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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의 어머님이 좌찬성을 지내신 우리 한산이문 이규년 할아버지 따님으로 한창부부인 (1818~1874) 감고당(안국동 37번지)마님인데 하늘에서 통곡을 하시겠네 ㅠㅠㅠ]
역사스페셜 을 토대로 재구성
러시아 비밀문서로 밝혀진 명성황후 최후의 날
1895년 10월 8일 새벽.일단의 일본인에 의해 조선왕궁이 습격당한다.
궁궐은 아수라장이 되고 명성황후는 잔인하게 시해된다.
조선왕궁에서 벌어진 이 참극을 기록한 보고서가 최근 러시아 에서 발견됐다.
백여년전에 작성된 명성황후 시해 사건 보고서다.
이 보고서엔 실로 놀라운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 있다.
그러자 러시아 공사관 웨베르의 지적입니다. '목격자는 조선인이 아니라 서양인이다'.
일본 공사관은 그제서야 당황하고 다시 알아 봐야 한다며 회의를 끝내버립니다. 아마 목격자가 모두 조선인이었다면 일본은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을 겁니다. 러시아 공사관 웨베르는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보고서에 생생 하게 담았습니다.그 러시아 보고서의 내용을 따라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재구성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895년 10월 31일자 노스차이나 헤롤드신문에 실린 보도는 낭인 역할을 축소하고 왜곡하려는 일본의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다. 일본을 비판하고 범죄자 처벌을 요구하는 여론이 들끓자 일본정부는 범인으로 지목된 48명의 용의자를 일본으로 소환한다. 사건을 히로시마 재판소에 넘기고 형식적인 절차를 거친 뒤 범죄자들을 증거 불충분으로 전원 석방한다.
-강창일 교수 인터뷰-
"히로시마 재판소에서 석방되자 마자 전 일본에서 구국적 영웅으로 대접하는 분위기 연출 기차로 동경까지 오는데 모든 연변에서 이 사람들에게 박수 치고 환호하고 그랬다 도쿄 도착했을 때 천황이 시종 대신을 보내 수고했다고 노고를 치하했다고 하죠"
일본정부는 애처에 시해범들을 처벌할 의도가 없었다.왜냐하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일본 군관민과 일본 정부의 합작으로 저질러진 만행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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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목격자가 있고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해범들은 증거 불충분으로 전원석방되고 그 이후 출세가도를 달립니다.낭인의 핵심 인물이었던 시바 시로우는 정치 소설가로 더큰 명성을 얻고 국회의원에 수차례 당선됩니다.낭인 동원책이었던 한성신보사 사장 아다치 겐조는 일본 내각의 내상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내무부 장관 자리까지 오릅니다. 그 외에도 명성황후 시해범 대부분은 정치요직에 발탁되거나 사회적인 부와 명성을 얻게 됩니다. 이사람은 주한 일본 공사관 미우라입니다.
일본 군대와 공사관 및 영사관 직원은 물론 일본 순사와 일본 낭인 들을 총동원하고 작전을 지시한 총지위자인데요, 역시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정치계의 거두로 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을 주목하시죠. 미우라 바로 전의 주한일본 공사관이었던 이노우에입니다. 당시 일본의 내상과 외상을 역임한 정치 실세로 이토우 히로 부미와 함께 일본의 정계를 움직이던 사람입니다.그는 조선을 식민지화 시키기 위해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 문제에 관한 전결권을 위임 받고 조선에 왔는데요, 조선에 있으면서 그는 갖은 내정 간섭을 자행했습니다. 그러던 이노우에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 한달전 돌연 사임을 합니다. 대신 외교경험이 전혀 없는 무장 출신의 미우라를 천거해 그에게 명성황후 시해 총 지휘 임무를 맡깁니다.그를 앞세우고 이노우에는 배후 조정을 한 것이죠.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이렇게 일본 정부의 결정권자였던 이노우에가 조작한 사건이었습니다.다시 말해 일본정부가 조작한 사건이었다고해도 틀린 말이 아닌데요,그렇다면 일본 정부는 왜 명성황후를 시해했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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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명성황후를 노렸나(대외 정책의 실권자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서 일본행동대와 맞닥뜨린 사바틴은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그들은 내말은 듣지도 않고 왕비가 어디 있는지 왕비가 누구인지만 물었다' 시해범들은 왕비를 찾기에만 혈안이 돼 있었다.시해범들은 왜 그토록 왕비를 노렸던 걸까. 서울대 국사학과 한영우 교수,그는 명성황후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규장각 관장으로 있을 당시 명성황후 국장과 관련된 의궤를 찾아내 해제를 붙여 재간행하는 작업을 했다. 성대하게 치러진 명성 황후의 국상은 의궤에 상세하게 기록돼있다. 고종이 직접 지은 명성황후행록. 이 행록엔 고종이 황후를 정치적 조언자로 평가하고 있음을 적고 있다.
-한영우 교수 인터뷰 "고종이 대원군으로부터 권력 이양...황후 독서량 많고 ...
고종이 황후의 지혜...고종을 찬조했다" 여기엔 명성황후의 외교의지를 알수 있는 대목이 있다. 수원 즉 먼나라와 편하게 지내라는 것이다.
