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8_黃薔(李相遠)

친일작가요 월북시인인 파인 김동환 시인과 북청물장수 그리고 이인석 상병

忍齋 黃薔 李相遠 2016. 1. 22.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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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일장기를 신문 제목 위에 붙인 조선일보

[좀 길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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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졸업한 서울영동고등학교는 북청 물장수 해청 김형목 선생님이 못배운 한을 풀겠다며 세운 학교였다. 그래서 북청분들이 학교의 어른들로 자리를 잡으셨고 그 중의 한분이 우리들에게 '할아버지 선생님'으로 불리우던 체육교사 이경록 선생님이다. 우연히 작년 이맘때 70쯤의 연세로 작고하신 기인 귀암 김정덕 선생님의 부음을 보고 동창회 관련 사이트에 갔다가 작년 1월 18일 북청의 어른인 이경록 할아버지 체육 선생님의 부음을 보게 되었다. 그분의 귀여움을 받은건, 내가 이리저리 북청과 인연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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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청 물장수' 하면 그쪽이 고향인 친일작가요 월북시인인 파인 김동환 시인이 떠오른다. 그리고 파인의 대표적 친일작품으로 지원병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한 '이인석'을 칭송하며 젊은이들에게 천황을 위해 참전할 것을 촉구하는 시 '권군취천명(勸君就天命, 1943. 11. 6)'이 있다. 그 당시 그리 난리법석을 떨며 천황을 위해 멸사봉공을 외치며 혈서까지 써가며 마치 친일이 애국이라 외치던 자들은 시간을 이어 독재를 가난극복과 반공의 기치로 멸사봉공을 외치며 혈서까지 써가며 또 애국이라 외치고 있다. '이인석'의 모습에서 보듯 정작 자신들은 찌저지게 가난하면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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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혹시나 독재를 옹호함의 잘못을 지적하여 자신들의 입지가 궁색하여 질때는 또 어김없이 '이인석'을 변호하듯 "아용당했다"느니 "위장친일"을 했다는 식으로 손바닥을 뒤집기가 여반장이다. 인생 살아보니 이처럼 묘한 구석이 있는게 삶인거다. 씁쓸하다. 말이 나온김에 '특별지원병에게 보내는 한 시인의 편지'라는 부제가 붙은 시 '권군취천명(勸君就天命)'을 살펴본다. "조국을 나아가 막지 않은 자엔 천벌이 내리느니라"라는 저주까지 덧붙여 성전에 나가 어서 죽으라고 외쳐된다. 실제로 파인은 1941년 10월 7일 중앙중학교 강당에서 열린 지원병보급혈전대강연회에서 '궐기하라, 나서라'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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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20대 우리는 40대 
부자 이대 서로 나란히 서서 전장에 내닫세 
다만 오늘은 그대 선진되고 내일날 우리 뒤따르리 
안 나서면 무얼 하나 
못쳐서 오륙십 살면 무얼하나 
차라리 한 두 해도 번듯하게 살아버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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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듯하게 사는 길이란---- 
제 목숨 나라에 바쳐, 나라가 그 생사 맡아주심일레 
그러면 살 제는 후하게 따뜻하게 뜻같게 하여주시고 
죽을 젠 그 자리 거룩하고 높게 꾸며주시네 
지금, 조국은 전쟁하는 때 
살고 죽고를 더욱더 군국에 바칠 때일세 
이인석 군은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도 병(兵) 되어 생사를 나라에 바치지 않았던들 
지금쯤 충청도 두메의 이름없는 농군이 되어 
베옷에 조밥에 한평생 묻혀 지내었겠지 
웬걸 지사, 군수가 그 무덤에 절하겠나 
웬걸, 폐백과 훈장이 그 제상에 내렸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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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권군취천명(勸君就天命)'의 제1∼3연인데, 이런 류의 작품으로는 '일천병사의 숲(一千兵士の森)', '우리들은 칠인(七人)',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등 입이 아플 지경으로 많다. '고란사에서'는 부여신궁(扶餘神宮) 건설에 근로봉사하는 감격을 읊고 있고, '비율빈 하늘 위에 일장기'나 '미영장송곡', '적국항복 받고지고' 등은 전쟁을 예찬하고 '지도민족', '조국일본 강토'를 외치면서 대동아공영의 이념을 합리화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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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청 물장수'가 '파인 김동환'을 떠올려 사설이 길어졌다. 파인이 비록 친일을 하고 월북은 하였지만 평북 철산 강제수용소에서 개고생하다 1958년 이후 죽었다 하니 이쯤해두고 그의 '북청 물장수'를 음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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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물을 솨아 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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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젖은 꿈이
북청 물장수를 부르면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온 자취도 없이 다시 사라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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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 물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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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배운것이 한이되어 서울영동고등학교를 세운 북청 물장수 '해청 김형묵' 선생님이 개교기념일에 기념원고를 떠듬떠듬 읽어내려가던 모습이 떠오른다. 2003년 돌아가시고 난뒤 그분의 얼이 설인 해청학원 영동고등학교는 쇄락의 길을 걷는건 아닐까 염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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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옥천현대사 - "형님이 이용당한 것...''일제에 의해 영웅으로 미화된 이인석 상병의 가족이 겪은 아픈 역사
이안재 기자  |  ajlee@okinews.com

