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2_한국역사

고문과 조작의 뿌리는 이승만과 친일파 치안간부들

忍齋 黃薔 李相遠 2017. 10. 27.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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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고문과 조작의 뿌리(6) http://chogabje.com/board/view.asp?C_IDX=10639&C_CC=AD


일선을 피하고 권부 주변만 맴돌아

여순반란사건 이후 육군내의 좌익세력을 제거하는 대숙군작업이 시작되었다. 육군 정보국에 근무하던 김창룡 소령은 이 작업의 실무 책임자로서 일했다. 『육군전사』는 숙군작업으로 공산세력이 군내에서 일소됐고, 이것이 6.25때 나라를 구했다고 높게 평가하면서도, 억울한 희생자가 많았다고 비판하고 있다. 6.25가 나자 김창룡은 1950년 8월 1일 부산 CIC 대장으로 임명됐다가 서울 수복 뒤에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부역자와 서울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조사를 지휘했다. 그러다가 평양지구특무대장으로 발령받았으나 1.4후퇴 바람에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합동수사본부장 일을 계속했다.

계엄하에서 합동수사본부장은 사실상 수사권을 독점한 자리로서 이승만과의 직통보고 루트를 늘 갖고 있었다. 독재자와의 이 직통선이야말로 권력이 나오는 원천이었던 것이다. 김창룡은 위험한 전선보다는 후방에서 항상 독재자의 측근에 머물러 있으면서 이 직통선을 확보했고, 그래서 권력행사를 무자비하게 할 수 있었다. 김창룡과 같이 숙군작업의 실무책임자였고, 그를 이해해주는 사람이기도 했던 김안일은 김창룡을 이렇게 평했다. '반공의식이 투철했고 일에 대한 집념은 무서울 정도였다. 그러나 두 가지 단점이 있었다. 공(功) 앞에선 전우가 없었고, 이해가 상반되는 사람을 용공으로 모는 버릇이 있었다.'

고등계 형사 출신들의 작품―'부산정치파동'

1952년 5월에서 7월에 걸친 부산정치파동은 일제 헌병 및 경찰 출신들이 벌인 정치공작의 종합판이었다. 경찰.헌병.특무대의 중추부를 장악하고 있던 이들은 이승만의 연임을 보장하는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의 국회통과'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다수파인 야당을 여러 방면에서 공략, 함락시켰다. 합동수사본부장 김창룡은 대구형무소의 중형수들을 빼내 공비로 위장시켜 부산 근교의 금정산에 나타나도록 쇼를 벌이고 이들을 사살한 뒤, 이를 구실로 5월 26일 0시를 기해 부산지역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게 했다는 것이, 당시 대구형무소에서 이들 중형수와 함께 있었던 서민호의 얘기였다. 민군 의무장교 출신 원용덕이 지휘하는 헌병대는 국회의원들이 탄 버스를 크레인으로 끌고 가 국제공산당 음모사건과 연루시켜 조사를 했다. 국제구락부에서 반정부 집회를 가진 야당인사들을 어용 테러집단 백골단으로 하여금 덮치게 해놓고는 이 사건을 야당내 싸움으로 몰아 오히려 피해자들을 잡아갔다. 서북청년단이 중심이 된 백골단을 동원, 야당을 위협하고, 이승만 저격미수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야당의 사주로 몰려고 했다. 경찰을 풀어서는 잠적한 야당의원들을 잡아와서 협박과 회유로써 발췌개헌안에 찬표를 던지도록 했다. 이때의 총리는 친일경찰 출신의 대부 장택상이었고, 치안국장은 일제 때 서장을 지냈고 잠시 헌병장교로 근무하기도 했던 윤우경이었다. 이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것은 주로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들이었다.

당시 경남도경국장 박병배(朴炳培)에 따르면 부산정치파동은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인 치안국 정보수사과장 박근용(朴根容)이 조정했고 경찰은 내부, 헌병은 바깥 일을 맡았다는 것이다(『임시수도천일』). 조작된 국제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 끌려간 어느 의원은 중국에서 활약한 독립투사였다. 그는 조사관에게 '자네 상관은 지금 경찰간부라면서 거들먹거리는 박근용.최난수.홍택희가 아닌가.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알아? 날 잡으로 눈이 벌겋게 쫓아다닌 고등계형사 출신들이야!' 라고 고함을 쳤다고 한다(『임시수도천일』) 정치파동의 실질적 주역은 이런 내부공작을 맡은 경찰이었다. 이 정치공작을 지휘한 것은 윤우경 치안국장, 박근용 치안국 정보과장, 홍택희.최난수 등 산전수전 다 겪은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국회의원을 찾아내면 국제공산당 사건과의 연루나 정치자금 출처 등을 조사하여 겁을 주었고, 그것을 이용하여 개헌 찬성 쪽으로 돌려놓았다. 계엄하에서 물리력을 제공한 헌병사령부에도 반민특위를 피해 입대했던 노덕술 등 친일경찰 출신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들도 경찰의 보조역으로 국회의원들의 체포. 협박. 회유공작에 동원되었따.

