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메시지를 드렸습니다. 강산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그분의 방북기를 제 블로그에 제 게시합니다. 강산 선생님의 방북기를 통해 북한을 이해하는 좋은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모든 볼드체는 원문이 링크되어 있습니다.]


[펌]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IV / 강산에서 이어집니다.



나의 북부조국 방문기 25    14-11-22


최고인민회의대의원이 된 리화순 직포공의 이야기


내가 평양방직공장을 방문하면서 이곳에 대하여 좀 더 관심이 있었던 것은 이곳이 북부조국 인민의 의복문제를 해결하는 생산공장이기도 하지만 특히 미주에서 1992년에 발행된 홍정자 여사의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책에 수록된 리화순 직포공의 이야기를 기억하였기 때문이었다.   북조선의 최고명예훈장인 ‘노력영웅’이자 남한의 국회의원 격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된 리화순 직포공이 바로 이곳 평양방직공장에서 그 전설적인 생애를 산 것이다.  


홍정자 여사는 나의 가장 존경하는 통일운동의 스승 고 홍동근 목사님 사모님이시다.  2001년 돌아가실 때까지 온 생을 통일운동에 헌신한 홍동근 목사님에 대해서는 이후에 방문기에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다.  홍정자 여사는 내가 작년 이맘때 로스앤젤스에 방문하였다가 옛날 홍동근 목사님과 함께 뵌지 28년만에 뵙게 되었다.  홍 목사님께서 내게 통일에 관한 책들과 편지를 자주  보내주셨고 나 또한 90년대까지 내내 서신으로 연락을 하였으니 홍정자 여사 또한 나를 잊지는 않으셨겠지하고  생각했는데 노길남 박사님 통해서 연락이 닿자 나를 너무도 잘 기억해주셨다.  그렇게 작년에 아주 반갑게 서로 만난 이후로 서로 안부를 물으며 연락을 끊지 않고 지내고 있다.  


근래에 내가 북을 다녀온 후 홍정자 여사께 연락하여 방북기를 쓰고 있다고 하자 고마워하면서도 한편으로 나를 너무도 사랑하는 나머지 그토록 어려운 길을 이제 내가 걷게 되었다고 하면서 위로해주셨다.  홍 목사님과 당신이 너무도 험난한 통일운동의 길을 걸어왔기에 내가 피할 수만 있으면 그 길을 걷지 않기를 바란다는 나를 지극히 사랑하기 때문에 해주신 그 깊은 마음을 내가 어떻게 알지 못하랴.  여기저기 통일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고 시절 또한 통일로 가는 분위기라면 굳이 내가 이 길을 걸을 이유가 없다.  정말 10년 전처럼 내가 참여하지 않아도 남북이 서로 오고 가면서 정상회담을 하는 그런 시절이면 아무 걱정없이 내 생업에만 집중해도 좋겠지만 지금은 남과 북이 다시 멀어져버렸고 남의 민중은 통일에 대한 꿈마저 잃어버린 시절이 되어버렸으니 그걸 알면서 어떻게 이 길을 회피할 수 있을까.  



왼편에서 두 번째가 홍동근 목사님, 그리고 네 번째가 홍정자 여사의 모습이다.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 책에서)



내가 학문을 연구해온 학자도 아니고 진보적인 신앙의 목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튼튼하게 굴러가는 사업체를 가진 사람도 아닌, 그야말로 살기 어려워 오래 전에 미국으로 온 가족이 이민을 와서는 온갖 밑바닥 일부터 다해보며 살아왔고, 아직도 북의 어떤 인민의 표현처럼 ‘조마조마하게 마음 조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의 민초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통일문제의 선각자로서 이 일을 회피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2013년 11월, 홍정자 여사와 28년만에 로스앤젤스에서 재회한 필자.   

홍동근 목사님과 함께 28년 전에 하와이에 방문했을 때 우리 집으로 저녁식사 초대했던 것을 기억해주셨다. 그때 함께 하와이섬을 일주하며 좋은 추억을 가졌고, 나는 홍동근 목사님으로부터 민족과 통일에 관한 참 귀한 말씀을 들었는데 그것이 내 삶을 바꾸어 놓았다.



통일운동가들 가운데 홍정자 여사만큼 북부조국의 수많은 인민들을 여러가지 어려움을 무릅쓰고 수차례 방문하여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하면서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깊은 내면을 우리들에게 알려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두 권의 저서 ‘내가 만난 북녘 사람들’과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를 통하여 독자들은 북의 인민들이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는지, 즉 그들의 삶의 목적에 공감하게 된다.  이웃이 서로 사랑하되 내 가족보다 이웃을 더욱 사랑하고, 내가 속한 사회와 나라를 내몸보다 더 사랑하는 그 거룩하기까지 한 그들의 정신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런 북부조국의 인민들을 그 책을 통하여 더욱 확실하게 알게 되면서 나 또한 깊은 감명을 받았고, 동족인 그들과 그들이 살고 있는 북부조국을 깊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홍정자 여사의 저서들은 통일운동이 확산되면서 다시 출판되어져야 할 것이다.  너무도 아름다운 북부조국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우리 모두가 읽으면 그들을 바로 이해하고 존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통일을 이루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도록 우리 민중을 바꿔놓을 것이다.



오늘의 나의 방문기는 홍정자 여사가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 책에서 평양방직공장에서 리화순 씨를 만나 인터뷰한 이야기로 대신 하기로 하자.   홍정자 여사는 공장 접대실에서 리화순 씨를 만나 자세하게 인터뷰를 하였는데 그 내용은 너무도 진한 감동을 주는 글이다.  홍정자 여사의 수준 높은 문장력으로 아주  자세하게 묘사된 그 이야기를 내가 간략하게 그 줄거리만 여기 옮기기는 하는데 그 감동을 이렇게 줄여서는 제대로 전할 길이 없어 너무도 아쉽다.


이화순 씨는 서울 인근에서 태어났는데 원래 이름은 이화자였다.  충청도로 이사를 갔다가 아버지가 빨치산으로 산으로 들어갔는데 7살 때 아버지는 총에 맞고 죽었다고 경찰이 알려오면서 협박하여 시체마저 찾지 못하도록 했다. 이후에 제대로 옷도 걸치지 못하고 굶주리며 살아가는 동안 너무도 고생이 되어 어머니와 이별하고 서울로 팔려가 아이를 봐주고 청소를 하며 겨우 허기를 채우며 살게 되는데 그런 동안에 주인을 잘못 만나 많이도 맞으면서 심한 고생을 하였다.  


