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데.....
아파트에 서류를 넣을 것이 있어서 구로 구청을 다녀왔다.
주민등본과 가족관계증명서를 띠려던것이였다.
아무생각없이 번호표를 받고, 대기중이였는데
내 번호가 불리고 준비해간 민증과 함께 번호표를 내밀곤,
위에 두서류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했고, 아내는 돈을 지불한다.
아내가 먼저 획돌더니 나간다.
나는 왜그러나 하고 서류를 받아서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하며 눈물이 난다.
어머님 함자 옆에 ()로 사망이라 써있는 서류를 첨 본 난 그렇게 울고 만다.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그 사실도 받아들였다고,
생각했음에도, 서류를 보니 오만게 다 떠오르며, 그냥 슬펐다.
돌아와서 일을 한다고 한다만, 또 울컥해 옥상으로 올라가 친구에게 전화를 한다.
다른 이야기라도 해 볼 요량이였으나, 이야기를 하니 알고는..............
집에 일찍 들어가야 겠다. 새끼들을 보면 나아지겠지하고 말이다.
두공주님과 요리하기.
[박용섭] [오전 11:37] 저녁에 스튜해 먹을껀지?-----마님
[박용섭] [오전 11:37] 답장주라
[딸
♥] [오전 11:38] 네에
[박용섭] [오전 11:38] 장봐야된다
[박용섭] [오전 11:38] 몇시올꺼야
[딸
♥] [오전 11:52] 6시쯤??
[딸
♥] [오전 11:52] 6~7시사이에렴
[딸
♥] [오전 11:52] 염
[박용섭] [오후 4:58] 공주님 어디세요?------접니다
[박용섭] [오후 4:58] 날이 많이 추워집니다.------접,,
[딸
♥] [오후 5:37] 뉑~
[딸
♥] [오후 5:37] 7시까지갈게염!
[박용섭] [오후 5:46] 빨리오셔요-----접..
[딸
♥] [오후 6:28] 지금집가구잇는중입니당
[박용섭] [오후 6:29] 어딘디요
[박용섭] [오후 6:30] 빨리와서 스튜만들어라 재료준비해놨다요---마님
[박용섭] [오후 6:30] 네 마님^^--저.
[딸
♥] [오후 6:37] 재료머머머머에여
[딸
♥] [오후 6:37] 나 가고잇응께
[딸
♥] [오후 6:37] 손대지마여
[딸
♥] [오후 6:37] 재료손질도 안대
[박용섭] [오후 6:50] 아빠는 들어갑니다.-----저
[딸
♥] [오후 7:08] ㄴㅇ
[딸
♥] [오후 7:08] 넹
[딸
♥] [오후 7:08] 젇ㅎ신도림
이렇게 카톡을 3자대면하고 - 저는 사무실의 컴에 깔고, 마님은 탭으로, 딸은 스마트로-
집에 모이니 모처럼 4식구가 다 모였습니다.
*.스튜을 맛나게 요리하기.*
재료는 아내가 미리 준비를 했네요, 당근 2개,감자여러개,양송이 두봉지,
제 착각으로 브로컬리도 준비해야했는데.ㅠㅠ.소고기 안심 두쪽.
먼저 물을 받아서 분말스프를 녹여야하니 큰공주님에게 풀으라 하고,
전 당근을 정리합니다. 감자도 정리하고, 양송이도 잘 닦아 놓고,
도마를 꺼내 공주님과 칼질도 하며 까르르 웃고, 위험하다느니,
이렇게 해야 덜 낫다느니, 말로는 벌써 요리를 끝냈습니다.ㅎㅎㅎ
오목한 후라이판에 당근넣고, 감자넣고, 고기넣고, 살짝 익히곤
스프 푼 국물을 붓고, 손질한 양송이도 넣고 잘 젖습니다.
한참을 저으니 걸쭉한게 맛나보이고, 우린 국자로 한사발씩 떠서는
준비한 식탁에서 바겟트빵과 함께 찍어도 먹고, 담궈도 먹고,
건데기도 건져 먹으며, 연신 맛있다를 남발하며 행복해 합니다.
공주님들과 처음으로 해 본 요리인지라 너무도 좋습니다.
그리고 맛도 좋아서 전 행복해서 미쳐버릴것 같습니다.
이래서 사람사는 맛이 우리집에서 솔솔 풍기는 모양입니다.
전 이렇게 사는 내가 너무도 좋고, 멋지고, 이쁘기도 하고, 너무도 좋습니다.
내돈과 남의 돈.
조금 지난 월요일의 일이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땀을 흠뻑 흘리면서 다급하게
나의 사무실로 들어온다. 한국말은 어눌하고 몹시도 서툴구, 몹시도 지쳐보인다.