李承晩 저격미수는 조작인가?

윤우경이 홍순봉에 이어 치안국장에 임명된 것은 1952년 5월 25일이었고, 그 다음날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부산정치파동이 시작되었다. 윤씨는 이런 정치판에는 적합한 사람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관계한 사건이 대통령 저격미수 사건이다. 부산정치파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1952년 6월 25일에 임시수도 부산의 충무동 광장에서 거행된 6.25 두 돌 기념식에서 이승만 대통령 저격해프닝이 있었다. 의열단원 출신인 유시태(柳時泰, 당시 62세)가 이승만의 등 뒤 3미터까지 다가가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이 되고 그는 현장에서 체포됐다. 경찰과 특무대는 합동으로 수사를 펴 유를 조종한 혐의로 국회의원 김시현, 민국당원 서상일 등 10여 명을 구속했다. 당시는 민국당을 중심한 야당의원들은 5월 26일에 계엄령이 내리자 헌병과 경찰의 눈을 피해 지하로 잠적, 내각책임제 개헌안의 통과를 모의하고 있을 때였다.

민국당에선 이 사건이 그런 시기를 포착한 수사기관이 민국당을 때려 잡기 위해 김시현과 짜고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에는 의문점이 많았다. 법정에서 김시현은 '서상일로부터 200만 원을 받아 정용환(전직형사)으로부터 모젤 3호 권총 한 자루와 탄환 4발을 구입했다. 탄환 2발은 불발이었고 권총의 탄창도 좋지 않았다. 나는 대통령을 죽일 의사는 없었고 이런 사건을 일으킴으로써 대통령의 반성을 촉구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불발탄임을 알고 구입하여 탄환을 물수건에 싸서 사흘 동안이나 두어 습하게 한 것이다. 나는 몸이 쇠약하여 유시태를 시켰다'고 진술, 세상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경찰은 사건 두 달 전에 김시현이 모의를 하고 다닌다는 결정적인 정보를 입수하고도 구속은커녕 묘한 대접을 했다고 한다. 당시 유시태의 변호인이었던 장후영 변호사(전 대하변호사회 회장)에 따르면 경찰은 이 정보를 입수하고는 4월 7일에 경무대에서 사찰관계자 회의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 회의에서 결정된 것은 김의 일거일동을 예의주시하고 당일식장의 경계를 철저히 한다는 것뿐이었다고 한다. 장후영은 이렇게 말했다.

이승만 박사의 마음에 안 들면 국회의원들도 국제공산당이다, 뭐다해서 올가미를 씌워 잡아가두던 시절인데 거사가담 제의를 받았던 최양옥이 제보를 했는데도 당일(대통령과 범인이) 식장에까지 나올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다. 전쟁중이라 권총은 흔해빠져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는데도 하필 쓰지도 못할 권총이라니. 더구나 총은 녹슬고 탄환은 만든 지 30년도 넘은 것이라 군 기관에서도 '발사불능'이란 감정을 했었다. 나는 저격이 연극이란 확신을 갖고 있다. 김시현은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지만 타락한 것 같았다.(부산일보사, 『임시수도천일』, 상권, pp. 408~14)


치안국장 윤우경은 사건이 나기 며칠 전에도 김시현을 불러 비밀요담을 했고, 치안국 소속의 지프차를 김의원에게 빌려주어, 민국당 의원들을 이승만 편으로 포섭한다는 명목으로 이 지프를 타고 야당의원 집을 찾아 다니게 했었다고 한다(『임시수도천일』). 재판에서 김시현과 유시태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가 4.19 뒤 풀려났다. 윤우경은 1986년 9월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김의원을 불러, 이박사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데 사실입니까 하고 물었지요. 김의원은 술 취한 척하면서 딱 잡아떼더군요. 나는 충격을 주면 암살계획을 취소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의원을 돌려보낸 뒤 김장흥 경무대경찰서장에게 전화를 걸어 6.25 기념식에 각하가 나오시지 않도록 하라고 했는데 나오시고 말았습니다. 이박사가 임시가설 연단 위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데 웬 영감이 국회의원석에서 일어서 이박사 등뒤로 다가가 권총을 겨누더니 '찰칵' 소리가 나더군요. 불발이 된 거지요. 이 순간 제가 덮쳐서 유시태를 쓰러뜨렸어요. 이박사가 뒤돌아보시더니, 

