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의 민주화운동 전민일보
2003.5.14. 전민일보
[1] 1980년 전주의 봄 - 1980년 5월, 전주, 그 역사의 현장
제목 : 1980년 전주의 봄
1980년 전주의 봄은 짧았다
1980년 전주는 여느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민주화 요구와 신군부에 대한 저항의식으로 가득했다. 유신말기 투옥됐던 이들이 풀려나고 대학에서 쫓겨났던 학생들이 돌아오면서 대학은 활력을 되찾았다. 오랜 독재권력에 억눌렸던 민주화 욕구가 사회 곳곳에서 봄 눈 녹듯 넘쳐흘렀다. 18년간 장기집권에 눌려 왔던 개개인의 소망이 폭발하는 건 당연했다.
한 인사는 "시국을 지켜만 보는 것과 나서서 행동을 하는 것은 백지 한 장 차이였다"며 당시의 분위기를 회고한다. 비록 행동에 나서지 않은 국민이라 할지라도 민주화에 대한 소망이 그만큼 컸다는 얘기다. 그래서 전주, 그리고 전북의 민주화 투쟁 역시 다른 지방 못지 않게 점점 커져 가고, 점점 강도가 높아져 가는 상황이었다.
유신정권에 저항해 오던 성직자들과 양심적 지식인들, 대학 내의 저항세력들은 서슬 퍼런 신군부의 탄압에 맞서면서 그 활동 반경을 넓혀 간다. 학원자율화 투쟁으로 시작해서 그 세를 결집한 대학생들은, 신군부에 민주화일정을 밝히라고 요구하며 투쟁의 수위를 높여 간다.
전국 어디서나 마찬가지였듯 양심세력의 저항과 대학생들의 거센 시위가,쿠데타의 꿈을 꾸던 신군부의 간장을 압박해 온 것이다.
80년 5월, 민주화를 요구하는 투쟁에 나서고 계엄사에 붙잡혀간 이들 중 많은 사람은 그저 평범한 학생, 평범한 시민이었다. 학생 운동의 선봉에 나서 민주화 투쟁을 이끌어 가던 젊은 사상가도 아니었고, 유신정권에 대한 저항의 연장선상에서 신군부를 압박하던 반정부 인사도 아니었다. 더구나 피투성이로 울분을 토하던 광주의 시민군도 아니었다. 80년 민주화의 봄이라고 하는 어수선한 계절을 대학에서 맞았거나, 아직 학생 티를 벗지 못했거나 하는 젊은이들일 뿐이었다. 이런 이들이 5.18 관련자, 5.18피해자라는 범주에 들게 된 것은, 단 하나 우리 사회가 정정당당하기를 바라는 소망 때문이었다. 이렇게 지극히 당연한 소망 때문에, 이들은 각자 자신의 삶에서 결코 지워 버릴 수 없는 아픔을, 또는 멍에를 안게 된 것이다. 더러는 대학의 신입생으로서,동아리의 막내로서, 더러는 자신이 믿는 종교에 충실한 신앙인으로서, 어쩌면 각자가 전혀 다른 인생의 꿈을 가진 사람들이기도 하다. 하기야 앞선 사회의식과 세계관에 눈뜨고 앞장서서 투쟁한 젊은이들도, 소박한 꿈이 없을 수는 없다. 당시 대학 4학년이던 학생들 중 많은 이는 교생실습을 해야 하는 학기가 바로 그해 봄이었다. 지금은 정치권에 몸담고 있는 어떤 이는, 그해 봄 검거망을 피해 숨어 지내면서 교생실습을 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못내 아쉬웠다고 했다.
드러난 사건들을 토대로 보면, 80년 전주, 전북의 민주화투쟁은 크게 세 가지의 단면에서 읽어 볼 수 있다.
먼저, 5월초부터 줄곧 시위와 농성으로 이어진 대학생들의 가두투쟁이다. 3월 개강 이후 대학생들은 복적생(긴급조치 위반으로 학교에서 쫓겨났다가 돌아온 재입학생)들의 주도 아래, 서클(동아리)과 각 학과의 연합을 기반으로 하는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를 결성한다.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는 학생들 스스로 선거를 치뤄, 유신정권의 잔재인 학도호국단 체제를 무너뜨리고 총학생회장 체제를 탄생시킨다. 학원 민주화의 많은 요구사항을 관철해내는 시점에서, 학생들은 신군부가 주도하는 계엄정국을 타개하고 정치적 민주화를 요구하며 거리 투쟁에 나선다. 도청 앞까지 밀고 나갔던 전북대생들의 대규모 시위, 이세종 열사(5.17 당시 사망)의 순교지가 돼 버린 전북대 학생회관의 농성 현장 등은 젊은 대학생들의 실천의지를 뚜렷하게 보여 준다.
둘째는, 5.18 이후 광주의 비극적 참상을 국민들에게 전하려고 몸부림친 젊은이들의 절박한 투쟁이다. 5.17 쿠데타 직후 단절된 광주의 참상이 탈출한 이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이 비극의 실상을 국민들에게 알리려는 노력이, 여러 건의 유인물 살포 사건과 고교생 시위 사건으로 드러난다. 광주의 비극을 전할 수 있는 언론보도가 차단된 와중에서 유일한 언론매체가 돼 버린 흑백 유인물은, 더러는 거리에 뿌려지자마자 수거되거나 더러는 운반 도중에 압수됐지만, 그 작은 사건, 사건들은 꼬리를 물고 많은 국민들에게 전파된다. 이 곳 저 곳의 작은 모임을 통해 조직된 크고 작은 시위 사건 역시, 비록 확산되지 못한 채 탄압의 군화 발에 짓밟혔지만 그 현장의 주인공들에게는 목숨을 건 투쟁이었다.
셋째는, 계엄령 속에 예비 검속 대상이 돼 탄압 받던 인사들과 복적생들이다. 이들은 이미 유신정권의 탄압을 견뎌 왔고, 79년 10.26 이후에는 좀 더 조직적인 방식으로 민주화 욕구를 모아 내는 적극적 역할을 감당했으며, 시위의 주동자로, 또는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낙인찍혀 붙잡혀 갔다.
이들에게 80년 5월은, 다만 몸을 피하고 누군가에게 꼬리를 잡혀 붙잡히는 수배, 검거의 과정만이 아니다. 남보다 한 발 먼저 사회 현실에 눈을 떴다는 이유 때문에, 이들은 앞장서는 입장이 되었고 감시 받는 상황에 놓였으며, 더 심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들은 이미 80년 봄 민주화투쟁 이전에도 이른바'지하서클을 통한 의식화운동'의 주도자였고, 박정희 정권이나 신군부에게'빨갱이 또는 빨갱이 같은 놈들'로 낙인찍혀 왔다.
80년대 중반부터 민주화운동세력은 스스로 민족민주운동, 민족민주세력이라 일컫게 되지만, 국민들로부터는 여전히 '운동권 학생들'이라거나 '재야인사'로 불려왔다. 허나 이것도 한참 나중 일이다. 유신정권 직후인 80년 봄만 하더라도, 이들은 극소수의 저항세력이었고, 언제나 "살얼음판 위를 걷는"이 사회의 반체제인사였다.
그러나, 전북대를 비롯해 우리 지방에서 80년 민주화 투쟁에 참여하거나 연루됐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저 미미한 움직임으로만 비쳐 왔다. 허나 이들의 삶은 이들만의 삶이 아니었다. 이들이 흘린 땀과 피눈물, 이들의 상처는23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회에서는 80년대를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범주화해서 불러 왔다. 80년대는 우리 시대의 일부였으며, 어떤 이들에게는 빛나는 성취의 시기였다.
80년 봄의 민주화투쟁은, 바로 이렇게 고유명사처럼 돼 버린 '80년대'의 주춧돌이자, 밑거름이 되었다.
"과거에 집착하면 한 쪽 눈을 잃고 과거를 잊으면 두 눈을 다 잃는다"는 말이 있다. 80년 봄, 이 땅을 수놓았던 뜨거운 청춘들의 노래는 어쩌면 우리의 두 눈을 잃지 않기 위해 반드시 간직해야 할, '그런 과거'일지도 모른다.(2003.5.13. 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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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둠을 밝히는 촛불이 - 1980년 5월, 전주, 그 역사의 현장
1980년 전주, 전북의 민주화 운동은, 70년대 후반 유신정권에 대한 민주화 세력의 저항으로부터 이어지는, 앞선 과정이 있다. 유신정권에 대한 저항 활동이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을 지나칠 수 없으며. 대학생들의 시국관이 어떻게 모아지고 실천됐는가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일련의 상황을 누가 계획하고 주도한 게 아니듯, 전체를 한 눈에 바라볼 수는 없다. 다만, 부분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전주에는 몇 개의 일정한 흐름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중 큰 흐름이 교회를 근거로 하는 양심 세력이다. 전북대학교를 비롯해 당시 전주의 중요 사건에 관련된 인물 대다수가 이 범주에 포함돼 있거나 영향권 안에 있다.
대학 내에서 KSCF(한국기독학생총연맹)로, 교계에서는 EYC(한국기독청년협의회, KNCC 즉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가맹 교단별 청년회 연합회)로 활동해 온 젊은이들이 이들이다. 이들의 조직력과 신,구 교회의 양심세력, 대학 내에서 이어져 오던 의식 있는 동아리조직의 힘이 합쳐지면서, 80년 민주화의 봄은 나머지 양심적인 개인들을 하나로 모아 뿜어내는 분화구 역할을 하게 된다.
기독교 교회를 근거로 하는 양심세력이 그 중 크게 형성된 데에는 70년대 박정희 유신정권의 시대적 상황이 큰 원인이다. 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의 충격은 한동안 모든 저항세력의 기를 꺾어 놓은 듯 하였다. 그러나 이 침묵의 기간에, 오히려 교회는 조직과 기반을 유지할 수 있는 저항집단의 중심으로 성장했고, 자연스레 유신말기 민주화운동 전개과정에서 교회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커지게 된다.
당시 카톨릭 센터에서는 신,구교 성직자들과 신앙인들이 매주 모여 월요기도회를 연다. 기도회를 통해 NCC가 발행하는 인권소식과 김지하의 오적 따위 유인물이 전달되고 읽혀진다. 75년 10월 21일에는 문정현 신부 등 신구교성직자 4명이 김지하 양심선언을 배포한 혐의로 경찰에 연행된 사건도 있다.당시에는 교회의 진보적인 성직자들이 교단을 통해, 강연장을 통해 시국문제를 거론하며 외친다. YH사건 뒤에는 교회에서 김경섭(전주 성광교회), 백윤석 목사(전주 신상교회)가 각각 긴급조치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한다. 기도회는 79년까지 계속된다.
70년대 중반까지 대학은 낭만과 지성을 추구하던 젊은 지성의 모습 그대로여서, 학생들이 사회현실과 역사인식을 같이 하는 일도 자연스럽다. 당시 대학은 시국에 관한 입장 표명이나 행동도 학과 별로 이뤄지고, 화장실과 건물 벽에 낙서를 통해 자신들의 시국관을 표출하던 시절이다. 그러나 학생운동은, 탄압이 강해짐에 따라 상처도 심했다. 저항 세력에 대한 유신정권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대학 내에서 학생들이 정상적인 동아리 활동이 어려워질 만큼 상황이 나빠진다. 사회의식에 눈을 뜬 진보적 학생들은 자신들의 양심을 실천할 통로와 기반이 절실했다.
KSCF는 75년 이전에는 합법적인 대학내 동아리였으나, 긴급조치 9호 이후 대학에 등록할 수 없게 된다. KSCF가 신앙활동과 신학연구 목적임에도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이들의 활동 때문에 이념동아리로 분류된다.
이후 KSCF는 학내에서 비공식 활동을 하며, 주로 교회에서 모인다. 전북대 외에 개정간호대와 원광대, 한일신학교는 물론 신흥고와 전주고, 기전여고,전주여고 등 고교생 조직(KSCM)도 활동한다.
69학번 백남운(전주 효자동교회 목사), 71학번 허종현(신부)이 선배 세대다.이후 74학번 최인규, 박종훈, 문정숙, 진창덕, 75학번 손인범, 한일신학교 배정희, 76학번에 전북대 이송재, 조용민, 신일섭, 77학번 김운주, 김남규, 윤성모 등이 활동한다. 이들은 독서 모임을 만들어 후배들을 지도하고 이끌어 간다. 많게는 삼, 사십 명까지 모이기도 한 이들은 아침 6시면 학교 식당에서 모여 공부를 한다. (70년대에 이렇게 형성된 독서 모임은 훗날 80년대에 전북대 내 운동권 그룹 '1집'으로 이어진다.)
