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뚝심송 씀
편집자 주
조갑제가 가카에게 국방장관 대신 무능한 스스로를 해임할 것을 주문했다. 조갑제에 따르면 “국민들은 그(가카)의 탄핵을 요구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그런데 그 이유는 가카가 전투기를 투입하여 북한의 해안을 포격하지도 못할 정도로 용기가 없는 “졸장부”이기 때문이다. 이에 본지는 또다시 화제가 되고 있는 조갑제의 인생을 재조명함으로써 그의 정신감정에 보탬이 되고자 한다.
조갑제는 현재 살아있는 사람이다.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얘기를 할 때에는 사실 무척이나 신경이 쓰인다. 그게 김정일이거나 오바마거나 상관없고, 혹은 조갑제거나 박노해거나 심지어 변드보르잡 선생이거나 블루칼라거나 7월이거나 전혀 상관이 없다. 다 신경 쓰이는 건 마찬가지다.
산 사람에게는 산 사람에게 해주어야 할 예우가 있기 마련이다. 여기서 굳이 제외된다면, 가카 정도일까…
그래서 조갑제 얘기를 시작한다. 신경 쓰이는 거.. 개나 주자.
꽤 알려지긴 했어도, 조갑제에 대한 얘기는 이렇게 시작할 수 밖에 없다.
– 너.. 조갑제 알아?
– 응. 그 또라이.
– 조갑제가 젊었을 때 어떤 인간이었는지 알게되면 너 자빠라질걸.
– 어떤 인간이었는데?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권력에 대한 고발정신으로는 김용철변호사를 능가하고, 기자 정신으로는 목숨 걸고 기사 쓰는 시사인 기자들을 능가하며, 말빨로는 진중권, 홍세화, 박노자를 능가하며, 개인적으로는 완전 개천에서 용 난 사람이었다.
일단 물뚝 이 새끼 글은 너무 길어서 읽을 도리가 없어… 라고 되뇌이고 있는 비문해자님들은 그 유명한 굽시니스트가 시사인에 두편에 걸쳐 그러낸 이 만화를 먼저 보자.
1편 : 본격 시사인 만화 116호(링크 클릭)
2편 : 본격 시사인 만화 117호(링크 클릭)
만화 다 보고 온 사람은 이제부터 장문테러의 고문에 시달려 보자.
(참고 : 조갑제의 인생에 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은 신동아의 조갑제 관련 특집기사를 참조하시길. 이 글도 그 기사에 기반해서 쓰인 글입니다. )
1. 중학교 입학시험 재수
조갑제는 부산 중학교 입학시험에 학과 시험은 합격했으나, 면접에서 떨어진다. 본인은 “보결 입학생을 받기 위해 나를 짤랐다” 라고 생각한다. 그 생각이 맞다면, 아주 일찌감치 돈질에 밀렸던 경험을 한 셈이다.
2. 야구중계로 영어일어 마스터
조갑제는 고교시절, 단파라디오를 통해 미국과 일본의 야구 중계방송을 들으며 영어, 일어를 마스터한다. 게임에 빠져 영어, 일어를 마스터하는 아이들이 생각나는 부분이다. 그리고 야구는 평생에 걸쳐 조갑제가 좋아하는 스포츠가 된다.
3. 6.3 사태에 대한 관점
조갑제는 당시 전국을 뒤흔들었던 박정희의 한일회담 반대시위에 그냥 참여하지는 않는다. 과 학생들을 모아놓고 토론회를 개최한 뒤, 각자 판단에 따라 알아서 참여하는 걸로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당시 조갑제는 박정희와 김종필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시위에 참여하지는 않았겠지.
4. 신문사 취직
조갑제는 공군에 입대해서 굵직한 사건들을 많이 경험한다. 김신조 사건, 물뚝심송 탄생, 울진삼척 사건, 등등…
결국 군복무기간이 늘어나면서 전역이 늦어져 제때 복학을 못했고, 복학하기 전에 당시 부산 최대의 신문사인 국제신보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기자로서의 인생을 시작한다.
5. 기자로써의 조갑제
선천적으로 술도 전혀 못먹는 상태에서 무척 깔끔한 자기관리를 하는 매우 능력이 뛰어난 기자 조갑제.
일년에 가까운 사내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하면서도 결혼 직전까지 조갑제가 어떤 여자를 사귀는지 알던 기자가 하나도 없던 조갑제.
평생을 친구들에게조차 흐트러진 모습을 한번도 안 보여주던 조갑제. 화도 안내고, 감정 폭발도 안하고, 소근소근 대화하며, 사석에서도 중요한 얘기는 메모하는 조갑제.
누구나 옆에 있던 사람은 알 수 있을 정도로 반항기가 있으면서도 절대 타인과 충돌하지 않고, 아쉬운 소리 안하는 인간 조갑제.
