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3_생각해볼글

[내 친구 박용섭의 어릴적부터 살아온 서울 이야기 (연재중) 4]

忍齋 黃薔 李相遠 2017. 7. 24.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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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박용섭의 어릴적부터 살아온 서울 이야기 (연재중) 3] 

http://blog.daum.net/enature/15854664 에서 계속

 

엄마와 간 시장은 순대가 넘 맛있었다.

"오늘은 구로시장에가서 막내 속옷 좀 사야겠어"
"그래 속옷사면서 브라자도 사줘라"
"같이 안갈거야"
"그럴까, 그럼 우리 오늘은 시장에서 점심먹자"
그리곤 우리부부는 시장투어를 시작한다.

 

왁짜지껄하는 시장의 풍경은 언제나 보아도 신나고, 
흥분이 된다.
뭔 물건이 있는지 궁금도 하지만 왜그리도 사고픈것이 많은지
아내를 따라가다보면 "요거사자,저것도"하다보면 항상 오버고,
양손엔 주렁주렁 검은 비닐봉다리가 손가락이 저려오듯이
아프지만, 그래도 흐믓한게 만족해하며 사무실에 와서 재차 
다시 분류하고, 아내가 가져갈 것과, 내가 퇴근할때 
가져갈 것도 구분한다.
오늘 저녁의 먹거리는 아마도 구로시장에서 산것으로 식탁이 풍성할 것이다.
식전에는 막내의 패션쇼도 있을 예정이고, "맞네 안맞네"하고,
그리곤 막걸리도 한통사서 반주로 한잔 할랏치면 세상 
부러울게 없다.ㅎ.---to be continued---

 

 

엄마와 간 시장은...-2-

"용섭아, 엄마랑 시장가자"
"네, 엄마"하곤 엄마 손을 붙잡고 쫄레쫄레 따라 나선다.
똥골에선 공항시장이 유일한 시장이여서 어린 난 제법 걷는다만
엄마와 시장을 가면 난 무지 좋다.

공항시장의 초입을 지나 조금가면 옷가계가 즐비한곳 한모퉁이에
연탄난로 하나에 커다란 솥을 걸고 하얀 비닐 안에서 김이 모락모락나는
순대를 파는 아줌마가 있었다.

"용섭아,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하시며 아줌마에게
"아줌마 애 먹게 순대 좀 썰어주세요"
그럼 아줌마는 "꼬마 손님이 또 오셨네"하시고
작은 의자도 내놓으시고, 한접시 가득한 순대와 한귀퉁이에 빨간소금을 주신다.
난 그곳에서 혼자 쪼그리고 앉아 먹는 순대가 너무 좋았다.
이쑤시게로 콕 찍어서, 빨간 소금에 살짝 찍어서 한입 가득
넣어서 먹으면, 짭쪼름한게 너무 맛났다.
"개눈 감추듯이 먹어 치운다"는 말은 아마도 내 어린시절의,
시장 한구석에서 쪼그리고 앉아 먹는, 그 순대를 먹는 모습일게다.
공항시장에서 먹어 본 그 순대는 정말 맛있었다.
그 후로도 얼마나 많은 순대를 먹는다만 내 기억하는 맛은 아니다.
엄마와 공항시장을 가고, 혼자 놓아두고 장을 보시고,

내게 베픈 그 호사를 지금도 감사한다.--to be continued-

 

 

엄마와 간 시장은 순대가 넘 맛있었다.-3-

다른 형제들은 엄마와 함께 시장을 나오는 이맛은 모른다.ㅎ.

한참을 그렇게 맛나게 먹고 있으면, 엄마의 시장 나드리는
끝나고 자그마한 봉지를 내게 건네시면 집으로 왔다.

엄마와 함께하는 시장은 늘 순대가 함께 했다.
난 그 순대를 먹기 위해서 엄마를 따라 시장을 찾았다.

늘 그런 것은 아니였다만, 엄마와 함께 시장을 다니는 것은 신났다.