"저기요, 제가 어린시절 외국으로 입양을가서 항국말을 잘 못해요"
한국에 여행을 왔다가 허리쌕을 누가 가져갔다며 분실신고를 하고,
항공권도 예약을 하고하려고, 16절지 복사용지에
본인의 영어이름과 국적, 분실물등이 상세하게 적힌 목록을 보이며,
우편환으로 돈을 받는다고 $2,000과 여권갱신하고 수속을 하는데
$283이 들어간다며, 도와달라고 합니다. 여행에 관계된 용어를 사용하기도하고,
어린나이에 외국으로 입양을 갔다는 말에 가엽기도하고, 뭔가를 해주어야 겠다싶어서
아내가 달러를 입금하라고 준 $110불과 엔화와, 그리고 비자대금으로 받아놓은
현금19만원을 우선수속을 하는데 쓰라고 톡톡 털어서주고, 캐나다를 간다기에 항공권도 예약
해주고 8/11일까지는 발권을해야한다고 친절하게 일러주고,
옆건물에 사진관이 있으니 내여행사에서 보냈다고하면 싸게 해줄거라고
일러주며 시간이 많지 않으니 서두르라고 보내며 얼마를 빌려가는지 알아야하기에
명함과 함께 금액을 적은 쪽지를 그에게 주곤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를 도왔다.
2일후에 오겠다고 하는 그친구는 열흘이 지나도 소식이 없다.
아~~ 내가 속았구나하니 답답하기도하고, 돈을 준것보다,
그자리에서 잘도 속아넘어가는 나를 보면서 "바보~"하는 그가 미치도록 밉다.
아내가 입금하라고 준 돈은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
엄한놈에게 톡 털어넣었고, 비자대금이야 또 벌어서 채우면 되지 하지만
사기를 당했다는것이 너무도 한심스럽다.
아내에게는 말도 못했다. 아는 지인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 잘했다고한다.
"용섭이 니 성격에 그 돈 안주면 내내 찝찝해서 아무일도 못한다고 잘했다고 한다."
씨불 정말이지 더럽다.
내가 가지고 있다고 다 내돈이 아닌가 보다.
상황이 종료가 되면 이상하다 생각되지만
그 현상황에서는 측은지심이 커서 생각을 많이 못했다.
근데, 난 또 이런 상황이 닥치면 안그러리라고
장담을 할 수 없다. 또 급하게 돕는다하면서 금고에 얼마
안되는 돈을 줄것이다.
그게 나이고 보니 아내에게 핀잔도 듣고, 단도리를 한다만 쉽지가 않네......
에고, 이를 어쩌나. 어떻게 아내에게 이야기를 해야하나 갑갑하네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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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아시는 분은 조언을 부탁 드립니다.
응답하라1977-교련복을 입다.
고등학교를 가니 교복외에 입는 옷이 하나더 늘었다.
기린도 아니고, 얼룩말도 아닌데,무슨 암호같은 문양으로
바탕은 흰색에 검은 먹물로 정성껏 장난친 이 옷은,
교련복!!!이다.
군복을 못입혀서 안달하는 권력자들이 전쟁놀이에
학도병용으로 디자인된 이 옷은 새끼 군인으로,
이상스레 이옷만 입으면 말도 걸어지고, 격한 장난에
친구의 손바닥을 아작내서 급히 교문밖으로 달려가
몇바늘 뜸질에 프랑켄슈타인의 자국을 남기기도 했으며,
M1 개인화기의 모형은 드럽게 무거웠으며, 총열부분이
잘 부러져서 급히 쇠파이프로 끼운것이 많아
친구와의 장난엔 정말 흉기이기도 했다.
머리에는 검정색 교모에, 상하의는 얼룩말문양의
새미군복과 목에는 하얀 스카프와 함께
군화인 워커를 신어도 되고, 아니면,
검정 운동화에 종아리에는 각반이라는 대용품으로
바지 밑둥을 조여서 풀이나 잔가지에 걸려서 넘어지는
효과를 방지하기엔 그지 없는 훌륭한 새미 전쟁용품이였다.
입학 후 일주일에 한번정도 이 새미군복을 입고,
우리는 재식훈련과 함께 집총체조도 배웠고,
삼각대를 유용하게 사용하는 법까지 배우고 익혔으며,
1년에 한번 외부의 전직 군인이였을것으로 예상되는
검열관 앞에서 그동안 배운 우리의 모습을 선보이기도 했으며,
이 시범을 보여주기 위해 여러날을 땡빛 운동장에서
걷고 또 걷고, 시범학급으로 야간 침투조와 기타 훈련을 반복했다.
검열관 앞에서 새미 군복과 모형 개인화기르 갖추고
신체건장한 허우대가 좋은 친구들이 기수로 당당함을 보여주고,
작은 난 재식훈련하는 뭉태기에 콕 박혀서 오른손을 힘차게
젖히면서 가다가 반장이 "우로봐"하면 "충성"하고 거수 경례와
함께 고개를 단상에 있는 검열관에게 돌렸다가 지나치면,
앞으로 돌려서 저벅저벅 원위치로 돌아오는
그것을 치루었다.
