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7_芳園(李盛粲)

[4. 제 부친 전쟁영웅 방원 이성찬 선생님을 페이스북 친구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忍齋 黃薔 李相遠 2017. 4. 20.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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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돈 한 푼 집에 벌어온 적 없이 국민학생(초등학생) 아들이 월사금 내려고 애호박 팔아모은 돈도 들고 한량 노릇 하러 다니시던 내 아버님을 무척 미워했습니다. 군사독재의 탄압도 피했지만 능력 없는 부모에게서 탈출도 겸해서 미국으로 연구 조교 자리를 구해 도망을 쳤습니다. 어느 날 내 아들이 할아버지는 어떤 사람이고 그 아버지는 또 그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어 훌륭한 분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자식 덕분에 철이 들었고 한량으로 잡기에만 빠져 사신 내 아버지 방원 선생의 삶을 공부했습니다. 육종학의 아버지 우장춘 박사의 조교를 지냈고 창경원 초대식물원장을 지냈고 625 한국동란 때 6사단에서 수류탄부상으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고도 죽음을 넘어 구사일생 살아나 우리 3남 2녀를 이 세상에 있도록 만든 분이셨습니다. 정말 다행하게도 나는 내 아들에게 거짓말을 했던 게 아니었습니다. 내 할아버지도 독립지사의 삶을 사셨고 내 증조할아버지는 3.1운동의 단초가 되었던 1919년 고종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라고 악을 쓰다 일본 기마 헌병들에게 참살당한 애국지사였습니다. 또 그 아버지인 내 고조할아버지는 고종의 퇴위를 함께한 탁지부 주사 성우 이명직 선생으로 고종의 수족을 자르듯 고종 독살 전인 1915년 일제에 독살당한 애국 지사셨습니다. 5대가 국가에 헌신한 집안이었습니다. 이 사실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데에는 그 중심에 조선공산당 창립의 주역 지운 김철수 선생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을 때까지 빨갱이로 몰릴까 봐 숨죽여 살았던 집안 어른들의 비겁함 때문이었습니다. 제 부친 전쟁영웅 방원 이성찬 선생님을 페이스북 친구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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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enature/15852876

 

 

 

 

27년생인 작고하신 부친과 아직 생존하신 32년생이신 모친은 세월만큼이나 이런저런 훈장을 달고 사셨고 사십니다. 모친은 심장박동이 약하여 심장박동기를 단체 신경통으로 보행이 불편하시지만 다행히 정신이 맑으셔서 거동이 불편하셨던 부친을 작고하실 때까지 24시간 보살피셨습니다. 영어학원을 운영하며 바쁘게 살며 자신의 집도 2체씩 있는 여동생이 기특하게도 부모님과 함께 살아주어 부친의 마지막 길을 편하게 해 주었고 홀로 남으신 모친을 위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니 여간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이제 모든 삶의 희로애락을 뒤로하시고 동작동 현충원에 영면하신 제 부친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님의 모습을 자손들을 위해 돌아보고자 합니다. 이런 노력이 하늘에 닿아 업 겁 윤회의 고리를 끊고 해탈의 경지에서 후손들에게 복을 베풀고 바르게 인도하는 한산이문(韓山李門)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님이길 간절히 구합니다. (不孝子 李相遠 拜上).]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은 한산이씨 호장공의 28세로 목은 이색 선생의 21대손이며 인재공 이종학(목은 3남 중 차남) 선생의 20대손입니다. 또 인재공의 6남 1녀 중 장남인 광목공 이숙야 선생의 19대손이고 직재공 이유청 선생의 16대손이며 상주영장를 지낸 이사목 선생의 8대 종손입니다.

 

그리고 구한말과 일제 초, 죽음으로 친일파와 일제에 저항했던 이명직 선생(탁지부 주사, 내장원경, 규장각직학사, 궁내부특진관 칙임관1등 역임 1915년 친일파에 암살당함)과 이철규 선생(금광국 기수, 평안북도 희천군 동면장, 충북 충주 노은금광경영하다 고종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 1919년 일제에 주살 당함)의 증손이며 손자입니다.  

방원(芳園) 선생은 1927년 종로구 계동 13번지에서 이성구(李成求, 1908~1981) 선생의 외동아들로 출생합니다. 일본강점기에 수원 농림을 나와 만주국(滿洲國) 농림국(農林局) 미곡검사관(米穀檢査官)을 지내던 부친 이성구 선생을 따라 만주에서 소학교를 다니다 경성의 봉래공립고등소학교(蓬萊公立高等小學校)로 유학을 나와 1942년 4월에 졸업하셨습니다.

 

해방되던 1945년 3월 방원(芳園) 선생은 경성원예학교(京城園藝學校)를 졸업하며 바로 구왕실(舊王室) 창경궁(昌慶宮) 식물원(植物園) 주임(主任)으로 근무를 시작합니다. 지금으로 치며 식물원 원장에 해당합니다. 그리고는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여 1950년 6월 27일 저녁 7시 30분 이승만 박사 부부의 피난기차 4량의 마지막 칸에 이승만 박사 부부가 아끼는 식물원의 화혜식물들을 싫고 이승만 박사 부부의 피난길을 호종하는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의 일원으로 피난길에 오릅니다.

