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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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 이지함의 진짜 비결

忍齋 黃薔 李相遠 2016. 1. 18.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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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백열 번째 이야기-2016년 1월 18일 (월)]

토정 이지함의 진짜 비결

[번역문]

토정 선생이 포천 현감에 임명되었을 때 베옷과 짚신, 포립(布笠) 차림으로 관청에 출근하였다. 관아의 아전이 음식상을 올리자 선생은 한참을 살피더니 젓가락도 대지 않고 말하였다. “먹을 게 없구나.” 아전이 뜰에 무릎을 꿇고 “고을에 특산품이 없어 밥상에 별미가 없습니다.”라며 다시 상을 차리겠다고 하였다. 얼마 뒤 진수성찬이 올라왔다. 선생은 다시 한참을 들여다본 뒤 말하였다. “먹을 게 없구나.” 그러자 아전이 두려워 떨며 죄를 청하였다.
선생은 “나라 백성들은 생계가 곤궁한데, 모두들 앉아 먹고 마시며 절제가 없다. 나는 밥상에서 식사하는 것을 싫어한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아전에게 잡곡밥 한 그릇과 우거짓국 한 그릇만을 삿갓 상자에 담아 올리라고 명하였다. 다음날 읍 중의 관리들이 와서 인사를 할 때, 시래기죽을 쑤어 권하였다. 관리들은 고개를 숙이고 수저를 들었는데, 먹자마자 토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죽을 다 먹어치웠다.

[원문]

先生嘗爲抱川縣監, 以布衣草鞋布笠上官. 官人進饌, 熟視而不下箸曰, 無所食. 吏人跪于庭曰, 邑無土産, 盤無異味, 請改之. 俄而盛陳嘉羞而進. 又熟視之曰, 無所食. 吏人震恐請罪. 先生曰, 我國之民生困苦,皆坐食飮之無節, 吾惡夫食者之用盤. 命下吏雜五穀, 炊飯一器, 黑菜羹一器, 盛之笠帽匣進之. 翌日, 邑中品官來謁, 爲作乾菜粥勸之. 品官低冠擧匙, 乍食乍吐, 先生食之盡.

- 이지함(李之菡, 1517~1578), 『토정유고(土亭遺稿)』,「토정선생유사[土亭先生遺事]」

[해설]

토정 이지함은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조선의 내로라하는 명문가문이었다. 젊은 시절 유학 경전은 물론 역사서, 제자백가서까지 섭렵한 토정은 어느 날 돌연 과거에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이에 대해 『선조실록』에는 과거에 급제한 이웃이 요란하게 잔치를 베푸는 것을 보고 천하다고 여겨 과거를 포기하였다고 적고 있다.

토정은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대신 전국을 유람하였다. 서해의 섬을 돌며 백성들이 먹고살 길을 찾는가 하면 조각배를 타고 제주도를 다녀오며 바다 무역을 통해 빈곤 퇴치를 모색했다고 전한다. 삿갓을 쓰고 나막신을 신은 채 저잣거리를 활보하고, 열흘을 굶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해 사람들로부터 기인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토정은 학문이 깊은데다 부모 형제에 대한 효도와 우애가 알려지면서 늦은 나이에 유일(遺逸)로 조정에 천거되었다.

토정은 57세 되던 1573년 포천 현감을 제수받는다. 생애 첫 관직이었다. 평생 전국을 떠돌며 백성들의 생활을 지켜봐 왔던 그의 벼슬 생활은 첫날부터 남달랐다. 그는 수령에 취임하는 날, 진수성찬으로 차린 밥상을 퇴짜 놓는다. 대신 잡곡밥에 우거짓국 한 그릇만 올리라고 명한다. 밥상도 필요 없고 삿갓을 넣은 상자를 사용하라고 주문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포천의 지방 관리들이 부임 인사를 왔을 때에는 시래기죽을 내놓았다. 백성의 고혈을 짜내며 호의호식하던 지방 관리들이 거친 시래기죽을 먹는다는 것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니라 견디기 힘든 고역이었으리라.