'그 때리지 말고 조사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발췌개헌안이 통과된 뒤 제 2대 대통령 선거에서 장택상 총리는 경찰조직을 지휘, 이범석(李範奭) 부통령후보를 떨어뜨리고 함태영 후보를 당선시키도록 했다. 이로써 족청세력의 거세에 성공한 장택상도 그 뒤 원내 족청세력의 반격을 받고 실각한다.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사회면적인 사건들을 조작하는 수법은 일제의 통치수단이었으며, 반민특위를 와해시키는 과정에서 실험되었고, 부산정치파동에서는 더욱 자신있게 실천되었고, 그 뒤로도 답습된 터였다.
독리투사들을 공양물로 바친 金昌龍
친일경찰과 헌병 출신들은 늘 불안했다. 영리하기 짝이 없는 그들은 아래로부터 배척받고 있는 자신들의 신세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오직 위를 보고 살아야 하며, 권력자의 신임만이 생존의 지름길이란 사실도 훤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신임을 받으려면 기술자로서의 필요성을 인정받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없는 사건도 만들고, 무고한 사람도 공산당으로 몰아야 했으며, 그러자니 고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민족반역적인 공식을 가장 철저하게 이 사회의 양심세력과 독립운동가들을 대상으로 적용한 것은 김창룡이었다. 용기는 있으되 순진하고, 열정적이되 치밀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반골들은 김창룡 같은 간교한 친일 주구들에게는 둘도 없는 공양물이었다. 김창룡 특무부대장의 측근에서 그의 머리와 손발이 되어준 이들(영관급. 지구대장급. 처장급. 고급문관급)은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관동군. 만주군 헌병 출신자, 조선군 헌병 출신자, 그리고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들이었다. 그는 관동군헌병학교 동기생들을 많이 썼다. 이상무(뒤에 공화당 국회의원), 김인측, 김광진, 최기원, 박노승, 이영호, 곽흥진 같은 장교들이 그의 동기생으로서 관동군 및 만군에서 헌병으로 있었던 이들이다. 관동군 헌병의 선배로서는 최일엽, 공병술, 공병익, 이옥봉, 이대섭 등을 측근에서 부하로 부렸다. 일제 경찰 출신으로는 도진희, 고영섭(청진서 고등계 출신), 장복성, 조병진(고등계 출신), 최석범(만주국 경찰), 계종운(고등계 출신), 최창화 등을 중용했다. 조선군 헌병 출신으로는 노엽, 염희춘, 허태영, 장보형 등이 있었다.
조선군 헌병들은 관동군이나 만주군 헌병들을 멸시하는 풍조가 있었다. 조선군 헌병 출신과 관동군 헌병 출신자들 사이엔 반목 관계가 있어 김창룡은 조선군 헌병 출신들을 중용하지 않았다. 허태영과 김창룡 반목의 심리적 배경에는 출신성분의 차이에서 오는 감정도 깔려 있었다고 한다. 특무대에서 특히 부정적 기능을 많이 한 것은 취조를 전문으로 하는 고등계 출신자들이었다. 이들과 함께 특무대에서 일했던 김모 당시 수사관은 '고등계 출신자들은 조작이나 고문에 대해선 양심이 마비된 것 같았다. 고문을 통해서 피의자와 한판 승부를 하여 자백이란 걸 받아내는 데 희열을 느끼는 듯했다'고 회고했다. 고등계 출신자들은 거의가 학력이 낮고 밑에서부터 승진하느라고 일본인 경찰간부들의 눈치를 보는 데는 도가 트인 이들이었다. 격동기를 통해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생존의 요령을 터득했고, 조작의 기술을 단련한 이들이었다. 이 김창룡의 죄상은 1956년 1월 31일 그가 암살당함으로써 백일하에 드러났다. 두 부하를 시켜 김을 죽인 이는 허태영(許泰榮)이었다.
그는 일제때 평양공립농업학교를 졸업, 일본군 헌병보조원으로 입대했었다. 평양, 수풍 등의 헌병파견대에서 복무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곧 월남하여 1948년 12월에 육사 제 8기 특별반에 입교, 졸업과 동시 소위로 임관한 뒤 육군정보국 제 3과에 배속됐다. 그는 육군특무대 창설과 동시에 이 부대에 전입, 1954년 6월 대령으로 진급했다. 그해 10월 서울지구병사구 사령관으로 임명됐으나 한해 뒤 해임됐다. 김창룡의 암살을 조종하고 있을 때는 무보직 상태였다. 일제헌병 출신이긴 했지만 허태영은 김창룡과 같은 질의 인간은 아니었고, 정의감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다. 노엽은 '허태영은 보통학교 때 그림을 그리라고 하니까 태극기를 그릴 만큼 반일의식이 뿌리깊었고 중학교 때는 스트라이크도 주동했다. 가족들이 그를 피신시킨다면서 일본헌병으로 집어넣었던 것이다'고 했다.