찬을 사려면 조금 먹어보고 샀다. 그러면 항상 내 입맛도 한입 거든다.
"맛있어"
"아니 좀 짜"
"그래야 반찬이 되지"

"용섭아 이것도 좀 먹어봐"
"아~~,쩝쩝짭짭, 맛있다.ㅎ."
"아줌마 이것도 좀 싸주세요" 
"아이고 고놈 잘 생겼네, 엄마랑 시장 나왔어"
"네"
"아이때문에 더 주는거야, 많이 줬어"
"많이는" 하시지만 싫진 않으신 눈치다.
그렇게 내 입맛과 엄마의 입맛으로, 우리 가족 모두의 입맛으로 저녁을 맛나게 한다.

늘 신났던 것만은 아닌것이 엄마의 얼굴이 침울해하시는 일도 있었다.
여느때와 같이 시장을 가시자고 하면 으례 내가 엄마의 손을 잡고 간다.
순대를 좋아한다며 시장의 그 아줌마네 가게에서 순대를 시키곤 
장을 보러가시는게 아니라
함께 앉아 내가 맛나게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시곤 다 먹은 후에
"가자" 하시면 공항시장 건너편의 중앙의원으로 날 데려가신다.
의자에 앉혀 놓곤
"용섭아 여기서 꼼짝하지말고 있어"
"네"
"엄마 곧 올거야" 하시곤 엄마는 의사를 만나러가고 , 한참 후에 몹시도 아픈
모습으로 나와 잘 걷지도 못하시며 "가자" 하시면 올때까지 아무말도 못하고
"엄마 아파"만 조잘대며 울먹이면 엄마는 간단히 "엄마 괜찮아" 하시며
집에 오자마자 이불을 깔고 누워 계셨다.

형제들이 "엄마 왜그래"하고 물어도 난 대답을 못했다.
"병원엘 다녀온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마라"는
엄마의 당부를 지켜주기 위함이였다.

그렇게 난 엄마와 시장을 다녀올때도 순대를 먹었지만, 병원에서 낙태수술을
받고 올때도 엄마는 친절하게 그 호사를 누리게 해주었다.

"어머님 늘 감사하고, 늘 많이 그리워 하고, 늘 보고 싶습니다."

-계속-

 

 

 

엄마와 간....-최종편-(눈물이 나서 빨리 올려야 겠다.)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아버지도
"용섭아 아버지하고 시내 좀 다녀오자" 하신다.

-울 아버지는 참으로 무섭웠다.그때까지만해도 형과 난 장농에 비단보로 잘 싸여진
회초리로 형이 잘못해도 함께 맞고, 내가 잘 못해도 함께 맞았다만
내가 잘 못해서 맞을 때 보단 형에게 뭍어서 맞았다.-

아버지의 말은 거역할 수 없는 명령에 가까운 것이여서
엄마가 준비해준 교복을 입고, 요리사시고 친구분들도 요리사여서
서울시내의 호텔 및 국회의사당의 식당을 투어한다.
아버지와의 외출은 정말 먹을게 많았고, 주머니도 든든했다.

아버지 스물에 결혼하셔서 스물하나에 형을 낳고, 그 이듬해에 내가
태어나서 같은 친구들의 부러움을 많이 받으셨다. 아버진 그게 좋으셨던거 같다.
형은 크고, 나이에 비해 나이가 들어 보였고, 난 작았으며, 아버지를 많이 닮아서
종종 아버지와의 나드리에 동행하는 즐거움도 느끼곤 했다만 늘 아버지는 무서웠다.

허나 엄마는 아버지와 달리 새끼들을 살갑게 잘 챙겨주셨고,
그냥 좋았다.

 

엄마와 시장 나드리에 익숙해선지
아내와 함께하는 시장 나들이도 즐겁다.
쪼그리고 앉아 먹었던 순대는 아니여도
재래시장은 언제나 활기차고,
사람사는 냄새가 나서 종종 간다.

