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5_李喆珪技手

고종황제 죽음의 비밀과 나의 증조부 이철규(李喆珪) - 한산군 목은 이색의 둘째아들 인재공파로 牧隱19代孫(호장공26世, 호장공25代孫, 목은20세)

忍齋 黃薔 李相遠 2012. 10. 13.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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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MtDKyGOmdOg

 

 

 

[나의 증조부 이철규 

(李喆珪) - 한산군 목은 이색의 둘째아들 인재공파로 목은 牧隱19代孫(호장공26世, 호장공25代孫, 목은20세)

]

 

대한제국(大韓帝國)과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까지 농공상부 금광국(農商工部 金鑛局)에 근무하던 이철규 기수(李喆珪 技手)는 1887년 11월 22일 수원군 동탄면 돌머루(석우리)에서 성우 이명직(性祐 李命稙) 선생과 전주 최씨(全州 崔氏) 사이에서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이철규 기수는 대한제국 시절에는 농공상부 금국 기수로서 해외 열강의 조선 잠식이 시작되던 그 혼란기에 조선의 금광 등을 관리 하는 중책을 맡고 노심초사했고 경술국치 이후에는 국권 회복을 위해 동료들과 결사하였습니다.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사망한 고종황제는 일제에 의한 독살이라는 친일파 청주한씨 한진창(韓鎭昌, 1858년 1월 26일 ~ 1935년 2월 2일)의 다음과 같은 고종독살설(高宗毒殺說)의 증언이 전국적으로 유포되었습니다.
 
1. 이상적이라 할 만큼 건강하던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 지 30분도 안 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다가 죽어갔다.
 
2. 고종 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황제의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3. 민영달과 몇몇 인사는 약용 솜으로 고종황제의 입안을 닦아내다가, 황제의 이가 모두 구강 안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4. 30센티미터 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5. 고종황제가 승하한 직후에 2명의 궁녀가 의문사했다.
 
(이 같은 내용은 일기 쓰기로 유명한 윤치호가 한진창에게 직접 듣고 1920년 10월 13일 자 일기에 기록해 두기도 했습니다.)
 
고종독살설로 인하여 1919년 3월 3일 고종황제의 인산일에 맞추어 한반도 전역에서 봉기한 독립운동인 3·1 만세 운동(三一萬歲運動)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이에 국권 회복을 위해 결사한 이철규 기수를 포함한 동료 관원들은 고종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진실을 규정할 것을 줄기차게 제기하다 1919년 10월 6일 용산에 주둔하던 일제 헌병대 군사들에게 참살당하셨습니다.
 
그때가 이철규 기수의 큰아들 이성구의 나이 11살 그리고 작은아들 이용구의 나이 3살도 체 되지 않았을 때 였고 고종황제 퇴위를 함께했던 이철규 기수의 부친 이명직 선생이 독살(1915년 9월 7일)당한 지 4년 만이었습니다. 첫 부인 영일 정 씨(英日 鄭氏)는 아들 이성구가 태어나고 1년 뒤 산고로 작고하셨습니다. 이후 재혼하여 새로이 밀양 박씨(密陽 朴氏)를 맞이하셨으나 어린 두 아들과 젊은 부인을 남기고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신 겁니다.
 
