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귀족(朝鮮貴族)은 1910년에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일본 제국 정부가 일본의 화족 제도를 준용하여 대한제국의 고위급 인사들에게 봉작하고자 창출한 특수 계급이다. 1910년 8월 29일에 〈한일 병합 조약〉 제5조에 수반하여 일본 황실령 제14호 〈조선귀족령〉(朝鮮貴族令)이 공포되면서 신설되었고, 1947년 5월 2일에 일본 황실령 제12호 〈황실령과 부속법령 폐지의 건〉(일본어: 皇室令及附属法令廃止ノ件)에 의해서 폐지되었다.
형성
조선귀족회관 (1912년)
조선귀족회장 박영효
1910년 8월 29일에 일본 황실령 제14호 〈조선귀족령〉이 공포되면서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 황족이 아닌 종친, 문지(門地), 훈공이라는 기준에 따라 선정된 고위급 인물들을 후작, 백작, 자작, 남작에 봉작하였다. 한일 병합 당시에 작위를 받은 76명의 수작자(후작 6명, 백작 3명, 자작 22명, 남작 45명), 1924년에 추가로 수작한 이항구, 수작자의 작위를 계승한 81명의 습작자, 총 158명이 조선귀족으로서 작위를 받았다.
1910년에 작위를 받은 76명 가운데 작위를 거절하거나 반납한 사람은 8명으로 김석진, 윤용구, 홍순형, 한규설, 민영달, 조경호, 조정구, 유길준이다. 이들을 제외한 68명의 수작자는 같은 해 10월 7일에 수작영식(授爵榮式)과 1911년 2월 22일에 작기본서 봉수식(爵記本書奉授式)에 참석하였으며, 1911년 1월 12일에 조선총독부에서 열린 공채본권 교부식(公債本券交付式)에 참석하여 작기와 은사공채권을 수령하였다. 1911년 9월 9일에는 일본의 화족회를 모방하여 박영효를 초대 회장으로 하는 조선귀족회를 설립하였다.
특권
조선귀족은 〈조선귀족령〉에 근거하여 일본 화족과 동일한 예우를 향유할 권리(제5조), 법규로서 구속력을 갖는 가범(家範)을 제정할 권리(제9조), 작위 세습의 권리(제10조)를 보장받았다. 1897년의 칙령 제10호 〈서위조례〉(敍位條例)와 1926년의 칙령 제325호 〈위계령〉(位階令)에 의거하여 작위에 따라 위계를 하사받았다. 공적인 의식에서의 좌석 순서를 뜻하는 궁중석차(宮中席次)를 작위와 위계에 따라 조선귀족에게 수여하였다. 작위에 따른 대례복의 착용이 허용되었으며, 조선귀족의 자제는 무시험으로 경성유치원과 가쿠슈인(学習院)에 입학할 수 있었고, 결원이 발생할 경우 무시험으로 도쿄제국대학이나 교토제국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조선귀족은 강점 초기에는 귀족원 구성에서 배제되었지만 1932년에 가서야 박영효가 칙선의원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조선귀족의 경제적 지위를 보장하고자 일본 정부는 은사공채증권을 교부하였다. 원금은 5년 거치 50년 이내 상환되는 것이며, 연리 5%의 이자는 매년 3월과 9월에 조선은행 또는 우체국에서 지불되었다. 조선귀족회 차원에서 조합을 설립하여 조선총독부로부터 임야 및 삼림 불하과정에서 무상 대부 및 불하를 받았다. 또한 조선귀족의 경제적 몰락을 방지하고자 1927년에 〈조선귀족세습재산령〉을 제정·공포하여 세습재산을 설정해서 보호를 받을 수 있게 하였다. 1928년에는 〈조선귀족보호자금령〉을 공포하고 재단을 설립하여 궁핍한 귀족들에 대한 구제 사업을 전개하였다.
통제
1920년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망명한 김가진
1911년에 습작하여 1913년에 실작한 윤치호
화족이 일본 궁내성의 감독을 받는 것과 다르게 조선귀족은 조선총독의 직접적인 통제 아래 있었으며, 조선총독은 일본 황실령 제15호 〈조선에 재주하는 귀족에 관한 건〉을 통하여 감독권을 행사하였다.
이완용의 차남 이항구는 1924년 10월 7일에 남작의 작위를 받았는데 조선귀족이 창출된 이래 일제강점기 동안 새로이 수작한 유일한 사례이다. 조선귀족 중에 승작한 자는 이완용(백작 → 후작), 송병준(자작 → 백작), 고희경(자작 → 백작)이 있다.
수작자 중에 일부는 반일적인 활동이나 충순을 결여한 행위를 이유로 하여 작위가 박탈되거나 습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사준은 독일과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위한 원조를 받고자 비밀 조약을 체결하려던 중한의방조약안(中韓誼邦條約案) 관련 사건에 연루되어[20] 1915년에 실형을 선고 받고 작위를 상실하였다. 김가진은 1919년에 의친왕 이강을 상하이로 탈출시키려 하였던 대동단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1920년에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였다. 김가진의 작위는 박탈되지 않았으나 습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용직과 김윤식은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여 실형을 선고 받고 작위를 박탈당하였다. 습작자 중에는 윤치호가 1912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1913년에 작위가 박탈되었고, 민태곤은 1941년 12월에 도쿄에서 조선민족독립운동 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마약, 도박 등으로 인한 형사범은 조선귀족으로서의 결격사유에 해당되어 작위가 박탈되었다. 민영린과 김병익은 아편 흡입죄로 실형을 선고 받아 작위를 박탈당하였다. 이지용은 도박으로 실형을 선고 받아 1912년에 예우가 정지되었다가 1915년에 해제되었다. 조민희는 도박으로 파산을 선고 받고 예우가 정지되었으며, 조동희는 집안 내의 재산 분쟁으로 예우 정지와 해제를 두 차례 반복하였다.
평가
조선귀족은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에 있어서 효용가치가 높은 최상위 협력층이었으나 1920년대 이후 문화 통치로 전환한 식민정책과 더불어 다양한 계층의 지식인 집단이 성장하면서 정체되고 무능력한 조선귀족을 적극적 협력자로 활용하려는 목적이 많이 희석되었다.[30] 1920년대 이후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조선귀족들이 속출하자 조선총독부는 1929년에 창복회(昌福會)를 설립하여 궁핍한 조선귀족들을 지원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귀족들은 일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각종 통치기구나 사회단체, 수탈기구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집필 활동을 통해서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조선귀족의 수작자와 습작자는 1948년 9월에 제헌국회에서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 제2조와 제4조 제1항에 의하여 당연범으로 처벌대상이 되었다.[32] 2004년 3월에 대한민국 국회에서 제정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7호는 수작 및 습작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하였고, 이에 의거하여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141명을 귀족 분야의 조사대상자로 심의하여 총 139명(이재면, 수작자 64명, 습작자 74명)을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하였다. 2009년에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에 작위 거부·반납자 및 상실자, 민족운동 참여자를 제외한 조선귀족 137명을 친일파로 선정하여 수록하였다.
수작 및 습작자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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