갈때마다 늘 좋다.ㅎ.

 

대한민국에 지하철이 첫운행하던날이 아버지와 함께 친구분을 찾던 그날 이였다. 1974년8월15일 광복절날이였고, 이날 육영수여사가 총탄에 맞아 사망하기도 했던 역사적인 날이 였던걸로 기억한다. 그날 아버지 덕에 지하철도 타보는 행운도 거머쥐었었다.

 

 

 

밥만 잘 먹고 있다.

어머님의 갑작스런 작고로 모든게 참으로 혼란스럽고,
평상심을 찾는다는게 너무도 힘들었다.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도 어머님을 잊은거는 아니나,
그 후유증은 실로 엄청났다. 아직도 우리 가족은 그 후폭풍에 잠시 휴전된 폭풍전야의 고요와 같다.

툭터놓고 이야기하고프지만 서로의 입장들이 달라서인지
참으로 서로를 이해한다는것이 어렵다.

그런 와중에도 때가 되면 밥만 잘 쳐먹고 있다. 그것도 
맛나게..........

한동안은 글을 쓴다는것이 너무도 힘들어서 감히 쓸 생각도 
못했다.
허나 더 이상 나를 어머님안에 가둔다는것이 어머니의 뜻이 
아닌것 같아
내가 좋아하고, 잘하지는 못하드라도 난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그렇게 하루를 보내기로 내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바로 오늘이고, 조금은 편하게 세상을 접하고, 
나중에 생각을 정리해서
어머님에 대한 글을 차분히 정리해야겠다.

밥만 잘 먹고 있다.
난 살아야 한다. 내 슬픔은 내안에만 간직하고, 어른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아이를 돌보고, 아내의 혼란스러운 마음도 다 잡아야하고,
가족과의 융화에도 적극적이어야 한다. 양보하고, 이해하고, 
손해도 보면서 말이다.

그렇게 밥만 잘 먹고 있다. 것두 드럽게 맛나게 쳐먹고,
어디가 잘한다면 찾아가서 비싼 대가를 지불하면서 
잘 쳐먹고 있다.

오늘 점심도 비가오니 따뜻한 국물이 맛있는 집을 찾아가
잘 먹을 것이다. 그렇게 밥만 잘 먹고 있다.

 

 

사무실을 개설한지가 어언13년이다.

강남 사무실을 깔끔하게 접고, 이곳에 온지 13년이 되었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에 나또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초등학교 다니던 큰아이는 대학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고,
막내공주는 기저귀 차던 때가 훌쩍 지나 고등학교1학년이다.
아내와 사이가 더욱더 돈독해졌고,
살이가 나아지기보다는 꾸준했다가 정답이다.

잘 해왔던 13년처럼,
앞으로 다가올 13년도 잘 준비해서 잘 지낼것이다.

오늘 새삼 내가 대견하다.
아내가 더 사랑스럽고, 아이들이 참 많이 컷음에 고맙다.
이거면 돼, 충분한 보상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 행복하다.

2017년6월23일이라고 꼭 쓰고 싶다.

 

 

심봤다.~~~

토요일 횡성에서 친구가 산에다 종자를 심어서 산양산삼을 재배지하는곳을 다녀 왔다. 
친구와 가고 오면서 많은 이야기로 좀더 가까워졌고, 잘 키운 산삼을 3뿌리나 주는데 먹으란다,-5년 8년,12년산-. 처음 접하는것이였다.먹고, 조금 지났다. 
술도 안 먹었는데 마치 소주를 2병은 마신듯한 몸으로 변신하고, 그렇게 웃음이 난다. 너무도 신묘했다.명현현상이라는데 난 잘 모르겠고, 먹은 티가 확실히 나서 좋았고, 새벽에 심볼이 심볼답게 ...너무 좋았다.
친구들에게 권하고 싶다. 내게는 쥑였다.
먼길을 선뜻 함께해준 "친구야 고맙고", 졸업 후 간간이 전화만하고, 만난 
"심산아 니덕에 나발 확실히 불었다".
필요하면 연락해주셔.---소개 해 줄 수 있다.필히!!!
이게 산삼입니다.

