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6_北韓과中國

[펌]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IV / 강산

忍齋 黃薔 李相遠 2014. 11. 22.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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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자이신 강산 선생님과 동행하신 노길남 선생님이 바라보시는 순수한 북한 동포에 대한 동족애와 사랑 그리고 그 측은지심을 이해하고 북한에 대한 이해의 차원에서 두 분의 생각이 담긴 글을 이곳에 소개를 하지만, 북한 정권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는 점이 있음을 밝힙니다. 북한정권의 독재와 세습왕조 그리고 여러 경로로 이미 알려지고 확인된 인민에 대한 탄압은 손가락질의 대상이며 살인마 전두환과 함께 인류의 양심 앞에 처단되어야 할 공적임을 알리고자 합니다.]] 


[어제는 시애틀에 사시며 "25년 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를 운영하시는 웹페이지 "사람 사는 시애틀 한마당"에 2014년 9월 24일부터 2014년 11월 18일까지 총 25차례에 걸쳐 게시하신 강산 선생님이 페이스북 친구를 신청하셨습니다. 그분의 페이스북을 방문하니 통일운동을 하시는 분입니다. 도와드릴 만한 게 내 블로그와 페이스북을 통해 통일에 대한 그분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메시지를 드렸습니다. 강산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그분의 방북기를 제 블로그에 제 게시합니다. 강산 선생님의 방북기를 통해 북한을 이해하는 좋은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모든 볼드체는 원문이 링크되어 있습니다.]


[펌]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III / 강산에서 이어집니다.



나의 북부조국 방문기 19 14-11-02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19


장수복 접대원으로부터 인민들의 생활을 공부하다


아직 해가 길어 연극관람을 마치고 돌아오는데도 밖이 환하다. 호텔로 돌아와 5층 엘리베이터를 내리니 5층의 휴게실에서 근무하는 장수복 접대원이 잘 다녀왔느냐면서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친절하면서 사려깊은 장수복 접대원은 호텔에 도착했을 때 우리 일행이 차를 마시며 일정을 의논할 때 봉사해주었고 그때 이미 인사를 나눴기에 구면이라 수복동무라 부르기로 했다. 휴게실은 호텔 복도 옆 제법 기다란 방에 스무 명 이상 앉을 수 있도록 여기저기 소파와 테이블을 배치해 놓아 커피샾 같은 분위기인데 보통 지나면서 살펴보면 두어 테이블 정도에 손님이 있었다.


수복동무는 입구 쪽에 진열대 겸 계산하는 곳이 있고 거기서 커피와 맥주 등 음료수를 판매하며 안주거리와 간단한 식사를 제공하는데 음식은 호텔의 식당에서 요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곳 휴게실에서 바로 복도 건너편에 직속 부엌이 있고 거기에도 요리사가 있어 직접 요리해서 음식을 제공한다고 했다. 수복동무의 나이는 이십대 후반으로 보였는데 직접 물어보지는 못했다. 내게도 편안하게 대해주었지만 손님들에게 참 친절하게 봉사하는 접대원이다. 참 아쉬운 것은 내가 수많은 사진을 찍었는데도 마침 수복동무의 사진을 찍지 못해서 여기서 나눌 수가 없다.


장수복 접대원이 일하는 휴게실에서 조선대학교 한성구 조교와 함께. 휴게실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 이 사진을 미리 올림. 이후 한성구 조교에 관하여 소개하게 됨.


호텔 객실로 바로 향하려다가 마침 휴게실 안에 아무도 없기에 조금 한가한 시간 같아 보였다. 잘 되었다 싶어 내가 수복동무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고 하자 무슨 부탁이냐고 묻는다. 그래 사실대로 내가 북부조국의 인민들의 생활에 대해서 이번 여행 동안 직접 인민들을 만나서 대화하며 알고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이미 책을 통해서, 그리고 선양 목란각에서 잠깐 동안 질문을 하여 어느 정도 인민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에 대해서 파악하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 내가 북에서 살고 있는 인민들을 만나서 직접 대화하지 않고는 아직 제대로 감을 잡을 수가 없는데 때문에 이번 여행을 통하여 내가 직접 인민들을 만나서 물어보고 과연 북부조국의 인민들은 어떻게 의식주 생활을 해결해나가는지에 대해서 이것 저것 질문을 하고 싶다고 했다.


별로 크게 기대를 하지는 않았는데 수복 동무는 그렇다면 무엇이든지 물어보라고 한다. 이건 정말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해보라. 북에서 어떤 사람이 서울이나 해외에 있는 우리들에게 찾아와서 우리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다고 한다면 과연 편안하게 무엇이든지 물어보라고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한달의 월급 혹은 수입이 얼마며, 어떤 집에서 살며, 집세로 얼마가 나가고, 아이들 교육비로 얼마가 나가고, 차량 유지비에 보험비, 전기세, 수도세, 하수도세,인터넷 , 셀폰, 식료품비, 술값, 교통비, 사교비…. 그야말로 돈이 없으면 불가능한 이런 숱한 비용에 대해서 편안하게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이건 개인의 사생활과 관계되는 문제다. 돈을 많이 벌면서 쓰기는 적게 쓰는 사람이라면 조금 답하기가 편하겠지만 그래도 자신의 경제적인 세세한 사항을 밝히기를 좋아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래 이건 워낙 민감한 질문이고, 상대방에게 실례가 될 수도 있는 질문이기 때문에 수복동무에게 잠깐 더 이해를 구한다. “사실 북에 대하여 크게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 이렇게 북을 방문한 나도 북의 인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잘 모르는데 대부분의 남쪽 동포 혹은 해외동포들은 더더욱 북의 생활에 대해서 바로 알지를 못하고 있다. 매스컴에서 왜곡해서 보도하는 그대로 모두들 믿을뿐인데 그 보도란 것이 북의 잘하는 것은 거론하지 않고 못살고 배고프다는 소리만 주로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북의 인민들이 고생하고 살면서 형편없는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 나는 이번 여행을 하면서 보고 들은대로 글을 쓰고 바로 알려서 우리 조국의 통일에 이바지하려고 한다. 내가 어려운 것을 묻는 것이 아니고 북의 인민이라면 누구든지 알고 있는 것이지만 바깥에선 모르는 것을 수복동무가 좀 알려주면 좋겠다.”라고 말해주었다.


다시 수복동무가 “그렇다면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라고 나를 편안하게 해준다. 그래 바로 가장 중요한 질문부터 던졌다. 먼저 한 달 월급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으니 선양 목란각의 접대원과 비슷한 대답을 해주었다. 월급은 적지만 상금이 많다는 것이었다. 월급은 6천원인데 상금은 5만원 정도 된다고 했다. 둘을 합하면 한 달에 5만6천원이다.


이곳 호텔에서 일하는 시간은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보니 하루 일하고 하루 쉰다고 한다. 출근은 아침 일곱시에 해서 저녁때까지 일하고, 밤 12시에 잠든다고 했다. 그러니까 일하는 날은 종일 일하고 잠도 호텔에서 자고 그 다음날 아침에 교대를 하여 집에 가서 쉰다는 것이다.


어떤 주택에서 살고 있는지 물어보니 지금 아파트에서 부모님들과 함께 산다고 했다. 당연히 그 아파트는 국가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것이다. 아파트의 사용료는 들어보니 전기요금을 말하는 것 같았다. 수복동무 자신이 내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내는데 그건 너무 작은 금액이라 신경을 쓰지 않지만 대략 한 가구당 천원이 채 안된다고 한다. 수복동무의 수입에다 부모의 수입이 따로 있으니 그 사용료는 너무도 미미한 것이 확인된 셈이다.


그렇지만 북의 전기사정이 좋지 않은데 사용료가 적다해도 전기를 아끼면서 살지 않는가하고 물어보니 올해는 특별히 가뭄이 심해서 북이 수력발전에 의존해서 주로 전기를 생산하는데 전기가 부족하다면서 사용료가 적은 것에 상관 없이 평소에 종종 ‘적산전력계’를 보면서 절전을 하며 산다고 했다. 우리는 계량기를 잘 들여다보지 않는데 적산전력계라는 것이 우리의 계량기와 같은 모양으로 생겼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북에서는 전기도 함께 온 인민이 나눠서 아끼며 사용해야 한다는 의식이 인민들 가운데 잘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내가 선양에서 미리 예습한 것처럼 쌀과 부식은 국가에서 무료로 제공하는데 노동의 양과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들에 따라 그 양이 다르게 배당되며, 가족당 배당되는 만큼의 배급표를 받는다고 했다. 부식배급에 대해서 물어보니 예를 들어서 이번에 배추가 들어왔다고 연락이 오면 배급표를 받아서 퇴근시간에 가지러 간다는 것이다. 만일 그때 출장을 간다거나 해서 제때 가지러 갈 수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보니 그런 경우엔 다른 이웃이 받아온다고 말해준다. 부식의 공급에 대해서 더 상세한 부분은 이후 다른 글에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내가 묵은 평양호텔 객실에서 내다본 시가지 풍경


주택과 먹는 것은 이렇게 해결되었으니 의식주 가운데 이제 옷에 대해서 물어보니 옷은 주로 가게에서 구입하거나 농민시장에서 구입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주식이나 부식 외 옷가지와 생활필수품들은 주로 그렇게 시장에서 구입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한데 북에서 의식주란 말을 쓰지 않는 대신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해서 식의주라고 사용한다고 우리는 들어왔는데 장수복 동무의 말로는 의식주도 식의주도 잘 알아듣지를 못하더니 북에서는 그런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의식주란 책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이지 일상에서 그런 단어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는 것이다.