또 군가 테스트도 있어서 교련복을 갖춰 입고,
양손을 허리에 놓고, 좌우로 흔들면서 지정된 군가를
힘차고, 절도 있게 부르는 대회엔 우리반이 지정되어
여의도 고등학교까지 손수 가서, 경연에 참가도 했다만
성적은 그닥 신통치 않았던거 갔다.
그리고, 이날 여의도 광장에서 쏳아지는 소나기를
아무런 장비도 없이 무차별하게 맞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짧은시간에 ...독안의 생쥐-
이뿐만이 아니고, 각 학교에서 허우대 멀쩡한
학교 대표를 선발해서 봄에 이순신장군을 기린다는
이유를 들어 전국에서 선발된 고등학교 새미군인들을
현충사에서 여의도 까지 몇날몇일을 걷기도 했다.
적대적인 관계에서 행해지는 우리의 모습은
우리가 졸업을 하고, 한참 후에도 지속 되었다가
어느 순간에 없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안한다.
난, 이 교련복을 대학엘 가서도 입었었고,
1학년땐 연고전을 끝내고 문무대에 입소해서
일주일간 군인으로 갖추어야하는 덕목을 배웠고,
2학년땐 12사단인 인제,원통까지 가서 야영도하고,
철책 밑 전방까지 실습가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그런 군인으로 길들여져 갔다.
장맛비.
매년 여름이 되면 년중 행사처럼 되풀이되서 오곤하는
여름의 불청객이다.
이때가 되면 우선 불편한것이 자전거를 못탄다는것이다.
반면에 아내가 차로 출퇴근을 시켜주는것이
또 다른 행복이기도 하다.
우리가 격을 이 장마는 내게는 호재가 되기도 한다.
장마철이 길어지면 길수록 따뜻한 햇살을 그리워하여
여행이 주는 즐거움을 상상하여 장마철에는 예약이 더 많아진다.
장마가 매년 되풀이 되는데도 해마다 물로 인한
피해는 엄청나기도하고 무섭기도 하다.
내가 격은 장마의 두려움은 결혼을하고 신혼생활때 격은
반지하집에서다.
비가 많이 온다고는 생각했지만 하수구를 역류해 누워 자고
있는 나를 뭔가에 둥실떠있다는 느낌에 놀라 깨서 장판을
거두니 물이 흔건하여, 안방과 작은방에 이불로 뚝을 쌓고,
3층에사는 주인집에 문을 두드려서
아저씨와 함께 역류하는 물을 퍼나르고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물에 젖은 책이며 옷과 이불은 쓸만한것은 챙기고 모두 버리기도 했다.
허나 장마로 불은 강물은 어린시절의 내게는 멋진 물놀이 터가
되기도 했다. 똥다리라고 부르던 그곳이 물에 잠기고 더불어서
장미마을까지 잠기는것을 보며 물이 무섭다기보다는 그곳에서
놀 수 있어서 즐겁다고 생각했었다.
어머님께는 똥물에서 놀았다며 호되게 혼이나고 깨끗한 물로
목욕을 했어야 했음은 당연했다.
지금은 아파트의 3층에 보금자리를 틀었지만 장마철엔 반지하에 사시는 분들이 저윽이 걱정되기도 한다.
개인적인 생각은 그곳에는 살지 않기를 권하지만 살이가 넉넉치
못해 어쩔 수 없이 살아야하시는 분들에게 측은지심이 든다.
서울에서만 생활하다보니 농사를 잘 몰랐던 시기에는 비만오면
농사가 저절로 되다고도 생각했다.
이 얼마나 웃으웠단 말인가.ㅜㅜㅜ.
이글을 쓰면서도 지금 제주에는 많은 비로인해 어려움을 격고 있을 그들에게 용기내기를 바라고,
이글을 읽고 있는 분들께 다시금 준비를 잘하시라고 권하고 싶다
우리집 설거지 복불복,ㅋㅋㅋ
"안내면 술레! 가위, 바위, 보"하면 다음엔
극명하게 다른 탄식과 환성을 들을 수 있다.ㅎㅎㅎ
요즘 우리집의 저녁식사가 끝나고 난 후의 풍경이다.
난 개인적으로 복불복을 좋아하지 않는다.
tv이의 1박2일에서 저녁이나 혹은 잠자리등 잔혹한 게임을 통해서
술레를 정하여 고통을 상대방이 즐기는 이런 방식을
별루 좋아하지 않았다만, 해보니 재밋드라구.ㅎ.
요즘 아이들이 방학이고, 나도 끝나면 바로 집으로 들어가니
항상 저녁을 함께 하는 날이 많아졌다.
가족과 함께 하는, 저녁은 찬이 많지 않아도 맛있고,
먹는 시간이 행복하고, 이야기도 많이하고,그래서 좋트라.