 

 

 

 

 

 

돈키호테를 사랑합니다.

"힘내세요"
"전 당신의 영원한 팬입니다"

고2때의 가을이였을것이다. 안방에 있는 텔레비젼에서
처음으로 연극으로 접했을 때의 난 전기에 감전되서
머리털은 헝클어져서 서고, 연기도 나고, 입은 옷은
중간중간에 터지기도하고, 입에서도 김이 모락모락나는
만화의 한장면을 기억에서 끄잡아도 될 만큼의
충격을 받았다.
사람들이 너무도 벅차면 아무런 행동을 못한다. 
난 그냥 눈물이 나왔다.
내가 할 수 있는게 그것 뿐이였다. 그래서 울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끝났고, 그 이후로도
난 처음으로 본 연극을 되끌어내며 만족하면서
"난 이다음에 크면 꼭 연극배우가 되고, 연극배우가 되서 
돈키호테역을 할 거야"하고
내 의지를 다지기도 했으면, 우선 목표로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염두에 두고
나름 전열을 불태웠다.

고3이였던 어느 봄날 아버지 친구분들이 놀러 왔고,
이날 연극을 접어야하는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

아버님이 끝으로 해외취업을 가시겠다며 함께 오신 친구분들에게
아들을 소개시켜주었다. 이때가 고3을 막오른때였다.
"작은아들은 고3이면 대학을 가야하는데 전공은 뭘하거야"
친구분의 이야기에
"연극영화과에가서 연극을 배우고 싶습니다"
"연극하려면 배가 많이 고플텐데"
"뭐라!!! 딴따라를 하겠다고 안돼"하시며 역정을 내시는 아버님이
절대로 안된다 하신다. 이때만해도 내 뜻과는 상관없이 아버님의 말씀은 법이고, 무조건 해야만하는 명령이였다.
모질거나, 아버지를 거역한다는것은 불효이므로
내뜻은 무참히도 꺽이고 말았다.

단지 배가 고플거란 친구분의 말씀과 딴따라는 안된다는
아버님의 신념은 전공을 돌려야하는 내 맹세로 끝이 났다.

꿈을 잊은 나는 고3 수험시절을 그렇게그렇게 보냈다.

그리고,대학을 가고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군대를거쳐
여행사로 취업했고,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얼마전에 tv에서 다시 그 영화를 보았다.
여전히 눈물이 났다.

난 꿈은 있는가? 그저 살고 있으니 사는것인가?
꿈이 사라졌다고 내 인생의 가치는 사라지는것일까?

지금은 다른 꿈을 꾼다.
임종직전의 돈키호테에게 찾아온 창녀 알돈자가
다시 그의 꿈을 일깨워주면서 무기력한 노인이 아닌
기사로서 최후를 맞이하면서 끝난다.

난 다시금 꿈을 꾸고, 그 꿈을 찾아 오늘도 힘차게 산다
뭐가되어도 무기력하게 맞이하진 않을테니까~~

 

 

 

널 무지 좋아해----아내의 오래된편지

오늘은 날씨도 우증충하고 기분도 썩 좋지가 않네요.

편지지 공간은 넓은데 평소에 안쓰던 편지를 써 볼려니

쓸말이 별로 없네요.

앞으로도 지금 현재처럼 결심한 마음 변치말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한달 동안 수고 많이 했어요.

한달동안 애써서 번 월급이니 저도 아껴 쓰도록 할께요.

그리고, 이 용돈은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절약해서 잘 쓰기

바랄께요.


요즘은 항상 당신한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는 것....


결혼한지도 10년이 가까워지지만 요즘처럼 행복한때도

제기억엔 별로 없었던것 같아요.


항상 우리집에 기둥이라고 생각하고 사랑하는 희정이와 나를

위해 노력하는 아빠,여보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믿어요.