입는 것이야 요즘은 옷이 귀한 시절이 아닌데다 주택이나 먹는 것은 국가에서 해결해주니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의식주가 북부조국에선 개인적으로 염려할 필요가 없어서일까? 옷값이 싼 우리들은 먹는 것도 흔한 편이라 별로 걱정하진 않지만 주택 비용과 교육비나 그외 엄청나게 들어가는 비용들을 감당하기 힘들어 그런 것을 통털어 의식주 문제라고 부르는데 이곳 북부조국에선 주택도 교육도 무료에 의료도 무료이고 교통비도 싼데다 별로 크게 돈이 들 곳이 없어서 그런 단어조차 사라진 것인가?


물론 돈이 있으면 할 수 있는 것은 더 많아지겠지만 돈이 없어도 살아가는데는 별로 지장이 없는 사회다. 가족이 번 돈으로 사용하고 남는 돈은 저축해서 그것으로 필요한 전자제품도 최신형으로 구입한다거나 할 수 있겠지만 돈이 없다해서 집을 쫒겨난다거나 아이들 교육을 못 시키거나 헐벗고 굶주리지는 않는 곳이다보니 의식주 혹은 식의주란 말도 사라져가는 것인가?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는 좀 더 북을 알긴 하지만 직접 살아보지는 못했으니 아직 이곳 인민들이 얼마나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고 스스로 행복하다는 생각을 갖고 사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단지 이후에 만나게 된 인민들과 더 많은 대화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그들 모두가 살아가는 일에 별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산다는 것을 느꼈다고 할 수 있다.


평양대극장 앞의 포스터


내가 한가지 더 궁금해하던 것을 물어보았다. 북부조국 인민들은 도시의 사무실에서 일해도 정해둔 기간 동안 노동으로 봉사하기 위해 농촌으로 간다고 들었는데 그것에 대해서 말해달라고 했다. 수복동무는 ‘농촌지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보통 1년에 열흘 정도 농촌지원을 나가서 직접 농삿일을 거들면서 농촌생활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해보았는가하고 물어보니 벼농사와 옥수수, 고구마 농사 등 여러가지 일을 다 해보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농촌지원을 나가서 알게되었다면서 농촌엔 국가에서 무료로 뜨락또르등 농기계를 제공하며, 그것이 오래 되어 못쓰게 되어 폐기하게 되면 다시 제공해준다고 말해준다. 농촌생활에 대해서는 이후에 내가 직접 답사하게 되어 잘 공부하였으니 이후의 방문기에서 다시 자세하게 쓰게 될 것이다.


내가 궁금해하였고 가장 알고싶어한 북부조국 인민들의 생활에 대해서 수복동무와 거의 대화가 끝나갈 무렵에 휴게실에 손님들이 찾아왔고 내 질문도 거기서 마치게 되었다. 사회주의 국가인 북에서 인민 각자의 월급이나 수입은 내가 인터뷰한 평양호텔 직원인 수복 동무보다 노동자들이 좀 더 대우를 받는 세상이었다. 그래도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인 주택과 식료품이 제공되고 교육과 의료를 비롯한 여러가지 복지정책이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주어진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내가 모든 사람들 만나서 물어보고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이후 농장과 공장을 방문하면서도 비슷한 질문을 던져서 대답을 들은 것으로 고려해볼 때 대부분의 인민들의 생활은 대략 비슷한 수준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특히 고난의 행군이 끝난지 10여년이 된 지금 의식주 문제가 해결된 상황에서 북부조국의 인민들은 주어진 제도와 생활환경에 맞춰서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있고 그 안에서 의식주 걱정 없이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보여진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염려와 걱정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이 부분은 이후에 북부조국과 잘 대비해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몇가지 기본적인 질문을 미리 던져본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의 현실이 과연 이 사회가 민중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인가?  왜 우리는 한시도 걱정과 근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일까?  과연 우리의 정치체제는 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정치인가?  그런 정치를 정말 한다면 그런데도 우리가 걱정과 근심 가운데 살아야 할까?  지금의 정치제도가 우리에게 걱정과 근심이 사라지지 않게 만든다면 그래도 그것이 민주주의가 맞는가?  민주주의가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을까?


내가 떠나오던 날 잘 있으라는 인사를 수복동무를 찾아가 했는데 ‘선생님, 오늘 가십니까? 이제 언제 오십니까? 앞으로는 자주 오세요’라고 말하며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의 불편했던 질문에 서슴없이 대답해준 평양호텔 5층 휴게실의 장수복 동무에게 이 글로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20     14-11-05

 

학교와 사회는 똑같은 곳 (25년 전의 여중학교 방문)


새벽 4시 넘어 내가 잠이 깨면 대부분 동시에 일어나신 노길남 박사님은 컴퓨터 앞에 앉아 민족통신에 기사를 올리거나 어제 올린 기사를 살펴보는데 오늘은 내가 조금 늦게 일어나면서 바로  기침이 콜록콜록 나온다.  같은 방에 묵으면서 방 안에서는 나를 위하여 절대로 금연을 하기로 하셨는데 잠깐 일에 열중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담뱃불을 붙이신 모양이다.  아이구 미안하다시며 얼른 담뱃불을 끄고는 창문을 여신다.  평소 일할 때는 줄담배를 태우신다는데 그래도 나 때문에 많이 줄이게 되었다고 내가 편하도록 말씀하신다.  나도 왠만하면 그냥 편안하게 태우시라고 하면 되겠지만 담배연기를 마시고 나면 당장 목에 담이 차고, 조금 심하면 감기가 걸리거나 기관지염을 앓게까지 된 전력이 있어 나와 띠동갑이 되는 대선배님이지만 어쩔수 없어 담배를 자제해주실 것을 부탁드린 것이었다.


 나와 같이 한 방에 묵지 않고 따로 방을 얻었으면 박사님은 더 편안하게 지내셨겠지만 북에서 머무는 동안의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서 불편함을 감수하고 같은 방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사실 나로서는 그 바람에 북을 62번째 방문한 통일운동의 대선배와 같이 지내게 되어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배우는 것이 많았고, 필요한 사항을 미리 알려주셨는가하면 내가 궁금한 것은 바로 질문할 수 있어 이번 여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 나의 이번 여행의 목적은 유명한 건물이나 관광지를 찾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여행은 이미 25년 전에 방문했을 때 충분히 보았으니 이번엔 북부조국의 제도와 인민들의 생활에 대해서 되도록이면 깊이 공부해보려 한 것이니만큼 노 박사님이 민족통신 기자로서 여기저기 취재를 하는 곳에 나 또한 함께 동행하여 듣기도 하고 질문도 하며 답을 구했다.   한편 때로는 내가 방문하기를 원한 곳을 찾게 되어 노 박사님이 그것을 취재하기도 하였으니 이번 여행은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여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도 미리 세수하고 준비했다가 어김없이 6시가 되자 호텔을 나와 아침 산책을 나선다.  아직은 이른 아침이라 약간의 새벽안개가 남아 있지만 참 좋은 날씨다.  먼저 대동강으로 향하여 전날과는 반대로 남쪽 방향으로 걷기로 했다.  입구에는 여전히 어제처럼 수많은 여성들이 아침체조를 하는가하면 그냥 열심히 걷는 사람들도 많다.  저멀리 양각도호텔이 마침 떠오르는 아침햇살에 안개속에서 드러나면서 물그림자를 비춘다.  주로 남한에서 북을 방문하면 저 호텔에서 묵게 된다고 하는데 수십 층 높이의 엄청나게 큰 현대식 건물로 보인다.


아침 일찍부터 운동을 하러 나온 평양 시민들





이쪽에도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강가의 움푹하니 패인 곳엔 특별히 고기가 잘 물리는 곳인지 진을 치고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데 그 모습들이 아주 진지하다.  저 강태공들은 우리보다 한참 더 일찍 날이 새기 전부터 이곳 낚시터로 달려나왔으리라.   일출에 그 모습이 너무도 보기 좋아 사진으로 남긴다.  좀 더 걸으니 따로 줄낚시를 하는 어른이 8개의 낚싯줄을 드리우고 입질을 기다리고 있어 잠시 대화를 나누는데 입질이 온다.  역시 이 분은 낚시 경험이 많으신지 놓치지 않고 입질이 세게 올 때 줄을 탁 채어서는 슬슬 잡아당기니 작은 손바닥만한 붕어 한 마리가 올라온다.  



인근에 여학생 넷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는 노 박사님이 다가간다.  중학생들인데 모두 가까이 사는 친구들이라 아침 산책을 나왔다고 한다.  각자의 옷차림도 다양해서 오늘 학교에 안가느냐고 물어보니 이미 방학이 끝나서 개학을 했기 때문에 학교가는 날이라면서 이제 곧 집에 가서 아침 먹고 교복으로 갈아입고 8시에 등교한단다.   그 중 한 학생에게 이담에 커서 무슨 일을 하고싶은가하고 물어보니 교원이 되고싶다고 한다.   이곳 북부조국에서 교원이 된다면 참 보람있게 가르칠 수 있으리라.  나라에서도 교원들을 귀하게 대접하기에 전날 전국에서 수많은 교육자들을 평양으로 초대하여 대회를 갖고는 옥류관에서 점심을 들게 하는 풍경을 보았지 않은가?  하긴 이곳에서 는 어떤 직업이라해도 모두 인민을 위해서 복무하는 것이니 그 일이 귀하고 보람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친구들과 대동강에 새벽산보를 나온 여중학생들


나도 젊은 시절에  학교 선생님이었던 아버지처럼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었고 그 길을 걷다가  한국에서 편히 공부를 계속하며 살 수 없어 이민자가 되어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미국에 살면서 아무런 보수 없이 몇 년 동안 주말마다 한글학교 교감 선생님으로 일하며 아이들을 가르쳐보았으니 아예 선생님이 되어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래 남한에서 후세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더라면 내 삶은 어떠했을까하는 생각을 종종 해보았다.  분명히 좋은 선생님이 될 수는 있었겠지만 선생님으로 평생 살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한때 교직을 잃은 선생님들이 많았는데 나도 그렇게 된 선생님들 가운데 들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내 어렸을 적의 친구들 가운데 몇몇은  아직도 교직에 있으면서 지금은 교장선생님이 되어 근무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나 또한 두 갈래 갈림길에서 다른 한 길을 선택했으면 이렇게 교장선생님이 되어 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었다.  인생은 짧고 세월은 참으로 빠르다.  내게 남은 시간을 나름대로 더 보람있게 살아가는 것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리라.  바로 오래 전에 내 삶의 목표로 세웠던 통일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나의 남은 삶을 보람있게 사는 것이리라. 