어느날 아내의 제안이 모두를 긴장하고,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우리 저녁 다먹었으니, 설거지 복불복할까?"
"그럴까" 그럼 큰아이가
"안내면 술레! 가위바위,보"
"와~~~""으~~~~" 나뉩니다.
제가 2번 걸려서 깔끔하게 정리했고,
한번은 막내공주가 걸려서 어설퍼서 흑기사,
아내는 한번도 안걸렸지만 막내가 걸려서 흑기사로 한번,
큰공주-대학2년-도 어제까지 2번 걸려서 즐겁게 설거지를 했다.
그리고, 막내공주-중1년-도 두번 걸려으나 엄마,아빠가 흑기사.
어제는 설거지 복불복을 시작한 후로,
한번도 안걸리는 아내를 어떻게든 역을려고
했으나 결과는 나였다. 에궁~~~
행복한 설거지다.
좋았고, 좋았으며, 좋트라.ㅎㅎㅎ.
참고로 어제는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ㅠㅠ.
마라톤이야? 광고야?
매년 10월쯤이면 구로구에선 점프구로라는 축제이름으로 각종 행사를 연다.
그중에 처음은 넥타이마라톤대회로 특이하게 넥타이를 메고 5키로 마라톤을
구로디지탈의 메카인 마리오광장에서 열린다.
매년 참여한다만, 11년째중에 2번은 참여를 못하고, 항상 달리고 있다.
이 의상이 내가 고안해서 리폼한 마라톤 의상이다.
보기는 어떨지 모르나 좀 뛰면 덥다. 것두 아주 많이 덥다.
달리면서 젊은 아가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면서 달리고, 힘내라고 응원도 하고,
뻔뻔하게 "나 지금 힘들니까 힘내라고 응원해달라"고 통제하시는 분들에게 청하기도 한다.
그럼 예외없이 "힘내세요" 한다. "네 힘이 펄펄 납니다, 고맙습니다"하곤 열심히 뛴다.
기록이나 상품을 탐내거나하는건 내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저 축제의 한부분을 즐기고, 등판에 있는 광고에 촛점을 맞춘다.
오늘도 잘 뛰고, 즐기고, 행복한 나만의 기록을 만들었다.
아직까진 건재하다. 그래서 좋다. 아주 좋다.ㅎ.
응답하라1977---RCY에 가입하다.
입학식도 무사히 마치고, 그저 평범한 난 학교와 집을 왕복하는
그저그러한 학생이였다.
신입생인 우리는 시도때도 없이 들어 닦치는
선배들의 불신검문에 치를 떨기도 한다.
아침에 등교하니 뒤문으로 선배들이 들어와선
"동작그만, 모두 차렷" 그럼 우리는 겁에 질려
앉은자세에서 바로한다.
그럼 앞으로도 뒤로도 여럿이 들어와선
"뒤열부터 책상위로 올라가"
나야 작은키였으니 언제나 맨 앞자리를 벗어나지 못해
웬일인가 궁금해 한다만 뒤돌아 볼 생각도 못한다.
"너,너, 복도로 나와"
"자리에 앉고 다음 앞 열"
이렇게 계속되는 와중에 복도로 끌려간
동기들은 양말을 검정색이나 짙은 회색이 아니라는
이유로 엉덩이를 몽둥이 찜질을 당하기도 했다.
"씨발 3학년은 예비고사 준비도 않하나"하고 푸념도 한다만,
샘들의 묵인하에 벌어지는 후배 다루기는 끝간 곳을 몰랐다.
우리들 사이에서 나눠지는 이야기론
"써클에 들면 선배들이 보호한다드라"는 달콤함에 젖어,
난 청년적십자회원으로 가입한다.
이때 rcy를 가입한 동기는 상기의 이유와 함께,
봉사활동도 하지만, 여학생과 미팅도 한다는
그말에 혹해서 바로 가입했다.
입학을 하고 첫미팅은 4월의 어느날이고,
영등포에서 성남을 가는 36번 버스로 한참을 가는
"헌인능"인가는 가물가물한다만 그곳을 가고,
상명여고학생들과 입구에서 만나,
간단하게 나무에 "자연보호"라는 팻찰을 달아주고,
나머지는 기대하고 기대한 미팅 시간이였고,
먼발치의 여학생과 마주보면서 나누어 받은
명함크기의 딱딱하고 색도 이쁜 그것에는
접을 반절을 펴고보니, "헤밍웨이의 서부전선 이상없다"
너무도 근사하지 않은가?
"그래 오늘 미팅전선에 이상 없다"며 쭈~~ㄱ~ 여학생을 둘러보니
중학교 동창이 눈에 들어왔고, 그아이만 아니면 돼!!!
한명씩 나가 쪽지에 적흰 글을 읽으면,
상대편의 학생이 같은걸 들고나온다.