그러다가 9살 때 전쟁이 터졌고 주인은 따로 피난을 가서 혼자가 되어 떠도는 동안 폭격을 맞고 시체들 사이에서 울고 있는데 한 무리 인민군대 아저씨들이 나타났다.  옷이 헤어져 살이 드러나는 것을 배낭에서 꺼집어낸 군복 저고리를 입히고 성큼 안아서 배낭 위에 업고는 후퇴하여 평양까지 간 것이다.  평양 시내의 애육원에 데려다주고는 김일성 장군 계신 평양에 왔으니 이제 걱정없이 잘 있으라하고 인민군인들은 같이 가겠다고 울부짖는 이화순을 두고 떠났다.


바로 그날 밤, 전쟁으로 고아들을 일단 안전하게 중국에 유학보내기로 한 결정에 따라 중국으로 간다는 웅성거림을 듣고는 이화순은 중국에 간다는 것이 겁난데다 어머니를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애육원을 도망쳐 나왔다.  다시 이집 저집 다니며 아이 봐주고 나무해주고 밥을 먹으며 지내는 동안 평양대폭격을 겪고 피신하던 중 김 주석의 교시에 따라 고아들을 모두 ‘평남신의주초등학원’에 보내게 되는데 거기 끼여져 남신의주로 갔다고 한다.  거기서 난생 처음으로 제 이름자 쓰는 것을 배우고 책읽기를 배웠고 참으로 오랜만에 먹을 것 입을 것 잠자리 걱정을 않게 되어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 집필을 위하여 북부조국을 찾던 시절의 홍정자 여사.   보기 드물게 얼굴도 마음씨도 아름다운 분으로 내가 오랫동안 기억해왔다.  



정전이 되고 온 나라가 재건사업을 시작했을 때 이화순은 평양방직공장 소녀공으로 가겠다고 지원하였다.  무엇보다 헐벗고 춥게 살아왔던 그녀는 스스로 베를 짜서 마음껏 옷을 입고 살아보고픈 생각에서였다.  순이의 직공 생활은 너무도 행복했다고 한다.  처음 1년간 기술공부를 마치고 2대의 직포기를 맡아 짜기 시작했고, ‘혁신언니’ ‘노력언니’들이 친절하게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남들보다 열심히 쉬지않고 일한 결과 처음 2대에서 9대, 16대 그리고 마침내 48대의 직포기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것은 1964년 최고의 기록으로 그해 연간 생산계획을 김주석의 생신인 4월 15일 이전에 이미 초과달성한 것이다.  


공장에서 ‘대기대공’으로 추대된 순이는 그해 10월 25일에 공장을 찾은 김주석을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 “나는 동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가장 기쁩니다”라고 직포공들에게 둘러싸여 말씀하시는 김주석에게 공장 지배인이 순이가 혼자서 48대를 담당하고 있다고 말하자 김주석이 “조그만 동무가 일잘하누만, 용기 잃지 말고 더 잘하라구” 하시면서 등을 토닥여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함께 동행했던 외국 귀빈들에게 ‘모범노동자’로 소개하며 “어디 아픈 데는 없는가, 일이 너무 힘들지 않는가”하고 물으며 공장의 근로환경과 노동자들의 월동준비에 대해서 염려하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그동안 수없이 부자들에게 매를 맞고 굶주리며 헐벗고 살아오면서 등에 업은 아이의 오줌내가 가실 날 없었던 순이의 등을 토닥여준 김주석을 생각하며 순이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에게 새 학생복을 입혀주고 글눈을 뜨게하고 이렇게 노동자로서 보람차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한 그분의 은덕을 보답하기 위하여 더욱 열심히 일하자는 각오를 하였다.


평양방직공장에선 모두 17 명의 노력영웅들이 나왔다고 한다.



1968년 5월 9일, 평양대극장에서 있은 대회에서 김 주석은 리화순을 옆자리에 앉게 하고는 지금은 72대의 직기를 본다고 하자 “흠, 그러면 매일 180리를 걸어야 한단 말이지. 그러면 1년을 300일로 치더라도 6만리를 걷는 것이니 이건 우리가 항일유격투쟁을 해봤지만 그렇게 걷는 것이 간단치 않습니다.  이것은 혁명입니다” 하며 감탄하고 치하해주었다고 한다.  뒤에 알려진 사실로 김 주석은 순이가 그렇게 달려도 건강에 지장이 없는지 의사에게 문의했고, 아무일 없다는 답변을 들은 후에야 안심하셨다고 한다.


그날 리화순은 김주석이 대회장에에 자신을 치하하며 당중앙위원회에서 이번에 ‘노력영웅’ 칭호를 수여하기로 했다며 “여러분, 리화순 동무가 한해에 짜내는 옷감이 백만메터입니다. 이 동무야말로 참다운 천리마 기수이며 영웅입니다.  누구나 옷을 입을 땐 우리 리화순 동무를 생각하시요”라고 말한 후 덧붙여서 “화순동무, 이젠 공장에 돌아가 후비를 서너 명 더 양성하고 학교에 가서 공부도 하고 시집도 가오” 하였고, 수줍어 얼굴만 붉힌 순이에게 이후에 아무래도 인민군 배낭에 업혀서 왔으니 인민군 신랑감에게 시집가도록 마음을 써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순이가 인민군 가운데 준수한 청년에게 시집가는 날 김주석께선 신부의 꽃다홍 비단옷감까지 손수 골라서 보내주었다고 한다.


김주석과 당의 순이에 대한 배려는 그것뿐만 아니라 속성으로 중고등과정을 밟게 하였고, 이후 순이는 조선인민경제대학 행정과에 입학하여 4년간의 대학과정을 기어이 마쳤다.  노력영웅 리화순씨는 1977년에 당비서로 임명되며 같은 해 조선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국회의원)으로 피택된다.  또한 1982년 김주석 탄생 70돌에 김일성 훈장을 수여받았다.


