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7_20세기100선

[Ⅰ] 문학 22.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 1957

忍齋 黃薔 李相遠 2016. 5. 14.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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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tEgnYCjdSSA

[Ⅰ] 문학 22.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 1957 

 

 

 

 

022. 보리스 파스테르나크(Boris Pasternak) 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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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있는  100   스물 두번째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Boris Pasternak) 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 1957)  시작합니다. 195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되었으나, 흐루시초프의 소련공산당으로부터 자신을 비롯한 자신의 가족 친지와 친구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노벨 문학상 수상을 거부해야 했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Boris Pasternak)’와 그의 작품 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 1957)속으로 빠져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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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파스테르나크(Boris Pastern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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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레오니도비치 파스테르나크(Boris Leonidovich Pasternak, 1890 2 10 ~ 1960 5 30) 1890 2 10 모스크바 유대인 가정에서 예술 학교 교수이자 후기 인상파 화가인 아버지 레오니드 파스테르나크(Leonid Pasternak)와 컨서트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로사 카우프만(Rosa Kaufman) 사이에서 2 2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한살어린 남동생은 알렉스였고 여동생들은 리디아와 조세핀이었습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국제적인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집에 들렀던 방문객으로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라이너 마리아 릴케, 레프 톨스토이가 있습니다. 파스테르나크의 부모는 소설가 레오 톨스토이의 철학적, 종교적 관점을 토대로  사회운동인 톨스토이 운동(Tolstoyan Movement) 가담했습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여사촌으로 후일 철학자가 된 올가 프라이덴버그(Olga Freidenberg)’와 같은 유치원에 다녔었지만, 그녀의 가족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하는 바람에 헤어졌습니다.  사람은 평생 가까운 친구 사이를 유지하며, 1910년부터 1954년까지 40년이 넘도록 편지를 교환했습니다.  사람이 직접 만난 것은 1936년이 마지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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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부터 1907 사이, 파스테르나크는 웨스트 우크라이나에 위치한 정교회 소속의 학교 홀리 모니티온 포타비 라브라(Holy Dormition Pochayiv Lavra)’에서 공부했습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그곳에서 혼란을 겪었습니다. 교복은 러시아 황제 3 군사학교 생도들의 유니폼과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파스테르나크는 군사훈련에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동유럽과 러시아의 학교에선 대부분 군복을 연상시키는 유니폼을 입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웃이었던 알렉산더 스크리아빈 영향으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모스크바 음악 학교(Moscow Conservatory)’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철학에 몰두하여 모스크바 대학을 졸업했고, 1910 독일의 마르부르크 대학(University of Marburg)’에서 신칸트주의(Neo-Kantianism)’ 철학자인 헤르만 코헨(Hermann Cohen)’ 니콜라이 하트만(Nicolai Hartmann)’ 교수의 지도 아래 공부했습니다. ‘헤르만 코헨 교수가 파스테르나크에게 독일에 계속 머물면서 철학박사 학위를  것은 권했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습니다. 학자가 되기 위해 독일에 갔지만 철학을 직업으로 삼길 포기한 , 1914 세계 1차대전이 발발할 즈음에 모스크바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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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테르나크는 모스크바에 살던 유대인 명문가의 딸인 아이다 비소즈카야(Ida Wissotzkaya)’라는 소녀를 사랑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세계 최대의 차회사인 비소츠키 (Wissotzky Tea)’ 운영했습니다. 파스테르나크는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을 다니던 그녀가 학기말 시험 준비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아버지가 그녀의 초상화를 그릴때  1912 여름  사람은 독일 마르부르크(Marburg)에서 만났습니다. 그후 파스테르나크는 아이다에게 프러포즈를 했습니다. 하지만 파스테르나크에게 비전이 없다고 판단한 비소즈카야 집안이 그녀가  프러포즈를 받아들이지 않도록 압력을 가했습니다. 고국에 돌아온 그는 알렉산더 블록의 영향을 받은 미래운동그룹에 피아니스토로 가입하고 그 기관지 레프 중심으로 많은 서정시를 발표하여,  시집을 같은  말에 출판했습니다. 1 세계 대전 , 파스테르나크는 러시아 뻬름(Perm)’ 부근의 쎄볼로드-빌베 (Vsevolodovo-Vilve)’ 위치한 화학 공장에서 일하며 가르쳤습니다. 이곳의 경험이 닥터 지바고 반영돼 있습니다. 1917 10 혁명이 있은 , 타국으로 이주한 다른 가족들이나 친지들과는 달리, 파스테르나크는 러시아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내전이 벌어지던 1918년부터 1920년까지 파스테르나크는 모스크바에 머물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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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상당수의 작가들은 백군이 장악한 지역으로 이미 탈출한 상태였지만, 외국이나 붉은 군대에 대항하는 백군이 장악한 남쪽으로 도피할 시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는 혁명이 가져온 새로운 사상과 가능성에 이끌렸습니다. ‘닥터 지바고 주인공 유리 지바고(Yuri Zhivago)’ 마찬가지로, 파스테르나크는 1917 10월에 권력을 장악한 볼셰비키 당이 의사가 놀라운 수술(splendid surgery) 하는  같은 탁월한 전략으로 부패 척결을 하는 것에 감동한 적이 있었습니다. 파스테르나크는 1921 소비에트 9 회의에서 보았던 블라디미르 레닌 대해 지도자의 통치 스타일에 대한 개인적인 존경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의 주장과 그 신빙성을 진지하게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식품과 연료의 심각한 부족 그리고 볼셰비키 당이 벌이는 약탈과 살인의 붉은 테러(Red Terror) 부르주아 지식층엔  두려움이었습니다. 외국으로 도피한 유명한 시인 마리나 츠베타예바(Marina Tsvetayeva)’ 파스테르나크에게 보낸 편지엔 그녀가 길을 걷다가 빵을 사기 위해 귀중한 도서관 장서들을 길거리에서 팔던 구질구질한 파스테르나크와 만난 장면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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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창작과 번역 활동을 지속했지만, 1918 후반부터는 출판을 거의   없었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알리는 유일한 방법은 당시 우후죽순 생겨나던 문학 카페에서 작품을 낭독하거나, 몰래 자비 출판하는 사미즈다트(samizdat)’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1922 출판된 삶은 나의 누이 그런 식으로 세상에 알려졌던 것입니다.   파스테르나크는 수준이 고르지 않은 소외적인 작품들을 집필했습니다. 볼셰비키 당을 피해 백군지역으로 도주한 작가들  아니라,  소비에트 작가들도 파스테르나크의 시가 순수하고 억제할  없는 영감을 준다고 칭찬했습니다. 1920년대 후반, 파스테르나크는 릴케와 츠베타예바 같은 저명한 시인들과 서신을 교환했습니다. 1920년대가 지나가면서, 그는 자신의 화려한 문체가 교육 수준이 낮은 독자층에 어필하지 못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자신이  초기 작품들을 개작하고, 1905 러시아 혁명에 관한  편의 장문의 시를 시작함으로써 보다 이해 하기 쉬운 시인이 되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는 산문으로 눈을 돌려 몇몇 자서전적 이야기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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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 파스테르나크는 미술대학 학생인 이브게니아 루리아(Evgeniya Lurye) 결혼했습니다.  다음 해에는 아들 이브게니(Evegenii) 태어났습니다. 파스테르나크가 1926년까지 공산당 지도부를 구성하는, 여전히 혁명적인 당원들을 지지한 증거는 그의  에서 나타납니다.  시는 1926 2 30일에 전설적인 볼셰비키 당의 리더인 라리사 레이스너( Larisa Reisner)’ 발진티푸스에 걸려 30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에 충격을 받아  것입니다. 1927, 파스테르나크의 절친한 친구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Vladimir Mayakovsky)’ 니콜라이 아세예프 (Nikolai Aseyev)’ 소련 공산당의 요구에 완전히 종속된 예술을 옹호했습니다. 1932, 파스테르나크는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문체를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해외로 망명한 반공주의 사상을 가진 그의 핵심 독자들에게는 그리 흥미를 끌지는 못했습니다. 1932, 파스테르나크는 저명한 피아니스트 겐리크 니가우스(Heinrich Neuhaus)’ 아내인 지나이다(Zinaida)’ 사랑에 빠졌습니다.  사람은 각기 이혼했습니다. 파스테르나크는 1934 지나이다와 정식으로 결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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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 4, ‘오시프 만델스탐(Osip Mandelstam)’ 스탈린을 풍자한 스탈린 에피그램(Stalin Epigram)이란 시를 파스테르나크에게 읽어주었습니다. 심약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만델스탐에게 나는 시를 듣지 않았고, 당신은 나에게 시를 들려주지 않았소. 당신도 알다시피, 이상하고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요.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있단 말이오. 건물 벽들도 귀가 있는지 두려울 지경입니다. 대로변의 벤치들도 우리들의 말을 듣고서 고발할지 모르겠소. 내가 아무 소리도 듣지 않은 거로 해두죠. 1934 5 14 , 만델스탐이 집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체포영장을 발급한 사람은 내무인민위원회의 수장 겐리흐 야고다(Genrikh Yagoda)’였습니다. 망연자실한 파스테르나크는 즉시 소련 기관지 이즈베스티아(Izvestia)’ 찾아가 나중에 우파로 돌아 처형당한 편집장 니콜라이 부카린(Nikolai Bukharin)’에게 만델스탐을 대신해서 중재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부카린과 대화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크렘린에서  전화였습니다. 스탈린 동지께서 당신과 통화를 하시겠답니다. 파스테르나크는 겁에 질려 사색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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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스탈린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스탈린은 친밀하면서도 허세 부리지 않은 태도로 그에게 말했습니다. 문학계에선 만델스탐의 체포를 두고 뭐라고들 합니까? 당황한 파스테르나크는 소련 어디에서고 그런 얘기를 하는 문학 서클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스탈린은 만델스탐에 대한 파스테르나크의 솔직한 의견이 듣고 싶다고 했습니다. 파스테르나크는 진지하면서도 더듬거리는 말투로 자신과 만델스탐의 철학이 완전 다르다고 둘러댔습니다. 이에 스탈린이 다소 조롱하는 말투로 대답했습니다.  러시군요, 당신은 동무를 옹호할  없으시군요"라고 말하고는 수화기를 내려놓았습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쪽팔리고 창피스러워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스탈린의 군부 숙청을 비판한 이오나 야키르(Iona Yakir)’ 대장과 마셜 미하일 투카체프스키(Marshal Mikhail Tukhachevsky)’ 사령관이 재판을 받을 때인 1937, 소련작가동맹은 회원들에게  피고에 대한 사형선고를 지지하는 선언문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파스테르나크는 작가동맹의 지도부가 그를 찾아와 협박했음에도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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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되지 않아, 그는 스탈린에게 직접 연락하여, 자신이 톨스토이 삶의 원리 지지하는 사람으로 자신의 생명이 스탈린의 처분에 달려 있다면서, 자신은 인간의 삶과 죽음을 판단할 재판관이   없다고 호소했습니다. 파스테르나크는  일로 자신이 체포되리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스탈린은 처형 대상에서 파스테르나크의 이름을 지워버리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구름 속에서 사는 이런 인간은 손대지 말자고. 성스러운 이런 바보는 내버려 두자! 파스테르나크의 가까운 친구이자 시인인 티지안 타비즈(Titsian Tabidze)’ 대숙청의 희생자였습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조지아의 수도 티플리스에 위치한 파올로 이아시빌리 집을 방문했을때, 이아시빌리는 그를 조지아 시인 협회원들에게 소개했는데, 그중에는 그의 절친한 친구가  티지안 타비즈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파스테르나크보다 5살이 적은 36살이었던 타비즈는 내성적이었으며 내면세계에서 나오는 영감으로 시를 썼습니다.  타비즈가 살아 있는 동안에, 파스테르나크는  미소를 짓는 땅딸막하고 작은 인물이 그와 얼마나 가까웠었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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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비즈가 체포되어 1937년에 처형되고 나서야 파스테르나크는 그의 인생에 있어서 타비즈가 차지했던 참다운 비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파스테르나크는 편지를 통해 타브즈에게 작가동맹의 지침을 따르지  것을 종용 했었습니다. 파스테르나크는 1950년에 출간한 자서전에서 타비즈의 처형, ‘마리나 츠베타예바 파올로 이아시빌리(Paolo Iashvili)’ 자살했을 때의 절망감을 피력했습니다. 파스테르나크는 타브즈가 처형당한 것에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자책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년간에 걸쳐 문체와 언어의 간결함을 추구했고,  문체 바꾸는 것을 계속했습니다. 2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공군이 모스크바를 공습할 , 파스테르나크는 라브루쉰스키(Lavrushinski)’ 거리에 있는 작가동맹 건물 옥탑 에서 화재 감시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는 독일 비행기에서 투하되는 폭탄 처리를 도왔습니다. 1943, 파스테르나크에게 전방의 군인들을 방문할  있는 군종작가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여정의 어려움을 고려하면 그는  견뎌냈다고   있습니다. 그는 오래전의 부상으로 다리 한쪽이 부실했음에도 가장 위험한 곳에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전투 중이거나 부상한 군인들에게 자신의 시를 읽어주거나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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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전쟁이 끝나면서, 소련 국민은 나치즘에 의한 참화와 스탈린의 숙청이 종식되기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밀폐된 기차들은 다수의 죄수들을 소련의 강제수용소인 굴라그(Gulag)’ 실어나르기 시작했습니다. 공산군 사령관으로 나치 협력자였던 안드레이 블라소프(Andrey Vlasov)’ 밑에서 나치 협력자 노릇을 해온 사람들도 일부 끼어있었지만,  부분은 평범한 소련 장교이거나 시민들이었습니다. 파스테르나크는 나치 독일에 체포되었던 소련 군인들이 풀려나 소련으로 돌아오자마자 강제수용소로 보내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반파시스트 조직에 가담했었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백군지역으로 망명했다가 사면해준다는 약속을 믿고 돌아온 사람들도 곧장 굴라그로 보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산당 내의 유명 정치인들을 숙청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인 레닌그라드 사건(Leningrad Affairs)’ 연계된 혐의로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추방되었습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트가 56세가 되던 1946 10,   결혼한 경험이 있는 당시 34살의 미혼모로 출판사 노비 미르(Novy Mir)’에서 일하고 있는 올가 아이빈스카야(Olga Ivinskaya)’ 만났습니다. 그는  사랑이었던 아이다 비소즈카야 닮은 그녀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파스테르나크는 자신의 시집과 번역서  권을 그녀에게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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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번째 부인 지나이다 곁을 평생 떠나지 않았지만 죽을 때까지 올가 이빈스카야와의 혼외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녀는 그에게 아래층에 사는 이웃 올가 볼코바(Olga Volkova)’ 전화번호를 주었습니다. 저녁에 파스테리나크가 전화를 하면, 볼코바는 그걸 받아 아파트 아래위로 연결되어 있던 수도 파이프를 때려 이빈스카야에게 알렸습니다.  번째 부인 지나이다 남편의 부정에 분노했습니다. 아들 레오니디 병에 걸렸을 , 지나이다는 아들의 침상 곁에서 남편으로부터 이빈스카야와의 관계를 끝내겠다는 다짐을 받아냈습니다. 파스테르나크는 자신의 친구이자 아내도  알고 있는 루이사 포포파(Luisa Popova)’에게 자신이 약속을 지킬 것임을 아내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고, 포포파는 그에게 반드시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되지 않아, 이빈스카야가 병에 걸려 포포파의 아파트에 머문적이 있었는데, 이때 지나이다가 찾아와 그녀를 만났습니다.