-한영우 교수 인터뷰 "일본과 서양 세력이 들어오는 상황속에서 어떻게 판단했느냐 하면은 가까운 일본 보다는 먼나라인 서양이 덜 위험하다고 판단을 한 것이다 그래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서양과 가까이 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래서 서양 중에도 러시아 미국.서방 세계와 친교를 갖고 서방 세계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려고 한 것이다"
청일전쟁도회 -이것은 청일 전쟁 당시 일본의 승리를 그린 만화다. 일본이 그린 작품으로 청나라를 무찌르는 일본군의 모습이 잘 나타나있다.열강이 조선의 이권을 놓고 각축을 벌이던 때,청과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려다 싸운 전투가 바로 청일 전쟁이다.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이것으로 조선진출의 본격적인 발판을 마련하였다.뿐만 아니라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과 시모노세키조약을 맺고 중국 요동반도 차지하게된다.그런데 일본이 요동반도로 진출하자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이에 제동을 건다.
러시아는 왜 3국간섭을 일으켰을까?
당시 러시아는 1891년부터 장장 오천오백 마일의 대륙 횡단시베리아 철도를 착공 중이었다. 러시아는 이 시베리아 철도를 완공하여 대대적으로 남하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일본이 요동 반도를 차지함으로써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차질을 빚는다.러시아는 그래서 일본의 요동 반도 진출에 제동을 건다.
-이민원 교수 인터뷰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건설하고 있던 러시아가 역시 자국의 방어적 입장에서 프랑스와 독일 끌어 들여 일본을 요동반도에서 군대 철수시키고 조선의 자주 독립을 존중하라는 의미로 간섭을 하게 된다 이른바 삼국 간섭을 한다"
명성황후는 이런 국제적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명성황후는 당시 강국으로 등장한 러시아가 조선을 침략할 의사가 없다고 판단하고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 세력을 철저히 견제해나갔다. 조선의 외교관계에서 철저히 배제당한 일본에게 명성황후는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최문형 교수 인터뷰 "정치의 주도 세력일 뿐 아니라 외교 일체 좌우 민왕후.특히 일본 거부하고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거부하겠다는 생각 민왕후...일본은 민왕후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자기 세력 부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겁니다" 러시아를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려고 했던 명성황후.그것이 바로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 한 이유다. 일본 세력에 의해 황후는 폐위된다.명성황후 시해와 폐위 사실이 알려지자 반일 감정은 극에 달하고 황후 복위를 요청하는 상소와 복수를 외치는 의병 운동이 전국에서 확산된다
-강창일 교수 인터뷰 "한국내에서는 반일 의병 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하게 되고 국제적 여론도 일본의 악랄한 만행이 공개됨으로 인해가지고 부득불 일본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손을 떼지 아니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되죠.그런 의미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전술적으로 실패 한 작전이었다"
일본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한다.친일 내각의 핵심인물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고 고종은 친일세력을 제거해 나간다. 고종은 명성황후 장례를 국가 과제로 삼았다.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고종이 명성황후의 장례를 수차례 연기한다는 것이다.
2년 2개월을 끌고서야 고종은 명성황후의 장례식을 치른다.
#한영우 교수 인터뷰 "장레식이 늦어진 이유는 일본의 을미 사변에 대한국민 각계 각 층의 반성과 자각과 국수에 대한 열기 합쳐지면서 자주적인 근대 국가로서 대한제국을 세우는 과정이었다 그런 과정을 완수하기 위해서 장례식을 미뤘다 볼수 있다"
고종은 2년 2개월동안 명성황후의 장례식을 끌면서 대한제국의 바탕이 되는 조칙들을 만들어 간 것이다.전국민의 요구와 합의에 의해 1897년 10월12일 마침내 대한 제국이 탄생한다. 그리고 한달뒤인 1897년 11월22일.일본의 강압에 의해 폐위됐던 왕후를 명성황후로 추존하고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른다.명성황후의 죽음은 나라와 국민의 하나됨을 이끌었다.황후의 죽음이 최초의 근대국가인 대한 제국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2년2개월 동안 미뤄왔던 장례식을 치르기 며칠전 고종은 명성황후의 빈전에서 시호를 올리는 의식을 거행하는데요,고종은 여기서 명성황후를 잃은 슬픔을 토로했습니다. '궁전의 사변은 너무나 불측스러운 것이어서 만고에 있어 본 적이없었다. 원수를 갚지 못하고 거상 기간이 지났다.그래서 나의 슬픔은 끝이 없다' 비극의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시해된지 백여년이 지났어도 사건은 여전히 미해결로 남아 있습니다.왜냐하면 명성황후 시해사건에는 용의자만 있을 뿐 지금까지 범죄자에 대한 그 어떤 처벌도 그 어떤 규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진상을 다시 가리고 규명해야 하지 않을까요. 역사의 진실을 숨기고 역사의 왜곡만 일삼는 일본에게 그 진실이 무엇이고 그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직시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출처: http://cafe.daum.net/emaeil 한산이씨 목은 이색의 후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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