6. 이어지는 특종 : 천마총, 중금속 오염, 미대입시부정
경주 천마총 발굴 같은 전국적인 사건에서 모여든 중앙언론사들의 기자들을 제치고 여러건 특종을 만들어낸다.
지방지 기자로써 부족한 정보는 공부로 메꾼다. 대학도서관을 돌며 새로 나온논문을 훑어 보는 방법으로 만들어낸 중금속 오염 실태에 관한 특종, 이 특종으로 제7회 한국기자상이라는 큰 상을 입사 4년만에 수상.
한국기자상 취재부문을 수상한 조갑제(맨 오른쪽)
제보자 관리에도 철저한 기자 조갑제. 제보에 의한 특종으로 부산대 미대 입시부정 사건 특종을 한다.
도대체 뭐 기자로써는 더할 나위가 없는 사람이다.
7. 포항 유전 논문 : 최초의 해직
당시 박정희 정권이 주도하던 포항앞바다 유전은 구라였다. 중정은 이에 대한 언론 통제를 했으나, 조갑제는 유전개발을 담당한 쉘 사의 사무실 쓰레기통을 뒤져 모은 텔리타잎 쪼가리들을 모아 그 내용에 근거한 논문을 자비로 출간한다. 포항 유전은 구라라는 내용을 담은…
그 논문은 일본 산케이 신문에 보도가 되고 조갑제는 중정에 끌려간뒤, 자진해서 사표를 쓰는 방식으로 국제신보에서 쫓겨난다.
8. 월간중앙 투고
퇴사후, 조갑제는 당시로써는 파격적으로 월간지에 기사를 쓰게 된다. 당시 월간지는 최소 대학교수나, 원로 언론인들이 논문 형태의 기사를 쓰는 것이었는데, 젊은 기자 출신 조갑제가 그 벽을 허물고, 프리랜서기자로써 월간지에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이는 뒤에 나오는 탐사보도의 첫걸음이었고, 우리 언론사에 조갑제가 끼친 큰 영향중의 하나이다.
9. 복직후 이어지는 특종
프리랜서 기자로는 살기 힘들어서 국제상사에도 취직했었으나, 중정 부장 교체이후, 중정 부산지부의 권유를 받고 슬그머니 국제신문에 복귀한다. 당시엔 그랬다. 이 때가 77년.
그리고 79년도에 또 특종을 한다. 이번엔 논문 뒤지기도 아니고 제보도 아니고, 조갑제 특유의 “관보 훑기” 기법으로 한 특종. 도대체 이 조갑제 기자는 기자로써 해야 할 일을 못하는 게 없다.
수산청 고시로 마산만에서 어패류 채취를 금지한다는 내용을 확인한 그는 사실 확인도 없이 “마산만이 오염되어 어패류 채취가 금지되었다” 라는 기사를 쓴다.
그리고 수산청은 오히려 그 사실을 확인해주게 된다. 요즘에도 맨날 그런다. 당황해서 설레발 치다가 오히려 기사를 확인해주게 되는 공무원들…
10. 10.26, 5월 광주, 해직
박정희가 죽었다. 그리고 다음해, 5월 광주에 조갑제는 병가를 내고 무단으로 광주에 잠입한다.
경상도 사투리가 강한 조갑제가 광주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
“경상도 사람은 조심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광주에 갔지만, 경상도 사람이라고 해서 봉변당한 적은 없다.”고 한다.
결국 조갑제는 5월 광주를 취재했고, 그 기사를 송고한다. 이 광주무단 취재로 인해 조갑제는 또 다시 해직된다.
그리고 그해 8월 신군부의 언론인 해직 지시에 의해, 각 신문사에서는 해직기자 명단을 공시하는데, 그 명단에 조갑제는 또 들어간다. 확인사살까지 당했다.
조갑제를 쫓아낸 국제신문도 11월달에 폐간된다. 어차피 폐간될거 개기기나 해보지… 빙신들…
11. 월간지 마당, 김근하 사건 르포
또 백수가 된 조갑제는 서울로 올라와, 당시 남아있던 월간지인 신동아에 기고하는 활동을 한다.
그러다가 월간지 “마당”이 창간된다.
사실 이 마당은 우리나라 월간지 역사를 바꾼 새로운 형태였는데, 논문집스러웠던 일본풍 월간지가 주류였던 우리 사회에 미국식 잡지의 틀을 최초로 도입한 월간지이다.
거기에 합류한 조갑제는 67년 부산에서 있었던 김근하 소년 유괴사건에 관한 르포기사를 써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
내용은 검찰과 경찰이 고문을 통해 멀쩡한 젊은이 하나를 유괴살인범으로 몰았다가 법정에서 무죄판결이 나고, 젊은이는 고문 후유증으로 죽게 된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피의자가 유죄라고 주장을 했고, 조갑제는 공권력이 전과하나 없는 젊은이의 인생을 어떻게 망쳐 버렸는가는 심층취재해서 보도한 것이다.