1948, 파스테르나크는 이빈스카야에게 직장인 출판사를 그만 두라고 조언했습니다. 사실  사람의 관계로 인해 더는 그곳에서 일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일이 있고 나서, 파스테르나크는 그녀에게  번역을 시켰습니다. 그들은 포따포프 거리에 있는 그녀의 아파트를 우리 가게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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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10 6, 이빈스카야가 KGB 체포되었습니다. KGB 요원들이 그녀의 아파트를 쳐들어왔을 , 그녀는 타자기를 앞에 놓고 북한 시인으로 추정되는 원두손(Won Tu-Son)’ 시를 번역하던 중이었습니다. KGB 그녀의 아파트를 샅샅이 뒤져 파스테르나크와 관계가 있는 물건들은 한데 쌓아놓았습니다. 이빈스카야는 루비앙카(Lubyanka) 비밀 경찰서로 연행되어 반복하여 조사를 받았지만 그녀는 파스테르나크에게 피해가  어떤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녀는 파스테르나크의 아기를 임신 중이었습니다. 그녀는 10 징역형을 선고 받고 굴라그에 수용되고 나서 얼마 있다가 아기를 유산했습니다. 비밀해제된 KGB문서에 의하면 이후부터 올가 아이빈스카야 KGB를 위해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를 감시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파스테르나크가 파우스트(Faust) 전반부를 번역하여 모비미르1950 8월호에 게재하자, 비평가들이 비난을 가해왔습니다. 그가 '순수예술의 반동론' 지지하기 위해 괴테의 '진보' 의미를 왜곡하고 미적이면서 개인주의적 가치를 끌어들였다는 것이라고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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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3 5, 스탈린이 뇌졸중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때 이빈스카야는 여전히 굴라그 수용소에, 파스테르나크는  스크바에 있었습니다. 나라 전체가 당황, 혼돈, 그리고 슬픔에 빠졌습니다. 이빈스카야가 풀려난 ,  사람 간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파스테르나크는 우리는 오랫동안 미친 살인자, 지금은 바보요 돼지에 불과한 자에게 지배를 당해왔소.  미친 자는 모호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망상에 사로잡혔고, 직관에 따라 일을 처리했지요. 우리는 하찮은 인간들에게 통치를 받고 있는 겁니다.라고 술회했습니다.  시기에 파스테르나크는 은밀히 불법 복제한 조지 오웰의 영문 소설 동물농장 읽으면서 희열에 잠겼습니다. 그는 이빈스카야에게 소설  돼지 독재자 나폴레옹이 소련 수상 니키타 흐루시초프를 연상시킨다고 말했습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1956년에  에세이에서 아버지가 톨스토이의 소설에 들어갈 삽화를 그리기 위해 미친 듯이 작업한 장면을 회고했습니다.  소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출판인 표도르 마르크스(Fyodor Marx)’ 운영 하는 니바(Niva)’라는 잡지에 연재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법정, 감옥, 기차 등을 현실감있게 스케치했습니다. 아버지는 마감일을 맞추기 위해, 삽화를 전달해줄 기차 차장들과 개인적으로 접촉하여 집으로 오게 하는 등의 방법으로 그림 그릴 시간을  많이 확보하려 했다고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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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테르나크는 1958 서독의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빈스카야는  때문에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녀가 나와 가장 가까운 사이라 판단한 비밀경찰이 가혹하게 취조하면서 협박하면 그녀로부터 나를 감옥에 집어넣을 만한 증거가 나올 것으로 생각했던 겁니다. 그들이 나를 건드리지 못했던 것은 그녀의 영웅적인 태도와 인내심 덕분이었습니다.” 1957,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1905 러시아 혁명과 2 세계 대전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1956년에 완성하여 소설 닥터 지바고 출간했습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조비미르  원고를 제출했지만, 출판사는 사회주의를 부정하는 내용이라는 이유로 퇴짜를 놓았습니다. 그는 소설의 주인공 유리 지바고처럼 사회의 진보보다는 개인의 복지에  많은 관심을 표명했던 것입니다. 검열관들은 반소련을 의미하는 일부 구절, 특히 스탈린주의, 집단화, 대숙청과 굴라그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을 문제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소설로 인해 파스테르나크의 운명은 변하고 맙니다. 1956 3, 이탈리아 공산당이 언론인 세르게이 단젤로(Sergio D'Angelo)’ 소련에 보냈습니다. 공산당의 일원이자 언론인으로서 모스크바의 생활상을 취재하라는  이었습니다. 밀란에서 출판사를 운영하는 사업가이자 공산당원인 지안지아코모 펠트리넬리(Giangiacomo Feltrinelli)’ 단젤로에게 서방 사람들에게 어필할 만한 소련 작품들을 찾아보라고 부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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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에 도착한 단젤로는 닥터 지바고 대한 소식을 듣자마자 모스코바 남쪽에 위치한 페레델키노(Peredelkino)’ 달려가 파스테르나크를 만나, 그의 원고를 펠트리넬리의 출판사에 넘길  있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파스테르나크는 크게 놀랐습니다. 그는 서재로 가서 원고를 갖고 와서는 크게 웃으면서 단젤로에게 말했습니다. 선생이 여기 오신 것은 내가 사형집행인들 앞에  있는 것을 보기 위해서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자신이 엄청나게 위험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1920년대 이래 소련 당국이 유럽권 출판사와 거래를 시도한 적이 없었습니다. ‘보리스 필냐크(Boris Pilnyak)’ 베를린에 있는 출판사에서 작품을 출간했다가 처형당했고, ‘예브게니 자미아틴(Evgeny Zamyatin)’ 유럽으로 작품을 빼돌리려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프랑스로 추방되어 파리에서 가난에 찌들어 살다가 죽었습니다. 하지만 유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출판사 사장인 펠트리넬리가 공산당원이기 때문에 유럽에서 자신의 작품이 출판될  있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소련 정부가 러시아에서도 출판을 허용하게  것이라 믿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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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빈스카야와 지나이다는 닥터 지바고 원고가 유럽 출판사에 넘겨졌다는 말을 듣고 공포에 떨었습니다. 하지만 파스테르나크는 출판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는 펠트리넬리가 은밀히 보내온 심부름꾼에게 자신은 닥터 지바고 출판할  있다면 어떤 희생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다고 전했습니다. 1957, 펠트리넬리가 자신의 출판사에서 파스테르나크의 소설이 출간될 것임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소련 정부에서 거듭 사람을 보내왔지만, 펠트리넬리는 출판 포기나 연기는 없을 것임을  박았습니다. 이빈스카야는 말했습니다. 페트리넬리는  소설이 소련에서 출판되리라 믿지 않았고, 그런 걸작을 세상에 내놓는 것을 막을 권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행위는 엄청난 범죄라고 생각했습니다. 소련 당국은 파스테르나크에게 압력을 가해, 출판사에 계약 취소를 알리는 전보를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페트넬리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 자신에게서  전보 내용은 무시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소설 출판에 대한 소련 정부의 치열한 방해 공작의 도움을 받아, 닥터 지바고 1957 11 출간되자마자 비공산권 세계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선 유대인에 대한 동화(同化)주의적 견해 때문에 날카로운 비판을 받았습니다.  사실을 들은 파스테르나크는 나는 인종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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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파스테르나크는 러시아 정교회 성찬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소련의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이 무신론과 스탈린주의로 동화되는 것보다  낫다고 믿었습니다. 엄청난 독자층의 요구로, 닥터 지바고 맥스 헤이워드(Max Hayward)’ 만야 허라리(Manta Harari)’ 의해 서둘러 영어로 번역이 되어, 1958 영어판 소설이 출판되었습니다.  때의 번역본은 50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출판 가능한 에디션으로 남아있습니다. 닥터 지바고 영문판은 1958년부터 1959 사이, 26 동안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를 유지했습니다. 이빈스카야의  이리나(Irina) 닥터 지바고 소설을 타이프로 쳐서 은밀히 돌렸습니다. 소련의 비평가 중에서  소설을 읽은 사람은 없었지만, 국영 언론에선 맹비난을 가했습니다. 그러자 이런 조롱이 나돌았습니다: 나는 파스테르나크  소설을 읽지 않았지만,  인간을 비난할  있다.” 2 세계 대전 후의 여파가 지속하는 동안, 파스테르나크는 기독교 복음을 위한 연작시를 지었습니다. 이빈스카야에 의하면, 그는 스탈린을 기독교 이전 시대의 거인에 비유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파스테르나크가  기독교 주제의 시는 일종의 항의의 일환이었던 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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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1958 9 9, 리터러리 가젯지의 평론가 빅토르 페르트소프(Viktor Pertsov)’ 파스테르나크의 시를 1908년부터 1910 사이에 제조된 상징주의 가방 속의 좀약에서 풍기는 악취와 같은 퇴폐적인 종교적 라고 응수했습니다. 