 

 

   

 

  ▲ 이인석 상병이 군복을 입은 모습. 매일신보 옥천지국이 64년전인 1939년 부인 유서분씨에게 기증한 것이다.  
 

군서면 하동리 새터에서 태어난 이인석 상병은 일제에 의해 영웅으로 떠받들어진 사람이다. 1938년 지원병제도를 실시한 이후 중일전쟁에 동원된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전사(1939년 6월22일이라고 신문 보도)했다며 일제가 영웅만들기에 나서 당시 사람들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인석 상병은 당시 일제가 준 금치훈장과 공로훈장 등 많은 훈장도 받았다. 당시 신문에 보도된 이인석 상병의 전사 소식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매일신보 등 모든 신문에 큼지막하게 보도됐다.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는 이인석 상병이 동원되었던 지역이 나오지 않지만 매일신보는 중국 산서전투였다고 구체적인 지명까지 보도했다.  그리고 지원병 군복을 입은 이인석 상병의 사진이 있었다.

 

"사진? 한 장 가지고 있지"라며 옥천읍 삼양리에 살고 있는 이인석 상병의 부인 유서분(87)씨는 예의 사진을 내놓았다. 반듯한 얼굴에 잘생긴 외모다. 유씨는 이인석 상병과 18살 때 결혼했다. 이인석 상병은 19살.  남동생 셋, 여동생 넷 등 여덟 명의 자녀 중 맏이였다.

 

동생들은 공부를 못시켰지만 이인석 상병은 지금은 없어진 옥천농업실습학교(이인석 상병의 동생 이종두씨는 실습학교가 옥천읍 삼청리 지금의 은성산업이 있던 자리에 있었다고 증언한다)에 다녔다. 결혼 후에 다닌 학교였고 졸업 후에는 실습학교에서 강사 자리를 얻었다.

 

현재 군서면 증산리에 살고 있는 첫 딸을 낳은 후 덜컥 지원병으로 나간다고 했다.  "학교 선생(동생 이종두씨는 강사라고 기억했고 부인 유씨는 선생이라고 기억했다)으로 갔는데 교장이 꼬셔서 지원병으로 갔던 거야. 말하자면 전장에 나가자마자 전사한 거지." 아흔에 가까운 나이지만 그때 일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이인석 묘, 아직도 일제때 세운 상석이 여전히
일본연호·일제 공훈등급 그대로 표기

 

조선인 지원병 최초 전사자 이인석 상병의 묘에는 아직 일제때 세운 상석이 그대로 있다. 상석에는 〈훈8등공7급 고 육군상등병 이인석지묘-소화 19년 7월7일(勳八等功七級 故 陸軍上等兵 李仁錫之墓-昭和 十九年 七月七日)〉로 표기되어 있다.