차차 줄어들고, 드디어, 내 차례
"헤밍웨이의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목이 터져라 외쳤더니 그 아이가 배시시 웃으며
나오는데, "아~~~ 너무 하십니다"ㅜㅜ
그 후에도 난 방학이면 고아원에도 여러번 찾아가
원아들과 함께 즐겁게 놀기도 하고, 헌혈 캠페인도
참여하며, 몇번의 미팅도 추가로 즐겼다.
그렇게 1학년을 마치고, 2학년도 마쳤다
응답하라 1977년
이때 난 중딩을 끝내는 졸업반이였고,
고딩을 시작하는 내 개인 역사에서 한획을 그린
대 변혁을 맞이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이때만해도 연합고사라하여,
난 1976년12월의 어느날 공항중학교에서
멀리 배정받은 여의도중학교에서 연합고사를 치루었다.
고사를 치는 내내 긴장하였고, 시험이 끝나서야 친구와 학생식당을
내려와서 우동을 시켜 먹었다. 난 이때 시킨 우동을 식탁에 가져다 놓고,
반찬을 받으러 간 사이에 우동이 업어져서 망연자실하고 있을때,
아주머니가 나오셔서 괜잖다며 치워주시고 다시 한그릇을 말아주셨다.
너무도 고맙기도 했지만 미안함도 함께하고 맛나게 먹는다만
하필이면 시험날에 이런 불행한 기운이여서 혹시 떨어지는건아닌지
몹시 불안해하기도 했었다.
허나 그건 기우였고, 난 인문계에 당당히 합격하였고,
2월의 어느날 고교배정을 받는 날 낮에 중학교에가서
7학군 11번을 배정받고, 집에와 델레비젼으로 내가 갈 학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헌데 4학군을 지정하면서 11번은
4학군과 7학군의 공동 배정으로 장훈고등학교를 지목했다.
우울했다.
학교에 대한 평판이 그닥 좋지는 못해서
재수를 한다하였다가 매만 직살나게 맞았고,
교복이야 중학교때 입었던 그옷을 그대로 입고,
교련복만 추가하고 건빵가방만 새로 장만했으며,
3월4일 첫 등교를 해야 했다.
응답하라 1977 --내가 본 학교는?
학교를 정식으로 입학하기전에 어떻게 가야하고,
어디에 쳐박혀있는지 알아야 했기에
친구와 학교를 가 보았다.
난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걸어서 등하교 하였기에
버스로 통학하는 등하교가 약간은 두렵기도 했으며,
작은키에 버스 손잡이는 드럽게 높았다.
똥골 집을 나오면 버스정류장까지 걸어서 15분정도를 소비했고,
-신길동 버스정류장에서 내려서 학교를 가는 거리였던거 같다.-
당시 방화동 종점에서 후암동을 거쳐서 되돌아오는
128번공항버스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였고, -영등포까지만 가는 강화버스를
타고 영등포역 앞에 내려서 골목길로 가면 영등포여고의 뒤길로 가는 길은
나중에야 알았고, 남학생 못지 않게 여학생들도
대단하다는걸 이골목길을 다니면서 득했다.- 송정국민학교에서 타곤
영등포를 지나 신길동역에서 하차하여,
거꾸로 되집어 걸어 내려가다가
영등포여고는 직진했고,
난 진로소주공장이 있는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소주공장을 지나고,
그 뒤에 골목길로 경계를 둔 장훈 중.고등학교를 보았다.
교문앞에는 허름한 문방구가 3개정도 있었으며,
대신시장을 가는 골목길입구에는 분식집도 하나 있었고,
엄청난 운동장을 바라보며
교문밑에서 반지하로 밴드부가 연습하는 연습실이 있고,
-밴드부는 조회와 학교행사나 교외행사에도 가끔씩 동원되기도하였다.-
6층짜리 건물 두동이 있었고,
앞동은 중학교와 여고애들이
주간,야간으로 교체 되면서 운영하였고,
뒤엔 고등학교 전용으로
1층은 화장실이 대표 되었고,
우린 6층 꼭대기 층에서 수업을 받았는데
5반이였던 1학년땐 종이 울리면 뺑이치게 달려서
화장실찾아 오줌넣고 다시 되돌아가면 종이 올리는
학생들의 대입체력장을 평소에 몸소실천
배양하도록 유도하는 대단한 학교였으며,
그나마 허름하지만 도서관도 있었고,
날나리들이 드나든다는 후문이 있었던
2층짜리 매점도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고,
웃기도 하고, 울고, 멋진기억도, 욕나오는 일도 ........그렇게 학교를 다녔다
우산지키기.ㅋ
토요일도 난 사무실을 나왔다. 한글날이 금요일이여서 샌드위치주말이였지만,
선약이 있기에 사무실을 나와서 한주를 마무리했다.
문자가 들어왔었던 모양이지만, 난 자주보는 형편이 못됐으나 전근이 어머님의부고를
보기도 전에 응준에게서 전화가 온 후에야 확인해봤다.