여학생들과 헤어지고는 생각해보니 이번 방문에 따로 학교를 방문할 계획이 없는 것이 참 아쉽다.  그래 내가 25년 전 평양축전에 참여한 미주 지역의 동포들과 함께 평양 시내의 한 여자중학교를 방문한 것이 떠오르고 그 기억을 더듬어서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것을 여기서 나눌까 한다.  


25년 전 평양의 한 여자중학교의 수업 모습


그날 우리들은 몇몇 교실에 들러 수업을 참관하였는데 한 교실에서 우리들을 환영하기 위해서 꽃다운 여학생들이 예쁜 공연복으로 갈아입고는 가야금과 손풍금 등 여러가지 악기를 연주하는가 하면, 여러 종류의 노래를 불러주었고 또한 율동도 보여주었다.  그 학생들이 전문적으로 음악이나 율동을 전공하는 것이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학교에서 누구든지 악기 하나쯤은 연주를 할 수 있도록 예능교육을 하기에 그 공연은 어쩌면 정식으로 무대에 올려지는 최상급의 공연과는 달리 북에서는 아주 평범한 공연이었는데 그런데도 나무랄데 없이 완벽한 공연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엔 ‘고향의 봄’ 노래를 서로 분단된 남북 동포들이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을 아쉬워하는 깊은 마음을 담아 울먹이며 불러주어서 우리 모두를 숙연하게 만들었었다.   


89년 평양축전때 우리를 위해 공연한 평양의 여중학생들


공연 후에 우리들은 학생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내가 아주 예쁜 모습으로 노래를 부른 한 여학생에게 나중에 공부를 마치면 어떤 직업을 갖고 싶느냐고 질문을 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그 학생은 자신은 농촌으로 가서 농삿일을 하겠다고 겸손한 태도로 말하는 것이었다.  무슨 이유로 그렇게 농사를 짓고 싶으냐고 하였더니 우리 인민들에게 필요한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는데 기여하기 위해서 농촌에서 일하고 싶다고 하였다.  


생각해보라.  평양이라는 북한의 수도에서 나고 자라서 좋은 중학교에서 공부하는  머리도 좋고 노래도 잘하는 예쁜 여학생이 자신은 학교를 졸업하면  살기도 편하고 모든 인민들이 살고싶어하리라고 우리가 여기는 평양에서 살려고 하지 않고, 조국의 식량생산을 위해서 농촌으로 가서 일하겠다고 할 때 그 사회 자체가 무엇을 중요시 여기며, 학교에서 후세들을 어떤 사람으로 자라나도록 교육하고 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지 않은가?  우리는 그런 똑똑한 학생이라면 무엇을 해도 평양에서 할 일이 있을텐데 무엇하러 고생이 되는 농촌으로 가려고 할까하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 북부조국의 학생들은 내가 나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나라를 위하여 어떤 보람된 일을 하면서 봉사하는가를 삶의 가장 귀중한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 학생이 당시의 11년 의무교육을 마치고 농업대학으로 진학하였을 수도 있고 전문학교를 거쳤거나 아니면 바로 농촌으로 원하던대로 가게 되어 일하게 되었을 수도 있으리라.  그런데 그때쯤엔 북부조국이 제 2의 고난의 행군 시기로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되었으니 어쩌면 그 학생의 농촌행은 아주 옳은 선택이었을 수도 있지 싶다.   무엇보다 식량이 부족하여 온 나라가 어려운 상황에서 그 학생은 일선에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여 인민을 배부르게 할 수 있을지를 고심하며 온갖 노력을 다했으리라.  


인간이 배고플 때는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며, 무엇보다 식량을 생산하는 일이 가장 값진 일이지 않은가?  그렇게 그 학생과 동료들이  20여년을 함께 그 어려움을 헤쳐나왔다면 그  결과 지금 북부조국이 식량을 거의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  북부조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우리 자본주의 방식으로 판단하고 재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 이 시기에도 평양을 떠나 아주 먼 농장으로 지원해서 가서는 사서 고생을 하지만 커다란 보람을 갖고 사는 어떤  중년의 남자에 대해서도 이후에 내가 소개하게 될 것이다.  내가 방문한 농촌에 실제로 젊은이들이 아주 많았던 것으로 보아 지금도 북부조국의 농촌은 청년들과 학생들에게 매력적인 곳이리라.  여기에 희망이 있지 않은가?  젊은이들이 모두 떠나버리고  피폐해져만 가는 남한의 농촌과 비교가 되지 않은가?


우리가 그 학교에서 떠나오기 전에 교장선생님을 만나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그 가운데 지금도 아주 뚜렸하게 남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학교와 사회가 다르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나 사회에 나가서 일하는 것이 모두 똑 같다 이말입니다.  학교에서 이것이 옳다고 가르치면 사회에서도 그것이 옳으니 그대로 하면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인가?  마치 남한의 학교와 사회의 다른 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말한 것 같았다.  이곳에선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 적응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배운 그대로 행하면 된다는 것이다.  내가 앞 글에서 북의 연극이나 예술작품에서 일어나는 일과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북부조국은 이론과 실제가 서로 맞닿는 사회인 것이다.


25년 전 우리들을 위해 노래와 춤을 보여준 평양의 여중학생들


내가 다녔던 실업계 고등학교 시절에  졸업 몇 달 전에 먼저 취업을 했던 급우들이 학교로 찾아오면 종종 이런 말을 했다.  “학교와 사회는 다른 곳이다.  학교에서 하던대로 사회에 나가서 하면 절대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   내가 처음 그 소리를 듣고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걸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남한의 그 시절은 부정부패가 만연하던 때였으니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자면 그것에 맞춰서 살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었으랴.  그러니 그때만해도 덜 오염되었던 학교와 사회는 천지 차이였고, 이왕 사회에 나왔으면 그 사회에 재빨리 적응하지 않는다면  낙오자가 되기 마련이니 거기 맞춰서 잘 처신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회에 먼저 나간 친구들의 말이었다.   


그런 그 시절의 학교와 사회에서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어쩌면 이미 학교에서 학생들은 더 심한 경쟁을 겪으면서 극도의 개인주의자로 키워져 이후에 사회에 나가면 더더욱 심한 경쟁 가운데서도 나 혼자만이라도 살아남는 일에 일부 똑똑한 학생들은 잘 적응하게 되리라.   그런 학생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학생들은 정의를 추구하지도 않고, 바른 정치에 대한 관심도 갖지 않는데다 사회의 온갖 비리와 부조리에도 눈을 감고 있다.  예전의 대학생들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그래 이제는 학생들도, 근래에 학교를 졸업한 사회인들도 분단된 조국의 통일마저도 내 알바 아니라고 모른척 외면하는 것이다.  


대동강변 공원의 잔디밭.  고향의 강아지풀이 생각나 사진으로 남김


우리의 2세 교육이 자본주의에서도 가장 추악한 얼굴을 한 신자유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을 유지하고 그것에 부합하도록  되어지는데 이대로 둔다면 교육자체도, 인격체인 학생들도,  그리고 그렇게 교육을 받은 학생들로 이뤄지게 될 이 세상 모두도  망치게 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아무 희망없는 세상이 되고  말 것이다.  하루속히 교육도 정상을 찾아야 하고 세상 또한 1% 의 부자들과 재벌들의 세상으로부터 참 민중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되어야만 한다.  어떻게 지금의 제도를 바꿀 수 있을지 남부조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리라.  사방에서  매스컴을 통하여 온 민중이 신자유주의로 세뇌당하고, 또한 북한을 모략하는 선전에 끊임없이 세뇌당하고 있음을 깨닫고, 과감하게 진실을 추구하고 모두가 통일을 꿈꾸며 통일운동을 확산시키며 살아가는 참 민중이 되고, 행동하는 시민이 되는 것이 한가지 방법이 아닐까 한다.



25 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21  14-11-09


자존심 강한 인민들과의 만남


강을 따라 제법 한참 걸었나보다. 이제 대동강 가운데 양각도호텔은 지척의 거리에 있다. 윗쪽의 큰길로 올라가서 호텔 방향으로 되짚어 돌아오기로 했다 . 잔디밭엔 강아지 풀이 무성하다. 이게 봄철에 고향에서 보던 강아지풀인양 반가워서 사진으로 남긴다. 출근 시간이 되어가니 길거리엔 사람들이 제법 많아졌다.