 

피난기차가 대전 거처 대구까지 갔다가 너무 멀리왔다며 다시 대전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승만 박사가 충남도청관사에서 "국군이 복한군을 막아내고 있으니 서울시민은 서울에 남으라"는 방송을 하고나서 자동차로 이리로 떠나 다시 기차로 목포로 피난갈때 식물원의 식물들을 가지고 전라북도 전주 임업시험장으로 옮겨가서 피난 식물원을 꾸리고 피난 식물원이 자리를 잡던 1951년 4월까지 근무를 합니다.

 

이어 식물원의 급료가 끊겨 호구지책 겸 후학을 양성할 작정으로 1951년 4월 부터 같은해 11월까지 전주농림중학교(全州農林中學校) 원예학과(園藝學科)에서 전임강사(專任講師)로 원예를 가르칩니다. 하지만 6.25 전쟁으로 전세가 악화되자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1951년 11월 자진하여 육군제6보병사단(陸軍第六步兵師團)에 이병(二兵)으로 입대합니다.

 

입대하자마자 방원(芳園) 선생은 1951년 11월 17일과 18일 양일간 전개된 강원도 김화군 임남면 949고지 전투에 6사단 제7연대에 투입되었습니다. 장도영 장군이 이끄는 6사단은 임남면 동남쪽으로부터 8사단 제21연대와 6사단예하 19연대, 7연대 및 2연대 등 4개 연대 병진으로 1951년 11월 17일 05:00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지대 내의 적인 중공군 202사단 605연대, 204사단 612연대, 35사단 104연대를 격파하고 공격2일째인 11월18일 예하 전 연대가 목표선을 모두 장악하여 전투를 승리로 매듭지었습니다.

 

방원(芳園) 선생이 배속된 6사단 7연대는 Gary선인 1220고지-석화동-903고지-949고지-용호리-교암산을 연하는 선을 공격하여 이를 확보하고 목표선을 모두 장악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방원(芳園) 선생은 이 전투에서 퇴각하던 중공군의 수류탄 투척으로 전신에 파편상(좌복부 파편창과 좌배부 맹관 파편창)을 입고 폐가 손상되는 죽음을 넘나드는 상황에서 부산통합병원까지 3일간에 걸쳐 후송되었습니다.

 

하늘이 8대 종손이자 이성구 선생의 외동아들인 방원(芳園)을 목숨을 지켜 주셨습니다. 방원(芳園) 선생은 폐를 관통하는 엄청난 수류탄 부상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합니다. 마침 덴마크 상선이 병원선으로 개조하여 참전한 바로 그 병원선 유틀란디아(Jutlandia) 호에서 군종병 지학순 (후일 주교로 선종)과 함께 재생의 환우 시간을 보냈습니다.

 

폐에서 파편을 빼내고 기적적으로 상처가 아물어 1953년 4월 퇴원하며 상등병(上等兵)으로 명예제대(名譽除隊)를 하셨습니다. 6·25 전쟁 부상으로 인한 상이용사(傷痍勇士)로 명예제대를 함과 동시에 방원(芳園) 선생은 한시의 여유도 가지지 않고 바로 삭막한 전후 사회를 밝게 바꾸겠다고 일거리를 사방팔방으로 찾았습니다.

 

퇴원하고 명예제대한 직후, 1953년 4월 전주(全州) 중앙국민학교(中央國民學校) 온실(溫室) 원예촉탁(園藝囑託)으로 1954년 5월까지 근무하면서 학생들의 국화전시회를 개최하여 원하던바 전쟁으로 삭막했던 사람들의 마음에 국화 향기와 국화꽃 같은 넉넉함이 묻어나게 하였습니다. 1954년 5월에는 국립원예기술원(國立園藝技術院) 서울 정량리 분원을 맡아 촉탁(囑託)으로 근무합니다.

 

부산에 본원이 있던 국립원예기술원은 우장춘(禹長春, 1898~1959) 박사가 원장으로 있었고 자신을 도와 육종기술을 보급하고 통역을 담당할 인재를 찾던 중 나의 부친 방원(芳園) 선생이 발탁되어 청량리에 있던 국립원예기술원에 근무하며 우장춘 박사의 서울업무를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승만 대통령 부부가 피난길에 자신과 부인이 좋아하던 창경궁 식물원의 꽃과 식물들을 무사히 전주까지 옮겨주었던 인연으로 1957년 4월 경무대(景武臺) 온실장(溫室)으로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그 바람에 한국말을 못 하던 우장춘 박사의 통역을 도맡아 하며 한국 원예육종발전을 도우며 우장춘 박사에게 향하는 이런저런 견제의 바람막이 일을 못 하게 되어 그 여파로 1959년 8월 10일 우장춘 박사님이 돌아가신 것이 아닌지 늘 미안해하셨습니다.