나도 노력할께요. 행복한 우리집을 위하여.............

 

2001년 4월 11일 희정이 엄마, 당신의 여보 순희가.

 

 

어느날 오랜된 가방에서 나온 분홍색 편지봉투를 발견하고,

지금은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등가방에 늘 간직하고 다니는

아주 오래전에 받은 아내의 당부와 사랑이 가득한 순희씨의

편지를 꺼내어서 다시 읽어본다.

 

이 편지는 내가 힘들고, 나태해지고, 아내와 관계가 소원해질때

옛날 일을 돌이켜보고 다시금 마음을 추슬릴때 꼭 꺼내서 다시 읽게 되었다.

 

작은공주님인 희선이가 이글을 본다면 내이야기는 왜 뺐냐고 질투를 할런지도

모르지만 아이에게도 웃으면서 이야기할때가 있을것이다.

 

오늘은 이 글을 읽으니 나도 정말 순희씨를 좋아하나부다.

 

첫만남이 전화로 시작해서 만나고, 사랑해서, 이별이 싫어서

결혼을 하고, 서로를 위해 이해하지 못해서 많은 갈등도 있었고,

다시 이해하고, 순희씨에게 못된 짓도 많이하고 있고,

속박되는 것을 너무도 싫어해서 지금도 튀격태격하며 알콩달콩 살지만

내 곁에서 오랫동안 날 사랑해주고 좋아해 주길 바랄뿐이다.

 

순희씨 나도 널 무지 좋아해^^

 

바보입니다. 저는...ㅎㅎㅎ

 

김포국제공항.

내가 김포공항을 처음 접한건 아버님의 상경으로 인하여 가족이 서울로 이주하면서 였다.
초등학교를 입학하기전이였으니 5~6살 정도 였을게다.
아버지는 요리사여서 시내호텔로 출근하시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는 김포공항의 -지금의 케더링센타정도- 한 식당에 취직을 하셨다. 
환송장이 있던 2층에 근처에 식당이 있었는데 안에는 한번 
들어가보기는 했다.

난 어린시절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걸 보면서 나도 크면 저 비행기를 타봐야지하면서 꿈을 키우기도
하였고, 이쁘장한 스튜어디스를보면 꼭 저 이쁜
여자와 결혼도 할거야하고, 결혼관도 정립할때였다.

어린시절엔 놀거리가 운동장에다 줄 대충그려서 오징어 가이상.찡뽕,삼팔선,시계불알.,,등등....

아버님은 식당에 근무하시면서도 꼭 집에서 도시락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그러면 언제나 심부름은
나의 몪이다. 그 도시락을 들고, 지금은 이마트로 변한 그 공항을 향한다. 지금이야 그리 그길이 길어보이진 않았으나 어린 내게는 그 길은 참으로 길었다. 그길을 그냥 걸으면 심심하니 배수구의 갯수도 세어가며 걷기도 하고 그러다 잘 못하여 뚜껑 사이로
발이 끼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아버지께 도시락을 전하곤 그 다음은 공항은 커다란 놀이터로 변한다. 계단이 스스로 움직인다는 -에스컬레이터- 그것은 신기하기도 했지만 아주 훌륭한 놀이시설이였다. 몇번을 오르락내리락하면 제복을 입은 어른이 집에
가길 제촉하기도 하였다, 그러면 자리를 옮겨 그
튼실한 의자에 팡팡 뛰어보기도하고, 누워도 보고 어쩜 이리도 폭신폭신한지 공항의 낯선 경험은
너무도 좋았다. 그러다 외국어른이 부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외국인은 동전이 필요가 없었고,
귀찮기도 했겠지만,-나를 세워 놓고는 십원짜리 동전을 내 손바닥에 올려놓으며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그 말은 전혀 알아들을수는 없었지만 척봐도 쓰라고 주는것이지 하며, 고맙습니다하고 꾸벅 인사까지
하곤, 그제서야 집으로 오곤했다.