파스테르나크는 소련 국내는 물론 해외의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증오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빈스카야는 그가 평생 그런 편지를 받았다고 증언했습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아들 이브게니는 아버지가 노벨상을 받을 것이라는 소문은 2차대전이 끝난 후부터 돌았습니다. 노벨문학상 심사위원장인 랄스 길렌스텐(Lars Gyllensten)’ 의하면, 1946년부터 1950 사이엔 매년 아버지가 수상자 후보에 올랐고, 1957년에 다시 올랐고, 1958년에 마침내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것이지요. 아버지는 소련내에서 자신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는 것에서 그런 조짐을 느꼈습니다. 아버지는 소련 작가 동맹에 의하면, 서구의 일부 문학계가  작품의 평범하면서도 낮은 생산성에 걸맞지 않게,  작품에서 남다른 중요성을 느끼고 있다 언급한바 있었습니다. 한편 파스테르나크는 작가 레나테 슈와이처(Renate Schweitzer)’ 자신의 여동생 리디아 파스테르나크 슬라이터에게 보낸 편지에서 노벨상 위원회가 자기 대신에 이탈리아 소설가 알베르토 모라비아(Alberto Moravia)’ 수상자로 선정했으면 한다는 바람을 피력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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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릴 생각에 괴로움과 근심으로 가득차 있다고 적었습니다. 1958 10 23, 스웨덴의 한림원은 노벨 문학상 수상작과 수상자로 닥터 지바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를 지명하였습니다. 러시아 서정시에 대한 그의 공헌과 위대한 러시아 서정시 전통에 대한 그의 역할이 지명 이유였습니다. 10 25, 파스테르나크는 스웨덴 학술원에 전보를 보냈습니다: 무한히 고맙고, 감동적이고, 자랑스럽고, 놀랍고, 벅찹니다. 그날, 모스크바에 있는 대학 문학연구소는 모든 학생에게 파스테르나크와 그의 소설을 규탄하는 성명서에 서명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를 소련 연방에서 추방  것을 요구하는 자발적인 시위 가담하라는 요구도 있었습니다. 10 26, ‘리터러리 가젯 언론인 다비드 자스라브스키(David Zaslavski)’  문학적 잡초를 둘러싼 반동적 선전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습니다. 당시 반 파스테르나크 캠페인에서 연설했던 시인 슬루츠키는 반파스테르나크 연설   것을 고통스러워하다 정신분열증에 걸렸습니다. 흐루시초프를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가 참석했던 1958 10 29, 공산청년동맹 콤소몰(Komsomol) 창립 40주년을 맞아 열린 공산주의 청년단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위원장 블라디미리 세미차스트누이(Vladimir Semichastny)’ 1 4천여 명의 청중 앞에서 파스테르나 크를 맹비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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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1961년에 KGB 수장으로 승진한 세미차스트누이는 파스테르나크를 소련의 적을 기쁘게 하는 멍청한 이라면서 그는 비방을 일로 착각하는 자라고 맹비난을 했습니다. 그는 파스테르나크가 외국에서 소련 국민의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를 했다면서 밥을 먹는 자리에선 똥을 싸지 않는, 돼지도 하지 않을 행동을 했다 공격했습니다. 그 연설에서 흐루시초프는 손뼉을 격렬하게 쳐댔습니다.  소식을 듣고, 파스테르나크는 자살 충동을 느꼈습니다. 파스테르나크에게 모욕을 주는  부분이 사실은 흐루시초프의 의중이었음이 밝혀지던 순간이었습니다. 총회 전날 밤에, 흐루시초프가 세미차스트누이에게 전화를 걸어 그런 문장을 불러주면서 연설문에 삽입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입니다. 새미차스트누이는  문장을 흐루시초프 답게, 의도적으로 조잡하면서도 무례하게 꾸짖는 말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노벨상을 받기 위해 스톡홀름으로 출국한다면 다시는 소련으로 돌아올  없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에 파스테르나크는 노벨상 위원회에 전보를 보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주는 상이라는 의미에 비추어  , 나는 나에게 수여된  과분한 대우를 포기해야   같습니다. 나의 자진 포기에 대해 오해하지  것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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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학술원의 반응은  수상 거부가 수상의 유효성을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학술원은 수상식없이 수상자를 발표하는 것을 아쉬워할 뿐입니다. 파스테르나크가 노벨상 수상을 거부했음에도 소련작가동맹은 관영 언론을 통해 그를 악마화했습니다. 서방세계로 추방 한다는 위협도 가했습니다. 이에 파스테르나크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시초프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님에게  편지를 보내는 바입니다. 저는 세미차스트누이 동지의 연설을 듣고 정부측에선 제가 모국을 떠나는 것을 막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모국을 떠날  없습니다. 저는 출생으로,  삶과 일로 러시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는 러시아와 떨어지는, 러시아를 벗어나  운명을 상상할  없습니다. 저의 실수나 실패가 무엇이든 간에, 저는 서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름을 둘러싼 정치 캠페인의 중심에 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상상할  없었습니다. 저는 그런 사실을 깨닫자마자, 스웨덴 학술원에 자발적으로 노벨상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전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국경을 넘어 떠나는 것은 저에게 죽음이나 마찬가집니다. 따라서 저는 저에 대해 극단적인 조처를 내리지  것을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말씀드리지만, 저는 소련 문학을 위해 일해왔고, 여전히 제가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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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솔제니친(Alexander Solzhenitsyn)’ 그의 저서   파스테르나크가 노벨상을 거부한 것과 그런 편지를 흐루시초프에게 보낸 것을 신랄하게 비난했습니다. ‘올가 이빈스카야 그에게 그런 행동을 하도록 부추겼던 것을 후회했습니다. 1958 10 31, 소련작가동맹은 비공개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들은 파스테르나크를 내부의 백색 망명자이자 적을 이롭게 하려고 내부 조직을  너뜨리는 반역자라는 의미의 파시스트 5번째 컬럼니스트(Fascist fifth columnist)’ 규탄하고, 그를 소련 연방에서 추방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그들은  중앙정치국에 보내는 청원서에 서명했는데,  내용은 파스테르나크에게서 소련 시민권을 박탈하고 그를 그가 바라는 자본주의 천국으로 추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작가 콘스탄틴 파우스토브스키(Konstantin Paustovsky)’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시인 예브게니 옙투셴코(Yevgeny Yevtushenko)’ 혐오감을 이기지 못하고 회의장를 빠져 나왔습니다. 인도의 네루 수상이 흐루시초프에게 전화를 걸어 파스테르나크를 보호하기 위한 위원회 결성을 추진하겠다는 식으로 압박을 가하는 바람에 추방계획은 무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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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이게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1958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된 덕분에 감옥행을 면하고 목숨을 구할  있었습니다. 소련 정부가 국제적인 항의에 직면하는 상황을 꺼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함에도 그로 인한 소요로 파스테르나크의 건강이 심각하게 나빠졌습니다. 풀리처 상을 받은  있는 미국의 유명 만화가  몰딘(Bill Mauldin)’ 1959 파스테르나크가 등장하는 카툰을 그려 신문에 실었습니다. 카툰 속의 파스테르나크는  더미에서 나무를 쪼개는 강제수용소 죄수였습니다. 그는 동료 죄수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죄로 죄수가 되었소? 당신의 죄는 뭐요?” 파스테르나크는 1936년부터 1960년까지 페레델키노(Peredelkino)’ 있는 시골집에서 살았습니다. 닥터 지바고 이후에  시들에선 사랑, 영혼 불멸, 하나님과의 화해같은 보편적인 의문을 담았습니다. 1959 그는 그의 마지막  날씨가 좋은 때(When the Weather Clears)’ 완성했습니다. 파스테르나크는 닥터 지바고 놓고 논란이 일고 있을 때도 매일 집필 스케쥴을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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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파스테르나크 공산당 문학 분과의 고위 임원인 미하일로비치 리우비모프(Mikhailovich Liubimov)’으로부터 은밀하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빈스카야는 리우비모프가 영리하고 깨어있는 사람으로 소설 때문에 발생한 혼란과 소동은 잊혀지겠지만 파스테르나크는 잊혀지지 않는 작가로 남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회고했습니다. 