 

1957년 11월, 우연한 자리에서 한국일보(韓國日報) 백상(百想) 장기영(張基榮) 사장이 함께 한남동에 현대식 원예식물원을 차리자는 제안을 받아드려 경무대 온실장 자리를 사직하였습니다.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을 만난 덕분에 4·19 혁명의 소용돌이를 피하게 었습니다. 아무튼 방원(芳園) 선생은 1957년 11월 백상 장기영 사장과 의기투합하여 한국 최초의 서구식 원예식물원을 한남동에 시설하여 1967년까지 서울의 명소가 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1961년에 태어났습니다.

 

방원(芳園) 선생은 수많은 사회활동과 봉사를 아끼지 않은 삶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활동 중의 하나는 1962년 3월 7일 국제친선(國際親善) 꽃씨협회 주최로 한국 최초로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꽃씨 날리기 행사를 주도적으로 개최한 것이었습니다. 이 행사는 5천여 명의 어린이들과 학생들이 맨드라미, 나팔꽃, 코스모스 씨 등을 담은 오색풍선 10개씩을 날리고 그 풍선이 하늘 높이 올라가고, 그 풍선이 올라가다 터지면 꽃씨가 퍼져서 꽃이 피게 되는 그런 행사였습니다.

 

1967년 방원(芳園) 선생님은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가난한 농촌이 잘살아야 한다는 강한 신념과 믿음으로 쌀 채소 농사에만 의존하던 한국 농촌에 부가가치가 높은 화훼원예(花卉園藝) 기술을 보급하겠다는 일념으로 근교농업의 붐을 일으키기 위해 부천군 소사읍 조종리 199-2번지 3천 평에 방원식물원(http://blog.daum.net/enature/15853024)을 시설하여 부천군(富川郡) 원예협동조합(園藝協同組合) 창립을 주도하고 분재전시회를 열고 의욕적으로 화훼원예 기술을 보급하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 부천군이 부천시로 서울의 메트로폴리탄에 흡수되어 농장을 정리할 때까지 한국의 화훼원예 기술보급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나의 부친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은 목은 이색 선생의 후손으로 구한말 애국지사 궁내부특진관 칙임관1등 이명직 선생의 증손이고 일제의 금광수탈을 최일선에서 막아내던 대한제국 금광국 기수였고 충북 충주 노은금광 주인 이철규 선생의 손자이며 11세 어린 나이에 조부와 부친을 여의고 혈혈단신 만주국의 관리로 살아가며 독립군의 군자금을 대던 이성구 미곡검사관의 아드님이었습니다.  

 

방원(芳園) 선생은 해방 후 창경궁(昌慶宮) 식물원(植物園)의 책임자로서 본분을 다했고, 자신의 몸을 던져 공산군에 맞서 싸운 6.25 참전 상이용사인 전쟁영웅(戰爭英雄)이었고, 국화전시회를 통해 전후 삭막한 한국인의 마음에 희망을 심어주었고, 우장춘 박사님을 도와 한국의 육종분야 발전에 이바지했으며, 한국 최초의 꽃씨 날리기를 주도하여 국토를 아름다운 꽃 강산으로 만들었으며, 한국의 근교농업발전을 주도적으로 시작했던 선각자(先覺者)였습니다.

 

더하여, 6.25부상치료후 명예제대를 하였지만 2005년까지 상의군인등록도 안하고 사셨습니다. 이유는 6.25후 상이군인들이 이곳저곳에서 행패를 부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또 상이군인혜택 받자고 전쟁을 치루고 부상을 당한게 아니라 공산군으로 부터 나라를 구하기위해 참전한거라며 상이군인등록도 안하고 살아 오셨습니다. 상이군인 혜택을 받았다면 우리 형제자매는 월사금이나 학비걱정으로 마음조리며 학창시절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는데 말입니다. 고지식한 방원 선생이셨습니다.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은 한국시간 2018년 4월 13일 20시 11분 6.25동란중 수류탄폭발로 인한 파편상(좌복부 파편창과 좌배부 맹관 파편창)과 외상성폐손상이 악화되어 흡인성폐렴으로 인하대학병원 11층 2호실에서 사망하셨습니다. 빈소는 서울 혜화동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2호실에서 젊은시절 창경궁(昌慶宮) 식물원(植物園)의 주임(主任)으로 근무하셨던 경궁 식물원이 바라보이는 곳에 모셔서 5일장으로 조문객을 맞았습니다.

 

발인은 2018년 4월 17일 9시 30분에 서울대학병원 영안실을 떠나 성남화장장에서 화장한후 명혼을 동일 16시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봉안의식을 국군의장병의 의장행사를 통 충혼당 314호실에 모셨습니다.

 

장지에서 돌아온 당일 저녁 혼란스런 영가께서 밝은 빛이 나는 곳으로 잘 가시도록 인도해드리는 초우재와 역시 손없는 날을 골라 4월 19일 저녁에 재우제를 인천 송도 신도시 평소 머무셨던 자택에서 지냈고, 4월 22일 일요일 장지인 현충원 제1제레동 2호실에서 삼우제(三虞祭)를 올려 탈상을 마쳤습니다.

 

요단강 건너가 뵈올때까지 아버님,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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