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2_Biography

미국 교민들 중에는: 내가 왕년에는 말이야~

忍齋 黃薔 李相遠 2017. 3. 31.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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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정권 시절, 27살에 미국에 와서 나의 한국 정서의 나이는 이팔청춘이다.


1. 89년인지 90년인지 여름방학때 아르바이트로 반혁명사건으로 미국에 나온 우대령님의 아틀란타 슈퍼에서 스탁일을 했다. 믿거나 말거나, 그때 그 슈퍼의 메니저는 한국 정보사 이등병출신이란다. 스페인의 무슨무역공사에 배치되어 외교 행랑에 돈을 넣어 스위스에 있는 전두환의 계좌에 넣는 일을 했다고 무용담을 늘어 놓았다.


안식일교회 신자로 착하디 학해보이는 사람이라 조용히 말했다. 난 한국에서 잡지연구소에서 잠시일했고 88올림픽때 잡지풀기자단의 총무를 했고 더우기 80년 5월 전두환의 신군부에게 고문과 구타와 감금과 녹화사업을 당했던 사람이니 내게 자세히 이야기를 해달라고. 그리곤 난 큰 봉변을 당해야 했다.


2. 90년말 우연하게 플로리다 탐파에 숨어사는 전직 중정 수사관을 만났다. 호시탐탐 자식의 콩팥을 이식 받아 생명을 연장해 보려는 듯한 노인의 날카로운 눈빛이 한국에서 그분이 한 행적을 들으니 이해가 된다. 외로움에 지쳤는지, 하루종일 붇들고 앉아 한심한 무용담을 토해낸다.


자신은 원래 철도경찰이었단다. 경부선을 타고 부산까지 가면 기차차장, 철도경찰, 기차헌병의 주머니가 두둑했단다. 그 좋은 자리를 놔두고 더 좋은 중정수사관으로 가서는 무슨 교수를 빨갱이로 잡아드려 고문하고 때려 죽였단다. 그 교수는 무서워서 창문으로 투신할걸로 했서 문제가 없었단다.


전두환이 없었다면 중정에서 떵떵거리며 남은 인생 편하게 살았을텐데 전두환이 중정서리로 오는 바람에 전두환이 데리고온 놈들에게 그 좋은자리를 내주고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고. 하여 나는 그분에게 진지하게 권했다. 인생도 정리하실겸 제게 좀더 자세하게 이야기 해주시면 세상 좋아질때 책으로 내드리겠다고. 


그랬더니 역시나 "아니 이놈이 사상이 의심스러운 놈"이라는 호통과 함께 이후론 그분과는 두번 다신 대면할수 없었다. 여러해 뒤에 문득 생각이 나 전화했더니, 그 아들이 전한 말은 직즉 요단강을 건넜다는 것이다.


3. 7~80년대 이전에, 미군이나 미군속과의 결혼을 인연으로 미국에 오지 않은 대부분의 한인들은 십중팔구 특무대, 방첩대, 보안대, 중정, 정보사등 한국민의 피를 빨아먹던 거머리들이다. 아직도 이사람들은 입에 "빨갱이"를 달고 산다. 다행하게도 이들의 2세는 이들 1세들과 대부분 단절되어 살아간다. 자식들과 소통도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식들에게 경멸을 받고 사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리곤 한국교회 한국성당 한국절에 터줏대감으로 틀어잡고 앉아서 한국서 온 자식또래의 이민자 유학생 들에게 자신의 미화되고 변색된 무용담을 늘어 놓고 살다가 자기 자식이 임종도 지키지 못하는 쓸쓸한 마지막을 맞이한다.


4. 내가 한국을 떠난지 너무 오래 되었다. 내 마음이 니마음 같지 않으니 무엇을 탓하랴. 백만학도의 존경을 받던 노동운동의 대부 김문수가 한나라당 국회의원에 새누리당 경기도지사를 하고있다. 나는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았으면 그게 전두환이가 만든 민정당의 후예들이라는 걸 까막케 모를번했다. 반유신투쟁의 선봉에 섰던 이재오, 80년 설대 총학생회장 광주의 아들 심재철, 김대중 선생의 대변인하던 홍사덕 …. 


나는 이 이름들 때문에 한나라당 새누리당이 살인마 전두환이와 무관한줄 알았다. 정말.


5. 이제 내 주변에도 망명을 들먹이며 문의를 하는 한국의 지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살생부에 올랐다는 둥, 무슨 명단에 이름이 올라갔다는 둥. 다행하게도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저지른 줄은 아는 모양이다. 정말 가관이다. 마음 같아서는 … 


선거 잘해서 못된 놈들 혼줄 좀 내줘라 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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