보다 한적한 곳에서 대어를 기다리는 낚시꾼들


호텔 방향으로 돌아가며 걷다보니 길가에 공원이 있어 그리로 들어간다. 평양대극장 인근의 공원이다. 우리가 묵는 평양호텔 맞은편에 엄청난 규모의 평양대극장이 있는데 김미향 안내원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로 김 주석이 한참 바쁘던 전쟁의 와중에 이미 지금 극장이 서 있는 그 자리를 인민을 위한 대극장 터로 미리 정해두었다가 전쟁 후에 건설했다고 한다. 김 주석의 새로 세워진 나라에서의 문화와 예술에 관한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평양대극장은 몇 층 높이의 대형 건물이고 조선식의 지붕을 올린 아주 아름다운 건물이다.


평양대극장의 앞 모습

평양대극장의 옆과 뒷모습. 사진의 오른편에 공원이 있었다.


나무들로 가려진 공원속 길을 걷는데 길이 꺾이면서 공원벤치에 세 할머니와 아이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띄자 노 박사님이 사진부터 한 장 찍고는 다가간다. 사진을 찍는 것을 정면으로 그분들이 보셨기에 편안하게 아침 산책을 나오셨다가 그분들은 좀 어이없어하였고 막상 사진을 찍은 박사님도 바로 몇 미터 앞의 그분들을 바로 마주치게 되었으니 아주 당황한 모습이다. 그래 바로 자신을 소개하면서 할머니들이 기분 나빠하지 않도록 애를 쓰신다.



정말 허락 없이 다른 사람들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들도 평소에 사진을 찍힐 때는 미리 옷차림도 단정히 하고 되도록이면 웃는 얼굴로 사진이 잘 나오기를 바라면서 임하는데 평화롭게 평상복 차림으로 아침 일찍 산보를 나왔다가 갑자기 사진을 찍히게 되는 사람들의 입장으로서는 제법 심각하게 그들 개인의 사생활이 침해당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진을 찍는 사람의 의도가 아무리 통일운동을 위해서 북부조국의 인민들의 이러저러한 모습을 찍는다고 하지만 찍히는 사람의 입장으로는 찍는 것을 허락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허락한다해도 이왕이면 잘 찍히기를 바랄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되도록이면 좀 멀리서 얼마 정도의 거리를 두고 찍히는 사람들이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상황에서 사진을 찍거나 아니면 미리 말을 먼저 걸어서 대화를 시작하고 간접적으로라도 예고를 하면서 사진을 찍곤 하였기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번 일은 좀 돌발적으로 발생했던 것이다.


한 할머니가 왜 사진부터 찍느냐는 항의를 하시다가 다행히 할머니들이 아침에 손주와 나란히 앉은 모습이 너무 평화롭게 보여서 사진부터 찍게 되었다면서 민족통신의 기자로 통일운동을 위해 취재차 오셨다는 박사님의 설명을 듣고는 화를 내지 않고 마음을 풀고는 차차 서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할머니들은 서로 친구 사이로 일찌감치 운동삼아 산보를 나오셨다고 했다. 모두 입을 모아 살아생전에 통일이 이뤄지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하신다. 대화가 되니 이젠 마음놓고 내가 사진을 찍는다.


왼편의 할머니에게 손녀가 몇 살이냐고 물으니 3살이라고 한다. 이름은 연아다. 이제 우리가 미국에서 방문한 동포라는 것을 알고는 서로 대화가 통한다고 여긴 내가 연아의 할머니에게 먼저 이해를 구했다. “원래 우리 풍습에 오랜만에 친한 친구집에 가서 그 집의 귀한 아이들을 보면 그냥 인사만 받지 않고 용돈을 하라면서 주머니에서 단돈 얼마라도 주는 풍습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북부조국을 방문해서 이렇게 아이들을 가까이서 개인적으로 만나는 일은 처음입니다. 해외에서 동포가 이렇게 오랜만에 조국을 방문해서 귀한 이곳의 후세를 보고 반갑고 사랑스러운 마음에 주는 아주 자그마한 성의인데 막상 아이에게 주려고 하니 자존심이 강한 북부조국의 인민들이 내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절대로 받지 않으려 할 것 같습니다. 아이에게 여기 중국인민폐 10원밖에 안되지만 꼭 주고싶은 제 마음을 먼저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니 세 할머니가 아무도 선뜻 대답하지 않고 잠깐 생각해보는 눈치였다. 그래 재차 내가 조금 더 설명을 하니 곁의 다른 할머니가 괜찮다는 표정을 먼저 지은데다 연아 할머니도 마지 못해 허락하는 것 같아서 연아에게 그 돈을 쥐어주었다. 세살 꼬마가 무슨 돈을 알랴. 그냥 새로 생긴 장난감으로 알고는 손에 쥐고 조물락 거리거나 흔들뿐이었다.



아무튼 노 박사님과 내가 이 세분의 할머니들을 만나 서로 자초하여 긴 설명이 필요한 상황을 만든 것이다. 허락없이 사진을 찍은 것과, 요즘은 북부조국에서는 다른 집의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는 풍습이 없는지 모르겠으나 모르는 사람인 내가, 그것도 미국이란 원수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 아이에게 용돈을 주겠다고 한 것은 편안하게 산책을 나온 분들에게 참 복잡한 상황을 만든 것이 아니랴? 전자는 개인의 사생활과 관련해서, 후자는 내가 아무리 내 손녀같은 북부조국의 어린이에게 용돈을 주었다고 하지만 그걸 잘못 이해하면 북의 인민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도 있는 일을 벌인 것이다. 아무튼 두가지 모두 부드럽게 받아준 할머니들이 그 부드러운 인상과 같이 이해하는 마음 또한 넓어서 다행한 일이었다.



연아의 할머니와 헤어져서 조금 걷는데 다시 세 사람의 할머니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젠 나도 노 박사님도 선뜻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는다. 북의 여느 인민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하니 이분들도 통일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연로보장으로 편안하게 지내시느냐고 물으니 “70 넘은 노인들이 대동강에서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자유로운 나라인데 듣자하니 남조선에서는 우리가 며느리에게 쫒겨나서 갈데가 없어 대동강에 가서 시간으 보낸다고 하더라”고말씀하신다. 내가 처음 듣는 이야기지만 남한의 매스컴에서 이런 식으로 거론한 적이 있을 수도 있으리라 싶다. 북부조국을 있는 그대로 방송하지 않고 언제나 왜곡하여 사람이 살기 힘든 곳으로 보여주는 것이 일상이니 저 정도로 비약하여 방송하는 것은 오히려 약과가 아닌가?


산책길에 우리를 반겨 맞고 대화한 세 할머니들과 기념사진


다시 세 할머니들과 헤어져서 몇 발짝 걷는데 연아가 저 뒤쪽에서 내가 준 돈을 짤랑짤랑 흔들며 우리 있는 곳으로 오기에 노 박사님이 귀엽다면 번쩍 안아 든다. 그런데 막 우리와 대화했던 한 할머니가 연아 손에 쥐어진 지폐를 보고는 이렇게 돈을 받으면 안된다고 다시 연아에게서 돈을 받아 돌려주려는 것이 아닌가? 이젠 나도 절대로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다. 이미 연아 할머니에게 어렵게 허락까지 받았는데 다른 할머니가 그걸 돌려주도록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노 박사님도 연아 손을 감싸쥐며 돌려받으면 안된다는 모습을 취한다. 내가 다시 그 할머니에게 힘들지만 상황을 설명해드리니 마지못해 이 할머니도 수긍을 하는 눈치다.




아무튼 귀여운 연아를 통하여 25년만에 북부조국을 다시 찾은 내가 북의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마음을 표한다는 것이 잘못 오해받게 되면 자존심 강한 인민들의 마음을 거스르게 할 수도 있으리라고 처음부터 내가 예감한 것은 기우가 아니었던 것이다. 북부조국 인민들의 그 때묻지 않은 마음과 강한 자존심을 내가 높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호텔로 돌아와 아침식사를 위해 식당에 들어가니 어제 우리가 앉았던 같은 자리에서 매일 아침식사를 하게 된다고 한다. 어제 아침에 노 박사님이 식사를 하고는 벗어둔 잠바가 의자에 그대로 걸쳐 있다. 오늘 아침 산책을 나가면서야 그걸 식당에다 벗어두고 나온 것을 기억하셨는데 내가 접대원에게 그 옷을 왜 챙겨두지 않았느냐고 물어보니 당연히 오늘 다시 오실 것이라 여기고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절대로 물건을 잃어버릴 수 없는 곳이기에 그냥 두면 주인이 찾으러 온다는 이야기다. 북부조국이 어떤 곳인지를 또 하나 배운다.



노 박사님이 말씀하던 문근영을 닮았다는 접대원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어제는 쉬는 날이었다면서 오랜만에 뵙는다며 박사님께 참 반갑게 인사를 한다. 아직 20대 초반일 듯한 앳된 모습이다. 이름표를 보니 김현순 접대원이다. 남한의 문근영이 나오는 드라마는 내가 몇 편 본 적이 있는데 두 사람의 분위기가 참 비슷하다. 말씨도 예의 바르고 음식을 내오거나 빈 그릇을 챙기는 일에도 작은 소리도 내지 않고 품위를 갖춘 모습으로 일한다. 물론 이곳의 모든 접대원들이 김현순 접대원과 마찬가지로 단정한 차림에 절도있는 걸음걸이로 품위있게 봉사를 한다.


