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1_韓山 李氏

조선시대 명문가문으로 자리 잡은 한산 이씨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12. 24. 12:09
반응형

[한산이씨를 소개하는 아래 용인신문의 첫줄에 대하여 이윤우와는 무관하다는 다른의견이 있습니다. 제 블로그에서는 용인신문의 이종구 기사에서 주장하는 내용이 제 의견과는 다를수도 있다는 걸 밝혀두는 바입니다. (이 기사를 퍼와 불로그에 게시한 한산이문 이상원 주)]


출처: 2015년 04월 01일 (수) 이종구 webmaster@yongin21.co.kr

 


기흥구 지곡동 두암산에 있는 정자 사은정 모습.

 


한산 이씨는 호장공 이윤경을 시조로 하는 한산 이씨와 이윤우를 시조로 하는 권지공계로 나뉜다.

권지공계는 고려조 이무를 비롯해 여러 인물을 배출했으나 조선에 들어와서는 크게 번성하지 못한 관계로 한산 이씨는 호장공계가 주를 이루고 있다.

한산 이씨의 관향인 한산은 현재 충청남도 서천군에 속해있는 지역으로 한산모시, 한산소곡주로 잘 알려진 곳이다.

한산 이씨는 고려말에 명문가로 발전하기 시작해 조선시대 사육신의 한사람인 이개와 요즘 방영되는 ‘징비록’에 등장하는 이산해, 토정비결의 저자로 유명한 토정 이지함, 그리고 20세기 들어와 풍자와 해학으로 일제를 농락한 이상재 등 유명인사를 배출한 가문이다.

조선조의 벼슬을 보면 상신 4명, 대제학 2명, 청백리 5명, 공신 12명을 배출했으며 문과급제자 195명을 배출한 명문거족이다.

여말에 명문 가문의 발판 마련
 
13세기 고려는 원나라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왕 이름조차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충자를 사용해야 했다. 또 매와 공녀와 같은 각종 공물을 바쳐야만 하는 어려운 시기였다. 이때 호장공 이윤경의 6세손 이곡(1298-1351, 호 가정)이 원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에 올라 문명을 떨치면서 원의 순제(1320-1370, 원의 마지막 황제)에게 공녀제도의 부당함을 건의해  폐지케 하니 고려에게는 큰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후 고려백성들은 가정 이곡의 공녀 폐지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밥을 먹을 때 밥을 조금 퍼 던지면서 “곡씨 고마워”, “곡씨 고마워”하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이 말이 변음돼 지금은 “고시래” “고시래” 하는 풍습으로 남아있게 되었다고 한산 이문에 전해지고 있다.

곡의 아들 이색(1328-1396, 호 목은) 또한 원나라에 가서 과거에 급제해 여러 벼슬을 하다가 고려에 돌아와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하면서 고려 교육발전에 커다란 업적을 세운 인물이다. 그의 문하에서 이숭인, 정도전, 변계량, 권근, 하륜 등 여러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배출됐다. 이로 인해 길재, 정몽주 등과 함께 삼은(三隱)으로 추앙받게 되면서 한산 이씨가 명문거족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하게 돼 목은 선생을 중시조로 받들게 됐다.


조선조 가문을 빛내 명문거족으로 우뚝


고려 사회가 혼란할 때 목은 이색은 이성계, 정몽주 등과 함께 고려의 각종 제도를 개혁하는 데 힘을 합쳐 함께 노력했으나 목은과 포은은 이성계, 정도전과 달리 조선 개국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다.

이로 인해 포은은 선죽교에서 피살됐고, 목은은 여주 강가에서 조선 개국 세력에 의해 원인 모를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목은은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큰아들 종덕(1350-1388, 호 문양)은 문과에 장원해 여러 벼슬을 거친 후 지밀직(종2품 관직)에 올랐으나 옥사에 연루돼 39세의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후에 종덕의 후손들을 문양공파를 이뤘다. 문양공의 후손들 중 명망 있는 이들로 문양공의 아들 이맹균은 세종 때 좌찬성을 역임했고, 광해군 때 광양현감으로 재직시 귀양와 있던 임해군을 죽이라는 이이첨의 명령을 거절한 이현영, 효종 때 판서를 역임한 이기조, 숙종조에 형조판서를 역임한 이규령 등이 문양공 후손들이다.

둘째 종학(1361-1392, 호 인제)은 1374년 과거에 합격하고 여러 벼슬을 거친 후 동지공거(과거시험 총책 보좌역으로 합격자는 스승으로 모심)로 과거를 관장했다. 조선이 개국에 협조하지 않음에 정도전 일파에게 살해당하니 이때 나이 33세에 불과했다. 저서로는 <인제유고>가 전해진다.

인제공의 후손들을 인제공파라 한다. 인제공의 후손들 중 유명인물을 보면 인제공의 손자 안소공 이훈이 효령대군의 사위로 좌찬성에 오르고 청백리에 녹선됐고, 아들 이숙묘는 태조 이성계의 큰아들 진안대군의 사위로 세종 때 형조판서를 역임했다.

기흥구 지곡동의 한산 이문은 숙묘의 증손으로 우찬성을 역임하다 기묘사화에 연루돼 파직당한 음애 이자의 후손들이다.