[참고 후손의 증언: 증손 이창원의 기억에 의하면, 만약 좀 더 오래 살아 계셨으면 망한 나라이긴 하지만 나라도 그렇고, 가문에 보관된 많은 문화재 등이 보전 관리 되었을 것으로 많은 주변 사람들이 증언하였답니다. 사진에서 보듯 이철규 기수는 인물이 출중하고 날씬하여 젊은 시절이 증손 이상원과 닮았다고 장손부가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증손 이상원의 어린 시절, 심장이 약한 이상원의 모친이 호흡곤란으로 위급할 때, 보이스카우트에서 배운 인공호흡법으로 이상원이 모친의 목숨을 구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증손 이상원이 증조부 이철규 기수의 환생으로 손주며느리의 목숨을 악귀로부터 구한다'고 어느 스님이 예전에 이야기했다고 이상원의 모친이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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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광상조사기수교습소 제1기 수업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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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세 때인 1919년 고종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라 진언하다 일본 헌병에 참살당한 증조부 농상공부 금광국 이철규 기수의 19세 때인 1907년 (광무 10년) 10월 11일 농상공부 기술직 연수원 수업증서를 내 아버지 방원선생의 유품을 정리하다 내 누나가 발견하였다고 사진을 찍어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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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증서를 보면 농상공부에서 최초로 광상조사기수교습소를 만들어 광무 10년인 1907년 10월 11일에 제1기 기수를 배출하며 40호로 40번째 인물인 19살의 이철규 기수에게 수여한 수업증서다. 이 증서를 발행한 사람은 농상공부대신 권중현(1854년 11월 27일 충북 영동출생, 안동권씨, 자작 아들 권태환 세습, 1934년 3월 19일 사망)으로 을사늑약에 찬성한 을사오적으로 군부대신을 지내며 의병을 토벌한 친일역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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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상조사기수교습소의 최고책임자인 광무기감은 이학박사 거지부충승이고 교관으로는 화학담임에 공학사 산내정, 채광담임 목전우오랑, 지질광물담임 전촌영태랑, 시금술담임 중천호태랑, 측량수학제도담임 복전천심으로 모두 일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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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은 고종황제를 강제 퇴임시키고 이철규 기수의 부친인 탁지부 주사 이명직 선생을 축출시킨 때이니 광상조사기수교습소에서 기수교육을 받던 내 증조부 이철규 기수의 마음이 헤아려져 마음이 먹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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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19세이면 내가 대학 1학년 때 나이이니 비분강개한 마음이셨을 것이다. 그로부터 8년 뒤인 1915년엔 부친 이명직 대감이 독살당하고 12년 뒤인 1919년엔 고종이 독살되었으니 마땅히 고종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라고 요구하셨을 만하다. 그로 인해 1919년 31살의 젊은 나이에 일본기마헌병의 칼날에 참살당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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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관보를 통해본 증조부 이철규 선생의 흔적 1]
1895년 탁지아문 주사로 대궐에 들어 1906년 규장각직학사(종2품), 1907년 궁내부특진관(종1품)으로 근무하던 이명직 대감은 1907년 고종 강제퇴위와 함께 궁에서 쫏겨나 수원 동탄 돌머루에 칩거하며 젊은이들에게 해외유학을 독려하며 사회계몽 활동을 벌였다. 일제는 1915년 호랑이 사냥꾼으로 위장한 일본헌병이 이명직 대감을 독살하기 1년전인 1914년 농상공부 금광국 기수인 아들 이철규 선생을 평안북도 희천군 동면장으로 보내 부친과 떨어뜨려 논후 1915년에 그 부친 성우 이명직 대감을 독살했다. 고종 주위에 충신들의 암살과 살해는 고종이 승하한 1919년까지 이어진다. 1919년에는 고종 승하의 의문을 제기하던 이명직 대감의 아들이며 농공상부 금광국 기수를 지내고 평안북도 희천군 동면장을 지냈던 이철규 선생이 일제에 참살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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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관보를 통해본 증조부 이철규 선생의 흔적 2]
1915년 이철규 선생은 부친 성우 이명직 대감이 일제에 독살 당하자 아마도 평안북도 희천군 동면장을 사직하고 돌아와 금광국 기수를 하며 익힌 금광기술을 사용하여 1916년9월21일 이철규 선생은 용인사는 이석영 선생과 충북 충주군 노은면 문성리의 금방산일대 21만3천150평에 금광업 면허를 받았다. 금광업면허를 취득하기위해서는 토지나 산야를 소유해야 한다는 금광면허업법에 근거하여 소유내지 공동소유하셨을 것으로 사료되고 1919년 고종 승하의 의문을 제기하다 일제에 참살 당할때까지 금광운영을 하셨다. 충청북도 충주군 노은면 문성리의 금방산은 '금을 채굴하는 금광이 생겨나면서 나타난 지명'이라고 향토사학자는 전하고 있다.
 
요즘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신 고조부 성우 이명직 대감에 이어 증조부 이철규 선생의 흔적을 찾느라 조선총독부 관보와 일본정부 관보를 열람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 덕에 1919년 31살의 나이로 고종황제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다 일본헌병에게 참살당한 굵고 짧았던 증조부 이철규 선생의 삶을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1887년 수원군 동탄면 석우리에서 태어나 19살때인 1907년 광산조사기수교습소를 제1게로 마치고 농상공부 금광국 기수로 근무를 했다는 흔적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조선총독부 관보를 통해 1914년에 평안북도 희천군 동면 면장으로 전보된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1915년에 부친인 성우 이명직 대감이 독살을 당했습니다. 조선총독부 관보에는 1916년 9월 21일, 금광업등록번호 2779로 충북 충주군 노은면에 21만3천150평의 땅을 금광으로 개발하겠다고 신청하여 허가된 내용이 나옵니다. 함께 첨부된 21만3천150평의 땅문서 사본내지 금광 사업자가 소유한다는 담당관리의 소유확인서를 찾으러 한국문서보관소나 일본의 문서보관소를 날잡아 방문하여야 한다는 걸 알아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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