커리큘럼은 신학 사상과 인문사회과학 서적이 주를 이룬다. 사울 알레스키,파올로 프레이리, 에리히 프롬의 저서, 브라이덴슈타인 목사(한국명 부광석)의 '학생과 사회정의' 같은 당시의 불법 도서, 현대신서 문고판 등이다. 78년 들어 각 대학은 학생운동을 막기 위해 학생들의 동아리 활동에 제약을 하며,이른 아침 강의실 문을 굳게 잠근다. 이후 독서모임은 교회로 이동하고, 전주에서는 주로 남문교회, 성광교회가 기지가 된다. 그러나 이 시기의 투쟁이란 그다지 화려한 모습이 아니라, 수련회 등을 통해 결의를 다지고, 조악한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는 정도다.
당시 KSCF 활동의 중심인물이던 최인규씨(전북대 74학번, 현 전주 갈릴리교회 목사)는, 서울의 KSCF 사무실에서 청타를 쳐서 원통형 인쇄기(당시에는 값싼 등사기, 이른바 '가리방'이 많이 쓰였다)로 뉴스레터를 찍어내던 것을 기억한다. "당시 경찰에 잡혀가 보니, 경찰서에서는 육필로 조서를 꾸몄고,검사들이나 4벌식 타자기를 사용했는데, 우린 고급 기기를 쓴 것"이라고 회상한다. 이들은 방학이 되면 EYC와 기청(한국기독교장로회 청년회)회원으로 서울의 빈민촌에서 합숙을 하거나 농촌활동을 한다. 77년 4.19 기념일, 최인규(당시 전북대 기계공학 4)와 손인범(전북대 체육 3), 최갑선(전북대 영문 2)등은, '고난동참투쟁 선언문'을 재등사해 전주시내 교회 등지에 뿌린다. 원본은 일주일전 서울 한신대에서 뿌려진 유인물이다.
유신 정권은 저항세력의 축이던 대학생들을 강제에 군대에 보내는 변칙을 통해 학생운동을 끊임없이 탄압한다. 당시 전북대 내에서 3, 4학년 선배 위치이던 박종훈과 최인규, 손인범 등도 희생자다. 78년 전북대 학생과는 박종훈에게 77년 EYC 성탄절 기도회에서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며, 휴학할 것을 제의한다. 박종훈이 거절하자 학생과장이 기관원과 함께 박종훈의 집을 방문해 부모에게 아들을 군대에 보내라고 협박하지만, 거절당하자 일방적으로 학적을 변동시켜 병무청에 조기현역입영을 요청, 징병검사 수검통지를 발부하게 한다. 박종훈은 당일 신체검사를 받고 이튿날 입대한다.
전북대 76학번 조용민 등 2명도 역시 학적변동으로 강제입대한다. 이후 79년 3월 손인범이 강제 입대한다. 최인규는 79년 긴급조치위반 투옥자로 강제 입영을 거부한 '병역대책위'수배자 중 한 사람으로 나중에 구속된다. 선배들이 수난을 겪는 사이 자연스레 전북대 KSCF활동은 76학번 과 77학번 몫이 되고, 이것이 80년 민주화의 봄까지 이어진다.
이들은 당시 2명이 사건에 연루돼 학교에서 나가게 되면 나머지 한 명이 남아 지키는 식으로 활동을 이어 간다. 김남규 등은 주로 대학 내에서 활동에 매달리고, 이송재(남문교회), 이광영(중앙교회), 이복순, 배정희(금암교회) 등은 교회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편다. 79년 8월에는 해성고등학교 종교감실에서 독서 모임을 하던 것이 발각돼, 윤성모, 김운주, 김남규가 연행된다. 구속은 면하지만 윤성모, 김운주는 퇴학, 김남규는 무기정학을 당한다.
흥사단 아카데미 역시 70년대 전북대 내에서 활동해 온 학생 조직의 하나다.79년 전북대 학내 시위와 집회를 주도한 인물 중 한 사람인 74학번 이광철(현 개혁국민정당 전북도준비위원장)도 전북대 흥사단아카데미 회원이다. 이광철이 군대를 마치고 79년 복학할 무렵, 전북대 흥사단 아카데미는 이념 동아리에 대한 탄압에 의해 학내 동아리로서 활동이 중단돼 있다. 당시 대학 동아리는 지도교수가 없으면 동아리 등록도 못하고 불법이 되던 상황이다.
이광철 등은 당시 전북대 사학과 곽천식 교수를 지도교수로 모시고, 전북대 흥사단 아카데미 활동을 재개한다. 흥사단 아카데미는 다른 대학과 함께 연합 활동도 전개한다. 전북대 흥사단 아카데미가 발간한 소식지 '참빛'과 연합회 소식지 '두레'는 미 대통령 카터의 방한을 앞두고 당국의 검열에 걸려 문제를 빚기도 한다. 당시 삼엄한 시국상황에서도 초청강연회와 토론회 등에는2백여 명씩이 몰려들어, 유신말기 사회현실에 대한 대학생들의 관심도를 보여준다. 79년 10.26 이후에는 대학 내에서 이어져 오던 학생운동 세력이 서서히 조직화한다.(2003.5.14. 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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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병역대책위 사건
75년 7월 11일 정부가 지방병무청에 보낸 대외비문서 (징모 930-524)는 "수형자일 지라도 긴급조치위반으로 형을 선고받은 자는 3년 미만일 경우 병무사범에 준하여 처리할 것"을 지시한다. 박정희 정권이 75년 긴급조치 이후,유신독재를 반대하는 주축세력인 대학생들을 억지(抑止)하려고, 스스로 법을 어기면서 학생운동세력을 제거, 봉쇄하려는 변칙적 음모였다.
난데없는 입영통지서를 받은 대상자들은 각자 피신하거나, 부모와의 타협 속에 군대로 끌려간다. 부당징집에 대한 집단적 항의는 78년 말 특별사면으로 출감한 학생들이 제기해, 79년 2월과 3월 '병역문제대책위원회'를 통한 저항운동으로 조직화한다. 이들은 "우리는 1등 국민인가, 2등 국민인가"라는 성명을 내며 투쟁하지만, 당국은 79년 3월 대책위원 9명을 수배하고 연행, 구속하는 것으로 대응한다.
[4] 피어라 민주화의 꽃|
유신체제의 폭압 정치에 눌려왔던 국민들은 7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 운동에 적극 나선다. 특히 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뒤에는, 마른 들에 불길이 치솟듯 민주화운동이 전국으로 번져 간다. 누구는 "자연발생적으로 민주화욕구가 분출되는 분위기여서 나서서 행동을 하느냐, 지켜 보느냐 하는 것은 백지 한 장 차이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12.12쿠데타로 군부를 장악한 신군부는, 국민이 염원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저버린 채.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의 길에 나선다. 이후 80년 8월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하고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하기까지 8개월이 걸렸으니 말이다. 이 기간에 대학에서 학생운동은 점차 조직화하고 그 투쟁의 강도를 더해 간다.
79년 11월부터 학생회 부활논의를 시작한 전국의 대학생들은, 80년 봄 학생회 부활운동에서 학원민주화운동으로, 나아가 계엄해제와 유신잔당 퇴진을 겨냥한 대대적인 민주화운동으로 발전해 간다. 79년 12월 5일 전북대생 1천5백여 명은 '민주학생선언'을 뿌리며 유신잔당 퇴진과 통대선거 반대, 거국내각 구성 등을 주장하는 시위를 벌여 이철주, 한해수, 이인기 등 3명이 붙잡히고(각각 구류 7일) 김 선호, 고남곤, 문현수 등 여러 학생이 도피한다.
한편, 군대에 끌려갔다가 78년 기청대회 사건으로 투옥된 박종훈은 79년 12월 5일 출소한다. 돌아 와 보니 대학 내의 모임이 와해되다시피 한 상태다.이미 77학번 윤성모, 김운주는 퇴학당하고 김남규는 무기정학을 당해 정상적인 학내 활동을 못하고 있으며, 78학번 최순희(사망)가 주축이 되어 후배들을 이끌고 있다. 박종훈은 "탈춤반을 비롯해 연계가능한 동아리가 6개 정도 산발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79년 겨울방학 동안 이들은 은석골의 수양원 등에서 모임을 가지며, 정국 상황과 활동방향을 집중적으로 논의한다. 논점은 대강 다음의 내용으로 모아진다. 먼저 선배 그룹은 복학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학교 조직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당시 활동 중인 동아리를 중심으로 연합조직(서클연합회)을 먼저 꾸리는 게 필요하다고 의견을 모으게 된다. 다음으로는, 대학 내에 일반 학생조직이 꾸려지면 그 활동의 폭을 어떻게 조정해 갈 것인가 하는 것과 학원 민주화운동과 정치 민주화운동의 구호를 내세우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 또한 학내시위 뿐 아니라 거리로 나가 시민들에게 호소하는 방법과 계엄령에 대한 대응도 고민거리이지만, 시위는 가능할 것이라고 낙관한다.
80년 민주화의 봄, 유신 치하에서 학교에서 쫓겨났던 학생들이 하나 둘씩 학교로 돌아오며, 학생운동의 불길이 다시 살아 오른다. 모두 복교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전북대만 해도 복교 대상자가 29명이다. 병역대책위 사건으로 투옥됐던 최인규가 2월 출소한 뒤, 박종훈, 최인규, 최갑선 등 선배그룹은 대학 내 후배들의 활동에 논의를 같이 하며, 전북대에서 서클연합회와 학자추를 구성하고 민주화 운동을 벌여 나가는 과정에관여하게 된다. (물론 이들의 활동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지만, 관련 인물 몇 사람의 구증을 토대로 한 줄거리임을 감안하기 바란다.)
80년 신학기 대학가는 여러 형태의 동아리가 공개적으로 신입생을 모집하고 여러 가지 대자보가 등장한다. 대자보는 연일 신군부의 음모를 폭로하고 유신정권의 비행을 질타한다. 학기초부터 전북대의 서클(동아리)들은 연합조직을 논의, 구성 준비를 마친다. 70여개 서클 가운데 16개 서클 회장단이 전주시 다가동의 한 중국음식점에서 모임을 갖고 김남규를 써클 연합회 회장으로 선출한다. 김남규는 "축구서클 '일레븐 싸카' 회장으로서 서클연합회 회장이 된다. 흥사단 아카데미를 이끌던 이광철은 서클연합회 고문을 맡고,김형근(현 교사), 김희수(현 변호사)등이 서클연합회 활동에 참여한다. 이들은 이후 학내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을 형성한다.
서클연합회는 구성했으나, 각 학과는 신학기 들어 과대표를 새로 뽑는 시점이라서 의견을 모으기가 쉽지 않다. 전북대는 법대, 상대 등을 중심으로 호국단 체제에 반발하는 과대표들이 3월부터 논의를 거듭하다, 먼저 조직된 서클연합회와 연합해 3월 28일 드디어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회장 78학번 이명호)'를 발족한다. 원광대에서도 80년 1월 중순부터 동아리(당시에는 서클로 불림)회장들의 모임이 준비돼 2월 5일 성사되고, 이것이 학원자율화위원회로, 학원민주화추진위원회로 탈바꿈하면서 학생들의 의사를 수렴하는 기구로 만들어진다. 3월말 학자추가 구성된다. 전북대 학자추는 곧바로 총학생회 선거관리위원회를 구성, 선거를 준비한다. 학내에서는 고교 동문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선거운동이 펼쳐지고 4월 15일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김희수(당시 경영 3, 현 전북도의회 부회장)가 회장으로 당선된다.
박종훈은 "그러나 대학의 학칙규정은 여전히 학도호국단을 인정하고 있어서, 기존 학칙이 유지된 채로 학생들에 의해 구성된 총학생회는 아직 학생들만의 총학생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총학생회 선거 열풍이 지나고, 대학은 민주화투쟁을 준비하는 거대한 요새로 변해간다. 학생들은 어용교수 퇴진,학내 비민주적 요소 척결을 내세우며 본격적인 학원자율화투쟁을 벌여 간다. 4월 중순 들어 병영집체훈련이 학원민주화투쟁의 구호로 전면에 등장한다.이 문제가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한다. 이때만 하더라도 언론매체들은 대학의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한다.
그러나 4월 14일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겸직 소식은, 입영훈련 거부투쟁과 맞물려 대학가에 운동의 진로와 방법에 대한 이견과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5월 1일, 서울대 학생들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5월 2일부터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퇴진, 개헌 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 본격적인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한다. 학생운동이 학내민주화운동에서 전국적인 민주화요구운동으로 돌입하는 계기가 된다. 5월 2일 전북대생 6천여 명이 가두로 진출, 전북도청 앞까지 시위를 벌인다. 당시 전북대 총 학생 수가 1만여 명이다. 학생 대부분이 참여했다고 할 수 있는 시위대열은 당시 전북대 앞 팔달로에서 금암동 남도주유소까지 이어진다.