1959 여름, 파스테르나크는 알렉산더 2세가 러시아에서 농노를 폐지하기 전후를 배경으로  무대 연극 3부작의 하나인 눈먼 아름다움(Blind Beauty)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파리 리뷰(The Paris Review)’지의 올가 칼라일(Olga Carlisle)’기자와 인터뷰하면서  연극의 구성과 인물 설정에 대해 진지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는 연극 말미에 서구적인 영향에 개방적이며, 진보적이고, 지적이고, 예술적인, 계몽적이면서 부유한 중산층의 탄생 그리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3부작   번째 작을 완성하기 전에 말기 폐암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1960 5 30 페레델키노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폐암으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나이 70 였습니다.  전날 그는 이빈스카야에게 말했습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늦게 찾아왔어하지만 올리샤(Oliusha: 올가 이빈 스카야), 우리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왔어. 지금은 모든 것이 좋아우리가 이렇게 영원히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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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임종하는 자리에 아들들을 불렀습니다. 내가 죽어서 누가 가장 고통을 받을까? 누가 가장 아파할까? 올리샤가 그럴거야. 그녀에게 뭔가를 해줄 시간이 없었어. 그녀가 고통받을 것이 가장 괴로워. 그러고 나서 그는 마지막 말을 했습니다.  들리지 않아. 눈앞에 안개가 끼었어. 하지만 사라지겠지,  그래? 내일 창문 여는  잊지마. 그가 사망하기 얼마 전에 러시아 정교회 신부들이 파스테르나크에게 마지막 종교 의식을 치를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교회 측에선 극비로 그의 집에서 장례 미사를 드렸습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사망을 알리는 부고가 리터러리 가젯 작게 실렸지만, 모스크바 지하철 곳곳에는 손으로 장례 일시를 적은 삐라가 붙여졌습니다. 이로 인해, 수천 명의 펜이 KGB 군경찰의 감시망을 뚫고 페레델키노에서 열린 장례식에 동참했습니다. 다수의 해외 언론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파스테르나크의 시신이 공동묘지로 운송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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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장례의식 조사는 아스무스(Asmus)’교수가 했고, 청년들이 파스테르나크의 금지된 시를 낭독하자, 기관원들이 장례식을 마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익명의 노동자가 친애하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평화롭게 주무십시오! 우리는 당신이  일을  알지 못하지만 지금 당신에게  가지 약속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당신이  일을 전부  알게 되는 날이 언제고 온다는 사실이지요. 우리는 당신의 책에 나쁜 것이 있다는 말을 믿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말로 표현할  없는 모욕을 안겨준 사람들, 그리고 동료 작가들이란 인간들에게 무슨 말을   있을까요? 평안히 영면하십시오, 보리스 레오니도비치 파스테르나크!라고 조사를 이어갔습니다. 페레델키노에 있는 예수 변모 교회(Church of the Transfiguration) 조종을 울렸고 망자(亡者) 위한 기도문이 파스테르나크의 이마에 놓여졌고, 관두껑이 닫히고 나서 관이 땅속  매장되었습니다. 파스테르나크의 묘지는 소련 반체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성지가 되었습니다. 소련연방이 붕괴하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죽은지 29년뒤인 1989 그의 아들이 뒤늦게 아버지를 대신에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2003 이후, 러시아 교과과정에 포함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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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 노벨상 수상에 대한 미국 CIA 역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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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2, 작가인 이반 톨스토이(Ivan Tolstoy)’ 세탁된 소설:KGB CIA사이에서의 닥터 지바고’(The Laundered Novel: Doctor Zhivago between the KGB and the CIA)’라는 책을 러시아에서 출간했습니다.  책에서 영국 정보기관 MI6, 미국의 CIA 러시아어  닥터 지바고 노벨상 위원회에 제출   있도록 손을 썼다고 증거를 들어 주장했습니다. 파스테르나크에게 노벨문학상을 주어 소련에 대한 국제적인 신뢰를 떨어뜨릴 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출판사 사장 펠트리넬리의 말을 빌려 CIA 요원들이 소설 원고를 사진 촬영하여, 러시아 언어로 소수의 책자를 비밀리에 제작했다고 합니다. 이반 톨스토이는 2008 12 7 러시아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CIA 파스테르나크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게끔 어떻게 도왔는지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CIA 러시아어  책자를 찍었기 때문에 파스테르나크가 노벨상  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해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봅니다. 강조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때 CIA 찍은 러시아어  소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만, 나는 바로 CIA 때문에 그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고 생각 합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렇게 결론 내리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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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문헌학자 안나 세르게예바-크리야티스(Anna Sergeyeva-Klyatis)’ 2012 출판한 논문에서, 전후 망명자 중앙 협회(Central Association of Postwar Emigres) 러시아인 망명자들에 의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러시아어  닥터 지바고 오타와 탈자가 난무한 상태로 비밀리에 출판하는 것에 손을 댔던 단체였었다고 주장 했습니다. 2014 4 14, CIA 헤이그 모튼 출판사(Mouton Publishers of the Hague)’ 1958 출판한 1 여종  러시아 책자들에 관해 작성된 130 종의 문서를 비밀해제하여 공개했습니다. 그중의 하나인 1957 12 12일에 작성된 CIA 문서에는 이런 문장이 들어있었습니다. “‘닥터 지바고 되도록 많은 나라에서 출판되게 해서 최대한 자유 세계에 대한 논의가 많이 벌어지게 하고, 노벨상 같은 명예로운 상을 받을  있도록 높게 평가되도록 한다. 닥터 지바고 관한 비밀해제 건에 대해 CIA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러시아판 소설을 출판할  있도록 비밀리에 작업한 , CIA 1958 브뤼셀(Brussels) 만국박람회장을 찾을 소련 방문객들에게 배포할 소설을 확보하기 위해 민첩하게 움직였다. 박람회가 끝날 때까지 355권의 닥터 지바고 은밀하게 배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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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된 파일을 검토한  지바고 사건(Zhivago Affair)이라는 책을 공동 저술한 워싱톤 포스트 저널리스트  피터 (Peter Finn)’ 작가 뻬트라 쿠비(Petra Couvee)’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CIA 파스테르나크의 소설이 스웨덴 학술원을 포함한 세계로부터 관심 끌기를 바랐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CIA 러시아판 소설을 출판 해서 파스테르나크가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지난 수십 년간 논쟁거리가 되어왔던 주장에 대한 증거는 없다. 파스테르나크의 사망 , 올가 이빈스카야는  번째로 체포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이리나 에멜야노바(Irina Emelyanova)’ 함께였습니다. 죄명은 서방 출판사와 연결하여 닥터 지바고 놓고 현금거래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KGB 파스테르나크가 이빈스카야에게 보낸 편지를 포함한 원고와 서류들을 압수했습니다. KGB 1962년에 이리나를 석방했고, 8 형을 선고받은 올가는 4년만인 1964년에 조용히 석방했습니다. 1978, 그녀의 회고록 원고가 해외에 반출되어 파리에서 출판되었습니다. 맥스 헤이워드가 영어로 번역하여 같은  시간이 포로: 파스테르나크와 같이한 세월(A Captive of Time: My Years with Pasternak)’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이빈스카야는 1988년이 되어서야 복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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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연방이 해체된 , 이빈스카야는 KGB 1961 압수한 편지  문서들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러시아 대법원은 소유권자가 불분명하여 국가 문서로 남아있어야 한다며 패소판결을 내렸습니다. 이빈스카야는 83세의 나이로 1995 9 8 암으로 사망했습니다.  안나 케른(Anna Kern) 없었다면 푸쉬킨도 없었을 것이고, 아시도라(Isadora) 없었다면 세르게이 예세닌(Sergei Yesenin) 없었을 것이고, 닥터 지바고 집필에 영감을 제공  올가 이빈스카야가 없었다면 파스테르나크도 없었을 것입니다. 