현순 동무와 박사님이 나란히 기념사진을 찍게 하였다. 우리가 어제 연극을 보았기에 박사님이 현순 동무도 연극공연을 보러 가느냐고 물어보니 직장에서 동료들과 함께 가기도 하고, 가족들과 함께 공연을 보러 가기도 한다고 답해준다. 연극표가 우린 아주 비싼데 얼마나 하느냐고 하니 인민들은 백원 정도로 구입할 수 있다 한다. 이건 엄청나게 싼 값이다. 표는 극장에 가서 사느냐고 물어보니 미리 여기저기서 표를 살 수 있다고 답해준다. 우리가 머무는 동안 이후에 아침 식사때면 현순 동무가 종종 인사하며 봉사해주었다.


위의 두 사진은 남한의 여배우 문근영의 모습이다.


문근영에 대해서 내가 잠깐 찾아보니 영화배우로 크게 성공하기도 하였지만 그 성공으로 번 수입을 ‘기부천사’로 불릴 정도로 평소에 다양한 기부와 후원활동을 하는 배우다. 이미 오래전에 10억이 넘는 돈을 기부하여 역대 익명의 개인 기부자 가운데 최대의 금액을 기부하였다고 하니 김현순 접대원이 문근영을 닮았다고 우리가 말해준 것은 그 개인으로서도 알고보면 참 영예로운 일이라 여겨진다. 북부조국에서야 지금은 나라에서 복지를 책임지니 인민 개개인이 사회단체에 기부하는 문화가 어떠한지 잘 모르지만, 남한의 복지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숱한그늘진 곳에는 문근영 배우처럼 뜻있는 연예인들과 독지가들이 기부하는 것이 크게 힘이 될 것이니 이들이 얼마나 귀한 일을 하고 있는가.


통일이 되는 날, 마음씨 고운 문근영 배우가 이곳 평양호텔에 찾아와 그녀를 닮은 김현순 접대원을 동생으로 삼고, 두 사람이 반갑게 마주할 수 있기를 꿈꾸어본다.



25 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22   14-11-12


국가선물관을 답사하며 인민의 마음을 읽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시간이 되어 호텔 로비로 내려오니 안내원 미향 동무가 우리를 반겨준다.  아침산책을 함께하지 못해서 죄송하다는 미향동무에게 우리들이야 여행중이라 새벽잠이 없어 일찍 일어나서 움직일 수 있지만 할 일이 많으신 분이니 아무 걱정 마시라고 말해주면서 호텔 밖을 나오니 운전사 영호 동무가 주차되어있는  버스 사이로 우리가 나오는 것을 멀리서 보고는 얼른 차를 몰고 온다.  오늘 오전은 국가선물관으로 가는 일정이다.


차가 평양교예극장을 지난다.  교예극장은 내가 한 번도 찾은 적이 없지만 여러번 책을 통하여 읽은바 있는데 우리의 서커스에 해당하는 공연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서커스 단원들이 살아가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내가 어렸을 때 살던 지역에 찾아와 가설극장 천막을 치고 그 안에서 저녁마다 서커스 공연을 하다가 때가 되면 다른 곳으로 철새처럼 옮겨가던 서커스단이 떠오른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광대들을 비롯하여 노래하는 가수들과 여러가지 묘기를 보여주는 젊은 남여가 있었고 예쁜 소녀도 있었는데 그들은 시골에선 보기 어려운 연극까지 공연했었다.   


거대한 규모의 평양교예극장


그 서커스 단원들은 모두가 어려웠던 그때 그시절에 얼마나 많은 애환과 함께 살아갔던가?  지금 시절의 연예인들에 대한 대우와는 판이하게 조선시대 재인들이 멸시받던 시절로부터 일제시대를 거쳐 산업화가 진행되는 동안 그들은 계속해서 빈궁과 굶주림 속에 싸우며 그 일을 계속해온 것이다.   한데 경제는 더욱 발전해나갔지만 그들은 더 이상 존속할 수가 없었나보다.  생각해보니 텔레비젼의 등장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자본주의의 속성상 단원들을 이끌고 운영을 계속하려면 수입이 남지 않으면 아무리 그들의 재능이 뛰어나다해도 우리 세상에선 살아남을 수가 없다.  그래 그 애환 많던 서커스 단이 지금은 모두 사라진 것같다.  한데 북에선 그들이 마음껏 기량을 발휘하고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지원하며, 좋은 공연을 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배려를 해준다고 한다.  저렇게 멋진 전문 극장까지 오래전에 지어놓고 온 인민의 사랑을 받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것은 증명되리라.  홍정자 여사님의 글로 1996년 한국의 ‘말’지에 게재된 ‘평양교예단을 찾아서’라는 글에서 북의 교예단에 대하여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이후에 내가 그 글을 널리 알려줄  기회가 있길 바란다.





즐비하게 지어진 아파트들이 차창으로 보여서 여기가 어딘가하고 물어보니 지금 우리가 지나는 곳은 평양 중구역의 살림집들이라 한다.   그리고 바로 철길 건너편은 평촌구역이라고 한다.  예전부터 인민들의 살림집들이 많이 모여있던 곳으로 지금은 새집들이 많이 들어선 모습이다.

잠시 후 창 밖으로 만경대 학생소년궁전 건물이 보이는데 아름답던 그 건물이 한참 공사중이다.  무슨 일인가해서 물어보니 김정은 원수께서 지시하여 새로 개건보수중이라고 한다. 내가 89년 평양축전때 여길 찾았었다.  수많은 소년소녀 학생들이 건물 여기저기에서 각자의 취미와 재능을 익히고  발휘하던 모습이 선하다.  8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너무도 잘 지어진 아름다운 건물이었는데 이렇게 세월이 흘러 개건보수를 대대적으로 하게 되었나보다.  저 공사가 끝나고 나면 예전보다 더욱 훌륭한 시설을 갖춘 건축물로 되어 북의 아이들이 마음껏 사용할 수 있으리라.  북은 또한 진정으로 아이들을 위한 나라다.  서로의 경쟁에 찌들지 않고 마음껏 뛰놀면서 스스로의 재능을 키워갈 수 있도록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나라다.  우리가 배울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개건보수중인 만경대학생소년궁전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을 지나니 한적한 농촌 마을이 여기저기 펼쳐져 있고 그 사이로 주욱 곧게 뻗은 길이 열리는데 저멀리 웅장한 모습의 국가선물관 건물이 산 기슭에 자리한 것이 보인다.  차를 내리니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김설이 해설동무가 우릴 맞아 국가선물관에 대해서 설명해준다.  



북부조국엔 그동안 세계 여러 나라의 국빈들로부터 수많은 값지고 진귀한 선물들을 보내왔는데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에 그 선물들은 잘 보존되어 있다.   이곳 국가선물관은 2012년 8월 1일에 개관하였는데 본관의 연건축 면적은 6,465 평방미터이고 현재 8,400여 점의 진귀한 선물들이 진열되어 있다.  위치는 만경대구역 룡악산에 있고, 모두 21개의 전시실이 있다.


육중한 정문을 통과하여 들어서자 먼저 신발에 덧신을 신게 한다.  김설이 해설동무의 설명이 이어진다.   1층과 2층은 북부조국 인민들이 정성으로 올린 선물들이 진열되어 있고, 3층은 해외동포들이 고국을 찾으면서 올린 선물들로, 그리고 4층은 지금의 김정은 원수에게 조선민족이 올린 선물을 진열해놓았다고 한다.



아주 아름다운 궁전처럼 잘 지어진 열린 공간에서 처음 안내된 방에 은은한 조명아래 김일성 김정일 두 지도자의 조상이 모셔져있다.  이곳 국가선물원을 찾는 인민들의 두 지도자에 대한 지극한 존경과 간절한 사랑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으리라.  

 

선물관 내부의 벽과 바닥이 아주 고급 건축재를 사용하여 단장되어 있어 이 자재들은 모두 어디서 구해온 것인가하고 물어보니 ‘북의 천리마 타일공장’에서 직접 생산한 것으로 지금 북부조국은 이런 아름다운 고급 건축재료들을 직접 생산한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 타일이라고 부르기엔 대리석에 가까운 아름다운 건축재료였다.


국가선물관 내부에선 사진을 찍을 수가 없어 내가 직접 본 그 진귀한 선물들을 모두 기억할 수도 없고 제대로 묘사할 수도 없다.  너무 많은 것들을 짧은 시간 동안에 보는 것은 보는 순간의 느낌만 있을 뿐 이후에 기억으로 남아있을 수가 없기도 하다.  사진이란 것이 그래 얼마나 우리의 기억을 되살리는데 유용한 것인지를 다시금 인식하게 된다.  내가 진열된 선물들을 보며 간단하게 메모한 것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그 일부를 더듬어볼 수밖에 없다.  


먼저 북부조국 인민들의 나라와 지도자에 대한 간절한 사랑을 수많은 선물로 표현한 것 가운데 내가 메모한 극히 일부분을 소개하고, 이후에 수많은 해외 동포들과 남한의 정치인들과 경제인들이 올린 선물 가운데 내가 메모한 아주 일부분만 여기에 옮긴다.


김주석과 함께 항일투쟁에 나섰던 김책의 가족들이 올린 ‘미래의 우리 장군’이란 제목의 선물.


북에서 귀하게 여기는 쌍둥이들을 상징해서 옥돌공예로 만들어 김정은 원수에게 올린 ‘세쌍둥이’ 작품과, 모두 9.5 톤의 엄청나게 대형으로 제작된 ‘장군옥바위’라는 작품.