학생들은 전북도청 앞까지 밀고 나가며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페퍼포그를 쏘며 진압에 나선 경찰은 수십 명의 학생을 구타, 부상하게 한다. 전북대 총학생회장 김희수, 부회장 황덕구, 배현식, 김병태 등은 부상학생을 위문하러 병원에 갔다가 경찰에 연행된다. 5월 2일부터 13일까지 열흘 남짓은, 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본격적인 가두투쟁을 준비하는 기간이다. 그러나 5월 6일 전북대생 3천여 명은 계엄 해제와 연행학생의 석방 등을 요구하며 가두 시위를 벌인다. 이중 2백여 명은 계엄해제, 어용교수 퇴진, 미복직교수 복직 등을 요구하며 학생회관에서 농성을 벌이고 총학생회 간부 10명은 단식에 들어간다.
5월 10일 고려대에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이 모여 '비상계엄 즉각 해제'와'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요구하기로 결의다. 이들은 항간에 유포된 5월 봉기설을 염려해 당분간 평화적 교내 시위만 전개하기로 합의한다. 쿠데타의 명분을 찾으려는 신군부에 빌미를 제공하지 말자는 의도다. 그러나 5월 12일 밤 가두진출을 주장해 온 강경파 학생들의 광화문 일대 시위로 학생운동은 전면적인 민주화투쟁을 위한 가두시위로 나서게 된다. (2003.5.15. 전민일보)
[5] 80년 사건 일지
사건일지 - 1979년
11월 27일 KSCF 통합10주년기념 강연회 사건(연행자 10명 중 전북대 진창덕 구류 15일)
12월 1일10대 대통령 선출을 위한 통일주체국민회의 6일 소집을 공고
12월 5일 전북대생 1천5백여 명 통대선거 반대 시위 (이철주, 한해수, 이인기3명 구류 7일)
군산대, 학원자율화 주장 유인물 살포 사건(경영 2 문성주 등 2명 연행, 구류)
사건일지- 1980년
3월 6일 전북대학교 남정길교수 복직 결정. 제적생 12명 복학 통고
3월 13일 원광대 한의대 교수 13명 집단 사표 제출
3월 26일 전북대 교수협의회 교권수호 결의
3월 31일 전북대 교수, 학생, 학내문제 해결 합의. 군산 서해공전, 학생들의 학장 퇴임 요구로 휴강
4월 7일 원광대, 학내문제로 임시 휴강. 기전여대 1천여 명, 학장의 퇴임을 요구하며 농성.
5월 2일 전북대생 6천여 명 도청 앞까지 가두 시위
5월 3일 전북대 총학생회장 김희수, 부회장 황덕구 등 7명 강제연행
5월 6일 전북대생 3천여 명 시위, 학생회관 농성 본격화
5월 8일 전북대 학생회 간부 등 2백여 명 철야농성. 원광대생 5백여 명 시국성토대회
5월 14일 전남대생 1만여 명 도청 앞 민주화 성회. 전북대생 3천명 가두시위로 학생 61명, 경찰 43명 부상.
5월 15일 서울역에 35개 대학 10만명 집결 시위. 전북대생 8백여 명, 교수20명의 보호받으며 가두 시위
5월 16일 이화여대에서 서울 25개대 지방 2개대 학생 대표 회의, 시위 중지하고 시국 관망키로 결의.
[6] 붙잡혀 있는 시간들
투사가 되어
1980년 5월 전북대 학생회관은, 여느 대학의 상황과 비슷하게 전주지역 민주화 운동의 본거지가 돼 있다. 계엄당국의 예비 검속으로 오갈 데 없게 된 수배자들이 2층 방송실 등에 진치게 되면서 학생회관은 자연스레 농성장으로 변해 간다. 수배자들은 고정적으로 학생회관에서 숙식을 했고, 서클연합회, 학자추를 비롯한 다른 학생들이 합류, 토론하며 밤을 지새운다. 5월 2일 도청 앞 시위를 전후해서 학생회관은 본격적인 농성장 분위기가 형성되고,적을 때에는 10여명, 많을 때는 백여 명이 밤을 지새운다.
당시 학내 분위기는 학생 수도 많지 않을 뿐더러 학생회관을 드나드는 이들은 서로 친숙해, 무척 가족적이다. 시위는 조직적인 몇몇 동아리가 선도투(시위대를 주도)를 벌임으로서 시작된다. KSCF, 흥사단아카데미, 아람회, MRA같은 동아리들이다. 또, 몇몇은 앞장서서 목이 터져라 시위를 이끈다. 복학생 이광철(철학 4)을 비롯해 78학번 김형근, 김중길 등이 이들이다. 시위가 끝나고 나면 학생회관에 모여들어 함께 대책을 논의하고, 거리에서 배포할 유인물을 써서 찍어낸다. 농성장에는 학생운동조직의 일원은 아니면서도 자연스럽게 시위대열에 합세하면서 자연스레 합류하고 투사가 되어간 이들도 여럿 있다.
농성장 멤버 중 유인물 살포조인 이승희(경제 3)는, '아무 것도 모르지만 현실에 대한 답답함이 이 공간에서는 해방감으로 바뀐다'고 술회한다. 학생들은 당시 유인물 살포조를 따로 만들어 거리에 유인물을 살포한다. 5월 항쟁의 첫 희생자가 되는 고 이세종도 이중 한 명이다. 그 때 그 때 선배들의 지도로 꾸려지는 유인물 살포조는 모두 30여명이나 되지만, 나중에 최순희, 이승희, 정선경 등이 다 책임을 뒤집어쓰고 다른 이들을 빠져나가게 한다(박종훈의 회고). 시위하다 다치고 돌아오는 남학생들은, 여학생들이 달려들어 상처를 치료해 주기도 하고, 오갈 데 없는 동료들을 위해 밥을 지어 먹인다.
농성현장의 한 사람인 김성숙(당시 국문 79)은 '5.18민중항쟁전북동지회'의 인터넷 카페를 통해 이렇게 회고한다. "지나가던 행인처럼 오며가며 모여 있는 학생들의 웅변적인 연설에 귀를 기울이던 저는 학생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5월 대대적인 시위가 남도주유소와 도청을 오며가며 확산되었고, 저는 우연히 농성장에 가서 학생들의 식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게 되고 도움이 필요함을 알게 됩니다. 많은 여학생들과 아주머니들과 교회에서 보내준 음식으로 그 당시 식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저 역시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도와준 많은 여학생들 중 하나였어요." 학생들이 연일 시위와 농성을 계속하는 사이, 비용조달도 큰 문제다. 현수막이나 유인물 같은 시위용품을 만드는 것도 그렇고, 한창 나이의 청년 2백여 명이 숙식을 해결하자니, 자연 총학생회 예산이 막대하게 지출된다. 5월 15일 경인가 해서 비용을 점검해 보니, 백 만원을 훌쩍 넘는다. 5월 2일 시위 때 회장, 부회장이 잡혀가고 없어 학교로부터 돈을 타는 게 문제다. 결국 총학 간부 한 사람이 회장 대신 청구서에 서명을 해 학교에 돈을 신청하게 된다. 나중에는 전주경찰서로 잡혀간 학생들 60여명의 사식도 이렇게 조달해 35일을 먹인다.
계엄 병력 이동 속 가열되는 시위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가 뜨거워지면서 5/15봉기설이 끈질기게 나돌자 김영삼, 김대중씨는 각기 기자회견을 통해 계엄령 해제, 임시국회 소집, 개헌 작업 중지 등을 요구하는 성명을 낸다. 그러나 신민당의 임시국회 소집 요구에 공화당은 20일 이후에나 국회를 소집하겠다고 미온적인 입장을 취하며 시국상황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 빠진다. 이렇게 정치권이 미로를 헤매고 있을 때, 신군부는 전국의 주요도시에 충정부대를 투입할 계획을 최종점검하며 일부 병력은 이미 점령목표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한다.
80년 5월 14일 새벽,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 서울지역 27개 대학의 총학생회 대표 40여 명이 모여 14일 오전부터 전면적인 가두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한다. 80년대 한국사회의 운명을 결정지은 나흘이 이 순간부터 시작된다.전국의 대학생들의 노도와 같은 가두시위로 80년 봄의 가장 적대적인 두 세력, 학생운동과 신군부 간의 사활을 건 전면전이 시작된다. 5월 14일 정오,서울시내 대학생 7만여 명이 일시에 교문을 박차고 나온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구호를 외치며 시위대는 영등포, 청량리 등을 거쳐 광화문으로 진출한다. 가두시위에 시민들은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타오르기 시작한 가두시위투쟁의 불길을 막을 방법은 없다. 같은 날, 전남대생들은 전남도청 앞 광장으로 진출하고, 전주에서는 전북대생 3천명이 거리로 나와 전북도청 앞에서 연좌시위를 한다. 경찰병력과 충돌해 학생 61명, 경찰 43명이 부상한 것으로 집계된다. 15일 오후, 서울역에는 10만에 육박하는 학생들이 집결하던 시각, 전북대생 8백여 명은 연 이틀째 가두시위를 벌인다.
이번에는 교수 20명이 함께 나와 시위대를 보호한다. 시민들이 가세하면서 시위대는 고사동 오거리에서 2만여 명이 되고, 전주 역(현 전주시청 자리)앞 시위를 벌인다. 대구, 광주, 부산, 인천, 목포, 청주, 춘천, 천안 등 대학이 있는 거의 모든 도시가 다 마찬가지 상황이다. 그러나 서울역 광장에 집결한 각 대학 대표들은 이른바 '서울역 회군'을 결정한다.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가 투입될 가능성이 짙고, 쿠데타의 빌미를 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16일 밤 이화여대에서 서울지역 25개대, 지방 2개대 학생 대표가 회의한 끝에 시위를 중지하고 시국을 관망하기로 결의한다. 16일에는 전남대와 조선대, 광주교대생들이 전남도청앞 광장에서 집회를 열어 횃불행진을 벌인다. 바로 그 무렵 신군부는 치밀하고도 무자비한 음모를 착착 진행한다.
[군화발에 짓밟힌 토요일 밤]
5월 17일은 토요일이다. 많은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간 오후, 대학의 교정은 조용하다 못해 평화롭다. 그러나 전북대 학생회관은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들려 오는 얘기로는 오늘이 D데이라고도 한다. 농성학생들은 향후 대책을 논의한다. 몇몇 단과대학에서도 술렁이는 분위기가 전해진다. 밤 9시를 넘어 잔디밭에 나와 논의하던 학생들은 방송국과 전화를 통해 결국, 5월 18일 비상계엄 확대와 더불어 계엄군이 학내로 진입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는다.
결국, 이미 수배중이던 복적생들 가운데 김운주가 남아 농성장을 이끌고, 나머지는 검거될 것에 대비해 먼저 몸을 피하기로 한다. 이광철, 박종훈, 최인규, 이송재, 윤성모,김남규 등은 18일 자정 계엄군 진입 직전에 학교를 빠져 나와 학교 근처에 마련해 둔 '집'으로 간다. 이 시각, 이미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고 계엄포고 10호를 발표한 신군부는 18일 자정, 무장한 공수부대원들을 각 대학마다 투입해 학생들을 무차별 연행한다. 당시 계엄군은 '학교점령시각'을 전북은 새벽 1시 30분 이전에, 전남은 18일 새벽 2시 30분 이전에,완료하도록 지시한다.
농성현장에서, 김성숙은 다음날 쓸 '데모가'를 녹음하려고 방송실로 간다. 7명이 모여 '흔들리지 않게' 등 노래를 녹음한 뒤 친구 김혜숙과 함께 여학생회장실로 잠을 자러 간다. 한 남학생이 긴장된 방안 공기를 의식해서인지"군인들 안 오니 걱정 말라"면서 소주나 사서 마시자고 주머니 돈을 걷는다.그러나 남학생이 나가고 일, 이분도 안돼 요란한 군화발 소리와 함께 무장군인들이 뛰어 든다. 익산 금마에서 4대의 트럭에 분승해 출동한 제 7공수여단 소속 계엄군들이다. 순식간에 전북대 학생회관을 포위하고 계단을 뛰어오른 군인들은 고함을 치며 학생들을 엎드리게 하고는 이내 몽둥이로 사납게 두들겨 팬다.