12. 월간조선 입사
조갑제는 마당의 편집장 자리를 거쳐 월간조선에 입사한다.
조갑제는 자신이 조선일보에 입사한 것에 대해 “날개를 달았다”라고 표현을 한다. 지방지 기자 시절, 프리랜서 시절, 취재원들을 만나기조차 힘들던 시절을 거친 조갑제는 누구건간에 전화 한통으로 만날 수 있는 중앙지 기자 신분이라는 것은 굉장한 권력이라고 느껴졌을 법 하다.
조갑제는 오히려 자신의 후배기자들에게, 니들은 이런 굉장한 권력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고 질책을 한다.
13. 탐사보도의 유행, 박정희의 여인
80년대는 월간지 전성시대였기도 하다. 이 월간지들이 유행한 것은 바로 탐사보도의 유행과 맥을 같이 하는데, 일간지에 실을 수 없는 심층취재가 가능하며, 폭압적인 군부정권의 감시 속에서 벌어진 사건들의 이면을 알고자 하는 독자들의 욕구가 결합된 결과이기도 하다.
거기에, 대규모로 해직된 기자들의 겁없는 취재가 곁들여지면서 가히 월간지 전성시대가 된 것이다.
조갑제는 이런 유행을 주도하면서, 또 하나의 히트작을 낸다.
박정희가 경북 선산에서 결혼해서 딸을 낳고 이혼한 뒤, 육영수와 결혼하기 전에, 그 사이에 또 다른 이대출신 여인과 동거했었다는 사실을 보도하게 된다.
동그라미 안의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취재과정을 거치면서 조갑제는 박정희에 대한 연구분석에 몰두하게 된 걸로 보인다. 그러면서, 박정희 정권에 치열하게 저항했던 조갑제는, 마당시절부터 슬슬 박정희의 위상에 대한 입장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14. 200명? 2000명?
조갑제는 광주에서 취재할 때, 시신 105구를 확인했다고 한다. 자신이 빠져 나온 뒤 계엄군이 유혈 사태를 빚으며 100여명이 추가로 사망했다고 추정했다. 거기에 행불 50명을 추가해도 광주 민주화 운동 전 과정에 걸쳐 200여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에서도 당시 200여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광주에 대한 진상조사가 반복되고 실종자 신고까지 취합했어도 역시 200여명 사망이 결론이다.
이런 논리에 기반해서 당시 월간지들이 경쟁적으로 보도하던 광주 2000여명 사망설에 반대해 조갑제는 끝까지 200여명 사망설을 고수한다. 그 결과 불매운동까지 당하게 되는데, 조갑제는 이 과정을 자랑스러워 한다. 진실을 보도하고 판매에서 패배했으니 자랑스러운 패배라는 것이다.
문제는, 조갑제가 추구한 진실이 과연 말 그대로의 진실, 팩트, 사실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기자로써 누구보다도 사실 보도에 충실하던 조갑제가 과연 그 기조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하는 부분이다.
15. CIA관련보도, 정형근과의 만남
86년, 조갑제는 새로운 특종을 한다. “한국내 미 CIA의 내막”이라는 제목으로 CIA의 한국 활동에 대한 세부적인 정보, 심지어 사무실 전화번호까지 공개해 버린다.
좋은 기사다.
하지만 이 기사로 조갑제는 남산 안기부 대공수사국으로 끌려가 정형근검사를 만나게 된다. 동갑내기인 정형근과 조갑제는 사실상 이 만남에서 의기투합한 것으로 보여진다.
정형근은 조갑제를 “판단이 매우 정확한 사람”으로 묘사하면서, 나와 조갑제는 시대를 앞선 사람이라는 둥, 우리가 좌파에 맞서 어떻게 싸웠는지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둥, 하는 소릴 늘어놓게 된다.
16. 사실과 이념의 충돌
이 이후로 조갑제는 사실과 이념 사이에서 방황을 시작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정형근에 관해, 나와 자유민주주의적 가치관이 최고라는 생각을 공유했다, 고 표현을 한다.
박정희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면서, 당시 남한사회에 박정희가 꼭 필요했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87년을 거치면서 김대중과 김영삼등이 표면적으로 얘기하던 민주화와는 달리 권력욕에 사로잡힌 정치 모리배라는 판단을 내린 듯 하다.
결국 이 사회를 위해선 자유민주주의적 가치가 최우선이고, 이를 지켜내려 했던 박정희는 옳은 사람이고, 이를 방해한 김일성 정권은 민족 반역자이고, 등등등…
그런 이념적 가치에 집중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그런 이념적 가치를 위해 사실의 발판에서 뛰어내려 버린 것 같다.
