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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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팔아먹은 독도 또 팔아먹은 살인마 전두환

忍齋 黃薔 李相遠 2017. 2. 25. 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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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한일경협차관 40억불의 실체





1965년 한일청구권 무상 3억불 유상 2억불 도합 5억불에 박정희는 독도를 일본에 팔아 먹었다. 박정희는 총 3회의 국가부도 위기속에 53억불의 국가 적자를 남긴체 김재규의 총탄에 비극의 종말을 고했다. 광주의 무고한 시민을 학살하며 집권한 살인마 전두환도 거덜난 국가살림을 위해 1981년 4월 23일 스노베 료조 일본대사에게 한국이 일본의 안전보장에 막대한 기여를 해왔다는 근거로 일본으로부터 100억불 경협차관을 요구했다.

이 요구의 배경에는 살인마 전두환이 1981년 1월 미국을 방문하여 한국의 대일 안보경협 요구의 정당성을 미 측에 설득하여 레이건 대통령의 긍정적 반응을 획득하고 이를 바탕으로 살인마 전두환은 일본에게 100억불 경협차관을 요구하게 된것이다. 1981년 8월 20일과 21일 일본에서 개최된 외무장관회담에서 100억불을 60억불로 줄여 재요청을 한다. 이어 1981년 9월 10일과 11일 서울에서 개최된 11차 한일 각료회담에서 40억불로 조정하여 합의하기로 결정한다.

40억불 경협과정에서 일본은 한국에게 일제침략의 역사를 일본진출의 역사로 인식하길 요구하며 '일제침략'을 '일본진출'로 또 '3.1운동'을 '3.1폭동'으로 기술한 1982년 1차 일본교과서 파동을 일으키고, 1965년 합의된 독도의 일본영토이행을 요구한다. 이에 부응하여 살인마 전두환은 정광태의 '독도는 우리땅'을 금지곡으로 지정하고 독도의용대장 홍순칠을 간첩으로 조작하여 보안사 고문을 실시한다 (홍순칠은 그 고문 후유증으로 인하여 1986년 사망한다).

또 1982년 11월 16일 독도를 천연기념물 336호로 지정하여 민간인의 입도를 금지시키고 한일공동관리수역으로 지정하여 일본의 독도관리를 허용한다 (독도는 2016년 현재까지도 민간인 출입을 사전 허가제로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이후 경협차관 교섭은 1983년 1월 나카소네 야스히로 수상의 방한으로 한국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지원하는 경제원조 형태의 40억불 차관으로 최종 결정이 이루어진다.

이 결정으로 한국은 더 이상 일제침략과 안보연관의 대일차관을 요구할수 없게 되었다. 이 40억불의 차관은 1983년부터 1989년까지 일본정부차관 18억5천만불과 일본수출입은행융자 21억5천만불로 살인마 전두환 정권의 ‘삼 저 대호황’과 ‘플라자합의’, ‘엔고’와 ‘저달러화’로 한국상품의 가격경쟁력이 엄청나게 강화되어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약 3년간 한시적인 무역흑자가 생기는데 견인차 역활을 했다. 이로인해 ‘살인마 전두환때는 경제가 잘되었다'는 오해를 만들었다.

살인마 전두환은 이에 더하여 강력한 물가억제정책으로 1988년 이후 용수철처럼 비용인상이 급증하고, 사회적인 다양한 요구가 일시에 터져 나온 것도 살인마 전두환의 지나친 ‘총수요관리정책’ 때문이었고, 물가안정에 집착한 나머지 재정정책을 효율적으로 실시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후유증이었다. 5공한일경협차관 40억불 결정 배후에는 한일관계의 악화와 이완을 경계하는 미국의 전략적 입장이 숨어 있었고 악화된 한일관계의 수복을 통해 대미관계에서의 발언권을 높이려는 전략적 발상이 작용하고 있었다.

박정희가 팔아먹은 독도 또 팔아먹은 살인마 전두환으로 인하여 독도 영유권에 대한 이 시한폭탄 돌리기에 차기 대권을 잡은 자는 어찌 풀어갈지 궁금하고 또 후손들에게 독도를 팔아먹은 선조로서 어찌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맞이 할지 아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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