"베레모를 비스듬히 쓰고 총에 칼을 꽂고 등장한 무장한 군인들의 모습은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들은 몹시 화가 나있었습니다. 학생들에게 몽둥이를 들고 때리던 군인들의 무장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초라하고 힘없는 모습으로 학생들은 맞았습니다. 무장군인과 무장이 안된 학생들의 대비는 허무했습니다. 학생회관의 불을 환하게 밝히고 무장한 군인들은 여기저길 다니며 학생들을 찾고 있었습니다. 잡힌 우리들은 좁은 차안에서 3시간 이상을 움직이지 못하게 묵인 상태로 기다립니다. 어디에선가 죽을 것 같다고 손목이 조여와서 죽을 것 같다고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도움이 되어주질 못했습니다. 소주를 사러간다고 나간 남학생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잡혔다면 얼마나 힘없이 맞고 있을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습니다. 그만큼 군인들의 기세는 대단해 보였습니다."(김성숙의 회고) 그리고 학생회관 뒤에선 이세종(농학 2)이 숨진 채 발견된다. 전북대에선 34명, 원광대는 23명이 연행된다. (2003.5.16. 전민일보)
[7] 들꽃처럼 지다|
한국의 80년 5월, 첫 희생자 이세종
80년 5월 17일 밤 12시, 그러니까 5월 18일 자정을 막 지나면서, 전북대 학생회관은 익산시 금마면 소재 7공수 31연대대 소속 계엄군의 작전 현장이다.온 건물을 흔드는 군화발 소리와 거친 고함 소리, 그 사이로 짓밟히는 학생들의 비명소리만이 뒤섞인 아수라장이다. 농성학생들은 곤봉과 군화발에 무자비하게 짓밟힌 채 질질 끌려간다.
잡힌 이들은 포승줄에 줄줄이 묶인 채 군용 트럭에 던져진다. 군인들은 눈을 부라리며 학생회관 곳곳을 뒤지고 다닌다. 학생들은 좁은 차 한 대에 실린 채3시간 넘게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기다린다. 손목을 조여오는 고통에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다 뚝 멈춘다. 지켜 섰던 군인 하나가 대검을 빼 치켜든 것이다. 어렴풋한 불빛에 날선 대검이 시퍼렇게 비친다.
놀란 이들의 겁에 질린 표정들! 대검은 손목에서 피를 흘릴 정도로 조여진 어느 학생의 손목으로 다가가 포승줄을 잘라낸다. "내가 포승줄을 풀지 못해 자른 거다!" 공수부대원들은 도저히 풀 수 없을 만큼 억세게 학생들을 묶었던 것이다. 트럭에 실려 있던 이들 중 몇은 엄습하는 공포감 속에서도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군인들이 무전기로 주고받는 말, "학생 한 명이 학생회관에서 떨어져 죽었다."
5.18 최초의 희생자 이세종의 죽음은 이랬다. 그 죽음을 목격한 이는 이 시각 옥상에 올라가 그를 짓밟은 군인들 뿐이다. 땅바닥에서 피범벅이 되어 발견된 이세종이 옥상에서 이미 숨을 다해 아래로 던져졌는지, 계엄군의 발표대로 난간에 매달리다 떨어져 숨졌는지, 떨어져 신음하다가 병원에서야 숨을 다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적어도 그 현장의 군인들이 나서서 고백하기 전에는.
마지막으로 이세종을 본 동료 학생들의 증언을 모아 보면, 이세종은 군인들이 뛰어들기 조금 전 학생회관 방송실에선 예닐곱명의 학생과 함께 다음 날 시위 때 사용할 "노래"를 녹음했다. 녹음 전에는 서로 대책을 논의하며 유광석과 함께 서울지역 대학들과 연락을 취하는 역할도 맡았다. 농성 기간 내내 이세종은 유인물을 뿌리는 여러 후배들 중 한 명이었다.
"군인들이 학교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한 이세종은 여학생회장실로 자러간 저희들이 걱정이 되었나봅니다. 문을 두드리고, 군인들이 들어오니 어서 피하란 말을 남기고 황급히 사라졌어요. 그게 세종이를 본 마지막 모습입니다.피하란 말은 들었지만 저희들은 어디로 피해야하는지도, 그리고 이미 경직된 몸이나 마음이 도무지 이 곳을 빠져나갈 수가 없었습니다."(김성숙)
"농성장 문을 나서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서너 개 내려 왔을까! 앞에총 자세로 착검한 총을 앞세워 4-5열 종대로 계단을 밀고 올라오는 2,3십 명의 계엄군(당시에는 공수부대원임을 몰랐음)과 맞닥뜨리는 순간 공포에 질린 세종과 나는 순간적으로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운명의 순간, 거기에서 생과 사의 갈림길이 되어 버린 그 찰나의 시간 -아니 세종군에 대한 참회와 이후 기억하기조차 싫었던-은 그렇게 이어진다.
나는 2층 화장실로 도망쳐 창문을 통해 베란다로 도망쳤지만 곧바로 뒤쫓아온 일단의 계엄군에 의해 무차별 구타와 함께 붙잡히고 말았는데 다행히도 위관급 장교로 기억되는 지휘관의 제지로 부질없는 생명은 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3층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쫓겨 간 세종군은 불행히도 다시 우리 곁에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가해자는 말이 없고 피해자 또한 말이 없으니 어느 누가 그 상황을 증언할 수 있겠냐마는 순간적 생과 사를 달리한 내가 폭행과 구타를 당했던 것을 기억하면, 그 옥상에서의 상황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유광석 )
이세종은 결국 광주에서 처음 인명피해가 발생한 18일 오후보다 반나절 이상 먼저 신군부에 의해 타살된 5월 항쟁의 첫 희생자가 됐다. 5.18의 엄청난 비극을 예고하는 서곡이 된 셈이다.
13년만의 사인 규명
당시 계엄군은 이세종 열사의 죽음을, 학생회관 2층에서 농성을 벌이다 계엄군이 교내로 진입하자 옥상으로 달아나다 떨어진 '단순 추락사-계엄군이 난입하자 무서워서 피하던 중 난간에 매달려 자연 추락한 것' 이라고 발표해 버렸다. 어이없게도 이세종 열사의 죽음은 단순추락사로 단정되고 말았다. 당시 사망진단서(부검의 전북대병원 이동근박사)는 직접사인을 '두개골 골절 및 두개강내 출혈'로, 부검 결과는 '상박골 및 슬개골 골절, 간장파열, 복막후강내 출혈'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동근 박사는 13년 뒤인 지난 93년 6월 가족들의 요청에 따라 발급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신청용 의견서'에서, "이 군의 두개골은 광범위한 복합골절 양상을 보였고 안면부, 흉부, 복부, 사지 등에 많은 타박상이 존재했다. 이들 손상 가운데 상당 부분은 추락 이전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고 밝혔다. 이세종이 옥상에서 떨어지기 전에 이미 무차별 폭행을 당했음을 말하고 있으며, 최소한 단순 추락사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다.
역사 속에 묻혀 있던 고귀한 죽음
이세종 열사의 죽음이 명백히 알려지고 사람들 가슴속에 고귀한 희생으로 자리하기까지 많은 세월이 걸려야 했다. 5년이 지나서야 당시 동료들과 전북대 총학생회가 열사를 기리기 위한 추모비를 세우지만, 군사 정권의 눈치를 보던 학교측의 탄압으로 쉽지만은 않았다.
85년 5월 18일 전북대 민주광장에 '고 리세종 열사 추모비'가 세워지지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학교와 경찰은 비석을 뽑아 숨기고, 학생들과 추모비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85년 전북대 총학생회장 김중길씨는 "몰래 만들어진 비석을 간신히 학교에 가지고 들어왔더니 교수들이 우리를 막았다"고 말한다.
88년에는 광주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위원회가 '지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심사대상에서 제외했다. 88년 6월 16일 다시 추모비가 세워지고, 89년 이후 끈질기게 이세종 열사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움직임이 계속되는 가운데 조금씩 진전을 보여 95년 2월에야, 전북대학교에서 명예 졸업장을 받게 된다.
이어 98년 10월 광주민주화관련 보상심의회 에서조차 논란을 벌인 끝에 뒤늦게 5.18 사망자로 인정돼 명예회복과 함께 보상을 받고, 99년 4월 비로소 광주 망월동 신묘역 4-11에 안치된다. 광주관련 보상의 기준이 시기, 장소,민주성이고 유독 전남·광주로만 지역을 제한적으로 해석하는 바람에 생겼던 문제다. 모교에 초라한 추모비가 세워지는 데에 5년, 명예졸업장을 받는 데에무려 15년이 걸렸고, 숨진 지 19년만에야 광주 망월동 묘역에 안장됐다.(2003.5.19. 전민일보)
[8] 이세종일지
이세종은 80년 5월 당시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학생회 간부도 아니었지만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컸고 성실해, 자연스레 농성장에 합류, 유인물 배포 활동을 벌였다. 당시 이세종 열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나, 당시 학생운동에 적극적인 KSCM 회원들의 출석 교회에 비해 훨씬 보수적 분위기인 전주 서문교회에 다니는 얌전한 학생이었다.
다음은 전주 서문교회 백년사 기록이다. "본 서문교회 대학부에 성실하게 출석하는 전북대학교 농대 농학과 제2학년에 재학중인 이세종(李世鐘) 군은 당시 군사정권 하에서 민주화운동에 가담하여 다음날의 민주화 투쟁 시위를 준비 계획 중 1980년 5월 18일 밤에 무장한 계엄군이 급습하자 도피하였다.
그가 대학교 건물 3층에까지 추격을 받고 난간에 겨우 의지하여 있을 때 계엄군은 육중한 총대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강타했다. 이세종 군은 처참하게21세 나이로 희생을 당하였다. 그 당시 살벌한 계엄 하에서 그 시신을 김제군 월촌면 향리로 싣고 가서 마을 뒷산에서 서문교회 서은선 목사의 집례로 여러 교인들의 참예 하에 장례를 치렀다."
이세종 열사가 5.18 최초의 희생자.
20년 지나서야 공식 확인! 이세종 열사가 5.18 최초 희생자임을 역사적으로 규명한 사람은 이민규 순천향대 교수(신문방송학)이다. 이민규 교수는 2000년 5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언론보도 분석-검열 삭제된 기사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신군부의 언론검열 실상을 분석 공개하면서 '80년 5월19일자 동아일보'에서 삭제됐던 기사 원문을 공개했다.
이 교수는 이를 근거로, " 5.18최초의 무력진압은 바로 전북대이고 5.18 최초 희생자는 5.17포고령 직후 계엄군의 교내 진입을 피해 달아나다 추락사한 전북대생이 이세종 열사" 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 때까지 20년 동안 '5·18민중항쟁 전북 동지회' 등에서 꾸준히 주장해 오던 것을 처음으로 학계에서 인정하게 된 것이다.
다음은 삭제됐던 동아일보 기사 일부이다. "18일 새벽 1시30분께 전주시 덕진동 전북대 학생회관 3층 옥상에서 동교 농학과 2년 이세종(20,전북 김제군 월촌면 연정리 281)이 13미터 아래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져 숨졌다. 경찰에 따르면 숨진 이 군은 이날 자정 비상계엄령이 전국에 확대 발표된 직후,계엄군이 학교에 진입 학생회관 쪽으로 몰려들자 학생회관 회의실에 있던3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몸을 피해 옥상 밑에 부착된 철제 외등 걸이를 붙잡고 매달렸다가 밑으로 떨어져 숨졌다는 것... "
위의 기사를 살펴보면, 이세종 열사 사망시간은 5월18일 오전 광주에서 계엄군에 의해 사상자가 발생하기 이전이어서 최초의 5월 민중항쟁 희생자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세종 열사 일지]
59년 7월 16일 김제군 월촌면 연정리 출생
80년 5월 전북대 학생회관에서 농성-유인물 제작 담당
80년 5월 18일 자정-1시 30분 전북대 학생회관에서 계엄군에 의해 사망
85년 5월 18일 전북대학교 이세종 광장에 추모비 건립
88년 광주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위원회에 사인 규명과 책임자 처벌 요구서한 묵살
88년 6월 16일 추모비 이전식 및 전북 민주열사 추모사업회 창립보고대회
89년 5월 26일 전북민족민주연합 고 이세종 열사 추모사업회, "이세종과 광주사망자는 동일한 희생자" 주장
94년 8월 12일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 보상 심의 기각(5.18 직전 피해는 5.18희생자가 아니라는 사유)
95년 2월 22일 전북대 명예학위수여
98년 10월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보상심의 3차 신청 끝에 5.18 사망자로 인정(명예회복과 보상)
99년 4월 5일 5.18 관련자로 인정, 국가 유공자 혜택, 광주 망월동 신묘역 묘비순서 4-11에 안치
02년 5월 17일 모교동문들 전라고 교정에 추모비 제막
03년 5월 17일 전북대 민주광장 이세종열사 추모비 확대이전
[9] 먼지가 되어
모여라 오거리로...
5월 19일... 일촉즉발의 상황, 그러나
5월 19일 투쟁 상황-
80년 5월 18일 계엄군 진주 이후, 많은 학생들은 검거를 피해 숨어 있는 시위 지도부를 기다리며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전주를 비롯한 전북에서는 친인척이나 이웃들의 소식을 통해 광주의 참상을 전해들은 시민들이 라면을 사재기하는 소동도 벌어졌다. 이미 그 동안 가두시위와 농성 속에서 서로 얼굴을 익혔으나 덜 조직화돼 있던 학생들은, 거리에서 수인사를 하며 정세를 논의했고, 광주에서 들려 오는 학살의 소식도 입에서 입으로 퍼져 갔다.
