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5_李喆珪技手

[2. 제 증조부 애국지사 이철규 기수님을 페이스북 친구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忍齋 黃薔 李相遠 2017. 4. 20.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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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돈 한 푼 집에 벌어온 적 없이 국민학생(초등학생) 아들이 월사금 내려고 애호박 팔아모은 돈도 들고 한량 노릇 하러 다니시던 내 아버님을 무척 미워했습니다. 군사독재의 탄압도 피했지만 능력 없는 부모에게서 탈출도 겸해서 미국으로 연구 조교 자리를 구해 도망을 쳤습니다. 어느 날 내 아들이 할아버지는 어떤 사람이고 그 아버지는 또 그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어 훌륭한 분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자식 덕분에 철이 들었고 한량으로 잡기에만 빠져 사신 내 아버지 방원 선생의 삶을 공부했습니다. 육종학의 아버지 우장춘 박사의 조교를 지냈고 창경원 초대식물원장을 지냈고 625 한국동란 때 6사단에서 수류탄부상으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고도 죽음을 넘어 구사일생 살아나 우리 3남 2녀를 이 세상에 있도록 만든 분이셨습니다. 정말 다행하게도 나는 내 아들에게 거짓말을 했던 게 아니었습니다. 내 할아버지도 독립지사의 삶을 사셨고 내 증조할아버지는 3.1운동의 단초가 되었던 1919년 고종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라고 악을 쓰다 일본 기마 헌병들에게 참살당한 애국지사였습니다. 또 그 아버지인 내 고조할아버지는 고종의 퇴위를 함께한 탁지부 주사 성우 이명직 선생으로 1915년 일제에 독살당한 애국 지사셨습니다. 5대가 국가에 헌신한 집안이었습니다. 이 사실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데에는 그 중심에 조선공산당 창립의 주역 지운 김철수 선생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을 때까지 빨갱이로 몰릴까 봐 숨죽여 살았던 집안 어른들의 비겁함 때문이었습니다. 제 증조부 애국지사 이철규 기수님을 페이스북 친구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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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enature/15851175

 

 

 

[1907년 광상조사기수교습소 제1기 수업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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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세 때인 1919년 고종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라 진언하다 일본 헌병에 참살당한 증조부 농상공부 금광국 이철규 기수의 19세 때인 1907년 (광무 10년) 10월 11일 농상공부 기술직 연수원 수업증서를 내 아버지 방원선생의 유품을 정리하다 내 누나가 발견하였다고 사진을 찍어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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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증서를 보면 농상공부에서 최초로 광상조사기수교습소를 만들어 광무 10년인 1907년 10월 11일에 제1기 기수를 배출하며 40호로 40번째 인물인 19살의 이철규 기수에게 수여한 수업증서다. 이 증서를 발행한 사람은 농상공부대신 권중현(1854년 11월 27일 충북 영동출생, 안동권씨, 자작 아들 권태환 세습, 1934년 3월 19일 사망)으로 을사늑약에 찬성한 을사오적으로 군부대신을 지내며 의병을 토벌한 친일역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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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상조사기수교습소의 최고책임자인 광무기감은 이학박사 거지부충승이고 교관으로는 화학담임에 공학사 산내정, 채광담임 목전우오랑, 지질광물담임 전촌영태랑, 시금술담임 중천호태랑, 측량수학제도담임 복전천심으로 모두 일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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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은 고종황제를 강제 퇴임시키고 이철규 기수의 부친인 탁지부 주사 이명직 선생을 축출시킨 때이니 광상조사기수교습소에서 기수교육을 받던 내 증조부 이철규 기수의 마음이 헤아려져 마음이 먹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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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19세이면 내가 대학 1학년 때 나이이니 비분강개한 마음이셨을 것이다. 그로부터 8년 뒤인 1915년엔 부친 이명직 선생이 독살당하고 12년 뒤인 1919년엔 고종이 독살되었으니 마땅히 고종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라고 요구하셨을 만하다. 그로 인해 1919년 31살의 젊은 나이에 일본기마헌병의 칼날에 참살당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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