다음은 1990년 경에 홍정자 여사가 리화순 씨와의 인터뷰에서 들은대로 옮긴 리화순 씨의 말이다.  “남반부 인민들이 TV 방송 보는대로 반공사상으로 무장돼 있으니 우리 공화국 조국의 현실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내 자신을 본보기로 살아온 체험을 알려주고 또 우리 인민이 얼마나 통일된 해방조국을 갈망하는가를 만나서 아는 대로 보여주고 싶습니다.  림수경 대표가 13차 축전에 참석해서 우리 인민들의 사랑과 환영을 많이 받았는데 자기 결심대로 3.8선을 디디고간 그 통일의 애국적 일꾼을 두손에다 철쇠를 채워 감옥에 집어넣었으니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림양은 북조선에 와서 무슨 반동사상을 말한 것도 없고 오직 세계의 청년대표들, 세계 기자들 보는 앞에서 다시 전쟁이 없이 통일된 하나의조선을 이루자고 간절히 말하고 전한 것밖에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반민족분자처럼 죄인으로 잡아넣을 수 있습니까…(중략)…그러나 반드시 나라는 통일되고 정의를 믿는 사람들이 승리할 겁니다. 북남없이 한민족 한국토가 통일이 되어 다같이 잘살 수 있도록 우선 내 자신이 만명 넘는 이 공장 노동자들과 더 훌륭한 노력영웅으로 살 일념입니다.  

(이상 홍정자 여사의 저서 '내가 만난 북녘 사람들' 가운데  ‘노력영웅 이화순’에서 발췌함)


홍정자 여사의 리화순 씨 인터뷰 당시의 사진 



내가 이번에 평양방직공장을 방문하면서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었던 숨은영웅 리명순 씨에게 리화순 여사가 아직도 살아계신지 물었더니 2000년도까지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은퇴하여 연로보장으로 지내셨는데 애석하게도  2001년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노력영웅 이화순’씨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가 북부조국과 그 지도자, 그리고 인민들을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여기 옮겼다.


내가 이번에 대화했던 노력영웅 전옥화 씨와 숨은영웅 리명순 씨 (오른쪽)

그 대화를 바탕으로 방문기 다음 회에 공장의 복지제도에 관하여 쓰게 될 것이다.



북부조국은 전쟁고아들을 부모가 있는 가정에서보다 나라에서 더 큰 관심을 갖고 돌보아주고 교육을 시키고 사회에 나가 잘 자리잡을 수 있도록 배려한 나라다.  리화순 씨처럼 고아 출신들은 모두  나라가 보살펴준 덕분에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었다.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된 후 멀리 외국으로 보내져 유학생활을 한 고아들도 모두 북부조국으로 돌아오도록 하여 제 나라 제 땅에서 기여하는 일군으로 살도록 했다고 한다.


전쟁 이후 남한의 수많은 고아원들이 있었지만 국가에선 그들에게 아무런 관심을 주지 못했다.사회사업이란 명분하에 여기저기 고아원을 차려놓고 얼마나 많은 사이비 원장들이 해외에서 고아들에게 보내오는 원조를 가로채어 부자가 되고, 고아들은 헐벗고 굶기면서 중노동을 시키고  자신들의 뱃속을 채웠던가?  그런 악마들은 훗날 70년대 80년대에도 있었고, 비교적 근래에도 수백명의 수용된 사람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생명을 경시하다 언론을 통하여 알려진 경우가 있지 않은가?  이것이 과연 사람으로서 할 짓인가?  국가가 해야 할 일을 회피하고 욕심 가득한 개인들이 돈벌이로 그 일을 하는데도  감독조차 하지 않았으니 그들은 짐승이 되고 악마가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기관에 수용되었던 고아들과 원생들이 사회에 나가서 어떻게 바로 설 수가 있었으랴.  


이제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인권이 없는 곳이 어떤 곳인지를. 고아들의 인권까지도 나라가 적극적으로 돌보는 곳은 어디인지를.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26     14-11-24


가보기 전엔 어쩔 수 없다.  홍 여사의 ‘아오지를 가다’


나의 방문기 지난 회에서 홍정자 여사의 두 권의 책 ‘내가 만난 북녘 사람들’과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를 언급하였는데 살펴보니 전자는 1992년 미국에서,  후자는 2002년 미국에서 출판된 책이다.  1990년대 중반에 한국의 ‘말’지를 통하여 그 가운데 여러 내용은 한국에도 소개가 되어 북부조국을 바로 알리는데 크게 기여를 하였는데 1994년에 ‘내가 만난 북녘 사람들’은 한국에서도 ‘살림터’에서 출판하여 한동안 베스트 10의 위치에 오르기도 했다고 한다.   


평양 인근의 넓은 도로와 새로 생겨난 아파트들.



홍정자 여사는 우리들이 잘 아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친누나다.  홍동근 목사님과 결혼 전의 본명은 백정자.  미술을 전공하였고 또한 불문학도 전공하였으며 한국에선 대학에서 미술 강사로도 있었다.  홍 여사의 방문기는 그분의 뛰어난 예술적인 감성과 묘사력, 그리고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북을 깊이 이해하는 따스한 눈을 통하여 읽는 독자들에게 북부조국의 진실과 그 인민들의 삶을 깊은 감동으로 전달하였다.


책의 내용들 가운데 한가지 예를 들어본다.   우리들이 학교에서 왜곡된 모습으로 배워 공산주의에 호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강제로 보내서 중노동을 시키는 곳으로 알고 있는 아오지 탄광 방문을 북의 관리들을 어렵게 설득하여 1994년 10월에 기어이 답사하고 그곳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였다.  가까운 곳에 여러 탄광들이 있는데 왜 그 먼 곳까지 찾아가야 하느냐는 북의 관리들에게 홍여사 특유의 고집으로 기어이 그곳이 아니면 안된다며 답사를 이뤄내는데 성공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우리들이 알던 모습과는 판이하게 김 주석이 4번이나 현지지도로 방문하여  탄광의 환경과 복지에 크게  관심을 기울였던 곳인데 우리는 그곳을 반공정권으로부터 정반대로 배우고 세뇌당하고 있었음을 그 책을 통하여 밝혀내었으니 홍정자 여사와 그 책의 업적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나처럼 북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사람조차도 홍여사의 그 책을 통하지 않았다면 아오지 탄광에 대한 나의 인식을 바꿀 수 없었을 것이다.