이러는 사이, 전주 금암교회, 남문교회, 전북대 흥사단, 전북대 민속극연구회 등에서 활동하던 대학생들이 자연스럽게 광주의 진상을 알리기 위한 투쟁방법을 논의하고, 이중 전북대 민속극연구회 소속 최순희(당시 전북대 독문 3, 92년 사망)를 비롯해 박성욱(전북대 철학 3), 정해동(전북대 사회학과 3, 현 목사) 등이 주도적으로 나서 3,4 개의 모임이 이뤄졌다.
다시 18일로 돌아가면, 계엄군이 대학을 점령한 5월 18일 밤부터 5월 19일 새벽 사이, 전주 시내 곳곳에는 시민들의 궐기를 촉구하는 대자보가 나붙는다. 월요일 하오 5시, 정해동, 이완배(현 교사)등 30여명은 전주시 고사동 오거리에서 시위를 시도했으나, 불과 1, 2분만에 해산, 달아나야 했다. 덕분에 그 시간 주변 당구장 등에 있던 애꿎은 젊은이들이 계엄군들에게 뭇매를 맞으며 연행당하는 풍경도 벌어졌다. 삼엄한 계엄군의 경계 속에 시위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 날 시위 현장에서 계엄군에게 붙잡힌 이흥복(당시 전북대 농학계열 1학년), 유홍렬 등은, 이 시각 오거리 주변에는 엄청난 수의 시민들이 몰려 나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시내에 몰려 있는 걸 지금껏 본 일이 없어요. 제가 헤아려 볼 수는 없었지만, 제 눈에는 2,3만 명쯤 되어 보일 만큼 굉장히 많은 사람이 나와 있었어요." 이 많은 인원이 함께 시위를 벌인 것도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기록은 따로 없다.
그렇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거리에 나와 있었고, 계엄군과 경찰 병력의 삼엄한 경계 속에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지 못했으리라는 점은 생각할 수 있다.그 무리 가운데 정해동, 이완배를 중심으로 한 30여 명이 차도 한 가운데로 뛰어 나와 시위를 벌인 점은, 비록 잠깐으로 그쳤을망정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수많은 군중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가운데 벌어진 이들 대학생들의 시위가, 상황이 조금만 달랐더라면 광주와 같은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을지도 모를 일이고, 만일 군, 경찰병력과 직접 충돌하는 사태로 갔더라면 어떤 사태로 증폭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날 하오, 전주 역에서 가까운 고사동 오거리, 또 미원탑, 시청(지금의 기업은행 전주지점 자리) 앞 등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있었고, 전북대 등 각 대학에서 며칠 전까지 시위, 농성을 벌였던 이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거리거리에 진치고 있던 탱크의 위압과 계엄군의 살벌한 표정, 경찰의 감시 따위가 5월 19일 전주의 시민들을 몹시도 무겁게 짓눌렀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날 이미 이웃 광주에서는 엄청난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는 걸 감안할 때, 전주에는 더욱 삼엄한 경계가 내려져 있었을 것이란 짐작은 쉽게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오거리에서 잠시나마 구호를 외치며 호소하던 소수의 시위학생들은 황급히 달려오는 경찰 병력을 피해 전주역 쪽으로 뛰었고, 일부는 마침 지나가던 시내버스에 올라타고 달아나기도 했다. 먼저 용감하게 나선 시위대열이 허무하게 흩어지고 무장병력이 눈을 부릅뜨고 뒤쫓는 상황에서, 인도에서 숨죽이고 있던 대다수의 시민들이 시위에 합류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을 알려라...
잡히고 흩어진 동지들
5월 24일 유인물 배포작전-
5월 19일 전북대 민속극연구회의 탈춤꾼 최순희, 박성욱 등은 김상배(당시 방위병)의 집에서 모임을 갖는다. 이들은 유인물을 통해 신군부의 만행과 광주의 참상을 알리기로 했다. 모든 매스컴이 차단된 상태에서 신군부의 만행과 도구로 유인물은 유일한 수단이었다. 다음날 이들은 쉽게 다른 모임과 연결돼 의견을 같이한다. 23일 전주시 효자동 효자아파트 5동 307호에 10여명이 모였다.
전주 금암교회 등사기로 유인물을 찍고, 이승희(당시 전북대 경제3), 정해동,최순희 등이 책임을 맡아 20여명의 유인물 배포조가 짜여졌다. 이들은 신군부에 대한 폭로, 광주 학살 소식을 주 내용으로 24일 하오 2시 오거리에 모여 시위할 것을 호소하는 내용의 유인물을 작성했다. 유인물을 뿌리는 시점은24일 새벽, 전주시내 전역에 뿌리기로 했다.
한편, 이승희는 이날 밤 광주를 탈출해 전주에 도착한 김현장과 김현장과 엠네스티(국제사면위) 후배인 노동길(전북대 80년 졸업생)을 만난다. 김현장을 통해 노동길과 이승희는 광주의 진상을 상세히 알게 되고, 김현장이 작성한 전주환의 광주학살작전이라는 유인물을 24일 하오 2시를 전후해 배포하기로 한다.
5월 24일 두 종류의 유인물이 전주시내 전역에 뿌려진다. 새벽 4시 30분부터5시 30분 사이 전북대생들이 제작한 '시민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제하의 유인물이 전주시내 전역에 뿌려졌다. 정해동은 덕진동 주택가, 이승희는 풍남동과 교동, 박영식은 인후동 주택가에서 유인물을 돌린다. 정오가 되자 비상이 걸린 계엄군이 35사단에서 출동해 전주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오후 1시 전주 중앙성당에서는 김현장이 작성한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이라는 제하의 유인물이 학생들의 손에 나눠지고, 박성욱, 이승희, 박영식, 정기일, 정찬홍 등 전북대생들은 시내버스 정류소와 육교 등을 다니며 유인물을 시민들에게 뿌린다. 오후 2시 시위 예정장소인 오거리에서 박영식을 비롯, 여러 명이 사복형사들에 의해 체포된다.
다른 이들은 경찰을 피해 숨었으나, 일주일 여 만인 6월 초 정해동, 이승희,황 철 등 9명이 체포된다. 전주경찰서에 구금됐다가 35사단 헌병대로 압송된 이들 가운데 정해동, 이승희, 박영식은 기소돼 광주 전투교육사령부 헌병대 감옥으로 이송된다. 주동자 중 최순희는 검거망을 피해 다니던 중 7월 10일 경찰에 체포됐다가 7월 25일 석방된다.(만 18세의 미성년자였고, 앞서 잡힌 이승희 등이 이미 계엄당국으로 넘겨져 사건이 종결됐던 덕분으로 보인다.)
(전민일보 2003.5.20)
[10] 김현장과 노동길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을 알려라!
전주에서 유인물 제작, 전국으로
80년 5월 광주를 탈출한 김현장이 작성한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 유인물은 전주에서 제작돼 전국으로 전해진다. '무등산 타잔 사건'의 기록자인 자유기고가 김현장은 광주의 참상을 목도하고 삼엄한 경계를 빠져 나와 걸어서 장성에 도착한다. 정읍을 거쳐 전주로 온 그는 천주교 전주교구청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전두환의 광주 살육작전"과 참상을 담은 유인물을 대량 제작, 노동길 등과 함께 배포를 상의한다.
그 해 대학을 졸업하고 정읍 산외의 집에 머물던 노동길은, 김현장의 연락을 받고 전주로 와 유인물 살포 작전에 합류한다. 김현장은 엠네스티 전북지부 수련회에 초청연사로 오는 등 전주에 자주 다니면서 전주 사람들과 교류했고, 노동길은 대학생 신분이던 78년경 엠네스티 회원으로 여러 모임에 참석하면서 김현장과 친분을 맺은 사이다.
5월 24일 새벽, 노동길은 이승희와 함께 평화동 장승백이 너머 한상렬(현 전주고백교회 목사)의 집으로 간다. 집 앞에 도착해 보니, 이상한 사람들이 골목에 서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면서 1시간 넘게 기다려 보다가, 결국 한상렬의 집에 들어갔다. 이들은 유인물을 전동성당으로 옮겨와 이승희, 박영식 등을 통해 전주시내에 배포할 수 있도록 전달한데 이어서, 유인물을 다른 도시로 운반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두 사람은 B4 용지 크기에 등사기로 인쇄한 유인물 5천 매씩을 대형 여행용 트렁크에 담았다. 김현장은 대구로, 노동길은 부산으로 전달하기로 하고, 전주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부산행 버스를 탄다. 유인물 운반 전날에 미리 노선까지 답사해 검문이 없는 것을 확인했으나, 가는 도중 세 차례나 검문을 받았다.
광주가 마무리되면서 전국적으로 하룻밤 사이에 검문소가 설치된 것이다. 김현장은 함양에서 대구행으로 갈아탔다. 노동길은 전주에서 출발한 버스를 그대로 타고 있었다. 그러나 함양에서 얼마 못 가 무장군인들이 지키는 검문소를 만나게 되고, 노동길은 유인물과 함께 붙잡히고 만다. 뒤이은 차량행렬 속의 대구행 버스에 타고 있던 김현장은 겨우 달아나, 천주교 원주교구청의 최기식 신부에게 의지해 숨어 지내게 된다.
[11] 기억 저 편의 그대들
휴교 후 첫 개강일 시위 나서...그날, 우린 벙어리가 되었다
6/24 전북의대생 시위사건
"아침밥도 먹지 않고 집을 나서려는데 어머니께서 어떻게 수상쩍은 기미를 알았는지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어제 밤에 어머니와 함께 있고 싶었으나 여의치 못했다. 지난밤에 죽음을 각오하고 나니 떠오르는 어머니 생각에 나 자신도 눈물을 흘렸다. 집을 막 나가려는 순간 어머니께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바라보셨다. (이상보의 회고)"
80년 6월 24일, 5.18이후 휴교 중이던 전국의 대학 중 전북대 의대가 가장 먼저 개강했다. 의과 대학 본과 4학년에 대해 학교 자율에 의해 휴교조치를 해제 할 수 있도록 함에 따라 이뤄진 개강이었다. 전북대 의과대(현 전주시 경원동 전북도2청사) 200여 평 남짓한 운동장에는 계엄군이 몇 개의 막사를 치고 주둔 중이었고, 정문에는 총을 든 계엄군 2명이 좌우로 지키고 있었다.
이미 며칠 전부터 시위를 계획했던 4학년생 이상보는 제 3 강의실에 들어가서 칠판에 글을 썼다. "4학년생은 9시까지 제3 강의실에 모일 것" 대부분의 학생들이 모였고, 이상보가 회의를 진행했다. 창 밖으로 총 든 계엄군의 모습이 보이는데도, 학생들은 모두 적극적이었다. 제 1안은 가두시위였고, 제 2안 은 동맹휴학이었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실습생이 오지 않자 교수들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몇 분이 강의실로 왔다.
단순한 학급회의라고 얼버무렸지만, 교수들의 눈치를 무마하느라 시간이 촉박해졌다. 일단 나가기로 했다. 정문은 계엄군이 지키고 있어 포기하고 대학병원 옥상으로 모였으나, 우왕좌왕하는 중에 교수들이 와서 말리는 것이었다. 결국 학생들은 계엄군이 지키고 있는 정문을 개별적으로 통과해 병원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모여 팔달로 쪽으로 나갔다.
그러나 곳곳에 무장한 계엄군이 지키고 선 가운데 학생들은 그저 침묵하며 걸을 뿐이었다. 이상보는 훗날 '우린 벙어리가 되었다'고 회상했다. 학생들은 차도 오른쪽으로 줄을 서서 1km 쯤을 걷다가 우체국 부근에서 멈추고 대책을 얘기한다. 전 의대생을 모두 연락해 하오 8시 미원탑 앞에서 기습시위를 하기로 했다. 이상보는 30분쯤 전에 미원탑 앞으로 갔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로 혼잡했다.
알고 보니, 학교 측의 연락을 받아 학생들을 찾으러 나온 가족들, 학교 직원들, 사복 형사들이 몰려 있는 것이었다. 시위는 실패했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몇몇이 구호를 외쳤으나 이내 연행되고 만다. 현장에서는 시위에 참여하려던 20여명이 연행되고 이 중에는 3학년생 도병룡, 정영원도 포함됐다.
시위를 주동했던 이상보(현 완주 이서의원 원장)는 며칠 뒤인 7월 초 검거돼 보안대, 35사단 헌병대를 거치며 고초를 겪게 되고, 10월 초 광주 전투교육사령부 군법재판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복역 중에 형집행 면제조치로 석방된다. 전국의 의과대학 가운데 가장 먼저 개강했던 전북의대생들의 시위 사건 덕분에, 다른 의과 대학의 개강도 미뤄지고 말았다.