허태영이 본 김창룡
허태영이 군교도소 안에서 쓴 「김창룡저격 거사 동기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김창룡은 일제시대 북만주에서 악질 일본헌병으로 일하면서 수많은 애국독립투사를 투옥했으며, 중지(中支)방면의 연합국포로수용소의 감시원으로 일할 때는 포로를 확대한 친일전범이다. 그는 월남한 후 공산당을 쫓는 군 정보기관에서 근무하게 된 것을 기화로 하여 개인적 영달을 위해 혈안이 되어 행동하였다. 그는 옥석을 가리지 않고 무분별하게 숙청을 되풀이하여 공산당원 1에 대해서 양민 10의 비율로 무고한 사람들을 괴롭혔다. 김창룡이 취급한 사건 전부가 허위날조됐거나 침소봉대된 것이다. 그 대표적 사건으로서는 관(棺) 사건, 조선방직 사건, 조병창 화재 사건, 김종평(金宗平) 장군 사건, 김도영(金道榮) 대령 사건, 삼각산 사건 등 20여 건을 꼽을 수 있다. 한편 뒤켠에선 살인, 약탈, 협박, 공갈, 항명, 군수품 부정처분, 밀수 등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20억 원의 재산을 끌어모았다. 이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나서부터는 그 본래의 임무인 군내 방첩업무를 등한시하고 정계.법조계를 상대로 종횡무진으로 활동, 정치적 혼란을 일층 심화시켰다. 군내에서는 참모총장, 국방장관 등 고급장교들을 모함하고, 위협.이간.항명.월권을 일삼아 안하무인으로 군통수권과 지휘권을 유린하였다.……
관사건
1951년 합동수사본부장이던 김창룡은 지리산의 공비가 부산에서 무기를 구입, 장례식을 가장하여 지리산으로 운반하려 했다는 사건을 적발했다고 대통령에게 허위보고했다.
삼각산 사건
9.28수복 후 인민군 패잔병으로부터 빼앗은 무기로써 삼각산 뒤편의 모 부락을 자치하고 있던 주민들을 공산분자라고 날조, 이들이 서울시 습격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꾸며 불법으로 살상하고 대통령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조병창 사건
1952년에 부산 조병창에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방화인지 실화인지 판단할 증거가 없었다. 김창룡은 한 지방민을 매수하여 대남간첩으로 가장시켜 이 간첩이 조병창 직원에게 지령하여 방화한 것이라고 날조했다. 대남간첩 역을 한 사람은 그 뒤 인천특무대에 문관으로 채용되었다.
김종평 장군 사건
1952년, 특무부대장 당시 반목관게에 있던 김종평(金宗平) 정보국장을 거세하기 위하여 만든 사건이다. 김종평 장군이 이형근(李亨根) 대장(제 1군 단장), 이용문(李龍文) 장군(육본 작전국장), 심언봉(沈彦俸) 장군(헌병사령관) 및 민국당 등과 공모하여 이대통령이 동해제 1군단을 방문할 때 암살하고 조봉암 국회부의장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기로 했다고 조작했다. 날조의 규모가 너무 커서 상부에서 받아드려지지 않자 김종평 장군만 투옥시켰다.
이밖에도 군사법정의 심판관과 검찰관을 협박, 또는 매수하여 특무대가 취급한 사건 전부를 김창룡의 뜻대로 결심(決審)시키고, 모든 날조사실을 은폐시킴으로써 군법회의의 신성성을 모독했다.
김창룡의 부하들이 나중에 김의 조작극이라고 증언한 사례는 숱하다. 김도영 대령의 쿠데타음모 사건, 그가 죽기 석 달 전에 발표한 국가원수 암살모의 사건도 완전한 조작이란 것이다. 김도영 대령 쿠데타음모 사건에 대하여 당시 특무처장 이진용은 이렇게 말했다. '김창룡 부대장이 서울로 올라가 대통령에게 이 사건에 관해 보고한 직후 대구에 있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서둘러 김대령 등 3명을 잡아넣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했다. 그 뒤 김대령을 내가 직접 신문했다. 혐의는 민국당의 신익희를 추대하여 정권을 탈취할 목적으로 쿠데타를 계획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무지 그런 사실이 확인되지 않고, 사건이 조작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김창룡에게 이 정보를 제공한 신모를 한번 조사해봐야겠다고 했다. 