근래에도 아오지 탄광을 북이 축구경기에 진다면 감독을 거기로 보낸다고 표현하는 남한의 언론이 있었는데 신문에 제목만 그렇게 붙였지 내용에서 거론하지는 못한 것으로 안다.  이제 함부로 막말을 하지 못하는 것도 홍 여사의 이런 방문기를 통하여 그 진실이 어느 정도 알려졌기 때문이리라.  ‘아오지 를 가다’라는 제목의 그 글은 1995년 월간 ‘말’지를 통하여 알려지기도 했다.  아직도 북에 대하여 너무도 무지하고 편견에 가득차 있는 것이 남한의 현실인 것을 생각한다면 북을 수십 번 방문하면서 수많은 동포들과 만나 인터뷰를 통하여 진실을 알리는데 기여한 홍 여사의 책들은 다시 출판되어 통일을 염원하는 우리 온 민중의 필독서가 되어야 할 것 같다.


미주에서 2002년 출판된 홍정자 여사의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자신의 책과 같은 제목의 구호 앞에서의 홍정자 여사 



이왕 아오지에 대해 언급하였으니 나의 방문기가 약간 옆길로 빠진 듯해도 오늘은 홍정자 여사의 ‘아오지를 가다’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여기 소개하여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이젠 아오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곳 아오지 한 곳만 제대로 이해해도 그동안 우리가 듣고 배워온 북부조국이 그 진실과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원래 아오지라 불리웠던 지역은 옛 함경북도 경흥군 소재지 읍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여진족의 말로 ‘불타는 돌’이라는 뜻이었다.  1977년 인민들의 제안에 따라 ‘은덕’군으로 개명되었는데 그 이유는 “수령님의 은덕을 가장 많이 입은 고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해방 후 산간벽촌 아오지는 천지개벽을 하게 된다.  김주석 께서는 아오지로 하여금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하도록 수차에 걸쳐 현지지도와 교시를 내려주셨다.  그리해서 석탄화학공업 부문의 공장을 비롯 여러 개의 중앙공업기업소들과  20여 개의 지방산업 공장들이 일떠서게 된다.  또한 은덕천을 가운데 두고 양기슭에 거리가 형성되면서 문화회관, 4개의 군 도서관, 체육구락부, 은덕화학공업대학, 고등석탄전문학교, 고등화학전문학교를 비롯 수많은 학교, 탁아소, 유치원들이 골고루 배치되었고 6.13 탄광병원을 비롯 여러 개의 병원진료소, 상점, 이발소, 목용탕 같은 갖가지 편의봉사시설이 마련되어 인구 9만을 헤아리는 주민, 근로자들의 문화적 수요를 보장하고 있다.  특별히 1966년에 살림집을 많이 지었고, 1972년도에 들어와 1966년도의 12배를 더 많이 지었다고 한다.  아오지는 교통이 아주 발전돼있다고했다.  각 리마다 농촌버스가 운행되고 주요 자동차 길로는 은덕-회령, 은덕-샛별, 은덕 –선봉, 은덕-원정 이렇게 자동차 길이 뻗어 있다./


아오지 (6.13) 탄광의 정문 모습


홍정자 여사와 탄광의 일꾼들.  홍 여사는 아오지 탄광을 직접 답사해서 온 민중을 세뇌시킨 그 거짓을 밝혀내었다.


/정기화 지배인은 이제 6.13 탄광에 대하여 알고자하는 나에게 먼저 김 주석께서 6.13 탄광에 대하여 그리고 탄부들에 대하여 그 어떤 사랑과 가르침을 주었는가에 대하여 자랑을 하고자 했다.  김 주석께서는  1948년 6월 6일, 1954년 7월 7일, 1959년 3월 17일, 그리고 1968년 6월 13일 (이 날의 방문을 기념하여 탄광의 이름을 바꾸게 됨) 그렇게 네 차례에 걸쳐 아오지를 찾아주셨다. 그리고 그중 1954년과 1968년엔 김정일 지도자를 동반해 오셨다. … 김 주석께서는 특별히 탄부들에 대한 사회적 우대를 강조하시어 “석탄이 공업의 식량이면 탄부들은 나라의 맏아들”이라 하시며 내세워주시고 해마다 7월 7일을 세계에 없는 “탄부절”로 제정해주시기도 했다.  /


/과연 6.13탄광기업소 내에는 여기저기 김 주석의 교시가 새겨져 모심을 받고 있었는데 그중 인상적인 것들로 이런 글귀를 볼 수 있었다.  “사회적으로 탄부를 존경하며 어떤 모임을 할 때에는 주석단에도 많이 앉게 하여 탄부들이 실지 생활을 통하여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영예를 간직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탄부들을 비행사 대접하라” (탄부들의 노임 수준을 말함)./


/과연 그들은 김 주석의 교시를 받들어 구슬땀을 흘리며 일한 결과 1967년 100만 톤 능력의 수직 갱을 건설, 6.13 탄광을 100만 톤 탄광으로 만들었고, 오늘날 종업원 5천명 가운데 70%가 청년들로 되었으며 운반 100% 채굴 40%가 기계화되었다.  여성일꾼들은 갱내에 들여보내지 않는 것이 규칙이나 현재 30여명 정도의 권양기 운전공과 4-50명 정도의 전차운전공이 여성들로 되어 있다./


/아오지에서 출생했으며 한 직장에서 40년 일해오고 있다는 장진세씨로부터 놀라웁게 들은 것은 그의 아내도 그의 딸도 청진의학대학 출신으로 현직 의사로써 봉직하고 있다는것이다.  믿어지지 않는 얘기다.  오직 그 사회에만 있는 일이 아닐는지, 탄부를 남편으로 모신 여의사 선생님을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가.  탄부의 딸이 그리 쉬이 의과대학을 진학할 수 있는 것인가../

/중학교 교원인 아버지와 유치원 보육원인 어머니, 그같은 인텔리 부모님과 함께 고향인 청진에서 도시생활을 즐기면 그만인 꽃다운 처녀 박옥화 양, 그러나 그녀는 “수령님의 교시”를 받들어 직장에서 받은 모처럼의 휴가를 고스란히 탄광에 바치러 왔다가 그만 눌러앉기로 했다.  그대신 온 직장 총각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다고…/

/아오지 탄광에서 한생을 바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수령님과 당이 바라는 힘든 부문”에 몸을 바치고자 12년째 굴진공으로 일한다는 김순복 씨는 평남도 평원군에 있는 광산설계원 양성학교에 추천되어 3년간 공부한 바 있다.  그는 다른 탄광보다 수령님이 많이 찾아오신 이 탄광에서 자자손손 대대로 일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상 홍정자 여사의 '아오지를 가다'에서)



