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1_韓山 李氏

[한강 밤섬 -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여율리]

忍齋 黃薔 李相遠 2017. 9. 13.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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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부 율도 - 1968년이전의 밤섬, 80여가구 600여명의 선.마.피.판씨들이 모여 살았다.


고종과 함께 운명을 같이한 내 고조부 성우 이명직 선생의 흔적을 찾아가다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여율리"에서 가죽 용품을 공급하던 갖바치 피서방과 육고기를 공급하던 백정 마서방을 위해 여율리 전 4필지를 소작 없이 경작하도록 했다는 기록을 보았다. 오랫동안 "고양군 용강면 여율리"를 지금의 고양 땅에서 뒤졌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한성부 율도 - 1968년이전의 밤섬, 80여가구 600여명의 선.마.피.판씨들이 모요 살았다.


그런데 이게 조선 시대 '한성부 율도(밤섬)'로 일제가 여의도와 함께 고양군 용강면에 편입시킨 여율리라는 것이다. 밤섬은 고려 시대에는 귀양지로 사용했고 조선 시대에는 가축도살과 가죽 용품을 만들던 선 씨, 마 씨, 피 씨, 판 씨들이 모여 살아 1968년 2월 10일 여의도 개발을 위한 제방 축조에 필요한 잡석 채취 목적으로 밤섬 중심부를 폭파할 때까지 80여 가구 600여 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서울시는 밤섬 면적이 1966년 미군이 최초로 측정했던 면적 4만5684㎡에서 매년 평균 4400㎡씩 증가해 현재 27만9531㎡(외곽길이 2895m)인 것으로 조사됐다고 20일 밝혔다. 이는 처음 측정치의 6배이자 서울광장의 21배에 해당하는 면적이다.


서울시가 2013년 항공측량을 통해 밤섬의 크기를 잰 결과, 섬의 면적이 27만9531㎡(외곽 길이 2895m)에 이르렀는데 이는 1966년 미군이 찍은 항공사진을 토대로 산출한 면적에 비해 6배가 넓어진 것이다. 1968년 한강 개발계획을 추진하던 박정희 정부는 한강 흐름이 원활해지도록 강폭을 넓히고 여의도를 개발하기 위해 밤섬 주민을 마포구 와우산 기슭으로 이주시키고, 밤섬을 폭파했고, 그곳에서 채취된 11만4000㎡의 돌과 자갈은 여의도 주위 제방 도로(윤중제)를 닦는 데 쓰였다.


서울시는 밤섬 면적이 1966년 미군이 최초로 측정했던 면적 4만5684㎡에서 매년 평균 4400㎡씩 증가해 현재 27만9531㎡(외곽길이 2895m)인 것으로 조사됐다고 20일 밝혔다. 이는 처음 측정치의 6배이자 서울광장의 21배에 해당하는 면적이다.


그런데 자연의 복원력이 밤섬을 되살렸다. 퇴적작용으로 토사가 쌓이고 나무가 자라면서 숲이 우거지기 시작했다. 밤섬은 위 밤섬과 아래 밤섬으로 나뉘는데, 위 밤섬은 영등포구가, 아래 밤섬은 마포구가 관리하고 있다. 밤섬의 ‘성장’은 대부분 아래 밤섬이 커진 덕분이다.


1968년 제방완공 직후의 여의도. 서울신문

1968년 5월 29일 윤중제 완료. 밤섬의 자갈과 모래를 퍼다가 쌓은 윤중제


1999년 밤섬은 '생태계보전지역' 지정되어 공식 무인도가 되었고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해 왔다. 1968년 이전까지 고기잡이와 조선, 뽕나무·약초(감초) 재배, 가축도살, 가죽 용품 제작, 염소 방목 등을 하며 살던 80여 세대의 주민들은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근처로 이주하여 밤섬 마을을 조성하게 되었고, 2년에 한 번씩 서울시에 허가를 받고 밤섬에 와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여의도 제방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부부와 김현옥 서울시장



공교롭게도 2년 뒤 1970년 4월 밤섬 마을 앞 와우 아파트가 와르르 무너져 3명이 죽고 39명이 다쳤다. 그 일로 입체 도시를 목표로 여의도를 개발 중이던 박정희 정권은 개발을 백지화하기에 이른다. 대신 비상시 탈출구 확보를 위한 위장 비행장 5.16 광장이 조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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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누워있는 소의 형상이라고 하는 와우산이 한강을 굽어보고 있다. 밤섬주민은 이곳 부근으로 이주하여 밤섬마을 조성했다.​ 그리고 2년뒤 밤섬마을 건너편 와우 아파트가 와르르 무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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