오후 7시에 이대목동병원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니, 좀 후에 종문에게도 연락이 와서
오늘 일정을 이야기했더니 같이 갈 수 있으니 연락을 달라했다.
그렇게 사무실에서 손님을 만나 일처리를 하고, 12시를 끝으로 사무실 문을 닫고 집으로 향한다.
5시 정도쯤에 종문에게 전화가 온다. "어차피 나올거면 좀 일찍보자"
"그러자 어디로가면되냐" "발산역에서 보자" 그리곤 난 서둘러 옷을입고,
나오니 비가 온다. 다시 들어가 우산을 가지고 나온다.
택시를 탓고, 간간이 오는 비도 내리니 그치고 만다.
이때부턴, 오늘 목표는 "이 우산을 집에까지 무사히 가져가는 것이 오늘 나온 목표다.ㅎ."
가서 만나니 규모가 커졌다며 황당해하는 종문이를 본다만
난감하거나 그렇치는 않다. 세이 모여서 먹는것보다는 여섯이 모이면 그것도 좋치.
그렇게 지영이, 처음보는 준오,용성이,오균이와 함께 호구조사도하고,
대단하다,어쩌다하며, 권커니자커니하며 한잔, 또 한잔한다만 나야 선약이 있으니
중간중간 시계를 보며, 마시는 술을 조절하고 있다.
시간이 얼추지나 자리를 2차로 가는 시점에서 난 자리를 옮긴다.
이때까지만해도 내손에는 우산이 들려있었다.ㅎ.
응준,봉철이를 만나 장례식장을 들어서 조문을 하고,
자리를 잡아서 저녁도 먹고, 술도 한잔한다. 혼자서 말이다.
몰론 이때도 우산은 우산꽃이에 잘 보관하였다.
필구가 합류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밀려드는 조문객들 때문에, 앉을자리를 내주어야 할 때쯤에야
내 손에 우산이 없다는 것을 당연히 몰랐다.
그렇게 다시 발산동에 갔다.
그렇게 또 한잔을 먹는다. 분위기는 묘해서 그렇게 그렇게 헤어졌다.
난 더 노력을 해야하는구나하고, 충분히 그럴수도 있겠구나하고 쿨하게 정리한다.
그리고, 종문과 한잔을 더한다.
그리고, 헤어져서 집에 오는데 그때야 우산이 없다는걸 알았고,
비가 오지도 않는다는 것을 깨우쳤다.
오늘 나오면서 내가 내게 약속했던걸 꼭 지키고 싶었다.
술에 취한 와중에도 이곳에 있겠구나하는 생각에 장례식장을 찾으니 있다.
상주와 또 만나 인사를 나누고 나오는데 뒤통수가 뜨끈하게 영.............
그렇게 우산을 챙겨서 집에왔다.
스스로 대견한 하루였고, 집에 무사히 온 내게 또한 고맙다.
산세베리아에 꽃이 피었습니다. 행운이 가득하십시요.
응답하라1977.--지퍼를 올리다 아~~ㄱ~
분명히 볼일을 보고, 단도고리도 잘 한 연후에 지퍼를 올렸다.
순간 눈물이 핑~~돈다. 악소리도 나온다만, 소리는 못내고,
신음소리만 내고 말았다.
와~~~드럽게 아프드라.%$%^&^*^&*
고등학생때였다.
이때는 노팬티로 학교를 다닌 적도 있었다.
통풍도 잘되고, 걸을 때마다 안에서 노는 고추가
옷깃을 스칠때나, 맨살에 닿는 느낌이 좋아,
아주 가끔은 프리하게 다녔다.
우리는 수업이 끝나면 화장실을 다녀오려면 6층에서
절나게 뛰어서,1층에 있는 화장실에서 일을 치루려면
아주 부지런을 떨어야 했다.
그 와중에 끽연하는 친구들은 문을 닫고 몇명이 한칸에
들어가 피워대는 담배로 인해 연기는 자욱하고,
그 냄새는 화장실을 넘어,
복도까지 넘어갈 즈음에 체육선생님이셨고, 무섭기가,
-배고파 사자가 잡아놓은 사냥감을 훔칠
기세인 하이에나를 본적이 있는가?-
그분은 그랬다.
얄짤없다해서 닉네임도 얄째였던 그 선생님이,
그 냄새를 고이 넘기지 못하고,
서슬이 퍼렇게 화장실에 들어오셨고,
"동작 그만"의 외침과 동시에, 난 그자리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어떻게든 끽연하지 않았다는 티를 내야 했기에,
노팬티라는 사실도 까막게 잊고, 오줌도 끊고,
지퍼를 힘차게 올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곡소리와 함께
거의 기절하다시피했다.
그렇게 핀놈, 안핀놈 구분해서 핀놈들은 옥상으로 끌려가
호되게 죄값을 치르고, 몇날을 반성문도 썼다.