김부대장은 화를 벌컥 내면서, '당신은 왜 피의자를 옹호하고 제보자를 의심하느냐'고 했다. 내가 완강히 사건이 애매하다고 버티니까 김창룡은, '나도 알겠는데 이미 대통령께 보고한 일이니 어떻게 하느냐, 당신은 지금 일이 많으니 이 사건에서 손을 떼라'고 했다. 장모 처장이 이 사건을 만들어 기소했다. 워낙 허구가 많아 재판과정에서 뒤집힐 것 같으니까 김대령의 다른 비행을 조사하여 횡령죄를 덧붙여 기소했다. 김은 재판부에 압력을 넣었고, 재판정에 직접 나가서 방청,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재판부도 반란음모 부분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하는 양식을 보였다.'
1955년 10월 육군특무대는 중앙청에서 열린 개천절 기념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죽이려고 했던 김재호(金載浩) 등 9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이들의 사주를 받아 수류탄을 호주머니에 넣고 식장에 들어갔다가 투척을 포기했다는 청년 이종태(李鍾泰)는 기소도 되지 않고, 증인으로도 나오지 않으며, 피의자 신문조서를 받은 적도 없었다. 김재호는 특무대에서 고문을 받을 때 그전에 자기를 찾아와 반이승만 발언을 하면서 부추기던 이종태가 군복을 입고 들어서는 것을 보고서야, 김창룡이 던진 미끼를 물었음을 깨닫게 됐다는 것이다. '이종태는 우리를 찾아와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이박사를 제거해야 한다고 열을 올리더니 모든 것을 자기한테 맡겨달라고 했어요. 우리는 그저 그의 주장이 옳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자가 김창룡의 부하로서 우리를 유인하는 연극을 했더군요. 우리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독립투사들을 잡아 죽이던 관동군 헌병 출신한테, 해방된 조국에서 또 고문을 당하게 되니 그것이 견딜 수 없이 분했오.' (金敎植, 「실록 金昌龍」, 『월간조선』 1982년 10월호에서 재인용)
현실불만에 찬 독립투사들 사이에 프락치를 넣어 암살음모를 꾸미도록 유도하여 사건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이종태는 사건 당시 미성년자였는데 사건 직후 군에 입대하여 공판정에 나오지도 않았다. 김재호 등 피고인들은 민재에서 모두 중형(징역 10~15년)을 선고받고 복역중 4.19 뒤 출감했고 군재에서 사형이 선고된 이범륜.김동훈(김재호의 아들)은 그전에 이미 사형집행되었다. 이범륜은 이종태를 포섭했고, 김동훈은 병기장교로서 수류탄을 아버지에게 구해주었다는 혐의였다. 피고인들 가운데 3명은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투사였다.
盧德述의 퇴장
친일경찰의 스타로서 헌병 중령으로 변신했던 노덕술은 어떻게 됐던가. 노덕술은 김창룡의 라이벌인 헌병사령부에서 근무한 관계로 김창룡의 견제를 계속 받아 경찰에 있었을 때만큼 빛을 보지는 못했다. 노덕술은 부산 CID(육군범죄수사단) 대장을 거쳐 1955년엔 서울의 15CID 대장으로 있었다. 이 부대는 경무대나 육군본부의 특명사항을 수사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은 정치감각이 뛰어난 노덕술을 측근참모로 활용하여 김창룡을 견제하려고 했다는 것이, 그때 김창룡의 참모였던 김모 당시 대위의 얘기다. 그러나 김창룡은 노덕술이 대규모 절도단이 미군 수송선으로부터 16만 달러어치의 군수품을 훔쳐 팔아먹는 것을 비호한 사실을 밝혀내고 그를 구속시켜버렸다. 유죄확정이 된 노덕술은 1년 남짓 징역을 살고 김창룡이 암살된 뒤 석방되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버렸다.
高문관과 고문