2004년 4월 15일에 올린 ‘금도금 모형의 독도’


김혁과 김일성 주석의 항일혁명 시절의 사진을 형상화한 수정공예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팔걸이 의자


모두 300 Kg의 조개껍질로 만든 작품인 ‘포경선’


 ‘철쭉무이’란 작품엔 김주석의 말씀이라며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철과 기계는 공업의 왕입니다.  동무들은 왕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단군릉 전경의 모형인 ‘단군상’


2009년 10월 22일에 인민들이 최초로 김정은 원수에게 올린 선물인  ‘갈매기털 방석’



최홍희 선생이 올린 ‘태권도 연맹 인가패’


서울의 어떤 동포가 올린 ‘권총사진 위의 고향집’ 작품


오스트레일리아 동포가 올린 ‘천연추출물’


미국 켈리포니아  김운하 동포가 올린 ‘두 마리의 말 시계’ 


미국에서 북부조국 가족찾기 등 공식적으로 대행하는 재미동포연합회에서 올린 ‘수정그릇’ 외


1999년 남한의 333 가구가 올린 선물들 가운데 66점 전시


정주영 선생 (선생으로 북에선 표현함)이 올린 여러가지 선물


김대중 대통령의  ‘나전칠기’, ‘닭과 돼지 형상의 금은 공예품’


노무현 대통령 부부의 ‘자기차 그릇 일식’


2007년 10월 3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장수를 기원하며 노무현 대통령 부부가 드린 ‘라전병풍’


2002년 5월 13일 박근혜 방북시 올린 ‘귀중품함 (작은 보석함)’


72년 12월 1일 박정희 대통령의 ‘은차일식’


나와 함께 동행해서 선물들을 감상하던 민족통신의 노길남 박사가 올렸던  ‘코끼리상’ , 노 박사님은 김정은 원수의 척척척 힘찬 발걸음을 연상하여 코끼리 상을 올렸다고 말씀하신다.



여러 전시실을 둘러보고 선물관을 나와서 다시 김설이 해설동무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내가 따로 물어보지 않았지만 이곳 국가선물관을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일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습이다.  선물관을 보고난 후 참 여러가지 생각들을 하게 된다.   정성으로 선물을 바친 북부조국 인민과 이렇게 선물관을 건축하여 그 선물을 공개하는 북부조국에 대해서 떠오르는대로 여기 적어본다.




첫째는, 북부조국 인민들의 지도자에 대한 신뢰와 존경과 사랑이다.  누가 인민에게 시켜서 저런 숱한 선물들을 바치도록 하였다면 얼마나 큰 불평이 쏟아져 나왔을까?  우리가 역사에서 배운대로 왕조시대의 민중은 수많은 세금과 부역에 시달려야 했었고 그런 부담과 고통은 결국 항쟁으로 이어졌던 것을 기억한다.  북부조국 인민들 그 누구도 선물을 바치도록 강요받은 일은 없을 것이다.  오직 자신이 살아가는 오늘의 조국이 있게해주고 인민 각자에게 태어날 때부터 조국이 주는 복지와 배려, 그리고 그것이 있도록 해준 지도자에 대한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저 귀한 선물들을 정성으로 준비하여 올리게 한 것이다.  


내가 쓰고있는 북의 현실에 대한 글에 대하여 가끔 믿기 어려워하는 분이 있는 것 같다.  여기 선물을 바친 사람들의 마음도 믿기 어렵다면 우리 세계에서 자신이 믿는 종교에 따라 헌금하는 것을 떠올려보라.   자본주의 시대에 돈이 제일 귀중한데 신앙에 따라 때로는 많은 돈을 바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떠올려본다면 북부조국 인민들의 그 간절한 마음 또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종교에 따른 신앙은 타인이 본다면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일 수 있는데도 믿고 정성껏 헌금을 하는데 우리가 그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는가?   반면에,  여기 북부조국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민들은 생활 속에서 지도자들이 인민에게 준 정책과 복지를 매일의  삶 속에서 대하고 있지 않은가?   한마디로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그동안 함께 살아오면서 보고 겪었던 그들이 지도자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이 훨씬 더 쉽고 이해되는  일이 아닌가?  지도자에 대한 그런 간절한 마음을 북부조국 인민들은 모두 갖고 있는 것이다.


내가 국가선물관에 들어서면서  안내된 첫 방에 두 지도자의 조상을 세워두어 인민들의 간절한 마음을 표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썼는데 이제 그 부분 또한 이해가 되었으면 한다.  선물을 바친 일부 인민들을 비롯하여 따로 선물을 바치지 못한 대부분의 인민들이 이곳 국가선물관을 찾을 때 선물들만 주욱 살펴보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정성으로 선물을 올릴 만큼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그들의 지도자를 조상으로나마 대할 수 있는 것이니 그들에겐 그것이 행복이고 기쁨이 되는 것이다.   십자가가 없는 교회가 어디 있으며, 마리아상이 없는 성당과 부처님이 없는 절을 떠올릴 수 있는가?   그것처럼 북부조국 인민들의 깊은 마음이 서려 있는 국가선물관이 바로 이곳이니 지도자의 동상이 여기에도 당연히 있는 것으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25 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23       14-11-15


피흘려 이뤄낸 것을 지켜나가기 (노무현 대통령과 민중의 예)


내가 지난 호에 국가선물관을 방문하고 쓴  글에서  북부조국 인민들의  그 지도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진실한 것이라는 방문기에 이어서 그 부분을 조금 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북부조국 인민들의 지도자에 대한 무한한 존경의 마음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남한에서는 불편한 일이다.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살아있어 그렇겠지만 그 부분에 대하여 남녘의 언론으로부터   북에서는 무엇때문에 인민들이 지도자를 극진하게 모시는지에 대하여 설명하는 글을 내가 대한 적이 없다.  반면에 그것을 왜곡하고 거짓되게 표현하는 것은 자유롭기에, 그런 왜곡된 정보로 우리 주변은 가득하다.  그 왜곡된 정보의 홍수 속에 살다보니 북의 지도자 이름만 나오면 의도적으로 그것을 회피하거나 그렇게 왜곡시키는 자들의 입장과 동조하도록 우리의 두뇌는 스스로도 모르는 동안에 이미 프로그램되어 있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해설원이 해설을 마친 후 국가선물관은 '인민들의 충정의 집'이라고 했는데 지금에야 그 말이 이해가 된다.



북의 지도자에 대한 흠모와 사랑의 진실됨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잠깐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을 떠올려보길 바란다.   우리들은 어려운 정치환경 가운데 가까스로 훌륭한 지도자를 갖게 되어도 그 지도자에게 보내는 존경과 신뢰는 참 보잘것 없다.   그렇지만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의식있는 민중의 마음은 달랐다.  그분이 청와대에 있는 동안 물론 과도 있었지만 참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 가운데 북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가진 후 남과 북이 공동으로 발표한 10.4 선언은  6.15 선언에 이어 남북관계의 발전과 평화, 번영, 그리고 통일의 발판을 다지기 위한 선언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 일을 환영하였다.


그러다가 임기를 마친  1년 후에  고향에서 은둔하던 그분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자 온 민중은 비로소 그가 우리 시대의 참 지도자였음을 알아차렸다.  그의 영결식에 얼마나 많은 민중이 눈물을 흘렸고 노란 풍선은 온 하늘을 뒤덮었던가.  노무현 대통령의 ‘사람사는세상’ 구호대로  남한 전역과 지구촌 곳곳에 그 뜻을 기리는 사람들로 그룹들이 생겨났었고 지금 그 열기는 식어가고 있지만 사람들의 마음 속에 뚜렷이 새겨진 노무현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지 않은가? 




두 달 전 김해 봉하마을의 노무현 대통령 생가를 방문하였다.  내가 한국에 가면 꼭 방문하고 싶었던 곳이다.




나 또한 그를 기리고 본받아 살아가야겠다는 마음으로 이곳 시애틀에서 기존 조직인 ‘시애틀 촛불’을 ‘사람사는 세상을 위한 시애틀 모임’으로  동지들과 함께 만들어 숱한 활동을 펼쳐왔었다.  천안함 조작발표엔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다는 생각에 미주지역에서 가장 큰 활동을 펼쳤다.  백악관에 편지를 써서 보내고 수천 명의 기자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한시애틀 인터넷 사이트를 만들어 홍보해오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터무니없는 제주 강정 해군기지를 여러 단체들과 연대해서 반대하였고,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시간을 들여 SNS를 통하여 활동하다 이후 여러가지 사건들로 뒤범벅이 된 지금까지 조국의 민중과 함께 싸우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을 생각하면 마음 한 켠이 내려앉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린 참으로 귀한분을 지도자로 모셨고, 억울하게 그 분을 잃었다.

  


그런 연고로 뒤늦게나마 두어 달 전엔  봉하의 노무현 대통령 묘소를 찾아 인사를 드리면서 그분을 기릴 수 있었다.  나처럼 남한과 해외에는 지금까지 비슷하게 활동해오고 주말엔 현장에서 시위에 참여하여 투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동안 이런 뜨거운 마음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하기 위하여 봉하를 찾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하여 감히 어느 누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그 마음이 진실하지 않거나 가짜라고 말할 수 있을까?  