내가 근래에 홍정자 여사와 전화로 통화하면서 잠깐 나눴던 대화를 소개한다.  날더러 참 귀한 사람이 통일운동에 뛰어들어 고마우면서도 마음이  아프시다며 나의 집사람이 나를 이해해주어서 참 다행이라고 하기에 내가 집사람이 그렇게 이해해주진 않지만 옳은 일이기에 이 길을 가게 되었다고 하니 본인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1980년대 초반, 홍동근 목사님이 처음 북으로 간다고 할 때 간절히 붙잡고 싶었고 막고 싶었지만 어머니를 만나러 가신다는데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 홍 목사님이 어머니를 만나뵙고 돌아오신 지 3개월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만일 조금만 때를 놓쳤다면 홍 목사님은 생전의 어머니를 만나볼 수조차 없었으리라.  홍 여사는 처음엔 북에서 발행된 신문이나 인쇄물이 집으로 배달되는 것도 싫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보기 전엔 어쩔수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옳은 말씀이다.  우리의 세뇌당한 것은 그렇게도 깊고 깊은 것이다.


내가 홍 여사께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책을 내기까지엔 어려움이 무척 많았겠다고 하자 잠깐 그 당시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홍 목사님을 찬밥 잡수시도록 홀로 두고 북을 방문할 때는 미리 부탁하고 갔는데도 막상 도착해보면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낭패를 본 일도 많았다고 했다.  며칠 동안의 머무는 시간은 촉박한데 그곳에선 홍정자 여사가 그동안 진실을 알려왔다며  좋은 평을 하면서도 답사와 인터뷰를 제대로 주선해주지 못해 속이 많이 탓다고 하셨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몇 년을 조르기도 했고, 자료준비를 미리 요청하면  준비한다고 해서 믿었는데 가보면 준비가 안된 경우도 허다했다는 것이다.  


북의 대표적인 배우 김룡린과 함께한 홍정자 여사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의 화보 가운데)


임수경 학생이 평양에 입성할 때 기다리며 환호하던 인민들을 통하여 북의 통일에 대한 염원을 읽을 수 있다.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 학생.  판문점을 통하여 함께 남으로 넘어오는 길에. ('내가 만난 북녘 사람들'의 화보 가운데)


내가 그 시절이 ‘고난의 행군’시절이었기도 하니 북으로서도 참으로 어려울 때여서 교통편이나 모든 것이 준비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며, 그렇게 수많은 어려움 가운데 인내하면서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수십 차례 북을 방문하여 답사하고 인터뷰하여 나온 책이기에 지금 남북관계가 다시 이렇게 어렵게 되고 진실이 묻혀지는 시절이 된 상황에서 그 책들이 더더욱 빛이 납니다하고 위로해드렸다.   올해 칠순인 홍 여사께서 고맙게도 내가 쓰고 있는 방문기를 읽고 싶으시다기에 적당한 분량을 프린팅을 해서 우편으로 보내드리기로 약속했다.  홍 여사는 미 동부 지역의 친지가 초대하여 잠깐 바람도 쐴겸 방문하러 떠나신다기에 부디 건강하셔서 오래오래 좋은 대화 나눕시다하고 말씀 올렸다.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27     14-11-28


평양방직공장의 노동자를 위한 복지제도


평양방직공장에서 7년 동안 근무했다는 강창숙 해설원의 안내로 혁명사적교양실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두 여성이 우리를 반겨 맞이해준다.   이곳 노동자들과 직접 대화하기를 원하는 우리들을 위한 배려로 이분들이 나온 것이다.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빙 둘러 만들어놓은 좋은 벤치가 있어 거기 자리를 잡고 대화를 나누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전옥화 선생, 세 번째는 리명순 씨.


한 분은 노력영웅 전옥화 선생으로 올해 77세가 된다는데 1951년부터 2009년 까지 근 60여년 동안 이 공장에서 일하였다고 한다.  아직 건강한 모습의 이  분은 평양방직공장 역사의 산 증인이다.  평안북도 빈농 출신으로 전쟁으로 부모님을 모두 잃고 이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하여 평생을 한 길을 걸었다고 한다.  전쟁 당시 미국이 조국에 가한 처참한 광경들을 직접 목격하였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면서 자신이 공장에서 열심을 다하여 일하는 것으로 나라와 인민에 기여하기로 마음먹고  평생을 열심을 다해 이곳에서 일한 것이다.  


전옥화 선생은 1977년에 북부조국 최고의 영예인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고, 중국과 러시아 헝가리 몽고 등지로 보상여행을 배려받았다고 했다.  아들 딸 하나씩 두었고 손자 손녀도 있어 남은 여생을 연로보장으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하신다.


다른 한 여성은 선군시대중앙공로자 (숨은영웅) 리명순 씨로  올해 38세라고 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방직공장 기능공 학교를 마치고 이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의 서거 소식 들었을 때가 그의 나이18세였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당시의 마음을 표현한다.   그 슬픔을 이겨내는 방법으로 나라를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각오로 다음 달인 8월부터 직포공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일을 조금씩 익혀가면서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 일했고, 자신을 포함한 모든 노동자들이 그 어려웠던 제2의고난의 행군 시절에도 언제나 목표량을 두 배 세 배 초과달성했다고 한다.  


노력영웅 전옥화 선생과 (왼편) 선군시대숨은공로자 리명순 씨와 함께한 필자 


그동안 우리를 안내하며 대화를 통해 조금 친해진   강창숙 해설원에게 우리 조국의 통일을 위해 내가 궁금해하던 여러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느냐고 물어보니 무엇이든지 물어보라고 한다.  그래 공장의 현황에 대해서 몇가지 물어보았고 또한 그동안 이곳 인민들의 생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게는 되었지만 공장의 노동자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북부조국에서 처음으로 인터뷰하게 되었다면서 여러가지 질문을 하였고 다음과 같은  답을 들었다.