(다음 호에 이어짐)
▲당시 연행자 일부 명단: 4학년 김영호(현 김영호 흉부외과원장), 이효성(현 실로암안과 원장 ), 박철영(현 전주병원 일반외과과장), 유관희(현 유관희내과원장), 이희섭(원대 산부인과 교수), 이황호(전북대의대교수,미생물학 ), 황호영( 전 군산황호영외과원장), 박철우(현 평택 박철우소아과원장), 임일성(서울 임피부비뇨기과의원) 3학년 도병룡(기독병원장), 정영원
(전민일보 2003. 5.21)
[12] 평범한 사람 이흥복의 '5월병'
(편집자 붙임: 연재를 하던 중, 80년 5월 19일의 시위(본지 5월 20일자)와 관련한 증언을 더 들을 수 있었다. 그 동안 짧은 기록에 그쳤던 5월 19일 시위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접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더불어 아주 평범한 학생이었고, 지금도 평범하기만 한 보통 시민이 겪어야 했던 그 날의 참담한 비극을, 지면에 옮긴다.) ▶
너무도 끔찍했던 20일 동안의 기억.. 인생에서 지울 수 없는 고통 본인의 말을 빌면, "민주"가 뭔지 "의식"이 뭔지도 도통 모르는 이흥복(43,현 광고사 운영)은 80년 당시 전북대 농학계열 1학년이었다. 그저 젊은 혈기에 선배들이 이끄는 시위에 참여하고 농성장에 다니고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80년 5월 19일 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된다. 5월 19일 새벽, 그와 다른 전북대생 3명은 함께 인후동 동중 옆 누군가의 자취방에서 대자보를 작성해 주택가를 돌며 담벼락에 붙인다. "농성 중이던 학우들이 계엄군에게 모두 붙들려 갔다. 오거리에 모이자."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함께 대자보를 썼던 이들이 같은 전북대 1학년이었다는 점과 이 중 '전종원'이라는 이름만 기억하고 있다.
"하오 4시 오거리로 나갔다. 삼엄한 경계 속에서, 사람들은 그 동안 시위현장, 농성장에서 익힌 얼굴들만 확인하며 주위를 살필 뿐 누구도 쉽게 나서지 못했다. 누군가가 스치듯 지나가며 '시청 5시'하고 속삭인다. 그러나 시청 앞에 가서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이번에는 '역전 5시 반'이라는 속삭임이 들린다.
다시 역전으로 갔다. 역전 오거리에서 누군가가 소리치며 차도로 뛰어든다.낯익은 얼굴들이 순식간에 모여든다. 나도 모르게 뛰어 들어갔다. "비상계엄 철폐하라" 구호가 몇 마디 나오다 말고 사납게 들려 오는 군화발 소리, 다시 대열이 흩어지고 모두들 뛰기 시작한다. 나도 무조건 인도로 뛰어들어 아닌 척 하고 걷는다."
그러나 이흥복은 대위 계급장을 단 공수부대 장교와 맞닥뜨리고 만다. "신분증 내놔 봐" 하는 소리에 수첩을 꺼냈는데 그 안에 숨겨뒀던 '민주회복'이란 검은 리본이 툭 떨어진다. 순간 몸을 돌려 죽어라 달려봤지만 권총을 빼들고 쫓아 온 장교에게 몇 걸음 못 가 사로잡힌다. 붙잡힌 그는 그 자리에서 늘씬 두들겨 맞고, 군인들이 대기 중이던 트럭에 실려 다시 20여명으로부터 집단 구타를 당한다.
"얼마나 맞았는지, 기절했다가 겨우 깨어나는데 그때까지 군화발로 지근지근 밟고 있더군요." 그는 다시 근처에 있던 장갑차에 태워졌다. 군인 7명이 타고 있던 장갑차는 초죽음이 된 그를 태운 채 한참을 달렸다. 좁은 창 틈으로 밖을 보니, 시내를 한 바퀴 도는 것 같았다. "남부시장 풍경이 보이고, 전주천이 보이더니, 남도주유소 근처인 것 같더군요." "병아리 어디 있나"하는 무전기 음이 들리더니, 대령 계급장을 단 장교가 들어온다.
장교는 대뜸 권총을 빼고 겨눈 채 묻는다. "네가 누군지 아나?" 갓 스물의 이흥복이 알 리가 없다. "나 전북지역 작전참모야 임마" 권총 개머리판이 사정없이 날아든다. 한참 뒤 닭장차로 옮겨지자, 지옥에서 빠져 나온 것만 같다.그러나 전주경찰서에서도 형사들의 주먹과 발길질이 이어진다. 5월 23일쯤이었을까?
어찌나 맞았는지 만신창이가 돼 버린 그는 다른 이들과 함께 35사단 헌병대 유치장으로 이송되지만 여기서는 구타보다 더 비참한 기억이 있다. 그는 여학생 7명, 남학생 32명이 갇혀 있었다고 기억한다. 식사는 4명당 식판 하나였다. 연일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는 고통과 배고픔에 시달리는 청춘들에게 1인분의 식사를 4명이 같이 먹어야 한다는 건, 너무도 가혹하고 비인간적인 일이었다.
당사자가 더 이상 표현을 하지 못했으니, 나머지는 상상에 맡기자. 이런 행위가 민주화의 열정 하나로 뭉쳐진 이들의 심리상태를 어떻게 만들어 놓았을까? 화장실은 항상 단체로 가야 했고, 한 사람이 일을 보는 동안 다음 사람이 지켜 서서 열을 세야 했다. 다 셀 때까지 나오지 않으면 동료가 일을 보는 화장실에 돌멩이를 던져야만 했다. 물론 강제로 말이다.
이흥복은 경찰서와 헌병대를 합쳐 한 20일쯤 갇혀 있다가 풀려 나왔다. "보증인이 있어야 풀어준다는데, 보증할 사람이 없다고 전화 한 통 하게 해 달랬지요. 석방 심사를 하는 보안대 옆이 모교인 전라고였어요. 학교에 전화를 했더니 일요일이었는데 마침 1학년 때 담임이던 임창원 선생님(현 군산대 사회과학대 교수)이 계시기에 사정을 말씀드렸죠."
선생님은 한달음에 달려와 "피보증인이 시위에 가담할 경우 옷을 벗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써 준다. 이렇게 풀려난 그는, 그러나 극도로 몸이 쇠약해져 있었다. 전북대 병원에서 진찰을 받아 보니 간, 폐, 허리 등이 몹쓸 상태였고,결국 다음해인 81년에는 시내 강준석 내과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에게 80년 5월의 이 끔찍한 경험은, 인생을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었다. 짧은 기간에 그에게 닥친 시련과 고통은 그의 청춘을 병마에 시달리게 했고, 대학을 겨우 졸업한 뒤 취업도 어렵게 만들었다. 이렇듯 80년 5월의 비극은 평범한 대학생들에게도 닥쳐 왔다. 이는 비단 이흥복 한 사람만의 비극이 아니다.
일일이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80년 당시 신군부에 저항했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렇게 참혹한 시련을 겪었고, 이는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가 되고 말았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전민일보 2003.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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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성지야학
<*편집자 붙임*> 80년 5월 당시 전주 신흥고생 의거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알려진 고교생투쟁이다. 여기에는, 5월 27일 시위 사건과 이후 유인물 배포 사건, 또 김제 성지야학 유인물 사건이 맞물린다. 거사 계획은 두 군데 이상에서 준비돼 하나로 연결되지만, 전개과정에서 관련 인물이 경찰에 붙잡힘에 따라 별개의 사건처럼 마무리된다.
또, 신흥고의 시위 주동학생들은 사건 마무리 과정에서 붙잡히지 않고 슬기롭게 빠져나감으로서 마치 작은 사건처럼 치부된 경향이 있었다. 신흥고 시위 사건은 이상호, 이우봉 등이 이미 정리한 상황과 성지야학 하연호, 당시 신흥고생 이성호의 증언, 신흥고 자료를 참고했으나, 증언들이 부분적이고,날짜가 부정확해 시간상 엇갈리는 점도 있다. 이 사건은 그 준비과정과 전개상황 등을 상세하게 바라 볼 필요가 있어, 전편과 후편으로 나눠 연재한다.
▶성지야학
1970년대 중반 기청(한국기독교장로회 청년회)활동을 해 오던 하연호(전북대 농과 72학번, 현 민주주의민족통일전주완주연합 의장), 이상호(당시 완산여상 교사)등은, 유신체제 아래 농촌 주민을 자각시키는 방법의 하나로, 중학교 과정 검정고시 야학, 성지야학을 시작하게 된다. 야학은 처음 김제읍 검산리 호남잠사 앞에서 시작, 당시 지역 최대 공장이던 호남잠사 직공들이 많이 다니게 되었다.
대학생 교사들보다 나이 많은 여공들도 학생 중에 있었다. 1976년 문을 연 성지 야학은, 주민들에 대한 경찰의 압력 속에 신풍리, 모샛멀 등의 마을회관으로 장소를 옮겨 다녀야 했다. 유재민(현 지하철 공사 노조 활동), 조정호(현 싱가폴 거주), 박화룡(부천 거주), 박성균(현 학원강사), 최철원(현 의료보험조합 전주북부지사 근무), 김영호(현 덕진중 교사), 나현균(당시 서울대생, 현대자동차 해고노동자 출신으로 현재 원광대 한의대 재학)등 전북대생들이 교사로 나섰다.
이들은 야학에서 독서 토론을 했고, 서울지역 야학과 함께 수련회도 가졌다.이후 81년부터는 고교과정도 따로 개설했으나, 80년 5.18 이후에는 탄압이 더욱 심해져 교사들을 못 나가게 만드는 일이 허다했고, 시간이 갈수록 야학 수요도 줄어들어, 83년 김제읍 교동리 성산 밑 마을회관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는다.
[14] 신흥고 거사모의
신흥고생들의 거사 모의는 최소한 5/27 시위 1-2 주 이전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우봉은, "80년 4월, 신흥고 3학년생 박영화(당시 금암교회 출석)가 청소시간에 친구 김인수를 만나 뭔가 해야 하지 않느냐고 제안한 것이 발단이 되어, 4월말 시험 이후 박영화, 김인수, 허천일, 이재유, 김의신 5명이 몰래 만나기 시작했다. 이들 중 박영화가 학교간 연대 필요성을 제기하고, 금암교회 선배 김명희, 이상호와 함께 남성고, 성심여고, 완산여상, 전주고, 기전여고 등 여러 학교 학생이 만나, 동시에 시위를 하자는 논의를 했다."고 정리(당시 주동자들의 증언을 모음)했다.
또, 당시 3학년 2반 종교부장이던 이성호는 KSCM 회원 허천일, 김인수 등이 이미 계획을 세우고 난 뒤에 문과 조영진(3-1종교부장)과 자신 등을 끌어 들여 몇 일에 걸쳐 만났다"고 말했다. 참고로, 신흥고 자료집(1990 발간)은 "5월 19일부터 22일까지 중간고사 기간 중 박영화 등 6명이 모임"으로부터 사건을 기록했다.
한편, 당시 기청 전국연합회장이던 하연호는, 농촌관련 취재를 쓰기 위해 김제에 온 광주의 김현장(당시 자유기고가)을 5월 15일에 만난다. (증언을 모아보면, 김현장은 5.18 이전 김제에 왔고, 20일을 전후해 다시 전주, 김제에 온 것으로 보인다.) 하연호 등 성지야학 교사들은 김현장에게서 광주의 참상을 전해 듣고, 대책을 세운다. 5월 20일부터 김제읍 신곡리에서 3,4차례 가진 모임에서, "대학이 휴교중이니 고교생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해 보자."는 계획이 세워진다.
5월 24일쯤, 하연호는 당시 한일신학교 학생이던 김명희(KSCF 회원)를 이상호에게 소개한다. 김명희는 현장에서 학생들을 움직이게 할 '디머(행동을 지휘하는 주동자)'로, 하연호 등 교사들은 유인물 제작조와 운반조로, 이상호는 유인물 전달자로 역할을 맡았다. 이들은 먼저 기독교 학교인데다, KSCM 조직이 있는 신흥고를 주목하고, 다음으로 전주여고, 해성고 등을 계획에 넣었다. 고교 교사이던 이상호는 활동적인 성격을 발휘해 따로 시내버스를 타고 다니며 고등학생들을 만난다.