소련 정부에 의해 출판 금지되었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작품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하일 고르바쵸프 공산당 서기장이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정책) 선언함으로써 해제되었습니다. 비밀해제된 KGB문서에 의하면, KGB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노벨상 수상거부 공작에 동원된 올가 이빈스카야의 역활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앞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이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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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 1957)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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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계 대전, 러시아 혁명, 적백내전 등의 20세기 러시아의 모습을 생생히 전하는  편의 대하소설입니다. 그 방대한 양으로 줄거리를 명확하게 요약하기에도 힘들 정도로 여러 인물의 시점으로 진행되고 있는 소설입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본래 시인으로 소설 속에서 간간히 시적 표현을 찾을  있어서 혹자는 이 작품을 시소설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또한 파스테르나크가 식물에 관한 지식이 많아서 자연물 묘사가 세밀하게 되어 있는 것도 시와 소설에 걸쳐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작품의 전반적인 특징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영화나 보고 이 작품이 아름다운 로맨스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힘들어 집니다. 러시아의 격동적인 역사적 상황은 둘째치고 쏟아져나오는 인물들에 정신 차리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저 역시 별도의 메모지를 끼워놓고 나오는 인물을 차근차근 적어가며 읽었고 나름  정신을 집중해서 읽어야 했거든요. 부록으로 '유리 지바고의 ' 25편이 있습니다. 주인공이며 의사이자 시인인 유리 지바고의 정신세계와 삶의 철학을 엿볼  있어서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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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바고(Живаго/Zhivago) 러시아어로 '살아있는(alive)' 뜻하는 '지보이(Живой)' 소유격 형태로,  소설의 배경과 관련이 있는 1917 러시아 혁명 이전의 체제가 아직 살아있으며, 이는 파스테르나크가 집필 당시 소련의 사회 체제를 반대한다는 뜻으로도 풀이됩니다. 실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정치나 사회에 깊이 관여하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특유의 객관적이고 냉정한 태도를 고수하며 당시 소련의 체제와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소설은 본격적으로 체제에 맞서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시인으로서 활동했을 시절 혁명의 물결에 치여 죽거나 멀리 떠나버린 동료들에게  빚을 갚고,  틈에서 용케 살아남아온 것을 속죄하는 의미가  컸습니다. 파스테르나크는 이 원고를 가지고 모스크바의 문학지 '노비 미르' 기고하려 했지만 거부당했습니다. 대신 1957년에 이탈리아어로  출판을 했습니다. 그렇게 1958 노벨문학상 수상이 결정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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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 1957)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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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전쟁속에 피어난 사랑 이야기로 전쟁과 얼음의 , 그곳에는 거대한 전투의 소리와 위대한 사랑의 침묵이 있었습니다. 8세의 나이에 고아가  유리 지바고는 그로메코가() 입양되어 성장합니다. 1912 어느 겨울 , 그는 크렘린 궁성 앞에서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기마병에게 살해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이후 그는 사회의 여러 뒷면들을 접하게 되고, 의학을 공부해 빈곤한 사람들을 돕고자 꿈꿉니다. 그는 그로메코가의 고명딸 토냐와 장래를 약속하면서 열심히 의학실습에 몰두하는데 운명의 여인 라라와 마주칩니다. 그녀는 어머니의 정부 코마로프스키에게 정조를 빼앗기자 사교계의 크리스마스 무도회장에서 코마로프스키에게 방아쇠를 당겨 총상을 입힙니다. 유리는 다시 한번  여인에게 호기심을 느낍니다. 그러나 라라에게는 혁명가 파샤라는 연인이 있었습니다. 1914 1차대전이 일어나고 군의관으로 참전한 그는 우연히 종군간호부로 변신한 라라와 반갑게 해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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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 혁명정부가 수립된 러시아에서 유리와 같은 지식인은 제일 먼저 숙청될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랄 산맥의 오지 바리끼노로 숨어듭니다. 궁핍하지만 평화가 감도는 전원 생활을 보내다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시내 도서관을 찾은 그는 우연히  근처로 이주해온 라라와 다시 운명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이때부터 유리는 라라와 토냐 사이를 오가면서 이중 밀회를 지속합니다. 그뒤 빨치산에 잡혀 강제 입산을 당한 유리는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여 이리저리 방황합니다.  , 이복형의 도움으로 생활하던 중에 전차를 타고 가다가 걸어가고 있는 라라를 보고 내려서 황급히 뛰어가다 심장마비로 절명합니다. 이것도 모르는 라라는 내란 통에 잃어버린 유리와의 사이에서  딸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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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 1957)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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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리 안드레예비치 지바고 (Yuri Andreyevich Zhivago) - 유라, 유로치카로 본 작품의 주인공으로 의사이자 시인입니다. 유리의 삶은 파스테르나크 본인의 삶과 제법 많이 결부되어 한편의 자서전을 보는 느낌을 들게 합니다. 참고로 유리의 죽음에 관해서는, 영화에서는 전차를 타고 가던  라라의 모습을 보고 황급히 내려 쫓아가다 심장마비로 사망하지만, 소설에서는 스위스 출신 마드모아젤 플뢰리 모습을 보고 어떤 정신적  육체적인 변화가 일어나 전차에서 내리려다 심장마비로 사망합니다. 사실 사망할  나이는 겨우 35세였다고 하지만, 어째서인지 중년 의사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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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라리사 표도로브나 기샤르 (Larisa Fyodorovna Guishar) - 라라 안티포바(Lara Antipova)로 프랑스인인 아말리아 카를로브나 기샤르의 딸이자, 파벨 안티포프의 아내입니다. 파벨과의 사이에  카챠(카첸카) 있습니다. 유리는 라라를 스벤티츠키씨의 크리스마스 파티 중에 일어난 사건을 통해 처음 보았으며 1 대전  군의관이었던 시절 재회하며 사랑을 느낍니다. 유리와 가깝게 지내지만 남편이 죽었다고 알린 코마로프스키와 함께 러시아를 떠나게 됩니다. 이후 귀환해 죽은 남편 파벨에 관해 알아보다가  과정에서 유리의 장례식에 참석하기도 합니다. 유리와의 사이에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을 두었는데  딸을 찾다가 스탈린의 대숙청에 휘말려 굴라그에서 숨졌습니다. 일반적으로 라라는 실존인물이자 파스테르나크의 정부(情婦) 올가 이빈스카야가 모델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가족들은 파스테르나크가 올가와 만나기 전에도 라라는 구상되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또는 파스테르나크가 느끼고 있는 이상적인 러시아의 표상이라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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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안토니나 알렉산드로브나 그로메코 (Antonina Alexandrovna Gromeko) - 토냐로 유리의 아내입니다. 유리가 의학을 전공할  토냐는 법학을 전공했습니다. 유리와의 사이에 영화에서의 애칭은 사샤인 슈라(알렉산데르)라는 아들과 마샤라는 딸이 있습니다. 토냐와 라라를 오가던 유리가 빨치산에 붙잡히자 그대로 생이별했으며, 후에 아버지, 아이들과 함께 파리로 추방되어 이민을 가고 맙니다. 라라와는 그녀가 토냐의 출산을 도와주기도 하는 등으로 우호적인 사이가 되며 마리나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아이는 자신이  키울 테니 라라와 도망쳐서 행복하게 살라고 편지하기도한 대인배입니다. 유리도 일말 양심은 있어서 이에 대한 유리의 답장은 아니 당신  그런 말을 !  라라 방이 어딘지도 모른다구! 아는   이상하잖아!” 토냐에 대해 책임  죄책감을 느끼고 토냐가 차라리 다른 남자를 만났으면 죄책감이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유리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에서 자신들이 파리로 이민간다는 것이나 자신은 유리를 사랑하지만 유리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모든 문제이며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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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알렉산데르 알렉산드로비치 그로메코 (Alexander Alexandrovich Gromeko) - 토냐의 아버지로 화학과 교수입니다. 유리의 양아버지이자 장인입니다. 아내는 안나 이바노브나 후에 토냐와 함께 파리로 망명합니다.