강창숙 해설원과 인터뷰하는 필자


평양방직공장의 위치는 평양시 동평양 선교구역 강안동이다. 이곳에선 방적공장과 직포공장 모두 있는데 실을 뽑기 위한 정방기는 예전부터 있던 기계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제직기로는 유연창대직기를 사용하는데 이 기계는 북에서 직접 생산하는 기계라고 한다.  내가 무명의 원료가 되는 목화는 어떻게 구입하느냐고 물어보니 목화는 외국에서 수입한다고 했다.  


이곳 평양방직공장에선 매년 필요한 인원이 있을 터인데 이곳에서 일하기 위해 신청하는 젊은이들의 상황은 어떤가하고 물어보니 지금까지  필요한 인원은 늘 지원하는 사람들로 충분히 메꿔졌다면서 올해의 경우 200여 명이 새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대부분 17살로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는 이곳 기능공 학교에서 6개월 동안 훈련을 받고 졸업한 후에 직장에 배치된다고 하였다.


모두 8,500 여명의 직원들이 근무하는데 미혼의 직원들은 합숙소에서 생활하고, 기혼자들은 평양 시내의 살림집에 살면서 공장버스로 출퇴근을 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이곳 평양방직공장은 여성 직원들의 숫자가 많고 남성이 적으므로 남성들이 일하는 것을 환영한다는 예상 밖의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미혼 여성이 결혼을 하게 될 때 그 배우자가 이곳 평양방직공장에서 함께 출퇴근하며 일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래 남자들이 이곳에서 할 일이 별로 없지 않으냐고 했더니 그렇지 않다면서 기계 수리공, 차량들의 운전수, 보일러 담당,  그외 공장 부속의 여러 사업소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성들이 많은 직장에서 남성들을 오도록 하여 함께 일하도록 하는 취지가 참 신선하다.


북에서 직접 생산한다는 유연창대직기로 천을 생산하는 직포공들


내가 가장 궁금해하던 이곳 방직공장 노동자들의 임금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물어보면서 그동안 내가 만나서 대화했던 식당이나 호텔의 봉사원들은 월급 6천원에 상금 5만원으로 모두 5만 6천원을 받는다고 하던데 이곳 노동자들의 수준은 어떤가하고 물어보았더니 강창숙 해설원은 살짝 웃으면서 ‘우리 월급은 그 두배가 넘습니다’라며 거기에다 생산량에 따라 차등해서 분배한다고  말해준다.  그러니까 더 열심히 일하면서 생산량을 높이면 그에 따라 분배도 많아진다는 이야기다.  사무직보다 노동자들이 훨씬 나은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같은 노동자들인데도 일급 호텔의 봉사원들보다 이곳 북부조국의 공장 노동자들은 더 많은 월급을 받는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이미 얼마간 알고는 있었지만 강창숙 해설원과의 대화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노동자들에게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복지혜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노동자들이 살고 있는 주택은 무료다.  쌀은 배급으로 필요한 양을 공급받게 되며 김치를 담기 위한 배추도 세대 수대로 공급하고, 부식물은 공장 안에 매대가 있어 거기서 값싸게 구입이 가능하다.  거기다가 노동자들의 부식을 위해서 다양한 후방공급소가 있는데 단천에는 수산기지가 있어 거기서 직접 잡은수산물을 공급한다.   젓갈과 까나리 젓까지 공급하고 있으며, 자체적으로 부업기지가 있어 강냉이 등 농산물도 공급하고 오리 닭 돼지를 농장에서 사육해서 고기를 공급하기도 한다고 했다.  


혁명사적교양실의 이 사진을 통해서 평양방직공장에서는 오래전부터 노동자들의 부식 생산을 위해서 노력해온 것을 알 수 있다.


이건 정말 뜻밖의 일이다.  우리처럼 시장에서 무엇이든지 돈으로 살 수 있다면 굳이 공장에서 이렇게 노동자들의 부식제공을 위한 사업을 하지 않아도 될텐데 아직은 북에서 편리하게 필요한 식재료들을 충분히 집에서 가까운 시장에서 구입할 수 없어서인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제 2의 고난의 행군 시절을 거치면서 부족한 음식물 재료를 직접 생산해낸 전통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공장의 노동자들에게 충분하게 부식을 공급하기 위해서 공장에서 직접 부식 생산까지 맡아서 제공하고 있다하니 노동자들을 위하는 그 정신을 내가 기억해야 할 것 같다.  이곳 평양방직공장은 자본가를 위한 공장이 아니라 바로 인민을 위한 노동자들의 공장인 것이다.


평양방직공장의 부지 면적은 64만 6천 평방미터로 웬만한 고을만한 면적이라고 한다.  그래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탁아소와  6살 까지 다니게 되는 유치원도 무상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거기서 일하는 선생님들도 모두 공장 소속이라고 했다.  공장 소속의 병원도 있는데 수술이 가능한 곳으로 입원실도 있다.  료양소도 운영하고 있는데 노동자들이 신경통이나 질병이 생겼을 때 40일 동안 요양하고 돌아올 수 있다고 했다.  노동정양소도 있는데 이곳은 혁신자들을 보내어 식사의 질을 높여서 보양해주는 곳이라 한다.  


노동자들의 문화생활에 대해서 물어보니 연극이나 공연은 국가에서 표가 나오고, 옥류관 청류관 등의 식당은 천 원 정도의 금액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하였고, 여행을 가기도 하느냐고 물어보니 당연하다면서 예를 들어서 멀리 견학으로 백두산 답사권이 주어지기도 하는데 그곳 신흥지구 비밀근거지 등을 답사하러 간다고 했다.


김 주석의 노동자들에 대한 사랑을 볼 수 있는 문귀다.


노동자들이 언제 쉬느냐고 하니 일요일과 국가 명절에 쉰다고 한다.  마침 추석 직전이라 추석때는 어떻게 고향으로 가는지를 물어보니 직장에서 지역별로 가는 차들을 준비해서 고향으로 가게 하는데 보통 2-3일 후에 돌아올 때는 자체적으로 평양으로 돌아오는 차편들이 많기 때문에 스스로 알아서 돌아올 수 있다고 했다.  


북부조국에선 주택과 쌀을 무료로 제공하고 학생들의 교복까지 제공하지만 그래도 인민이 입을 옷은 스스로 구입해야 하지 않느냐면서 괜찮은 옷을 구입하려면 얼마 정도 하느냐고 물어보니 2만 원에서 3만 원 정도라고 한다.   노동자들의 월급에서 옷을 구입하기 위해 지출되는 금액은 다른 비용에 비해서는 높은 편이지만 따로 주거비용이나 교육비, 의료비의 부담이 없는 것을 고려할 때 그리 비싼 것 같지는 않다.