노무현 대통령을 사랑한 참민중의 마음이 진실이듯이 북부조국 인민들의 지도자에 대한 마음 또한 진실한 것이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우리들은 생전의 노무현 대통령을 뵌 적도 없다.  그리고 그분으로 인해 아무런 이득을 본 것도 없다.   단지 이렇게 왜곡된 정치와 왜곡된 세상에서 그런 분이 민중 가운데서 우뚝 일어나 잠깐이나마 민중의 지도자로 계셨고, 그가 이룬 일이 귀한데다 지금 그 이룬 일이 무너져내리는 것이 안타까운 마음에 아무런 보수 없이 각자의 시간과 금전을 들여서 사회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북부조국에서  미국을 비롯한 사방의 적들로부터 나라를 지켜내고 친일 친미파가 없는 나라로 만들고 재벌들이 나라경제를 주름잡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 아직은 가난하지만 골고루 나눠서 먹고 함께 복지를 누리는 나라로  만드는데 성공한 그들의 지도자들은 위의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을 우리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보다 인민들로부터 열배 백배 더 깊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을 이제는 얼마간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그곳은 혁명이 성공하였고 개혁이 성공한 곳이다.  우리의 미완의 개혁과 다시 그 개혁마저도 도로아미타불로 돌아가고만 지금의 현실을 생각할 때 북의 인민들이 그 성공한 지도자들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사랑을 보내는 것은 분명히 이유 있음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국가선물관을 찾은 북의 인민들.  모두 충정의 마음으로 이곳을 찾으리라.


 그 존경과 사랑을 바탕으로 인민 스스로 더욱 훌륭한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그들의 마음가짐이 나오는 것임을 이제는 이해해야만 한다.  우리도 뜻있는 민중은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을 깊이 존경하면서 그분들을 본받겠다는 마음을 갖고 아무런 보상도 없이  스스로의 시간과 정력을 쏟아부어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계속해왔지 않은가?   정성을 모아 재단에 기부를 하며, 노무현 대통령의 묘소 주변조성에 수많은 민중이 참여하지 않았는가?  


노무현 대통령은 이미 가셨지만 그분을 이은 새 지도자가 나와서 남한에 민주주의를 다시 회복하고 통일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면  동상을 백개 천개 세워도 부족하지 않으리라.    금수강산을 필요없이 파헤쳐 환경을 파괴한 사대강 사업에 들어간 돈의 백분의 일만으로도 그 일은 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렇게 그분을 제대로 홍보하고, 후세들에게 학교에서 제대로 교육하고, 동상을 세워서라도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하고, 그 분을 존경하고 따르는 마음이 세세로 이어져 다시는 민중의 마음이 해이해져서 이 강토에 사대역적 매국노들이 권력을 쥐어 분단을 고착화하면서 민중을 핍박하지 않도록 지켜나가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북부조국 인민의  지도자에 대한 이런 마음을 모르고,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부정하면서 어떻게 우리가 진보적인 시민이라고 할 수 있을까?  통일운동을 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의식있는 민중이라면 이 부분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만일 내 글을 읽는 민중 가운데 아직도 북을 저 수구들의 논리대로 함께 비판하는 일에 자신도 끼여있다면  냉철하게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길 바란다.  4.19 혁명으로 피흘려 이룬 것을 우린 지켜내지 못했고,  광주학살 이후 오랜 민주화 투쟁 끝에 세워졌던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뒤를 훌륭한 지도자가 이어나가도록 민주주의를 지켜내지 못했다.   지금과 같은 시절이 올 것을 이미 내다보면서도 힘들게 얻은 것을 모두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건 비단 우리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저 동구의 숱한 나라들이 그들이 어렵게 얻은 것을 지키지 못하여 무너져내렸고 소련 또한 그 길을 걸었다.  북유럽의 그렇게 잘 갖춰졌던 복지제도 또한 지난 30여년 동안의 신자유주의에 민중이 안일하게 대처한 결과 지금은 당시에 누리던 복지조차 훨씬 줄어들었고 점점 더 줄어져가는데도 어떻게 손쓰기가 어렵게 되어버렸다.


그들 모두도 이미 이룬 것들이 잠깐의 방심을 하는 동안 물거품처럼 사라지지 않았는가?   그것을 너무도 잘 아는 북부조국 인민들이다.  그들이 지속적으로 사상교양을 하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지 않고서는 잊어버리길 잘하는 똑같은 인간으로서 북부조국 또한 미국을 비롯한 남한과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이미 이룬 것을 지켜나갈 수 없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북부조국에서 온 인민이 그 지도자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것은 지도자가 그 사회와 인민에게 페푼 것에 대하여 마음 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며 또한 이미 이룩한 그 사회체제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는 것이 이제는 이해가 되지 않는가?


국가선물관 주변의 풍경


한편 북부조국의 지도자들이 인민들로부터 올려진 선물들을 어떻게 처리하였는가도 나는 깊이 생각해보았다.   내가 살펴본 지도자들에게 올려진 인민의 선물들은 한결같이 정성을 들여 제작되어진 정말 값지고 귀한 예술품들이었고 보물들이었다.  나는 여지껏  세계 여러 나라들 가운데 국가 지도자에게 이만큼 선물을 올리는  인민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했고, 또한 그 지도자들이 선물관을 만들어서 받은 선물들을 공개한다는 것도 듣지 못했다.  그런 경우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북부조국이 그리 크지 않은 나라인 것에 비하면 이미 묘향산의 선물관에 이어 이만한 규모의 선물관으로 온 인민에게 공개하는 것은 정말 특이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남한의 지도자들에게 민중이 귀한 선물을 올렸다는 소식을 듣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그런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해외에서 수많은 국가원수나 사절들이 선물을 드린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렇게 받은 선물들은 어떻게 관리되고 처리되는지에 대해서  나는 들은 적이 없다.  대통령이 받은 선물은 당연히 그 나라의 민중의 대표로서 받은 것이니 법으로 금지하는 뇌물로 받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개인의 사유물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남한에 국가선물원이나 어떤 건물이 있어 그동안 국가원수가 받은 선물을 공개하고 온 민중이 그것을 함께 보며 나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는 것은 무슨 일일까?  공무원들은 일정액 이상의 선물을 받으면 뇌물수수죄로 걸리지만 국가원수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러워서 모두를 개인소유로 해도 되는 것인가?  그렇지만 나는 여기서 그걸 거론하자는 것은 아니다.


국가선물관을 떠나오기 전 김설이 해설원과 함께


나는 여기서  북의 지도자들이 인민으로부터 혹은 외국의 국가원수나 사절들로부터 받은 선물을 국가선물관에 진열하여  인민들 모두와 함께 나누는 그 정신을 거론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들이 늘상 민주주의가 아니고 독재하는 나라라고 신문을 비롯한 서구 세계의 매스컴에서 보고 듣는 북부조국의 지도자가 이 귀한 선물들을 개인적으로 소장하거나 팔지를 않고 온 인민과 함께 나누는 그 정신을 이해하면  북을 좀 더 알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독재자 치고 개인적으로 부를 축적하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는가?  어떤 독재자가 자신이 받은 선물을 온 인민들과 함께 나누고 있던가?  그런데 지도자 자신과 자신의 일가와 몇몇 고급 당원들만 호화롭게 산다고 악선전을 당하는 북부조국에서 무슨 이유로 이 귀한 보물들을 온 인민과 함께 나누고 있는가?  과연 이런 지도자가 있는 나라를 독재하는 나라라고 부를 수 있는가?  


미국으로부터의 끊임없는 위협에서  나라를 지켜내느라  온 힘을 쏟으면서 또한 무역 제재를 당하여 경제가 크게 일어서지 못하여 지금도 가난한 상태지만 그 가운데 먹을 것을 함께 나누고 복지제도로 교육과 의료와 주거지를 온 인민에게 제공하는 나라에서 이제 그 지도자가 인민들로부터 받은 값지고 귀한 선물들 또한 온 인민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나라를 인권이 없다고 손가락질 할 수 있는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우리의 세뇌된 것을 이젠 씻어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24    14-11-18


김정숙평양방직공장을 찾아서


이번 북부조국 여행 가운데 평양에서 방직공장을 답사할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사실 내가 북에서 미리 요청하지는 못했지만  공장의 노동자들은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알고 싶었는데 이곳 김정숙평양방직공장에서 마침 합숙소를 새로 완공하여 그곳을 우리가 찾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합숙소란 말을 내가 알아듣기는 해도 좀 생소했는데 남쪽에서도 기숙사와  비슷한 용어로 많이 사용되는 말이란 것을 근래에야 알았다.  내가 해외에서 살면서 이 단어를 별로 접하지 못했을뿐이었다.


운전기사 리영호동무도 이곳은 자주 찾지를 않아서인지 먼저 합숙소쪽에 도착했는데 반대쪽의 공장쪽으로 가도록 입구에서 수위처럼  차려입은 아주 활달한 모습의 여성이 알려준다.  공장 입구에 도착하니 이미 안내를 맡은 강창숙 안내원이 조선옷 차림으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강창숙 안내원은 이곳에서 7년 동안 근무했다고 한다.  먼저 이곳 김정숙방직공장의 지난 역사를 한눈으로 볼 수 있도록 자료들을 잘 전시해놓은 방으로 안내한다.  혁명사적교양실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먼저 처음 보게 된 전시물에 북의 지도자들이 이곳 평양방직공장을 찾은 횟수와 그 날짜를 표기해놓았다.  살펴보니 그 가운데 김일성 주석이 이 공장을 찾은 횟수는 모두 48차례나 된다.  평양방직공장에 대한 북의 지도자가 얼마나 큰 관심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이고, 또한 인민의 의식주 가운데 입을 것에 대한 지도자의 관심이 얼마나 컷던가를 알 수 있는 자료다. 북부조국에 인민들이 입는 옷감을 생산하는 다른 공장들도 많이 있겠지만  전쟁 후 대부분의 공장들이 파괴된 상황에서 헐벗은 인민들에게 옷을 입히는 일에 이곳 평양방직공장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기도 하다.





