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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미군기지의 평택 이전으로 100년이 넘어가는 용산기지의 광복이 시작되었다. 1595년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후방 병참기지가 있었고, 1882년 임오군란으로 진입한 청나라 군대 3천 명이 주둔했었으며, 1884년 갑신정변 때는 일본군이 주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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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일본이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일본군 20사단이 주둔하면서, 일본조선주둔군은 용산에 본부와 함께 기마 헌병대를 주둔시켜 1910년부터 일제의 무단통치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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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농공상부 금광국 기수를 지내던 31살의 젊은 관원, 내 증조부 이철규(李喆珪) 기수를 비롯한 조선의 마지막 충신들은 고종황제의 인산일을 기해 대전 앞에 부복하고 고종독살의 진상을 규명할 것을 탄원하다가 용산에 주둔해 있던 이 기마 헌병대에게 모두 참살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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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으로 민심이 악화하자 일제는 무단통치를 마치고 순사들이 치안을 담당하는 문민 통치로 바꾸어 용산의 일제기마헌병대를 대륙침탈의 병참기지로 바꾸어 나갔다. 일제 보병 78·79연대와 포병대, 사격장, 기병대, 공병대를 주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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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패망한 후 주한 미8군이 용산기지를 넘겨받아 현재까지 주둔하고 있다. 용산기지의 완벽한 회복은 조선 민족에게 한시대를 정리하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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