 

공훈 등급이 8등과 7급이라는 말은 일제의 기준으로 이인석 상병의 공훈을 설정해 부여한 것이다. 일제가 연호로 썼던 소화 19년이면 1944년이다. 이인석 상병이 전사한 뒤 5년이 지난 해이다. 

 

문제는 일제에 의해 수여된 공훈등급이 표기된 상석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는 것이다. 상석을 세운 시기를 나타낸 일본 연호 역시 마찬가지로 일제의 잔재이다. 

 

이인석 상병은 일제의 영웅, 또는 친일파가 아닌 최대의 피해자였다. 상석을 없애지는 않더라도 당시 상황을 설명할 비석을 세우거나 하는 방법으로 비록 지하에서나마 한스러웠을 일제 지원병 굴레를 벗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영웅만들기에 골몰했던 군수 등 일제 앞잡이들이 만들어놓은 이인석 상병의 상석에 아직도 드리우고 있는 일제의 망령을 걷어내는 작업이 필요한 시기이다.

 

 

 

 

"선생하면서 학교 관사에 나와 있다가 지원병 나가고 나서 고향으로 돌아가 살았지. 하루는 일하고 고단해서 잠이 들었는데 누가 불러. 시아버님이 나갔는데 군청에서 왔나, 어디에서 사람이 와서 `이인석이 운명했다'라며 울면서 종이조각을 읽고 한참을 강연을 해. 잠자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울어보지도 못했어. 사람이 세상을 그렇게 살다 말고 갔어."

 

그때부터 3년이 넘게 군서면 하동리 이인석 상병의 집은 옥천 뿐 아니라 전국에서 온 순례객들로 넘쳐났다.

 

"어디서든 안온 데가 없었어. 선생들이 학생들 데리고 왔고, 그때는 사람은 죽었어도 이름은 안 잊어버리고 찾아온다 싶었어." 부인 유씨는 그래도 시어머니가 천지사방을 다니며 천 사람으로부터 한 뜸씩 뜬 일명 `천인침'을 남편에게 보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다.

 

고생해 가면서 전쟁터에서 잘 있게 해달라고 천인침을 완성했는데 끝내 보내지 못한 채 전사통지서를 받았더란다. 남편이 전사함에 따라 둘째 동생의 장남을 양자로 들였다. 유씨가 현재 함께 살고 있는 이가 양자로 들인 아들이다.

 

동생 이종두(79)씨의 기억은 좀더 구체적이었다. 이씨는 당시 지원병으로 간 사람이 충북에서 7명, 그중 3명이 형을 포함한 옥천 사람이었다고 기억했다.

 

"강제로 지원시킨 거야.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 뭘. 해방되고 나서 청주 반민특위(친일행위자나 친일부역자 등을 처벌하기 위해 해방후 구성한 특별기구)에서 우리를 불렀어. 조사관들이 조사해보더니 미안하다고, 옥천갈 차비는 있느냐고 묻데. 우리가 형님 덕분에 큰 부자나 됐고 하면 반민으로 몰렸지. 하지만 그게 아니었잖아."

 

형님이 전사한 뒤 이들 가족들은 일제 강점기 동안 전국에서 온 부의금 등으로 살았다. 그리고 그 돈으로 만주좁쌀을 팔아 순례한다며 찾아온 사람들에게 점심이라도 줄 수 있었다.

 

"형님 전사한 뒤 처음에는 월전리에 묘소가 있었어요. 그후에 고향 뒷산을 내가 사서 모시게 된 거지. 일본놈들이 더 열심이었어. 영웅이라 순례해야 한다고. 어머니는 형님 전사하고 6개월을 찬물만 마시고 살았는걸."