허태영의 김창룡 암살계획을 지원한 혐의로 강문봉(姜文奉) 중장, 공국진(孔國進) 준장, 백학규(白鶴圭) 중령 등 반김창룡 계열의 장교들이 잇따라 구속, 기소돼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들도 법정에서 김창룡의 반민족적 죄악을 폭로했다. 1957년 1월 24일 전 2군사령관 강문봉 중장은 군법회의에 출정하여 김창룡을 군에서 제거하기로 결심하게 된 동기를 설명하면서 특무대와 김의 부정 사례들을 열거했다. '특무대는 육군본부의 관계 국.감.실장들에게 압력을 넣어 위조전표를 끊게 한 다음 이 전표로서 대량의 병기부품을 횡령했다. 특무대는 이러한 부정으로 손에 넣은 자동차 타이어를 일반상인들에게 팔았다. 이는 미군사령부에서도 알고 있었다. 공병자재로 도입된 목재 전량을 특무대 창고에 집어넣은 사실이 미군에게도 알려져 군사원조의 중지까지 검토된 적이 있다. 많은 승용차가 정치가 및 행정부의 고관들에게 공급됐는데 이것도 특무대 루트를 통해서 나온 것이다. 김창룡이 피살된 뒤 신임 특무대장에게 나는 60장의 위조전표를 제시, 부정의 시정을 촉구했으나 그는 되려 나를 제거하려고 했다. 김창룡은 직속상관인 참모총장이나 국방부장관을 무시하고 직접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따위의 월권을 자행했다. 비위사실의 보고내용도 사감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김은 정보를 군사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세력확장에 이용했다. 그는 또 지휘관 사이를 이간시켜 장성들을 분열시켰다. 특무대는 본래의 사명을 망각하고 지휘관들을 감시하는 데 열중했다. 내가 일선 지휘관이었을 때 나의 부대에 파견된 특무대원은 소련인 케페우처럼 행동했다. 특무대는 육군의 암적 존재다.'
1957년 2월 6일 백학규 피고인(당시 중령, 전 육군인쇄공창장)은 변호인측의 신문에 대하여 이렇게 진술했다.
'……실내에는 강중령, 고(高)문관, 김중위, CID 장대위, 그리고 김모란 인물들이 있었다. 그중의 한 사람이 '옷을 벗어!'라고 호통을 쳤다. 나는 잠바를 벗었다. '이 새끼야! 전부 벗어!' 나는 내복까지 완전히 벗어야 했다. 그들은 나의 양손 양발을 묶고는 나의 두 팔로 내 다리를 끼게 한 다음 두 다리 사이로 굵은 몽둥이를 끼우고 두 책상 사이에 (통닭구이처럼) 걸었다. 그리고는 얼굴에다가 수건을 덮어씌우더니 그 위로 물을 들이붓는 것이었다. 수건이 물에 젖자 나는 숨이 막혔다. 그래서 입을 여니 물이 들어왔다. 지옥과 같은 고문은 한시간이나 계속됐다. ……건장한 세 청년이 나의 등을 몽둥이로 수십 번이나 두들겨팼다.' 독자들은 백피고인의 진술에 나오는 '고문관'을 특별히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1957년 2월 20일 군사법정의 제 39회 공판에서 공국진 준장은 이런 최후진술을 했다. '
……우리 육군은 오직 한 사람의 지휘관, 즉 참모총장에 의하여 통솔되는 육군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미국이 진주만기습을 당한 것도 지휘권의 혼란 때문이었다. 김창룡이 참모총장의 지휘권 안에 머물지 않았던 것이 오늘날의 비극을 불렀다.' 강문봉 재판에서 증인으로 나온 허태영은 '나의 행동은 이등박문을 암살한 안중군 의사의 거사와 같은 것이다. 김창룡은 일본군의 헌병이었지만 나의 아버지는 일본헌병 손에 돌아가셨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창룡을 사살했던 신초식 피고인은 최후진술에서 '김구 선생을 살해한 안두희가 백주에 명동거리를 활보하도록 허용하고 있는 이 나라의 법률이 도대체 어떻게 나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 하고 항변했다. 안두희는 무기징역 선고를 받은 지 석 달 만인 1949년 11월에 벌써 15년 징역형으로 감형되었다. 6.25가 터지자 곧바로 석방돼 육군포병장교로 복직했다. 제대한 뒤에는 김창룡의 비호 아래서 명동으로 건설회사, 양구에서 군납업을 하는 등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다. 이즈음의 생활에 대해 안두희의 실토를 들어보자.
'나는 양구에서 콩나물, 두부 등을 군납해서 강원도에 세금을 두 번째로 많이 낼 만큼 돈을 많이 벌었다. 국회의원과 장관들도 우리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이상철, 인태식, 김진만, 이재학, 이런 사람들이었다. 나는 파로호에 모터 보트를 띄워놓고 있었다. 이들은 낚시할 때 내 보트를 자주 이용했다. 이렇게 되니 사단장들까지도 내가 이승만 대통령과 가까운 줄 알고 '나 안두희요'하면 다 통했다.' 불멸의 민족지도자를 살해한 이를 영웅처럼 대접하던 계층이 당시의 한국을 지배하고 있었다.
曺奉岩 사건과 고등계 형사 출신