대량생산에 대량소비, 그리고 무역의 자유화로  우리들은 일상용품들을 아주 싼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한편으로 지구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으니 그것을 잘 보존해야 하고, 하나밖에 없는 이 지구의 주어진 환경을 깨끗이 유지하기 위해서 무한정으로 생산되는 상품의 구입 또한 절제가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의 신자유주의 시절에 모두가 검소하고 절약해서 살아간다면  경기하락에 공황으로 이어져 생산과 유통에 큰 혼란을 주게 되고, 그걸로 유지되는 자본주의 체제의 사회 자체가 무너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소비성향을 부추겨서 대량소비로만 유지되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한때 우리 사회에서도 절약과 검소한 생활이 본이 되는 시절이 있었고  그것을 국가에서 권유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생필품이 부족하다해서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불행은 그것보다는 편히 쉴 집이 없다거나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없어서 였고, 돈이 없어 자녀들의 교육을 못 시킨다거나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었거나 부정과 부패한 정치와 사회로 억울한 일을 당한 것에 있었음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나의 여러가지 질문에 성심껏 대답해준 강창숙 해설원과 함께


시장에 나가면 값싼 생필품이 넘쳐나지만 그것을 우리가 구입할 수 있다해서 우리가 행복한 것은 아니다.  각자의 수입에서 아주 많은 부분을 우리는 주택, 교육, 교통 혹은 차량유지, 의료, 보험, 통신, 문화생활 등에 사용하는데 바로 이것이 우리들을 옭아매게 만들고 수입이 충분하지 못할 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도록 만든다.  그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정된 직장을 원하지만 모두가 그런 직장을 가질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의 직장에서 받게 되는 스트레스도 큰데다 그것마저도 언제 그만두게 될지 모르며, 그런 날이 오면 그야말로 의식주를 해결할 방법이 캄캄해지니 우리가 날마다 불안 가운데서 살게 되고 걱정근심이 그치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생활고로 인하여 자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살에 까지 이르진 않더라도 그렇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불안한 심정을 우리 사회에서 누가 알아주기라도 하는가?  직장을 구하지 못한 수많은 젊은이들이 넘쳐나는데도 먹거리와 생필품이 흔한 곳에 우리가 산다해서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가?  사람이 떡으로만 행복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들의 차가 멀어지는데도 계속 손을 흔들어주는 강창숙 해설원.  잠깐 만나도 서로 소통하고 나니 정이 넘쳐흐르는 사람들이 바로 북부조국의 동포들이다.


내가 대화한 평양방직공장의 전옥화 노력영웅, 리명순 숨은영웅, 그리고 강창숙 해설원도 그러했지만 그외 만나서 대화를 나눈 북부조국 인민들은 한결같이 지금의 생활을 행복하다고 말해주었다.  그들이 생필품이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절약하고 검소하게 살기도 하겠지만 이미 그것에 오랫동안 익숙해있으니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왔듯이 절대로 그것 때문에 불행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직장을 잃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의식주 생활에 걱정거리가 없는 사회제도를 갖고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린 이제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우리들 또한 보다 민주적인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다하며 싸워왔다.  우리가 꿈꾸는 민주주의와 정의로운 사회와 복지제도 자체가 당장 모두를 배부르게 하지 않더라해도 그런 제도가 정착되면 그것이 우리를 더욱 행복하게 만들어주리라 여기기 때문에 싸워온 것이 아닌가?  북부조국 인민들이 개인적으로 물질을 많이 갖고 많이 먹고 많이 누려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온 우리들의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행복은 오히려 가난하더라해도 정의로운 세상에서 인민이 서로를 위해주고 화목하며 함께 나누는 것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


나의 질문에 성심껏 답변해준 김정숙평양방직공장의 강창숙 해설원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평양방직공장 여직원 합숙소를 찾아서 


평양방직공장의 노동자들의 생활과 복지에 관하여 대화를 나눈 후 공장 내부를 보기 위하여 다시 차에 올라 공장으로 향했다.  길가엔 여기저기 구호들이 그려져 있는데 대체적으로 열심히 일해서 생산을 높이자는 구호들이다.    돌아가신 북의 두 지도자 동지는 영원히 인민들과 함께 하신다는 구호의 ‘영생탑’이 여기에도 세워져 있다.  이것은 구호로만 그치지 않고 북의 인민들이 일상에서 두 지도자의 뜻을 받들어 이웃과 나라를 위하여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임으로 실제로 그 일을 이뤄나가고 있는 것이다.  


인견공장으로 가는 길에 여러 구호들이 있고 저 앞쪽에 영생탑이 보인다.


북부조국은 90년대에 무너진 소련과 동구의 공산주의 체제로서는 결코  이뤄내지 못했던,  지도자와 인민이 일체가 되어 열심을 다하여 나라를 일으킨 곳이다.  자신이 속한 기업소나 농장에서 인민은 각자의 배당되는 몫을 위해서 일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지도자의 뜻을 받들어 인민들과 온 나라를 위해서 내가 열심히 일하여 생산을 높이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회라는 것을 우리가 이해해야 한다. 


인조견 공장 입구


우리가 찾은 공장은 인견천직장이라고 되어 있다.  인조견사로 천을 짜는 곳이다.  여기도 북의 지도자들이 직접 찾아 현지지도를 한 곳이다.  


공장 안으로 들어서니  제직기들이 돌아가는 소리로 무척 요란하다.  방직공장이란 원래 이런 곳이고 공장의 노동자들이 대우를 받는 것은 이런 환경 가운데서 일하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지시로 주변을 깨끗이 하고 먼지를 없애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깨끗한  환경을 갖추어도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를 없애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이곳은 자동화가 많이 이뤄진 곳인지 일하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다.  요란한 기계소리에 귀를 보호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은 귀마개라도 착용하면서 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해설원의 안내를 받으려 해도 목소리를 알아듣기가 쉽지 않을 정도였다.  실을 꼬는 연사기쪽은 거의 사람이 없이 자동화되어 있는 것 같다.  