 

이씨는 고향인 하동리 새터와 가까운 이웃 상중리 신대마을에 살고 있지만 옛 집터는 잘 가지 않는다.행랑채는 이미 허물어졌고 페허가 되어 있는 집을 보기에도 그렇거니와 형제들이 오르내리며 감을 따먹던 집 울타리의 감나무 두 그루가 당시의 기억을 새롭게 하기 때문이다. 

 

일제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그 자신 기구한 삶을 살아온 이씨는 지금 `혈액순환부전증'이라는 병을 얻어 3년 넘게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전쟁 참전자에게 주어지는 6만여원의 연금과 노인연금, 국민기초생활수급자에게 주어지는 10여만원 등 20만원이 채 되지 않는 돈으로 한 달을 살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이인석 상병이 남기고 간 일가족의 상흔을 느낄 수 있다.

 


이인석 전사, 반도인 영예로 미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물론 조선·동아도 `지원병의 꽃'으로 찬양

  ■  「지원병 이인석군/ 최초로 영예의 전사/ 적진 중으로 돌입 분투」-조선일보
  ■  「지원병 최초의 꽃/ 옥천출신 일등병 이인석군 전사!/ 조선인지원병의 영예」-동아일보
  ■  「반도인의 영예/ 지원병 최초의 전사/ 충북 옥천출신의 이인석군」-매일신보

 

 

 

 

 
 
▲ 이인석 상병의 전사 사실을 미화해 보도했던 동아, 매일신보, 조선일보.(오른쪽부터)
 
위 기사는 1939년 7월8일 국내에서 발행된 각 신문에 실린 기사의 제목이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대륙 침략을 시작한 이후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소위 말하는 대동아공영권을 실현한다는 명분으로 광분한다.

 

1930년대 이후 조선을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병참기지로의 구실을 강제해 인력과 물자를 전쟁터로 내몰았고 `내선일체', `일선융합' 등 조선인과 일본인은 하나라는 구호로 민족말살과 황민화정책을 강행했다. 

 

1937년부터는 신사참배와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을 강요했고 1938년에는 학교의 조선어과를 폐지하고 조선어 사용을 금지했으며 `육군지원병제도'를 실시했다. 1939년에는 창씨개명제도를 실시해 조선인의 성명까지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했다.

 

이 기간, 언론은 물론 문인과 음악가, 미술인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친일 지식인들이 국민들을 전쟁터로 내몰기 위해 강연을 다녔고 일제는 이를 활용해 `영웅만들기'에 나섰다.

 

그 하나의 예가 이인석 상병의 사례이다. 이인석 상병이 1939년 중일전쟁 과정에서 조선인 지원병 가운데 첫 전사자라는 점을 일제는 놓치지 않았다.

 

조선일보, 동아일보는 물론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이르기까지 언론은 이인석 상병의 전사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이들 세 신문은 모두 이인석 상병의 전사 소식을 4단 기사로 처리했다.

 

조선이나 동아일보의 보도보다는 매일신보의 기사 내용이 더 구체적이다. 이인석 상병의 전사 소식을 미화해 일제에 적극 협력한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애를 쓴 흔적이 바로 신문 기사이다. 나라를 빼앗긴 것도 서러운데 이인석 상병의 죽음은 일제 통치를 합리화하고 전쟁수행을 위한 수단으로 쓰여진 것이다.

 

 

이인석 상병의 가족들은 이 상병의 전사 후 일제의 영웅화 책략에 따라 넘쳐나는 순례객들을 맞아야 했다. 이인석 상병의 셋째 동생인 이종두씨.
 

 

옥천읍 삼양리에 살고 있는 이인석 상병의 부인 유서분(87)씨.

빨간 일장기를 신문 제목 위에 붙인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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