5월 24일-25일
5월 24일부터 사흘 동안 박영화를 비롯한 주동 학생들은 매우 바쁘게 움직였다. 증언을 종합할 때, 여러 명으로 나뉘어 준비에 돌입한 것으로 보인다. "D데이를 5월 29일로 잡고 연대시위를 논의했으나, 광주항쟁 소식이 들려왔고, 상황이 심상치 않자 일정을 27일로 당긴다. 유인물, 현수막 준비문제로 깜깜한 밤에 시골 어디론가(김제 야학으로 추정됨)이동하기도 했다. 그때 만난 대학생이 유인물을 준비해 5월 26일 미원탑 네거리 전화국에서 만나기로 했다."(이우봉) "중간고사가 끝난 5월 24일 학생들은 전주 신상교회 백윤석 목사를 방문해 조언을 들었고, 이날 저녁 허천일의 집에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시위 날짜는 5월 27일, 전날인 26일에 예비모임을 갖기로 하고, 각 반 실장과 종교부장, 학생회 간부를 중심 인원으로 확보하고, '애국 신흥인에게 고함'이라는 전단 초안을 작성했다.(신흥고 자료집) "26일 밤, 다가동 천변 조영진의 하숙집에서 만나 예배시간에 부를 찬송가를 뽑고 행동계획을 얘기하는 사이,다른 하숙생 유복근, 오봉수 등도 계획을 알게 됐다."(이성호)
급박했던 D-1
야학교사들은 경찰의 눈을 피해 부친이 김제군청 총무과장인 박성균의 집 지하실에 등사기를 가져와, 25일 밤새 유인물을 찍었다.(이후 박성균의 부친은 보직 해임되는 수난을 겪는다.) 이들은, 26일 저녁 유인물을 전주로 옮기고, 27일 아침에는 모두 피하기로 했다. 그러나 유인물을 싸 들고 전주행 버스를 탄 조정호와 유재민이 그만 꼬리를 밟힌다.
이상호는 전주 장승백이의 하숙집에서 유인물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던 중, 두 사람을 쫓아 들어온 사복형사들에게 함께 연행된다. 이들을 닥달한 경찰은 불과 몇 시간만에 관련자들을 캐내고, 아직 집에 있던 하연호 등 6명은, 한밤중에 들이닥친 형사들에게 무방비상태로 연행된다. (이중 박성균은 마침 집에 없어, 경찰은 그의 형을 대신 볼모처럼 잡아갔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던 이날 밤, 신흥고 3학년 각반 종교부장, 반장, 학생회 간부 등 20여 명이 전주시 다가동 파출소 옆 웅변학원에 모였다. 문과반은 방송실 점거, 7,8반은 1학년 동원책임, 3,4반은 2학년 동원책임, 이렇게 역할을 분담하고 2학년생 허민, 차춘남 등이 2학년을 동원하기로 했다. 2학년생으로 참여한 허민, 차춘남, 강동호, 사재훈 등은 KSCM 후배들이었다. 이들은,아침 자율학습에 각 반 실장이 거사내용을 학생들에게 알리고, 종교부장이 주관하는 학급 예배가 끝나면 1교시 시작종을 신호로 운동장에 모여 거리로 나가기로 했다.
시위가 무산되면, 각자 흩어졌다가 미원탑에 집결하기로 했다. 이들은 시위가 용공이 아님을 알리는 서신을 두 통 작성해, 경찰서와 시청에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김제로부터 도착할 유인물 조가 경찰에 붙잡혔기 때문에, 이들을 만나러 간 선배 김명희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직접 유인물을 제작하기로 하고 26일 밤에 허천일이 다니던 신상교회로 모여 유인물을 제작했다.
박영화, 이재유, 허천일, 김인수, 이중길, 2학년 몇 명, 김명희 선배 등 10여명이 열심히 '가리방'을 긁어대 '아! 민족사의 비극이다'라고 시작하는 유인물을 찍어냈다."(이우봉) 이성호 등의 증언을 들어보면, 이들이 유인물을 찍은 곳은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곳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노출된 시위계획
이들은 당시 다른 학교도 차질 없이 시위를 준비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경찰은 이들의 움직임을 감지했다. 27일 아침, 박영화는 이른 아침 옷을 갈아입으러 자취방에 갔다. 그러나 한 골목 안에서 자취를 하던 친구 배을섭이 양치질을 하다 눈짓으로 형사들이 숨어 있다는 신호를 보낸다.
박영화는 이내 몸을 돌려 도망쳤다. 계획이 노출된 이유는 석연치 않다. 이우봉은 유인물을 운반하다 잡힌 대학생을 통해 이상호, 박영화가 차례로 노출됐다고 정리했으나, 당시 기전여고에서 시위를 계획하던 학생 1명이 "광주에 생필품이 부족하다니 쌀 좀 사다 둬야 한다"는 말을 했다가 엄마의 추궁에 들통이 나고 경찰과 학교에 알려졌다는 설도 있다. (전민일보 2003.5.22)
[15] 신흥고 5.27 시위(상)|
80년 5월 27일 새벽, 신흥고 정옥동 교감에게 도교육위원회 장학사의 전화가 걸려 온다. 학생들 동태가 심상치 않으니, 일찍 출근해 대책을 세우라는 것이다. 교사들은 평소보다 1시간 일찍 출근해 학급마다 학생들을 살폈지만 아무 이상이 없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학교에는 장학사와 담당 형사가 급파돼 있었다. 이런 움직임을 모른 채 등교한 학생들은 쪽지를 통해 교실마다 행동계획을 전한다. 아침 예배시간, 목이 터져라 부르는 학생들의 찬송소리는 평소와 달리 격정적이고 우렁차서, 이미 학교 상공을 맴도는 헬기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기도 순서가 되자, 교실마다 통성 기도가 터져 나왔다. 학생들의 표정은 격앙돼 있었다. 당초, 교사들이 교무회의를 하는 동안에 나갈 계획이었지만, 신호가 될 8시 1교시 시작종은 울리지 않았다. 이미 학교측은 유종철 교목과 생활지도부장, 교련교사 등이 3학년 반장과 학도호국단 간부 20여명을 신흥중 과학실에 불러 설득 중이었다. 교실에 갑자기 교사들이 들어오고 3학년 방송수업이 시작되자, 먼저 문과 반 학생들이 급히 교실 문을 박차고 나온다.
3학년 2반에서는 이성호가, 담임 강명수 선생을 밀치고 나오고, 3학년 1반 박일규는 방송실로 곧장 뛰어가, 방송수업 중이던 문봉길 선생의 마이크를 나꿔챈다. (평소 사회 현실에 관한 발언으로 학생들로부터 존경받던 문 선생은, 이 순간 순순히 마이크를 넘겨줬다) 이어 이과 반 학생들이 뛰쳐나와 3학년 모두 운동장에 모이고, 몇몇 학생들은 1, 2학년생을 불러내 순식간에 신흥고생 1천5백여 명 전체가 집결, '오 자유!' 등의 노래를 부르고 '비상계엄 철폐', '유신잔당 척결' 등 구호를 외친다.
3학년 고 석은 마이크를 잡고 '애국신흥인에게 고함'이라는 유인물을 낭독하고 "우리를 말리는 선생님들은 역사의 반역자가 될 것"이라고 연설한다. 헬기가 상공을 맴도는 학교 주변은 군인과 경찰 5백여 명이 총을 겨눈 채 둘러쌌고, 다가교 옆에 페퍼포그 차량 2대가 서 있었다.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운동장을 돌다 교문을 향해 달려가지만, 교문 옆 느티나무 쪽에 서 있던 교사들이 가로막았다. 몇몇 교사는 막대기를 휘두르며 "나가면 너희들 다 죽어!"외치며 결사적으로 막았고, 어떤 교사는 '군의 발포명령'소식을 전해 주며 자제를 당부했다.
이때 주임교사 강규원 선생은 제자들에게 밀려 넘어졌는데, 나중에 "교사생활 중 이렇게 기분 좋았던 적이 없었다"고 학생들 앞에서 회고했다 한다. 시위대열은 결국 교문을 돌파하지 못하고 운동장으로 발길을 돌려, 다시 스크럼을 짜고 1시간 반 동안이나 시위를 한다. 3학년생 이찬규는 자작시를 방송으로 낭송하기도 했다. 이들은 당초 9시 10분 안에 다가교를 건너 시내로 나갈 계획을 세웠지만, 시간은 벌써 9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당시, 다가공원에 경찰 병력이 배치되는 시각이 9시 반쯤이었다.) 전주천 변에 사람들이 몰려 서서 건너다보고 있었고, 교문 밖에서 대검이 반짝 반짝 빛나는 게 보였다.
바로 옆 기전여고와 신흥중 건물에서는 학생들이 쫑긋이 고개를 내밀고 지켜보고 있었으며, 더러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도 보였다. 집회 도중 전원이 차단돼 방송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되자 잠시 분위기가 가라앉는 듯 했지만,한 학생이 단상에 올라 기도를 시작하자 모든 학생이 통성기도를 한다. 학생대표들은, 시국공청회를 하며 현 시국의 진실을 알리자고 결정, 10시 30분쯤 강당으로 들어간다. 강당 안에서 집회를 하는 동안, 정양 선생 등 교사 2명은 바깥 상황을 학생들에게 전해주기도 했다.
도교육위원회와 도경 간부들이 앞장선 학생 몇(배을섭, 이성호 등)과 협상하는 사이, 학도호국단 간부들과 반장들은 교사들의 설득으로 반 별로 의견을 모은다. 학생들은 교사들의 설득 속에 의견이 분분하고, 3학년 대표들이 다시 모이지만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결국 12시쯤 자진 해산한다. 정옥동 교감은 경찰 측에 병력을 철수해 학생들을 맘놓고 귀가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고, 오후 1시쯤 1, 2학년부터 하교를 시작한다. 그러나 몇몇 경찰이 남아 주동학생을 연행할 기미를 보이자, 주동 학생들은 1, 2학년 틈에 끼어 먼저 가거나, 신흥중학생들과 교복 윗도리를 바꿔 입고 교문을 나섰다.
몇몇은 기전여고 쪽 산으로 넘어 갔다. 시위 이후 신흥고는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휴업을 하고, 양영옥 교장은 시위사태가 재발하면 모든 책임을 지기로 계엄사령부와 타협해, 경찰에 불려 가 조사 받은 주동학생들도 모두 훈방된다. 그러나 개교 이후로도 교내 여기저기서 낙서가 발견되는 등 긴장감이 돌고, 결국 6월 17일 징계위원회가 열려 모두 25명을 징계한다. (다음으로...)
[16] 신흥고 5/27시위(하)|
제목 : 신흥고 5/27시위(하)
한 달 가까이 신출귀몰, 외로운 싸움
이강희, 이우봉의 유인물 배포사건 휴교기간이 끝나고 다시 등교를 하게 되었으나, 학생들의 표정은 침울했다. 신흥고 3학년 이강희는 친구 이우봉에게"시위가 무산됐는데 다시 시작해봐야 하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둘은 다른 친구들에게 의사를 타진해봤으나 쉽지 않아 결국 둘만이 외로운 싸움을 결행하기로 한다. 광주의 참담한 사태가 이미 막을 내린 뒤라, 둘은 광주에 가기도 하고, 목회자들을 만나 간접적인 조언을 받기도 하면서 행동을 준비한다.
이들은 먼저 광주항쟁을 전 학교에 알리기 위해 낙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페인트를 사 들고 전주 시내 전 고등학교를 밤마다 며칠에 걸쳐 돌며 "계엄 해제하라" "전두환이 광주시민 2천명을 학살했다" "고등학생들이여 총궐기하자" 등 구호를 벽과 시멘트 바닥에 적고 다녔다. 도중에 성심여고에서는 경비에게 들키기도 했다. 신흥고에도 구호를 적어 놓고 다음날 등교해 보니,학교측에서 구호 위에다 페인트로 덧칠을 해서 글자가 희미해졌지만 학생들은 술렁대기 시작하였다.
이강희, 이우봉은 이제 유인물 작업을 하기로 했다. 등사기와 철펜 등은 이강희가 다니던 중앙교회에서 핑계를 둘러대 빌렸고, 유인물을 쓸 기초내용은 교회 선배인 이광영에게서 유인물 한 뭉치를 얻어 왔다. 유인물을 인쇄할 종이는 보충수업비, 참고서 구입비를 쏟아 붓고 모자라, 정학 당한 친구들에게서 갹출해 사들였다. 둘은, 밤을 새워 이강희 방에서 가리방을 긁어 "전주시내 고등학생들에게 드리는 글-고등학생들이여 총궐기하자"는 제목의 유인물을 찍었다.
다음날 밤 각자 한 학교씩을 맡아 교실, 화장실, 복도 등 고등학교 전역에 유인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전 낙서사건 덕분인지 학교경비는 갈수록 강화됐고, 다음날 등교해보면 대부분 수거되고 학생들 손에는 불과 몇 장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사정은 어려워진다. 3학년 보충수업이 끝나고 밤 11시를 넘어 유인물을 들고 나가, 학교 근처 숲이나 건물옥상에 숨어 경비가 순찰 도는 주기를 계산해 보면, 날이 갈수록 그 주기가 짧아지고 있었다.