5. 빅토르 이폴리토비치 코마로프스키 (Victor Ippolitovich Komarovsky) - 사업가로 기샤르 가의 조력자이자 아말리아 기샤르의 정부입니다. 유리의 아버지의 죽음에 관련된 인물입니다. 어린 라라를 겁탈하고 스벤티츠키씨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라라에게 총상을 입을 뻔했습니다. 영화에서는 혁명 이후에도 볼세비키들에게 죽기는커녕 능력을 인정받아  자리 받고 이를 이용해 라라를 해외로 빼돌립니다.

6. 파벨 파블로비치 안티포프 (Pavel Pavlovich Antipov) - 파툴리야, 파샤, 파셴카로 아버지는 철도 노동자인 파벨 페라폰토비치 안티포프입니다. 라라의 남편으로 학교 교사였습니다. 아버지가 시베리아로 유배되자 티베르진가에 살면서 혁명을 꿈꾸는데,  과정에서 라라와 멀어집니다. 그리고 아내는 외간 남자가 주워갔습니다. 아내를 사랑하지만 그녀의 사랑에 자신이 억압받는다고 느껴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적군에 가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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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로지온 표도로비치 기샤르 (Rodion Fyodorovich Guishar)  로쟈로 라라의 오빠입니다. 영화에서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8.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베데냐핀 (Nikolai Nikolayevich Vedenyapin)  콜리야로 유리의 외삼촌입니다. 유리가 그로메코 가에 받아들여질 때까지 유리와 함께 지냈습니다. 예전에는 수도사였으며 후에 유명한 작가가 됩니다.