나야 반성문을 쓰진 않았다만, 지퍼 자국난 고추를 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몇일을 생고생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헌데, 오늘도 그일을 치루니 ㅠㅠ. 아프다.것두 많이 아프다.
이사,
---작고 말랐던 그 형들은 어디서든 잘 지내시겠지.---
윙~~~~~~~~~~~~~
창밖으로 고층사다리가 우리집을 지나고 있다.
"여보 오늘도 이사를 하나봐?오는거야? 가는거야?"
"왜 606호 집수리한다고 얼마전에 연판장을 들고 왔었잖아., 오늘 이사를 온다는거 같아."
그렇게 3층인 우리집을 지나는 짐을 바라보니
"그때 이사를 할때 그 형들이 없었으면 난 아무것도 못하고 울고만 있엇을테지"
드르륵~~~,포장마차 문을 열면서
"어우 춥기도하고, 배도 고픈데, 라면도 끓여줄 수 있나요"
"네, 어서 앉으시고 술도 한잔 드릴까?
"네 소주 한병주세요"하고 주인장이 건네는 소주병과 잔하나 그리고, 김치를 받아 놓는다.
한잔을 따라서 입에 대면서 주변을 바라보니,
-결혼하고 장승배기로 이사와서 맞벌이하는 아내가 좀 늦는다고 먼저 들어가라했는데,
이때가 기회다 싶어 직장동료들과 한잔하고, 이차도 가고, 집에오는 길에
너무도 배가 고파서 라면이라고 문에다 써 놓은 그곳을 아무생각없이 걸어들어 갔다.-
벽돌벽으로 길게 늘어서 그곳에 작은 문하나가 있어서 작겠다하고 들어 선
그곳은 의외로 넓었고, 겨울이였고,11시쯤 되어서인지 손님이라곤 나와 포장마차의
한쪽 짧은 면에서 앉은 키가 유난히 작아보이는 두사람이 날 바라보며 한잔하고 있었다.
한분은 하이에나처럼 매우 공격적이고, 말도 막하는 경우가 있었고-영진형님-
나머지 한분은 미어켓처럼 자꾸두리번 거리고, 심한 말을 해도 넌 짖어라 난 상관없다-정우형님- 였다.
눈이 마주치길레 "안녕하세요" 인사를 했고, "저도 한잔 했습니다.ㅎ"
안주로 끓인 라면이 나오곤 "형님들 같이 한잔합시다"하여, 꺽어지는 모서리끝부분에서 다시 모여서,
권커니 자커니하며 한잔을 마셨고, 집에도 잘 온 것 같았다.
눈을 떠보니 낮선곳이였고, 어제 본 두명중에 한명이 내 옆에 같이 누워자고 있다.
깜짝 놀라 일어나니 "동생 잘 잤어" "아~~네"
"어제 자꾸 한잔 더하자해서 그대로 보내면 어디에 쓰러질것 같고, 동상이라도 걸릴것 같아서"
살짝 꼬득여서 포장마차에서 가까운 우리집으로 내가 데려 왔지"
세수도 못하고 서둘러 집에 와보니 아내는 이미 출근했는지 없고, 난 간단히 닦고,
옷을 갈아 입고, 출근해서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고, 안 믿으려하는 아내에게
사실임을 강조하고, 신세를 졌으니 그분들 한번 뫼시고 집에 갈께" 한다.
그후로 가끔 그 포장마차에가면 주인장이 그형을 불러주기도 하고,
그곳에서 술을 먹고 앉아 있기도 했다.
두분은 모두 키가 작았다 나도 작았지만 160은 될까싶은 만큼 작고 그리고 깡마르기까지해서
가냘프기도 했고, 술이라도 같이 마실랏치면 앉아 있지도 못할지도 몰라하며
서그프게 술을 먹기도 했으며, 마흔이 가까운 두분은 고교동창이며 결혼도 못했고,
만나기만하며 그렇게 서로 못잡아 먹어서 안달인데도 늘 두분이 함께 다녔다.
나 또한 낯선 곳에서 아는 이 하나없이 아내와 신혼살림중이여서 그 두분과 꽤나 친하게 지냈고,
여행사에 다니는 내게 유난스럽게 관심이 많았다.
"신혼집은 전세를 월세로 전환할테니 월세 안할거며 빨리 다른집을 알아보라"는
주인의 통보에 가진 돈과 옮길 집을 봤지만 여의치가 않았고, 더군다나 아내가 산달이
가까워올수록 혼자 애만 태우다, 결국 부모님이 사시는 방화동 식당 근처의 반지하방으로 정하고,
아내는 산기가 있어 대구처가댁으로 내려가고, 혼자서 이사를 준비해서 가야 했다.