1958년의 진보당 사건은 당수 조봉암과 그의 돈줄이기도 했던 양명산(梁明山)을 교수대로 보냈다. 이영석(李英石, 중앙일보 편집위원)은 그의 노작 『죽산 조봉암』에서 이 사건은 정치적 조작이라고 거의 결론짓고 있다. 그는 이 사건의 핵심은 조봉암이 간첩 양명산으로부터 자금을 받았다는 혐의이고, 이것은 양명산의 정체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썼다. 양이 간첩이란 증거는 수사당국에서 받은 자백뿐이다. 그 자백을 뒷받침할 만한 아무런 증거도 없다. 그 자백도 2심에서 번복되어 무너졌다. 재판부는 모든 정황 증거들을 묵살, 외면했다. 수사당국은 아무런 증거보강을 못한 채 북괴의 구명공작이 극성스럽다는 발표만 계속했다. 조봉암과 양명산의 구출사명을 띠고 남파된 거물 여간첩을 잡았다고 했는데, 그 여간첩 김귀동은 양의 아내였다. 그녀는 한번도 이북에 가본 적이 없다. 그녀는 남편을 찾아가 수사당국의 속임수(시키는 대로한다면 살려준다는 약속)에 넘어가지 말고 진실을 말하라고 했다. 그녀의 그런 행동이 당국으로 하여금 그녀를 간첩으로 잡아넣게 만들었다. 그녀가 무죄판결로 풀려난 것이 그 증거다.(『죽산 조봉암』)
2심에서 양명산은, 1심에서 검찰측에 협조하여 조봉암에게 북괴자금을 대주었다고 진술하던 태도를 뒤집고, 자신이 특무대의 날조공작에 걸렸다고 진술하기 시작했다. 그의 진술에서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것이 특무대 취조관 고영섭(高永燮)이다. '……고수사관이 '아픈 데가 없느냐'고 물어 '평소에 혈압이 높다'고 했다. 고는 자기도 혈압이 높다면서 나를 데리고 특무대 의무에 가서 주사 두 대를 맞혔다. 어쩐 일인지 정신이 몽롱해지고 잠은 오는데 잠을 잘 수 없는 고통에 빠져들었다. 그런 상태에서 조봉암과의 관계를 캐묻기 시작했다.'(『죽산 조봉암』) 양명산은 '고(高)문관'이 고문하겠다고 협박하면서 일방적으로 조봉암과의 관계를 날조하여 조서를 작성했다고 진술했다. '고수사관은 '최고 악질이 되라'면서 '이 사람과 만나 이런 말을 했지, 조봉암을 만나 이렇게 얘기했지'라고 했고 나는 덮어놓고 '네, 네' 했다.' 양명산은 특무대 수사가 끝난 1958년 3월 16일 목을 매 자살을 꾀했다고 했다. 죽기 직전에 발견 돼, 여섯 시간 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다가 살아났다. 그는 2심 법정에서 자살기도의 동기를 설명했는데 이런 대목도 있었다. '고수사관은 과거 일본경찰로(함흥, 신의주 등 경찰서에서 근무) 독립운동가를 탄압했는데, 아무런 반성도 없이 이번엔 다시 혁명가를 해롭게 하려 하니 살아서 무엇하겠나 하는 극단의 염세증이 들었다.'(『죽산 조봉암』)
고영섭은 앞에도 나왔다. 강문봉 장군 사건 재판에서 백학규 피고인(중령)은 고문당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고(高)문관'을 거명했다. 일제 고등계 형사였던 고문관은 일제 헌병이었던 김창룡의 두뇌와 손발이 되어 온갖 궂은 일에 손을 댔다고 당시의 특무대 간부들은 증언하고 있다. 양명산의 취조 책임자도 그였다. 그는 5.16뒤에까지 살아남아 어느 기관에서 문관으로 그 특유의 일을 충직하게 계속했다.
인맥은 끊겼으나 악의 유산은 남아
일제경찰 출신이 독립투쟁 경력자를 잡아먹은 또 하나의 사례는 김성주(金聖柱) 사건이다. 변호사 태윤기(太倫基)는 『권력과 재판』에서 이렇게 썼다. 1953년 6월 25일 헌병총사령부는 김성주를 체포했다. 김은 19세에 중국으로 망명, 독립투쟁을 했고, 해방 뒤에는 서북청년단 조직에 참여했으며, 6.25 동란 때는 평안남도 지사대리이기도 했다. 그는 2대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의 선거사무차장이었다. 헌병대는 그를 고문하여 북괴자금으로 선거운동 했다는 식으로 자백을 받아내 기소했지만 고등군법회의에서 허구성이 드러나자 당황했다. 안두희의 조종자인 김지웅(일제의 밀정 출신이며 헌병대 및 특무대의 촉탁, 즉 정보꾼)이 미군장교를 등장시켜 엉터리 증거를 만들기도 했으나 조작임이 곧 들통나고 말았다. 당황한 수사책임자 김진호(金鎭浩) 중령(일제 고등경찰 출신)은 육군 형무소에서 김성주를 빼내 사경을 넘나드는 고문을 가했다. 군법회의는 1954년 5월 6일에 사형을 선고했고, 5월 29일에 그의 사형이 집행된 것으로 발표되었으나 사실은 사형선고 이전인 4월 16일 밤에 김성주는 사살되었다. 원용덕 헌병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김중령은 원의 집 지하 방공호에서 임정수 상병에게 지시, 45구경 권총으로 김의 뒷머리를 쏘게 했던 것이다.