9. 예프그라프 안드레예비치 지바고 (Yevgraf Andreyevich Zhivago) - 유리의 이복동생으로 옛날부터 자신의 이복형의 딸을 찾아다녔습니다. 영화에서는 유리의 이복형으로 나오며, 공산당원으로 나옵니다. 오비완 케노비로 유명한 명배우 알렉 기네스가 연기하였습니다.

10. 카챠 (Катя/Katya) - 라라와 파샤의 딸로 카챠는 예카테리나의 애칭입니다. 카텐카라고도 불립니다.

11. 미하일 그리고리예비치 고르돈 (Mikhail Grigorievich Gordon) - 미샤(Миша/Misha)로 유리의 친구입니다. 변호사 그리고리 오시포비치 고르돈 아들로 유리와 함께 그로메코 가에 살았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모스크바로 가던  유리의 아버지이자 쇠락한 부호 안드레이 지바고의 죽음을 목격합니다. 유리, 토냐와 함께 대학을 다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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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인노켄티 데멘티예비치 두도로프 (Innokentii Dementievich Dudorov) - 니카로 유리의 소꿉친구인데 유리보다   위입니다.

13. 라브렌티 미하일로비치 칼로그리보프 (Lavrentii Mikhailovich Kologrivov) - 자본가로 아내는 세라피마 필리포브나이며 나쟈와 리파라는  딸이 있습니다. 나쟈의 친구이며 자신들의 집에서 리파의 가정교사로 일하는 라라를 친딸같이 아껴줍니다.

14. 오시프 기마제트지노비치 갈리울린 (Osip Gimazetdinovich Galiullin)  유수프카로 티베르진네 아파트를 지키는 수위 기마제트진의 아들이며, 백군이 됩니다.

15. 안핌 예피모비치 삼제비야토프 (Anfim Yefimovich Samdevyatov) - 지바고 가족이 바리키노에 있을  그들을 도와준 혁명군인입니다.

16. 리베리우스 아베르시예비치 미쿨리친 (Liberius Avercievich Mikulitsin) – 리베리로 바리키노에 주둔하던 소비에트 관리 아베르시우스 미쿨리친의 아들이자 빨치산의 리더가 되는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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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쿠프리안 사벨리예비치 티베르진 (Kuprian Savelievich Tiverzin)  쿠프리크로 독신이며 파벨 페라폰토비치 안티포프와 함께 철도 노동자였습니다. 무슬림이며 적군의 리더가 됩니다.