그 다음 자료를 보니 이곳 평양방직공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모친인 김정숙 여사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인 1948년에 이곳에다 방직공장을 건설하여 헐벗은 인민들에게 좋은 옷을 해입히자고 제안한 것을 1948년 10월 10일 김일성 주석이 지시하여 공장을 짓게 된 것으로 되어있었다.  이 공장의 이름이 왜 김정숙평양방직공장으로 되었는지의 유래를 알 수 있고, 또한 김정숙 여사의 인민을 사랑한 그 마음을 볼 수 있는 자료다.





평양방직공장은 1950년 6월 27일에 기본적인 건설이 완공되어 공장이 가동되었다고 한다.   전쟁 가운데 53년 1월 2일에는 크게 폭격을 맞아 20여 명의 노동자가 희생되었다고 하는데 바로 이틀 후인 1월 4일에 김 주석이 지하방직공장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격려하였다고 한다.  전쟁으로 대부분의 생산시설들은 지하로 옮겨져 생산을 계속했는데, 정전 후 군인들이 나서서 전후복구사업으로 공장건물을 복구하였고 이후 생산 목표량은 언제나 초과하여 달성했다고 한다.





 1960년대 중반엔 큰 수해로 공장이 침수되어 엄청난 피해를 보았는데 종업원들과 외부에서 지원자들이 몰려와 다시 밤낮으로 수해를 복구하여 두 달만에 조업을 정상화시킨 일도 있었다.  지금은 서해갑문으로 평양이 다시는 수해를 입을 일이 없다고 한다.  





자료로는  ‘제2의 고난의 행군 시절’ 동안 평양방직공장이 얼마만큼의  어려움을 겪었는지 내가 알 수는 없지만 1994년부터 2004년까지의 기간 동안 ‘신념으로 이겨낸 고난의 행군,강행군’'이라는 도표가 있었다.  나라 전체가 어려움에 처했을 동안 평양방직공장 또한 함께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 기간 동안 생산을 위한 전력에 문제가 있었을 수 있다.  전기 없이 어떻게 생산이 가능하랴.  또한 실을 뽑기 위한 원료의 공급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천연섬유나 화학섬유 재료의 생산과 공급 또한 나라 전체가 어려울 때라면 당연히 공급이 원활하지 못했을 것이고, 이런 기본적으로 방적과 제직에 필요한 원료의 조달에 문제가 있었다면 생산량 또한 크게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제2의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를 만큼의 어려웠던 외부로부터 주어진 상황속에서도 평양방직공장 또한 북의 모든 인민들이 스스로 그 어려움을 극복하였듯이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온 힘을 다하여 그 기간을 지혜롭게 극복해낸 것 같다.  이곳 자료들이 전시된 ‘혁명사적교양실’도 2003년 11월에 건설된 사진을 보니 고난의 행군 기간의 시련을 이때쯤엔 모두 이겨내었기에 가능하였으리라.  





평양방직공장의 지난 역사를 살펴본 이후 이곳에서 오랫동안 열정적으로 일해온 두 분의 노동자와 깊이 있는 대화를 하였는데 그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먼저 내가 이곳 사회주의 나라에서 인민을 위하여 옷감을 생산하는 방직공장에 대하여 느낀 점들을 오늘은 말하고 싶다.


첫째, 평양방직공장은 누구의 공장인가 하는 것이다.  

이 공장을 북부조국의 지도자들이 수없이 방문하고 격려하고 지원해왔는데 과연 그렇다면 이 평양방직공장은 북부조국의 지도자들의 것인가?  이 글을 읽는 독자들 가운데 그렇다고 답할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사회주의 사회의 공장은 모두 국가의 소유로 알고 있다.  한마디로 국영기업체다.  국가의 소유라는 말은 바로 모든 인민이 주인이라는 말이 아닌가?  아니라고 할 사람이 있는가?  한 예로 국가가 모든 주택과 아파트들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인민을 위해서 지어졌고 인민이 그 안에서 무료로 사는 나라가 바로 여기 북부조국이다. 





마찬가지로 이런 생산공장 또한 국가가 소유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바로 인민을 위해서 생산하고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인민을 위해서 더 많은 생산이 필요하기 때문에 북의 지도자들이 이곳을 수십 차례에 걸쳐서 방문한 것이다.  그 지도자들이 이곳을 방문한 목적이 생산을 늘려서 지도자들의 수중에 더 많은 재산을 축적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을 독려하려고 왔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독자들이 있는가?  북은 그런 사회가 아닌 것이다. 




자 이제 생각을 좀 더 넓혀보자.  과연 북부조국 인민들을 어느 누가 가난하고 못산다고 할 수 있는가?  나 또한 방문기를 쓰면서 몇 번을 가난하다는 말을 사용하였으리라.  그리고 그것은 북부조국을 방문했을 때 내가 가끔 듣기도 하는 이야기였다.  한데 그 가난한 인민들이 실제로는 이렇게 북부조국의 수많은 생산공장들을 모두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본주의 세상에서 사는 우리들 가운데 공장을 소유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수많은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일하지만 그 공장은 재벌의 소유가 아닌가?  한마디로 내것이 아닌 것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한데 이 북부조국에서는 모든 노동자들이  나라의 것이면서도 자신의 것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가난한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이렇게 부자인 것이다.  


둘째, 이 평양방직공장은 누구를 위한 공장인가하는 문제를 생각해보자.  이미 윗 글에서 인민을 위해서 생산하는 공장이라고 했다.  북의 사회주의가 인민의 복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지도자들이 저렇게 수십 번을 방문하여 생산을 독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늘 말하는 의식주 문제에 있어 바로 그 첫번째인 옷감을 생산하는 공장이 이곳이고, 북의 지도자들은 인민들의 옷차림에 대해서 그만큼 큰 관심을 보여왔다는 것의 증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북부조국은 12년의 의무교육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교복을 제공하는 나라다.  이번 방문에서 내가 그 일을 다시 물어보지 못하였지만 이미 80년대에 내가 읽었던 방문기에서 그 내용을 알았으니 북부조국이 학생들의 교복을 무료로 제공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의 일일 것이다.  인민들의 입을 옷은 당연히 돈을 받고 팔아서 다시 이렇게 생산하여 이 공장이 운영되도록 하겠지만 한편으로 북부조국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무료로 교복을 제공하기도 하는 곳이다.  무료로 교복을 주는 것으로도 이 공장이 누구를 위해서 운영되는지를 알게 되지 않는가?  바로 인민을 위해서 운영되는 것이다.  인민을 위해서 운영하는 이 공장은 바로 내가 위에서 거론하였듯이 인민이 그것을 소유하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랴?  바로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인민의 공장인 것이다.  


누가 북부조국에 민주주의가 없다고 하겠는가?  이보다 더 귀한 민주주의가 있으면 어디 말해보라.  저 큰 공장의 주인이 바로 인민인 나라다.  그리고 그 공장은 바로 인민이 운영하고, 인민을 위해서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종종 말하고 듣는 경제민주주의가 이보다 더 확실하게  자리잡은 곳이 세상 어디에 있는가?  이보다 더 인권이 존중되는 곳이 어디에 있는가?


내가 살펴본 공장 내부의 실을 뽑는 방적기와 베를 짜는 직포기들은 남한의 오래전부터 수출을 하기 위해서 해외에서 일류 기계들을 들여와서 생산하던 설비에 비하여 턱없이 부족한 시설일 수도 있다.  이미 70년대에 남한에선 방직공장들은 사양산업이라는 말을 했었다.  그러다가 재벌들의 차관으로 가능했던 자본의 투자로 인해 아주 좋은 시설을 갖추게 되고  값싼 노동력을 발판으로 훌륭한 제품을 만들어 해외수출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경기가 좋을 때는 많은 외화를 벌어들이기도 했을 것이다.  한데 지금은 수많은 후진국들이 그 일을 하고 있으니 방직산업이 다시 사양산업이 되었다가 아주 잠깐 일어났다가를 반복하는데 그것은 순전히 해외수출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가 나빠서 살아남지 못한 방직공장들은 모두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돈벌이가 될 때는 공장을 열고, 돈벌이가 되지 않으면 공장을 닫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일상이다.  거기 노동자가 주인일 수 없고, 일반 민중이 주인일 수 없다.  한마디로 자본가를 위한, 노동자에 의한, 자본가의 공장이 아닌가?  방직공장의 수많은 젊은 여성 노동자들이 얼마나 저임금과 가혹한 노동환경 속에서 살아왔던가를 생각해보라.  그런 혹독한 저임금과 기나긴 노동시간으로 자본가에게 착취당해온 노동자들이 아닌가?  그것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한 재벌이 아닌가?  절대로 노동자는 공장의 주인이 될 수 없는 곳이 우리가 사는 곳이 아닌가?


북부조국의 이런 방직공장 시설과 설비들이 자본주의 공장들에 비해서 부족할 수는 있어도 이 공장이 문을 닫을 일은 없다.  해외의 산업들과 경쟁할 필요는 없지만 지나간 공장의 역사처럼 앞으로도 인민의 필요에 의하여 꾸준히  생산시설을 확장하여 보다 자동화되고 좋은 기계로 바꿔 노동자들이 보다 나은 환경에서 능률적으로 일하게 될 것이다.   노동자들도 인민을 위하여 보다 많은 생산을 하겠노라고 지속적으로 다짐하며 열심을 다하여 일하는 곳이다.  또한 노동자들의 생활수준과 복지를 지도자들이 찾아와서 관심을 가져주고, 공장에서는 그것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곳이다.   이곳 평양방직공장의 노동자들의 복지에 관해서도 이어지는 글에서 거론하게 될 것이다.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25]가 시작되는 [펌]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V / 강산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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