집근처에 공항이 가까이 있어서 그 공항은 내 직업관과 공항과 관련된 일을 주었다. 처음 타는 공항에서의 비행기는 지금도 귀가 너무도 아펏다는
기억밖에 없지만 그 이후로도 난 공항을 다니고,
외국의 공항도 많이다니는 여행업에 종사해 많은
이들을 보내기도 하고, 나도 간다. 스튜어디스아내를 얻지는 못했지만 그 이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아주 행복하게 산다.
공항이 가까이 있어서인지 우리 친구들은 해외 이주도 많이 하고, 공항을 근거로 그 속에서 일하는
친구도 많고, 공항을 늘 그린다. 군에 입대해서
왜그리도 공항은 자주나오는지 그러면 꼭 나와서 담배한대 피곤, 휴~~~ 우리집이 바로 그옆인데....

 

 

 

친구에게 쓰는 편지

내일이면 7월입니다.
여름이 정점을 찍으며,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올 한핸 알고있는 명사분들이 많이도 서거하시고, 알고 있는 분들도 곁을 떠나서 많이도 심란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대선,사드로 인해 곤란을 격기도하는 아주 기분이 안좋은 그런 시기이기도합니다. 그래도 전 웃습니다. 그럼 힘이 막 생기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에게도 많이 웃기를 적극적으로 권합니다. 가끔 아니 매일 거울을 보면서 주문을 겁니다. 넌 웃는 얼굴이 참으로 멋지고, 웃으며 넌 괜찮은 놈이고, 니가 하는 일이 당장은 힘들어도 곧 좋아질거고 "이것 또한 지날거야"하고 
스스로 힘을내곤합니다. 
그럼 거짓말처럼 기분이 금방 좋아집니다.

친구여! 
혼자 있거나 글을쓸때나 친구들의 글을 볼때면 생각나는 그의 얼굴을 기억해내곤, 그와의 일들을 꺼내서 웃기도하고, 화도 내기도하고, 소리없이 울기도 합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들또한 절 기억해내곤 웃기도할것입니다. 늘 생각한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그러나 가끔 생각나고, 정말이지 보고 플 때도 많습니다. 연락처를 알고 있을땐 목소리라도 들어볼요량으로 전화도 합니다. 그럼 잘 지내고 있다고 하니 안한것보단 나아집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면 그 친구도 절 기억해내고, 가끔은 보고도 싶을것입니다.

친구란 참 좋은것입니다. 
우리가 배웠던 참된 친구의 표본으로 사형수와 친구,아버지의 친한 세친구등 다양합니다만, 전 있으면 같이 있어서 행복하고, 곁에 없으면 생각나고, 보고싶어서 친구를 좋아합니다. 죽마고우는 너무 잘알기에 함부로 대하지는 않는지, 학창시절의 친구는 내가 너무 의시대거나 건방을 떨지는 않았는지,
사회에서 만난 친구에게는 손익계산을 너무 따지지는 않았는지
많이 생각하게합니다. 이글을 쓰면서......

친구여 늘 함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친구여 곁에서 지켜봐 주어서 고맙습니다.
친구여 살아 있어줘서 감사합니다. 살아서 숨쉬고 살았을제 최선을 다합시다. 열심히 살려고 많이 노력합니다. 지켜봐주고,함께이고,사는 동안 힘이 되주어서 너무도 좋습니다.

곧 가을이 옵니다. 그리곤 겨울이 될것입니다. 그러다보면 다시 단순히 지난 시간이라 불리는 과거가 되어있을 것입니다.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그정도는 웃어넘길 여유도 있으며, 살아온것이 행복하기도 했었고, 후회가 많이도 남지만 최소한 이 가을 부턴 후회는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친구여! 고맙습니다. 너무도 감사를 드립니다.

2017년6월30일. 마무리를 하며,낮에..박용섭드림.

*.추신 : 오랫동안 건강하게,멋지게 늙어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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