18. 마리나 (Марина) - 중앙 전신국 무선 기사로 마르켈 시차포프의 딸이며 의사 일도 그만둔 남루한 유리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주었고, 결국 그의 세번째 아내가 됩니다. 당시 토냐는 파리로 이민을   연락이 두절되었고 라라도 행방이 묘연했습니다. 유리와의 사이에 카프카와 글라시카라는 딸들이 있습니다.

19. 스트렐니코프 (Strelnikov) - 파벨 안티포프와 동일인물로 파벨 안티포프가 죽은 것으로 위장하고 이런 가명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실로 고압적입니다. 빨치산에 체포되어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살아서 유리와 대면하여 밤새  이야기를   자살했습니다. 자신이  일이 결국 아내나 사랑하는 사람들, 국가를 위태롭게 했다고 후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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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지바고 (Marya Nikolayevna Zhivago) - 유리의 어머니로 유리가 어렸을  죽었습니다. 그녀의 장례식으로부터 작품이 시작됩니다.

21. 타냐 (Tanya) - 유리와 라라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세탁부 여자아이입니다. 니카 두도로프가 수용소에 있었을  동료였던 보니파티 오를레초프의  크리스티나를 만났는데 크리스티나가 타냐를 이어 주었습니다. 유리가 죽은  예프그라프와, 이어서 친구인 미샤 고르돈  니카 두도로프와 대면합니다. 그녀 말로는 그녀의 어머니는 코마로프스키와 결혼하기 위해 그녀를 버렸다고 합니다. 영화에서는 유리의 아내의 이름과 같은 '토냐' 나오며 세탁부가 아닌 건설인부입니다. 예프그라프와만 대면하며, 다비드란 이름의 애인도 있습니다.

22. 보리스 쿠르트(Dr. Boris Kurt) - 영화에서만 등장하는 인물이며 유리 지바고가 사사받는 대학 교수입니다. 영화에서 그로메코 교수를 잉여로 밀어넣고  역할을 대신 때우고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원작자 파스테르나크의 오마주격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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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영화, 뮤지컬의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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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원작 소설이 다양하게 여러 인물들을 골고루 조명하고 있는  반해 영화는 유리와 라라의 사랑에 집중하여 등장인물을 비롯한 많은 부분이 잘려나갔습니다.  외에도 할리우드 영화 특유의 집중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가지 부분을 개조하였습니다. 뮤지컬은 무대 공연의 특성상  여기저기가 잘려나갔지만 의외로 영화에 비해 원작에 충실한 부분도 있습니다. 소설의 라라는 잿빛 눈동자를 지닌 16세의 미인이지만, 영화의 라라는 벽안을 지닌 17세의 평범한 소녀입니다. 뮤지컬은 무대 공연이라 배우에 따라 달라집니다. 배우가 벽안이면 벽안의 라라, 배우가 흑안이면 흑안의 라라, 배우가 동양인이면 동양의 라라로 말이지요. 영화에서는 코마로프스키가 라라와 파샤를 불러 둘의 혼인에 관여 하는 묘사가 있는데, 소설 뮤지컬에는 없습니다. 살롱 연주회 도중 마담 기샤르가 음독자살을 기도했다는 소식을 들을  소설에서는 그로메코 교수가 나서서 연주회를 중지시킨뒤 소년 미샤 고르돈 유리 데리고 갑니다. 영화에서는 보리스 쿠르트라 교수가 청년 지바고 데리고 조용히 떠납니다. 뮤지컬에서는  에피소드가 잘려나가고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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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소설에서 마담 기샤르의 보호자는 파제이 카시미로비치 티슈케비치라는 사람이고 영화와 뮤지컬은 빅토르 코마로프스키 본인입니다. 라라가 코마로프스키를 쏘기 위한 권총을 얻는 방법도 다릅니다. 원작에서는 도박으로 돈을  날린 오빠 로쟈가 주고, 영화 뮤지컬에서는 시위하던 파샤가 도망다니는 과정에서 라라에게 맡깁니다. 스벤티츠키씨네 크리스마스 파티  유리와 토냐의 결혼 발표는 영화에서만 묘사되어있습니다. 뮤지컬에서도 파티에서 결혼 발표를 하기는 하지만 원작이나 영화를   사람들은 그로메코 씨네 파티로  듯합니다. 스벤티츠키씨네 크리스마스 파티  라라가  총에 맞은 사람은 소설과 뮤지컬에서는 보리스 코르나코프라는 검사지만, 영화에서는 빅토르 코마로프스키 본인입니다. 물론 모두 코마로프스키를 겨냥한 것입니다. 영화에서 파샤가 처음부터 전단지를 돌리는  혁명가다운 활동 하는데 소설에서는 없습니다. 파샤는 라라와 결혼한  혁명노선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뮤지컬에서는 아예 철도파업을 주도하다 도망다니는   등장입니다. 예프그라프가 유리를 찾는 과정도 다릅니다. 소설에서는 '형인 유리' 장티푸스에 걸려 있을  찾아오고, 영화에서는 '동생인 유리' 땔감을 훔치는 것을  예프그라프가 발견하고 따라갑니다. 뮤지컬에서는 예프그라프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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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가 코마로프스키를 대하는 태도는 영화 쪽이  쌀쌀맞고 소설에서는  사람이 목소리를 높이며 싸우는 모습을 좀처럼 찾기 힘들지만, 뮤지컬에서는 배우 노선에 따라서 아예 목소리를 높여 싸울 때도 있습니다. 스트렐니코프의 최후도 다릅니다. 소설에서는 죽은  알았던 스트렐니코프가 유리를 찾아가 만난  자살하고, 영화에서는 귀찮았는지 그냥 처형당한 것으로 끝냅니다. 뮤지컬에서는 소설판을 따르며 스트렐니코프의 애처로움이 배가됩니다.

유리가 전차를 타고 가다가 심장발작을 일으킬  밖에 지나가던 여자의 정체가 다릅니다. 소설에서는 보랏빛 원피스를 입은 마담 플레리, 영화에서는 라라 본인입니다. 다만 뮤지컬에서 그런 얘기는  나오고 스트렐니코프의 자살에서 공산당 행진으로 상징되는 공산당의 통치에서 유리 장례식으로 바로 스킵합니다. 에필로그 내용도 다릅니다. 소설에서는 예프그라프가 라라와 유리의 시집 편찬의  때문에 만나 이야기한  미샤 고르돈과 니카 두도로프가 세탁부 '타냐' 만나 자신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는 예프그라프로부터 들은 타냐의 이야기를 듣고, 영화에서는 그냥 예프그라프가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인부 '토냐' 만나 토냐의 정체를 확인하는 입니다. 뮤지컬에서는 바로 유리 장례식으로 넘어가면서 라라가  카타리나와 함께 장례식장에서 유리의 시를 읽는 것으로 끝납니다. 영화에는 발랄라이카가 하나의 키워드로 작용합니다. 물론 소설이나 뮤지컬에는 그런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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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보리스 레오니도비치 파스테르나크(Boris Pasternak) 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 1957)’ 살펴보았습니다.

(S48)

20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있는  100   스물 세번째 , 알버트 치누알루모구 아체베(Albert Chinalmg Achebe, 1930 11 16 ~ 2013 3 21) 무너져내린다(Things Fall Apart, 1958)편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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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781405879873.pdf

 

 Doctor Zhivago (1).pdf

 

 Doctor Zhivago.pdf

 

 Pasternak, Boris - Doctor Zhivago.pdf

 

 Stanton Rebeca Jane.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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