17. 안기부도 속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갑제는 유능한 언론인이었다. 노태우 시절, 전두환을 백담사로 보내버린 노태우는 6.29 선언 자체가 자신의 업적이라고 구라를 치고 있었는데, 조갑제는 전두환 통치사료 비서관이었던 김성익씨의 기록을 근거로 6.29는 전두환의 아이디어였다는 기사를 쓰기로 맘을 먹는다.
이런 기사를 노태우 치하의 당시 안기부가 내버려둘리가 없다.
일단 기사 초안을 아무에게도 안 보여주고, 당시 인쇄소까지 쫓아와 내용을 훑어보고 인쇄기를 세우던 안기부를 피해, 이 기사가 실린 대지를 별도로 인쇄하고, 표지와 목차도 별도 인쇄소에서 찍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제본하는 과정에서 기존에 찍었던 표지와 목차를 갈아 끼워 서점에 뿌려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잠적.
안기부는 도대체 이 기사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조차도 확인을 못해서 허둥거릴 뿐이었다.
18. 그리고 오늘날의 조갑제
조갑제는 김정일을 악마로 생각한다. 김대중은 역사발전의 걸림돌, 노무현은 여적죄(형법 93조. 적국과 합세하여 대한민국에 항적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혐의자라고 주장을 한다.
진보 개혁 세력의 모든 활동은 얼치기 초짜들이 친북 빨갱이들에게 속아서 설치는 어리석은 행동으로 간주한다.
심지어 까스통 들고 설치는 할배들 앞에서 연설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사건, 그 사건에 대한 해석마저도 조갑제가 하면 아스트랄해진다. 예를 들어 NLL 문제의 역사적 기원이나,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력 같은 것들도 반역행위가 된다.
이를 놓고 진중권은 이렇게 표현한다.
“기자로써의 조갑제는 대단했지만, 이제 그는 스스로를 희화화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단지 궁금한 것은 그가 왜 스스로를 희화화하는 단계까지 갔는지,도대체 무엇이 저널리즘에 충실했고, 누구보다도 능력있던 한 기자를 이렇게 망쳐 놓은건지가 궁금하다 .
19. 현실을 떠나 이념으로 날아가 버린 현실주의자 조갑제
조갑제는 분명히 현실에 기반을 둔 저널리스트였다. 자신이 호감을 가지고 있던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 사실에 근거한 취재를 바탕으로 저항하던 그였고,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불러온 피의 광주에 두려워하지 않고 단신으로 뛰어들어 취재하던 진정한 기자였다.
그러던 그가, 우리 사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이념이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이해하기 힘든 결정을 내리고 나서는 현실을 박차고 뛰어 올라, 굽시니스트가 그린대로 풍선에 매달려 말도 안되는 이념의 세계로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나서 이제는 현실마저도 무시하고, 심지어 조선일보로부터도 경원시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의 외골수적인 성격을 미루어 본다면, 그가 만약에 좌파 이념을 선택했다면, 지금쯤 청와대에 불을 질렀을 지도 모른다.
어떤 이념을 선택하거나 그것은 자신의 자유이다.
그러나 어떤 이념을 선택했더라도 스스로의 판단의 기준은 언제나 사실에 고정시켜 두어야 한다. 어떤 좋은 이념을 가진 자라 해도, 사실을 자신의 이념에 맞추어 호도하는 짓은 배척받아야 한다. 이런 행동을 보통 우리는 인지부조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신의 사고에 사실을 맞춰서 엉터리로 해석하는 행위.
이런 것을 모를 리가 없는 조갑제마저도, 이념에 빠져 사실을 돌아보지 않게 된 이 세태에서 나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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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
사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조갑제만큼 특이한 캐릭터를 찾기 힘들 거 같다.
이 글은, 글 중에도 나오지만 조갑제에 관한 신동아의 특집기사, 그리고 열댓군데의 웹 사이트, 그리고 다수의 조갑제 본인의 글을 기반으로 정리한 얘기이며 대부분 상당한 수준의 정확도로 확인된 사실들이다.
물론 말미의 결론은 내가 내린 판단이지만, 크게 무리하지 않는 판단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난 조갑제씨를 직접 마주친 적이 딱 한번 있었다.
2004년 탄핵반대 촛불시위 현장이었는데, 조선일보 사옥 앞에서 모여든 군중을 바라보면서 아주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차고 있던 그를 발견한 것이다. 조용히 다가가서 혹시 조갑제씨 되십니까? 하니까 정중한 표정으로 그렇습니다만, 하길래, 아 그러시군요, 만나뵈어서 반갑습니다. 하고 인사만 하고 돌아섰었다.
뭐 할 얘기도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고..
혹시 관심이 생기는 분들은 조갑제의 인생에 대해 찬찬히 한번 돌이켜 보시길 권한다. 분명히 뭔가 남는게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