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1_韓山 李氏

[경술국치의 실무자 이완용의 비서 국초 이인직]

忍齋 黃薔 李相遠 2017. 8. 31.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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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초(菊初) 이인직(李人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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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족역사에 가정(稼亭) 이곡(李穀)과 목은(牧隱) 이색(李穡)을 필두로 수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한 충절의 가문 한산이씨에게도 수치스러운 친일 매국의 중심에 있던 분이 있습니다. 바로 학창시절 국어 시간에 최초의 신소설 '혈의 누 (血の淚:피눈물)' 작가로 배웠던 국초(菊初) 이인직(李人稙)이 바로 그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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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7월 22일부터 '만세보'에 연재되던 '혈의 누'는

"1894년 청일전쟁이 평양 일대를 휩쓸었을 때, 7살 난 여주인공 옥련은 피난길에서 부모를 잃고 부상을 당하지만, 일본군에 의해 구출되어 이노우에 군의관의 도움으로 일본에 건너가 소학교를 다니게 된다"

라는 일본의 점령을 다독거리는 친일적인 내용입니다.

신소설 '혈의 누 (血の淚:피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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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혈의 누' 덕분에 이인직이 태어난 경기도 이천 설봉산에 있는 도자기 공원에는 이인직을 기리는 문학비가 서 있고 우리는 이인직을 문학인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인직은 매국적 사대 당파 노론의 영수인 이완용의 비서로 1910년 8월 4일 밤 11시에 통감부 고마츠(小松綠) 외사국장과 함께 한일병탄의 치욕스러운 역사를 만든 실무자였습니다.

국초 이인직 문학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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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직은 1862년 음력 7월 27일 음죽(陰竹, 현재의 이천(利川))에서 둘째로 태어나 5세에 아버지(윤기(胤耆))를 여의고 큰아버지 은기(殷耆)의 양자가 되었으나 11세에 양어머니(남원윤씨)를 18세에는 친어머니(전주이씨)를 여의고 일찍 동래 정씨와 혼인하여 슬하에 자녀까지 두고 가난하고 불행하게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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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900년 2월 서른여덟의 나이에 처자식을 버리고 일본 유학길에 올라 그해 9월 도쿄정치학교에 입학하고 1901년 7월에 졸업하고 1903년 2월 조선의 유학생 소환령에 불응하고 미야코(都) 신문사의 견습생으로 지내며 '조선루'라는 한국식 요정을 경영하던 일본 여자 우에노(上野)와 혼인을 하고 종교도 천리교로 개종을 합니다. 바로 도쿄정치학교시절 이인직의 '열국(列國)의 정치제도와 국제법 강의' 선생이 1906년부터 통감부 외사국장을 지내는 고마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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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는 일본 유학생 이인직에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일본육군 통역관으로 조선 땅에 돌아오게 했습니다. 1906년 2월에는 일진회 기관지 '국민신보'의 주필로 6월에는 '혈의 누'를 연재한 '만세보'의 주필로 조선 내 친일파 1세대의 선봉이 되었습니다. 일진회의 송병준과 이완용 내각은 서로 한일병탄의 주도자가 되고자 경쟁하였습니다.

좌로부터 이완용, 임선준, 이병무, 송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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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이인직은 이완용의 후원으로 이완용 친일내각 기관지 '대한신문' 사장에 취임하며 이완용의 비서를 겸하게 됩니다. 그리고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완성하여 이완용이가 조선을 일본에 팔아넘기는 걸 결정적으로 돕습니다. 경술국치 이후 1911년 이인직은 연봉 900원인 '경학원(經學院, 성균관을 격하하여 만든 기관) 사성(司成)'이라는 말단의 직위를 얻습니다. 이완용의 연봉이 2000원이고 동창 조중응이 1600원이었으니 친일의 공에 비해 그 자리가 낮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이인직이 실제로 경술국치를 그의 스승 고마츠와 만들어 놓고는 한직으로 떠돈 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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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 고마츠는 '조선병합의 이면'이라는 책에서 이완용의 밀사 이인직과 있었던 자세한 이야기를 수록하여 친일파들에게 돌아갈 나라 팔아먹은 값과 작위들을 흥정하는 내용을 전했습니다. 이인직의 도쿄정치학교 동기인 조중응(趙重應)은 고마츠와의 사제간의 인연만으로 애제자 이인직을 앞세워 법부대신.농상공부대신에 자작까지 받아 호의호식한 매국칠적(賣國七賊)에 올랐으니 이인직의 가다만 친일의 욕망은 신기할 뿐입니다.

조중응(趙重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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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내용에서 나타나듯 이인직이 원했다면 이완용을 넘어서는 친일의 괴수로 부와 명예를 손아귀에 움켜 잡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인직은 스승 고마츠의 유혹 같은 제의를 마다하고 모든 이권을 이완용이나 동기 조중응이에게 넘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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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11월 21일 '경학원 사성'의 한직에 머물며 빈곤하게 살던 이인직은 신경통으로 총독부병원에 입원하여 4일 만에 조선인으로 태어나 일본인으로 54세의 길지 않은 일생을 마쳤습니다. 일제도 조선을 넘겨준 이인직의 노고에 비해 준 것이 적었다고 생각했는지 죽기 하루 전에 연봉을 100원 올려 1000원으로 특별인상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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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신문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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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직 씨의 장의 - 천리교식의 장의 - 경학원 사성 이인직 씨의 장의는 본월 28일에 고양군 용강면 아현화장장에서 거행하였는데, 장의의 제반의식은 동씨의 평일 신앙하던 바 천리교식으로 행하였는데, 당일 참회한 회원은 경학원 부제학 박제빈남(朴齊斌男) 이하 경학원 직원 일동과 천리교 신도 다수와 이완용백(伯), 조중응자(子), 유성준 제씨와 총독부의 다수한 관리가 호종하였으며, 씨의 평일 공로를 위로하기 위하야 당국에서는 상여금이라는 명목으로 450원의 금액을 하부하였고, 대제학 자작 김윤식 씨는 부제학 자작 이용직(李容稙) 씨를 대리로 명하여 일반직원을 대동하고 제권을 행하였더라.(『매일신보』, 1916.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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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측을 하자면 이인직이 한일병탄을 통해 일본에 기대했던 것은 그의 '혈의 누'의 내용처럼 조선을 가난과 억압의 굴래에서 해방해주는 게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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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이 조선을 일본에 팔아먹도록 거간꾼 노릇을 단단히 한 국초 이인직과 한산이문의 피를 나눈 자로서 한산이문을 대신하여 엎드려 용서를 청하고 국초 이인직의 매국 행위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대대손손 이 내용을 뼛속에 세기 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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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1. [임기상의 역사산책 91]매국노를 선각자로 가르친 중·고교 교과서 (http://www.nocutnews.co.kr/news/4096428)
2. 이인직 [李人稙, 1862.7.27~1916.11.1] 경기 이천(利川) (http://blog.daum.net/enature/15853037)
3. 조선인으로 태어나 일본인으로 죽은 이인직 (http://www.vop.co.kr/A0000002803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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