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1_韓山 李氏

월남 이상재 선생님, 이명직 목사님 그리고 이봉준 사장님

忍齋 黃薔 李相遠 2016. 2. 3.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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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에 불타오르는 사람들은 35년의 일제강점기 동안, 핍박과 수탈 속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목숨을 부지하려 외국으로 망명하든가, 아니면 싸우다가 죽든지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굴종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울신학대학교 백주년 기념관


저는 초등학교를 부천군 소사읍에서 다녔습니다. 그때 그곳에는 서울신학대학이라는 작고 예쁜 대학이 하나 있었습니다. 친구 중에는 커서 그 학교에 가겠다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성결교의 어른 이명직 목사님이 만든 학교입니다.


이명직 목사


집안과 조상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된 후에 제 고조부와 같은 학열이신 이명직 목사님이 집안 일가일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분에 대한 연구논문을 찾아보고, 아예 제적등분을 통해 그분이 제가 속한 한산이씨 일가분인 걸 알아내었습니다. (http://blog.daum.net/enature/15853664).


그리고 그 이야기를 다른 일가분들에게 소개하였습니다. 이명직 목사님을 소개한 이유는 그분이 좀 억울하게 친일파 명단에 올랐다고 판단되어 일가분들이라도 곡절을 아시라는 뜻이었습니다.


크리스탈 성구사 사장 사진작가 이봉준 선생


그런데 교회의 강대상을 만드는 일을 하시는 조카뻘 되는 일가 이봉준 사장님이 그 내용을 읽고는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다셨습니다.


이봉준 선생이 운영하는 강대상 등 교회 성물을 제작하는 크리스탈성구사 웹페이지


"저도 한때 성결교회를 섬긴 적이 있고 크리스탈성구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준 목사님이 지금의 삼성제일교회 윤성원 목사님이십니다. 그때 윤성원 목사님이 담임으로 계셨던 교회가 은혜교회였는데 우리회사 제품 중에서 제1호로 제작된 강대상 이름이 은혜형으로 붙여졌고 은혜교회에 바치는 물건이 되었읍니다. 유일하계 GOOD DEMEAN 상을 받았고 이 제품이 전국의 관공서와 병원·학교 호텔 등에 많이 납품됩니다. 지난번 세브란스병원에서 미국 대사 사고 입원 때 언론에 브리핑 단상용으로 많이 보여 졌던 단상입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


이명직 목사님은 '은혜기'를 남기셨습니다. 자신이 살아온 생애를 감동적으로 기술하신 자서전입니다. 많은 성결교인돌의 신앙의 지침서 역할을 하는 책입니다. 그 은혜기에는 YMCA에서 일가 할아버지 이상재 선생에게 처음으로 성경공부를 한 내용이 나옵니다. 일가 이상재 할아버지에서 이어진 신앙의 꽃이 이명직 목사님 그리고 이봉준 사장님으로 이어지는 셈입니다.


이명직 목사 전집


종로 수성동 목은 이색영당 입구, 오른쪽 하얀건물이 목은관 대종회 빌딩이다.


이성계가 역성혁명의 당위성을 홍보하려고 목은 이색 선생을 한산백에 봉하고 유일하게 이색선생의 영당을 4대 문안 종로통에 두고 매년 성균관 대사성이 제주가 되어 후손과 백성이 시제를 지내게 한 충절의 가문입니다. 끝까지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지지하지 않아 이색선생과 3 아드님 모두 참살을 당하셨습니다.




1915년 이완용의 반대편에 섰다 암살당한 이명직 선생, 당상관의 관복인 관대와 쌍학이 선명하게 보인다.


1919년 고종승하의 의문을 제기하다 일제에 척살당한 금광국 기수와 평안북도 동면 면장을 지내고 금광업을 했던 이철규 선생, 이명직 대감의 장자.


1981년 작고하신 조부 이성구(李成求) 선생은 수원농림을 나온 후 만주국 농림국 미곡검사관(滿洲國 農林局 米穀檢査官)을 지냈으며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조달한 독립지사


이철규 선생의 손자이자 독립지사 이성구 선생의 외아들 6.25 전쟁영웅 방원 이성찬 선생 


제 집안만 하여도 이명직 목사님과 같은 항렬이신 목숨명자를 쓰시는 고조부 성우 이명직 선생님과 증조부 금광국 이철규 기수는 일제에 항거하다 돌아가십니다. (http://blog.daum.net/enature/15853939). 또 제 아버님은 6.25전쟁 상이 국가유공자인 전쟁영웅이십니다. (http://blog.daum.net/enature/15852876). 그런 연고로 우리 일가는 전체 국민의 0.2% 정도의 미미한 숫자에 불과합니다. 가정 이곡 선조의 유훈조차 만나는 종친은 다 일가로 대하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각종 문헌을 통하여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명직 목사님이 신사참배를 하고 성결교 해체선언서에 서명한 것으로 사리사욕을 채운 바도 없거니와 부귀영화를 누린 것도 없습니다. 수많은 성결교도와 성결교의 목숨줄을 지키려 한 고육지책이지요.

그러함에도 이명직 목사님의 신사참배에 분통이 터지는 분들이 있다면 일가 후손으로 5대째 충절의 집안 맥을 이어오고 있는 제가 이명직 목사님을 대신하여 업드려 무릎 꿇고 사과를 드리오니 용서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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