셋째 종선(1368-1438년, 호 양경)은 15세 때 과거에 올라 벼슬하던 중 조선이 개국하면서 포은 일파로 몰려 귀양 갔다가 조선 개국 후 출사해 지중추원사에 이르렀다. 후손들을 양경공파라 하며 후예들은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에 세거하다가 돌마면에 분당 신도시가 형성되면서 양경공파 후손들의 묘역이 중앙공원으로 변화돼 성남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종선의 후손들 중 유명인사로 사육신의 한사람인 이개가 종선의 손자이고, 셋째 아들 이계전은 조카 이개와 달리 세조를 도와 정란공신 1등에 올랐다. 토정비결을 저술한 이지함 또한 종선의 후예이다.


용인의 한산 이씨


 


 

음애 이자 묘소

용인에 한산 이씨가 세거하기 시작한 것은 1510년대 음애 이자 선생이 현 기흥구 지곡동에 부친의 묘를 조성한 이후부터로 추정된다. 현재 용인의 한산 이문은 지곡동 일원과 처인구 포곡읍, 양지면, 그리고 남사면 진목리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포곡읍= 포곡의 한산 이씨는 목은의 셋째 아들 양경공 종선의 후예 중 이경준(임진왜란 당시 무인)의 후손들이다. 이경준이 왕을 호종하던 중 새가 날아가며 어가에 똥을 싸자 경준이 왕에게 “어디를 맞춰 잡을까요” 하니 “왼쪽 눈을 맞추거라” 함에 이내 시위를 당겨 새를 떨어뜨렸다고 한다. 가져다 보니 아니나 다를까 떨어진 새의 왼쪽에 화살을 맞았지 않은가? 이에 임금이 경준의 활 솜씨에 감탄하고 무예를 높이 사 경상도 수사를 제수, 경상도 통제사를 역임하고 승진해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이후 현 광주시 오포읍 일부를 사패지로 받고 후손들이 세거하다가 200여 년 전 일부가 현 포곡으로 이주해 포곡에 씨족촌을 이뤘다 한다. 50여 년 전만 해도 포곡읍 마성리, 영문리 일원에 20여 호가 세거했으나 현재 7~8호만이 남아 있다.


◇양지면= 현재 양지면에는 5~6호가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은 양경공파의 후손들이다. 입향 경위는 150여 년 전 양평군 지평에서 이승렬이라는 분이 생활이 여의치 않아 이곳으로 이주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선대 조상들의 묘소가 양평에 있어 매년 10월이면 이곳 한산 이씨들이 양평으로 시제를 모시러 간다.


 


 
음애 이자 묘비
◇지곡동= 지곡동에 한산 이씨가 세거하기 시작한 것은 500여 년 전 음애 이자선생이 부친인 대사간공 이예견(1436-1510)의 묘를 지곡동 상동마을에 안장한 후부터라고 한다. 지곡동에 묘를 쓰게 된 연유는 음애선생의 외가와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선생의 어머니가 선산 김씨이고 부친인 대사간공 묘소 북쪽 인근에 선산 김씨 화의군 김달상( ?-1368)의 묘가 있고, 남서쪽 인근에 화의군 김달상의 사위이며 한양도성 건립 책임자인 전주인 최유경(1343-1413) 묘가 있다.

이로 미뤄 과거에 처가 인근에 묘를 안장하던 풍습에 따라 선산 김씨와 인연으로 이곳에 묘를 쓰면서 후손들이 한산 이씨 동족촌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청렴했던 선생이 타계한 후 후손들은 생활이 어렵게 되자 국가에 공이 큰 음애공 후손들에게 지곡동 일대를 사패지로 하사함에 한산 이씨는 용인의 명문거족으로 성장했다.

지곡동에는 고려시대 해주 오씨 무덤 몇 기가 있었는데 한산 이씨가 이곳을 사패지로 받은 후 해주 오씨와 산송(산에 대한 송사)문제가 발생하자 나라에서 한산 이씨는 땅이 넓으니 원래 있던 묘소는 후손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함에 두 집안이 화합하고 사이좋게 지냈다는 이야기가 한산 이문에 전해지고 있다. 현재 지곡동에 해주 오씨 무덤 몇 기가 전해지고 있으나 해주 오씨는 한 집도 남아있지 않다.

지곡동은 1960년대만 해도 한산한 농촌마을로 한산 이씨가 30여 호 세거했으나 1970년대 신갈에 고속도로가 형성되자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해 현재는 농업이 쇠퇴하고 각종 공장, 유통업이 들어와 농촌마을의 정취가 사라지고 있다.

아울러 씨족마을도 해체되면서 현재는 10여 호 후손들만이 선산을 지키며 각종 시제를 모시고 있다. 

특히 음애 이자선생은 불천위(영원히 기제사를 모시라는 것)로 지정받아 매년 12월이면 후손들이 음애의 사당 부조지묘(영원히 기제사를 모시는 사당)에서 기제사를 모시고 있다.

현재 지곡동에는 입향조 음애 이자선생의 흔적으로 음애 묘역에는 대사간을 역임한 선생의 부친 이예견, 형이며 제주목사를 역임했던 이운, 둘째형이며 의금부 도사를 역임한 이누의 묘와 음애선생 묘가 있다. 

이 묘역은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또 선생이 지었다는 옛집 또한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기묘명현이라 일컬어지는 정암 조광조, 방은 조광보, 호곡 조광좌 등 3명과 음애선생이 말년에 쉬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지었다는 사은정(용인시 문화재)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