노동환경이 어려운 곳일수록 자동으로 생산이 이뤄지도록 하여 노동자들의 건강과 안전을 잘 지켜주는 일은 우리가 사는 세상 어디든지 이뤄져야 한다.  이번에 북에서 머무는 동안 정책적으로 기계화를 확장시키는 등 이 부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직은 한동안 인민의 육체적인 노동에 의존해야 할 것 같다.  적당한 노동은 건강에도 좋지만 노동자들이 너무 고된 노동을 하게 되면 젊어서야 별 일 없다해도 나이가 들어서 육체적으로 고생하게 된다.  북부조국에서 힘든 노동을 하는 인민들은 모두 이웃과 나라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귀한 사람들이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사회인 만큼  나라에서 노동자들을 우대하는 것이다.



공장 내부를 둘러본 후 이제 새로 지어진 방직공장의  합숙소로 향한다.  합숙소가 비교적 근래에 완공되어서인지 아직도 전경도가 세워져있다.  합숙소 안에서 우리를 안내해줄  해설원이 맞아준다.  신발에 덧신을 신고는 내부를 살펴보기로 했다.  




미혼여성노동자들을 위하여 새로 건설한 평양방직공장 합숙소


이곳 평양방직공장 합숙소는 미혼의 여직원들이 사는 곳으로 김정은 원수의 지시로 군부대가 동원되어 짓기 시작했고 6개월 만인  2014년 5월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모두 2,3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건물이다.  여직원들이 생활하는 곳이라 진달래색을 많이  사용하였고 아늑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 천정을 높게 하지 않고 2.4M 높이로 하였다고 설명해준다.   이곳에 각 방마다 7명이 쉴 수 있는 침대가 놓여져있고 옷장과 사물함이 있으며 따로 화장실과 세면대를 갖추고 있다 .  이런 방이 모두 330개가 있는 대형 건물이다.  





합숙소에는 치료소가 있고 의사가 9명이 있어 종합적으로 진료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7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목욕탕이 2개 있고, 세탁소, 옷 수리점, 미용실, 안마실이 있다. 우리가 살펴본 엄청난 규모의 식당은 800석 규모라고 했다.  친지가 방문할 때 맞이하는 접견실도 있고, 독서실이 있어 마음껏 책을 읽을 수도 있는데다 상점도 있어 필요한 생활용품을 구입할 수 있다고 했다.






노동자들의 복지에 관심을 많이 쏟았던 선대 지도자의 유지를 이어받아 이곳에  합숙소를 새로 짓도록 지시했던 김정은 원수가  완공 며칠 전에 다시 방문하여 현지지도를 하였다고 설명한다.  서거한 두 지도자와 마찬가지로 인민들의 생활향상을 위해 왕성하게 현지지도를 하는 것은 북부조국 지도자들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오는 것인데,  우리가 목격한 것만으로도 수많은 건물들을 새로 짓거나 재단장을 하도록 지시하였다고 하였고, 이 합숙소도 그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내가 근래에 접한 자료를 통하여 알게 된 사실로, 건강이 악화되어 의사들이 만류하는데도  현지지도를 위해 기차로 여행하는 도중에 서거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한평생 1만 4,290여개 단위들을 현지지도하였다고 한다.  무려 70만 킬로의 험하고 먼길을 마다않고 전국 곳곳의 인민이 사는 곳이라면 다 찾으셨다는데 그 거리는 지구를 17바퀴 도는 거리다.  김일성 주석의 경우라면 그보다 훨씬 오랜 기간 동안 지도자로 있었으니 그동안 전국을 누비며 현지지도한 것이 그 몇 배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북부조국의 지도자들은 나라를 튼튼히 하고 인민들의 생활향상을 위하여 현지지도를 하는 시간이 사무실에서 집무하는 시간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인민을 위하여 직접 가서 현장을 보고 판단하고 인민을 격려하고 지도하는 지도자를 북부조국 인민들이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가 그동안 듣고 배운 북의 지도자의 모습과는 천지 차이가 아닌가?   과연 누가 거짓을 말한 것인가?  북의 지도자들에 대하여 우리가 갖고 있는 편견이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국가보안법이라는 악법을 없애지 못한 이유로 지금까지  북의 지도자들에 대하여 진실을 말하는 것은 법에 저촉되는 참으로 요상한 시대를 우리는 살아온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북을 바로 알도록  배우지 못하였다면 그 지도자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로 왜곡된 모습으로 매스컴을 통하여 듣고 보고 배워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북의 지도자들을 북부조국 인민들이 그만큼 존경하고 사랑한다면 거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 이유들 이 많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위에서 거론한대로 직접 인민들이 사는 곳이라면 어떤 기업소나 두메산골 동네라도 찾아가 인민으로부터 애로사항을 들어주고 격려해주고 필요한 것을 해결해주도록 해온 지도자의 모습때문일 것이다.  인민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건강을 상해가면서까지 현지지도를 통하여 인민과 함께 하는 지도자를 어떻게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남한의 지도자도 생산공장도 방문하고 재벌들에게 수출에 기여한 상도 준다.  그렇지만 남의 지도자가 공장의 노동자들을 위해 공장을 찾아가는 일은 없지 않는가?  공장의 주인인 자본가를 위하여 방문하는 것이지 그것이 노동자들의 복지를 위하여 찾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제대로 된 지도자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노동자의 복지를 위해서 신경을 쓰고, 노동조합이 잘 되어지도록 관심을 가져야 하겠지만 우리 사회는 그렇게 하지를  못했고, 특히 이명박 정권 이후 정부는 노동자들과 더 멀어졌다. 이제  임시직 노동자들의 권리가 무참하게 유린당해도 수수방관하고 일자리가 없는 청년들이 넘쳐나도 아무런 대책이 없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남의 지도자가 어떻게 민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남한의 지도자가 민중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권력자로서의 지도자와 다스림을 받는 존재로서의 민중을 분리하는 일에 우리는 너무 익숙해 있지만,  북부조국에선 그 반대의 상황이다.  지도자가 인민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  끊임없는 현지지도를 해왔고, 인민들은 그 지도자의 뜻을 이루겠다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 열심을 다하여 살아가는 곳이니 서거한 두 지도자 동지 또한 인민의 삶과 늘 함께 한다는 ‘영생탑’의 글귀가 구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북부조국 인민들의 실제 생활 가운데 매일처럼 이뤄지고 있다고 쓴 이 글의 서두가 이제 이해되지 않는가?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29]가 시작되는 [펌]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VI / 강산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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