백성들과 동고동락하겠다는 토정의 결의가 어떻게 지방 정치에 반영되었는지는 기록이 많지 않아 상세히 알기 어렵다. 그러나 포천 현감으로 있을 때 올린 상소문을 보면 그가 포천 백성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고심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토정은 포천현의 상황을 아침 아니면 저녁에 죽게 될 고아나 거지에 비유하며 조정에 긴급한 대책을 촉구하고 있다. 이 가운데에는 서울이나 부유한 고을의 곡식을 풀어 포천의 굶주린 백성을 구호할 것과 서해안의 염전을 포천현에 떼어 주어 염전의 소금을 구호물자로 활용하자는 방안이 들어있다.

토정이 포천 현감으로 재임한 것은 1년 남짓에 지나지 않았다. 조정에 올린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핑계로 관직을 때려치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토정이 임지를 떠나는 날 ‘고을 사람들이 길을 가로막고 만류했다.[邑民攔道留之]’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의 고을살이가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토정이 벼슬길에 오른 것은 포천 현감과 아산 현감이 전부였다. 아산 현감은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재임 중 숨졌는데, 아산 시절에는 ‘걸인청(乞人廳)’을 세워 부랑인의 구호와 자활 사업을 펼치기도 하였다.

토정은 검약하고 절제 있는 삶으로 일관했다. 그는 양반 신분이었지만, ‘토정(土亭)’이라는 흙집에 살았다. 팔도를 유람하면서도 탈것을 빌리지 않고 걸어서 다녔다고 한다. 특히 천한 사람의 일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 매 맞는 일까지 자청해 시험해 보기도 하였다. 「토정선생유사」 등에는 그가 베옷 차림에 솜옷을 짊어지고 쇠로 만든 모자를 쓰고 다니는 기행(奇行)을 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토정의 기행은 과시욕이 아닌 검약을 실천한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게 옳다. 솜옷은 추위를 대비하려는 것이었고, 쇠 모자는 밥 짓기 위한 솥으로도 사용하였다.

토정이 가장 경계한 것은 ‘욕심’이었다. 그의 문집 『토정유고』에 실린 글은 시 2편, 논설 3편, 상소문 2편이 전부다. 논설 가운데에 포함된 「과욕설(寡欲說)」은 토정의 좌우명이라고 할 정도로, 토정의 철학이 잘 드러난다.
“맹자는 ‘마음을 수양하는데 욕심을 적게 가지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욕심을 적게 하는 것은 욕심을 없게 하는 시작이다. 욕심을 줄이고 또 줄이다 보면 적은 것조차 없게 된다. 이런 경지가 되면 마음이 비고 신령스러워진다.[孟子曰 養心 莫善於寡欲 寡者無之始 寡而又寡 至於無寡 則心虛而靈]”

오늘날 토정을 유명하게 한 것은 『토정비결』이다. 정초가 되면 생년월일과 주역의 괘를 이용해 한해의 운수를 점친다는 바로 그 책이다. 토정의 저서로 알려져 있지만, 학계는 『토정비결』이라는 책이 19세기 이후에 보이는 점을 들어 누군가가 토정의 이름을 가탁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훗날 역술가가 ‘비결’을 지으며 『주역』에 능하고 민초들과 동고동락한 토정을 필자로 내세웠다는 얘기다.

반면 ‘검약의 화신’이었던 토정은 삶의 지침이 되는 중요한 비결을 남겼다. 그것은 ‘과욕(寡慾)’이다. 자본주의에 물들어 있는 현대인들은 “욕심은 본능이며, 추구할수록 커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토정은 욕심이 인간의 본성일지라도 부단히 줄여간다면 없앨 수 있다고 강조한다. 욕심을 적게 하는 '과욕'을 실천하다 보면 무욕(無慾)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욕심을 줄여라." 500년전 이지함이 남긴 진짜 '토정비결'이다.


글쓴이 : 조운찬
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장

- 경향신문 편집국 문화부장과 문화에디터, 베이징특파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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