아내는 대구를 가고, 곧, 공주님을 낳았다고 연락이 왔고, 난 넘 기뻣고,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전화로 알리고,
"나리야, 이번주 이사가는데, 이사짐 좀 같이 나르자" "아 그날 선약이 있어"
"빵빵아, 창진아, 범선아, 봇대야등등 몇에게 전화를 해본다만 전부 약속이 있단다.
친구들에게 집단으로 거절을 들으니 내가 그렇게 한심하고, 그래도 내일 이사를 가야하고,
혼자서 치뤄야 한다는게 너무도 서글퍼서 방에서 엉엉 울고 말았다.
그런데 흑기사처럼 나타나 웃으며 "용섭이 동생 뭐해"하는데 반갑기도하지만
서러움이 더해서 형들을 보자마자 친구들 욕을 하며 소리내서 엉엉 울었다.
정우형은 나가자며 우리가 맨처음 만난 그 포차로 끌고가"술한잔하고 이사는 걱정하지마" 한다.
"왜요, 형이 도와줄거야" ,
"그럼 동생 이사간다는데 나몰라라 할 수 없고 영진이하고 셋이 하면 돼" 합니다.
장롱도 두짝을 옮겨야 하고, 살림이 없으니 걱정은 마라 했지만 의외로 많았고, 더욱 걱정은
장승배기의 산위집이여서 그 무거운걸 들고, 매재가 트럭을 세워둔 곳까지는 언덕을 내려와야해서
심히 걱정이된다만 달리 방법이 없으니 2인 1조로 장롱부터 옮기는데 한시간이 족히 지났다.
무겁기도 했지만 가파른 언덕이고, 평소 퇴근 할 때도 걸어 올라가면 숨이 찼다,
형들이 힘을 제대로 못줘서 가다쉬기를 반복하고,거침없이 육두문자가 오고갔음은 말안해도 뻔했다.ㅎ.
"신발끈, 거길 제대로 들어야지 힘만 들잔아 쨔샤."
"야 나두 힘쓰고 있거든 이 신발끈아"
그래도, 그 약골 두 형님의 도움으로 우린 집을 비워줄 수 있었고, 매제의 도움으로
앞에 영진이 형이 타고, 나와 정우형은 트럭 뒤에 타고 방화동으로 향했다.
방화동에 도착하니 어제 못온다는 친구들이 미안하다며 나와줘서 힘들이지 않고,
이사짐을 무사히 나를 수 있었다. 수고해준 매제와 정우,영진형에게 저녁이나 함께 하자했더니
아니라고 극구 사양하는 바람에 목욕이나하라고 안받게다는걸 억지로 주머니에 쑤셔넣다시피
수고비를 드렸다.
그렇게 이사 간 반지하방은 비가 많이 와 하수구로 빗물이 역류해서 장판에서 둥둥 떠다니는
체험을 두번하고, 아내의 노력으로 대림동으로 아파트가 당첨되어서 이듬해에 이사했고,
큰아이의 유치원서부터 대학을 마칠때까지 함께 하고 있다.
"따르릉~~~~~~ 네, #허브투어 박용섭입니다"
"잉~ 동생 나 정우야, 기억하지"
"네 형님 기억하죠, 어떻게 잘지내셨지요"
"그럼, 몇시에 퇴근해"
"6시요, 어디신데요"
"사무실 근처야, 기다릴테니 퇴근하면서 보자구"
"네 형님 혼자세요,"
"아냐 ,같이 있어.ㅎㅎ"
그렇게 간만에 만나 두 형님은 한국에서는 할일이 없다고, 미국을 가고싶은데 비자가 어렵다며,
캐나다를 간다고 여권을 만드는 방법과 캐나다를 입국하는 절차를 알려 달라해서
자세히 가르켜 주고, 항공권도 발권해서 김포공항에서 출국도 도와 주었었다.
잊고 2년인가를 지나고서, 또, 뜬금없이 전화가 온다.
"동생 나 정우형인데 잘지내지, 만날 수 있어"
"네, 형님 어디세요."하고 만나서 또 두분과 흐르는 세월만큼 더 나이가 들어뵈도
그냥 형은 내가 할 수 있는한 도와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 후에 호주도 다녀오셨고, 다시 캐나다를 다녀오시려 했으나 생각대로
뜻을 이루순 없어서 "회사 택시를 해"하고 연락이 오곤 이내 소식도 없다.
이사를 온다는 606호의 이사짐을 바라보니 그 작은 정우,영진형이 보고프다.
정말 고생 많이하셨고, 너무도 고마웠던 두분께 수고 많이 하셨고, 늘 감사합니다란 이야기도 못했다.
두분 아직도 서로만 보면 아웅다웅 다투시는지 그 모습 다시 뵙고 싶네요.
두분 다투시는 모습은 서로를 충분히 위로하면서 서로를 향해
"넌 나 없으면 안돼"하는 끔찍한 우정이였습니다. 넘 보기 부럽고, 싫기도 했습니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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