만군 장교출신 헌병사령관, 일경 출신 수사관, 일제 밀정 출신의 정보 브로커들이 짜고 무고한 독립투사를 간접으로 몰아 조봉암을 제거하려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재판도중에 사살한 뒤 궐석 상태에서(시체에 대하여) 사형선고를 내리도록 만든 전대미문의 이 사건은 4.19 뒤 다시 문제가 돼 관련자들이 유죄선고를 받았으나 간단한 징역생활 끝에 모두 풀려났다. 김성주를 죽인 것은 그가 고문을 너무 많이 당해 실명상태에 이르는 등 처참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살인이었다는 설도 있다. 1960년 3·15 부정투표 직후 마산에서 격렬한 부정선거 항의 시위가 일어났다. 마산경찰은 데모대에 발포, 수십 명의 사상자를 냇다. 이때 쏜 최루탄이 김주열군의 안면부를 직격, 숨지게 했다. 그때 마산서장의 명령에 따라 김군의 시체를 바다에 집어던진 것은 박종표(朴鍾杓) 경비주임이었다.
이때 현지조사단으로 마산에 내려갔던 태윤기 변호사는 그의 저서 『권력과 재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박종표는 많은 경찰간부와 마찬가지로 일본 헌병 출신이었다. 일제시대의 이름은 니이이(新井)로서 보통은 '니이이 오장'이라고 불렸다. 그는 수많은 전과가 있는데, 그 하나는 정장호 학살 사건이다.1945년 6월의 어느 날 붉은 가죽군화를 신은 니이이 헌병은 돌연 정씨 집에 나타났다. '너희 집에는 8급의 라디오가 있지, 그것으로 밤마다 적군의 방송을 듣고 있다는 것은 이미 내사가 끝난 사실이야.' 그러면서 정씨의 아랫배를 여러 번 발로 차 치사케 했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시대의 경찰이나 군에는 이런 인물들이 많아 일제시대에 몸에 배인 야만적인 습관을 발휘하곤 했던 것이다.
일제경찰 출신들의 맹목적 권력자 추종 습관은 자유당정권의 경찰을 그렇게 길들였고, 그 버릇이 드러난 것은 4·19때의 무차별 발포였다. 이것은 정권의 붕괴를 불렀고, 일시적으로 악질 경찰관들을 불안에 떨게 했다. 1960년 4월 26일 자유당정권이 끝난 날, 많은 경찰관들은 1945년 8월 15일에 그랬던 것처럼 민중의 돌팔매질을 피해 잠적해버렸다. 4·19이후 장면 내각이 들어서자 반민주행위자 공민권제한법안이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3·15선거 당시의 치안국장, 정보과장, 특정 분실장, 분실 2계장, 시·도경국장, 서장, 서 사찰과장, 사찰주임 등 4,520명이 면직되엇다. 이듬해 5·16이 터지자 일제경찰 및 일본헌병, 그리고 특무대 출신들은 새로운 지평을 마련하게 된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공안 및 수사기관에서 일제경력자들은 자연적 수명에 의해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라진 것은 인간 그 자체뿐이었다. 그들이 만든 관습은 그 뒤에도 살아남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아무리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해도 이민족에 충성하여 동포를 감시 고문 투옥 살상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하고 출세하려고 한 인간은 보통사람이 아니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선 어떤 수모도 무릅쓰고 어떤 악행도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이며, 힘센 자 앞에선 고민 없이 맹종할 수 잇는 소질의 소유자다. 권력이 늘 뒤에 있어야 제힘으로 설 수 있고, 혼자가 되면 비열해지고 마는 가장 연약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자존·자립·자율 의지가 취약한 이런 인간들은 노예가 되든지 폭군이 되든지 해야 한다. 독재사회에 가장 적당한 인간이며 민주사회에 가장 부적당한 인간들이다. 일제가 망함으로써 그들의 존립기반도 무너졌다. 민주국가에선 그들이 발붙일 구석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들, 인간집단은 파멸 직전의 상황으로 몰린 사람들의 특유한 단결력과 집념으로써 생존의 길을 모색했다. 그 길이란 바이러스가 번식할 수 있는 오염된 환경의 창조였다. 그리하여 민족반역의 전과자들인 그들은 민주반역의 죄까지 범하여 민중을 배신, 탄압한 상습범이 됐던 것이다.

[[윤우경 치안국장의 이름이 총 5번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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