이들은 결국 시내 주택가에 유인물을 배포하기로 하고 "전주시민에게 드리는 글-전주시민이여 총 궐기합시다"라는 제목으로 전두환이 정권을 잡기 위해 광주시민 2천명을 참혹하게 학살했다는 내용의 유인물을 만들었다. 이들은 밤새 건물 안에 숨어 있다가 통행금지가 풀리는 시간부터 주택가에 배포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유창훈이 가세해, 이강희와 함께 다니며 유인물을 뿌렸다. 밤을 꼬박 새워 유인물을 찍고, 새벽 4시부터 배포한 뒤 등교하는 일정이 며칠동안 이어지다 보니 십대의 체력도 한계가 드러났다.
6월말이 되자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배포하고, 징계를 당한 친구들이 등교하면 다른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그러나 마지막 배포에 나선 이강희, 유창훈이 어느 아파트에서 경비에게 들켜 남은 유인물을 갖고 돌아오자, 이우봉이 자신이 사는 교동에 배포하겠다며 갖고 나갔다가 경찰에 연행되고 만다. 당시 경찰은 "거의 한달 가까이 신출귀몰해 큰 조직이 움직이는 것으로 보고 있었는데 잡고 보니 애숭이"라며 배후조직을 캔다고 이들을 모질게 다루며 추궁했다. 이강희, 이우봉은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 퇴학당하고, 유창훈은 훈방, 선배 이광영은 전주 35사단 헌병대까지 갔다가 훈방된다.
당시 신흥고 징계 내용
<지도휴학> 3학년 박영화(이후 자퇴)
<무기정학> 3학년 박일규, 고 석, 채범석, 김인수, 이재유, 허천일, 2학년 허민,
<3주 정학> 3학년 박현수, 김의신, 2학년 차춘남
<2주 정학> 3학년 조인구, 조영진, 유건영, 김용선, 김진길, 신영재, 김남규,이중길, 배을섭, 이정우, 최이천, 전정철
<1주 정학> 강원국, 황찬규
*징계학생 외에 3학년 이성호가 자퇴했고, 교사 중 문봉길, 최용식 선생이 구속, 해직 당한다. 또, 이들에게 성지야학으로부터 유인물을 전달하려던 한일신학교 김명희는 붙잡힌 뒤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완산여상 교사 이상호는 징역 1년을 선고받는다.*
(전민일보 2003.5.23)
[17] 5월에 만난 사람들
5월특집 [10회]오월에 만난 사람들
<끊이지 않는 항쟁과 고난>
80년 5.18 이후 신 군부는 유언비어 유포와 사회정화라는 명분 등으로 사회 각층의 민주화 인사를 탄압하고 격리하면서 집권을 위한 체제를 갖춰나갔고,항쟁과 고난은 계속된다.
6월 25일 밤에는 익산군 여산면 여산리 여산 천주교회 사제관에 공수 부대원으로 보이는 괴한 4명이 침입해 박창신 주임신부와 신도 임을영(당시 26세)을 쇠파이프와 흉기로 중상을 입히고 달아났다.(당시 천주교 전주교구는 긴급 사제단 회의를 거쳐, 광주를 탈출한 김현장이 작성한 유인물 1만 매를 만들고, 교구내의 성당과 공소를 통해 신도들에게 광주의 참상을 전했다. 박 신부는 5월 21일, 이 내용을 강론하면서 옥외확성기를 통해 주민들에게 알렸다. 여산성당 마전공소에 다니던 여중생 유영희, 현미숙, 김양순은 이 유인물을 주민들에게 배포하다 충남 강경 경찰서에 잡혀갔고, 신근리 공소의 신도회장 이명구도 대전에 있는 충남계엄사로 연행됐다.)
5.18이후 광주항쟁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인물과 시위가 번지자, 신 군부는 이들을 학교에서 쫓아냈다. 도내에서는 8월 31일 전북대 20여명, 원광대 2명, 군산대 1명이 제적당한다. 신군부의 대대적인 숙정(사회정화)으로 인해 전북대에서는 남정길, 김용성, 이석영, 변홍규 교수 4명이 해임 당했다.
8월 말에는 이리시청 직원 황세연이 친구에게 광주의 참상을 담은 편지를 보낸 것이 발각돼 2명이 구속됐다.(이리시청 직원 반공법 위반 사건) 황세연은 징역 1년을, 그에게 광주 현장을 목격한 이야기를 한 미도백화점(이도백화점의 오기일 수 있음)계장 이길야는 징역 1년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카페 80518> 웹사이트 프리챌에는 카페80518(http://freechal.com/80518/)이 있다. 80년 5월 그 뜨거운 날의 투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여기서 만난다. 카페의 손님들은, 5.18민중항쟁전북동지회로 뭉쳐진 전주, 그리고 전북의 ‘동지’들이다. 카페 80518은, 그 동안 아무도 관심 두지 않았던 이들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고자, 전국의 비슷한 아픔들이 모여 게시판과 방명록을 가득 채우고 있다.
게시판과 자료실에는 우리가 지나치기 쉬웠던 역사적인 현장증언들도 눈에 띈다. 2천년 5월 김남규 씨는 “80년 5월 당시 계엄군에 의해 피해를 당한 동지 중 전북의대 침묵시위에 참여했던 이황호(당시 의대 75학번, 현 전북대 의대 교수), 그리고 임창규(당시 전산통계학과 80학번)를 찾았다”고 글을 올렸다. 5.17 휴교 조치 중에, “전주역에서 계엄군의 검문에 걸려 역 지하 방공호로 끌려 가 소총과 대검으로 폭행을 당하고 군대에 못 갈 만큼 심한 상처를 받았다”는 임창규는, “살아남은 것도 감사하고, 죽은 사람들이 너무 많기에 20년 동안 이야기도 꺼내지 못했다”고 했다.
이흥복 역시 회원들의 노력으로 찾은 인물이다. 20년을 혼자만으로 고통으로 견뎌 온 그는 2천년에야, 5월 TV프로그램에서 80년 5월의 동지들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만나게 됐다. 그리고 나서 오월병이 사라져간다고 했다. 계엄군에게 잡혀가 온갖 고통을 겪은 그는, 오월만 되면 매스컴을 통해 들려 오는 소식들이 온 몸에 가시처럼 꽂혀 왔다고 했다. 80년 이전이나 이후나 그저 평범할 뿐인 그는, “80년대 중반만 해도 담당 형사가 한밤중에 불러내 공원장, 백년장 같은 전북대 근처 여관으로 불러내 ‘이광철이 어딨냐’는 추궁에 시달렸다”고 했다.
경찰이 그토록 찾는 이광철의 고향이 그와 같은 익산 여산이고, 집안 친척끼리 연결되는 인맥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모임을 통해서 만난 뒤에야 비로소 알았다. 2천년 2월, 이들 중 40여명은 광주항쟁 제4차 보상신청에 집단적으로 응했다. 하지만 명예회복이나 금전 보상이 아닌 역사에 공식 기록되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에서 보상에 응한 것이기에, 장해등급 신청은 거부했다. 그러나 몇몇은 고통을 받았으면서도, 보상 신청에 누락돼 있다.
고영표, 이진상, 이흥복, 송병주, 김완술, 김형근, 이유숙, 김갑석, 홍정숙, 고 최순희(사망), 이런 이름들이 보상명단에서 제외돼 있다. 92년에 사망한 고 최순희는, 80년 이후로도 노동운동(후레아패션, 경성고무 등)에 종사한 투사였다. 공립 교사자격이 있으면서도 임용에서 제외 당하는 피해를 입은 그가92년 서른 둘의 젊은 나이에 숨진 이후, 가족들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광주민주화운동 해당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인물이다.
어떤 이는 스스로 부끄럽다며 회피했다. 또, 누구는 근거자료가 파기되고 없어서 그랬고, 누구는 몰라서 보상신청 시기도 놓쳤으며, 더러는 병원이나 군,경찰에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서 그랬다. 이십여 년을 고통에 시달려 왔지만,그저 개인의 지독한 고통일 뿐이었다.
*5.17 이후 사건 일지*
5월 17일 밤 9시 40분에 정부, 비상계엄 전국 확대, 대학 휴교 등 계엄포고10호 발표,
5월 18일 자정 계엄 확대. 공수부대 대학 진입, 학생 연행, 첫 사망자(전북대 이세종) 발생.
5월 27일 전주신흥고등학교 시위사건 발생
6월 17일 계엄사 지명수배자 3백29명 발표
6월 25일 여산성당 박창신 신부 테러사건
7월 3일 계엄사, 지명수배자 중 2백47명은 자수, 1백44명 훈방, 3백75명은 계속 조사중이라고 발표
8월 2일 계엄사, 광주사태 관련 조사자 1백62명 훈방
8월 31일 전북대 교수 해직. 전북대, 원광대, 군산대 시위관련 학생 제적. 이리시청 직원 반공법위반 구속사건.
9월 4일 전남북 계엄분소, 광주사태 관련 1백75명 군사재판 기소 발표
[18] 5월특집을 마치며
연재를 마치며
이번 기획연재는 '80년 전주'의 지극히 일부분을 정리했을 뿐이다. 취재와 지면의 한계를 핑계로, 기록해야 할 많은 부분이 누락돼 있다. 정리한 기록마저도 그 사건, 그 상황의 전부를 담아내지 못했다. 취재에 협조해 주신 분들의 기억과 시각 또한 각자 자기가 바라 본 것, 자기가 아는 것의 한계 속에서 말해 줄 수 있을 뿐이다. 80년의 그 상황을 어느 누가 모두 알 수 있으랴. 기록을 모으면서 느낀 바로는, 각자의 체험적 증언이 좀 더 모아져야만 하겠다는 것이다.
개인의 체험과 체험이 모여질 때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를 구성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연재의 한계는, 증언자들의 시각 안에 놓여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다. 이번 연재 중에 이름이 등장한 인물이나 사진이 등장한 것에,어느 누가 부각되거나 어느 누가 비중 있다거나 하는 식의 의미는 두지 않으려 한다. 다만 이들의 체험담과 이들의 증언이, 1980년 5월이라는 커다란 산을 바로 보는데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할 뿐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체험과 참여가 소중하다는 의미에서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 더군다나 원광대생, 군산대생, 전주간호학교생들, 전주공전, 전주대생 시위 등은 담아내지 못했다. 또 당시 전주경찰서, 보안대, 헌병대에서 조사를 받고 피해를 당한 이들, 자식의 징계로 덩달아 직장을 쫓겨났거니 수배자를 숨겨 줬다가 고초를 당한 이들, 사전수배, 역과 버스정류장 등에서 학생이란 이유로 두들겨 맞고 다친 이들에 대한 기록이 빠져 있다. 5.18 이후 23년 동안 숱한 이의 뇌리에 박힌 상처와 피눈물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5.18 광주민중항쟁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도, 우리지방 전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몸소 그 현장을 뛰었던 이들마저도 이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듯 피할 새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 바로 우리들의 벗이, 이웃이 있다. 상처는 바로 우리 삶의 현장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다. 80년 5월은, 우리 사회의 역사 속에, 모든 국민들에게 기억되어 있어야 한다. 다시는 어느 누구도 국가의 이름을 앞세워 생명을 짓밟지 않는다는 맹세와 실천이 없다면, 이 상처는 결코 치료되지 않을 것이다. (연재 끝)전민일보 2003.5.26
■ 5.17 전후 구속자, 피해자 명단(KNCC한국민주화운동사 참조)
<전북대> 김남규(축산 4) 선고유예. 이광철(철학 4) 징역 1년. 김운주(농 4)징역 1년, 집유 2년. 김병태(농 4) 집행유예. 윤성모(농 4) 공소취하. 최인규(기계공 3) 징 1년. 김희수(경영 3) 징역 6월. 황덕구(경영 3) 집행유예. 김중길(축산 3) 집행유예. 최만호(경제 3) 집행유예. 배현식(정외 2). 집행유예. 이상보(의학 4) 형집행 면제. 이승희(사회계열 2) 징역 8월. 박영식(인문계열 1)장기10월,단기6월. 정해동(사회 3) 징역 10월. 강형근 기소유예. 김동수 집행유예. 박종훈(원예 4). 이상철 집유. 이충래 집유. 김성규.
<원광대> 강익현 (한의 본3) 집행유예. 라경균(법 3) 징역 6월. 성경환 집행유예.
<군산대> 문성주(경영 3> 집행유예
<한일신학교> 김명희 집행유예
<기타> 이상호(당시 31,고교 교사).징역 1년 선고 . 노동길(전북대 졸) 징역 1년6월. 이우봉(신흥고 3) 징역 8월. 이강희(신흥고 3) 징역 8월. 황세연(이리시청 직원) 징역 1년. 이길야 징역 1년, 집행유예 1년.
†5.18 사망자
이세종(전북대 농 2) 80년 5월 18일 자정께 사망
임균수(원광대 한의 본2) 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앞 피격 사망
오세현(74년 전주고 졸, 동아제약 광주영업소 근무) 5월 18일 새벽 광주 동아제약 옥상에서 피격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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