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_082_五.一八

미국 시민권자라고 5.18 유공자 자격을 박탈당했다

忍齋 黃薔 李相遠 2018. 5. 16. 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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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려간 군대에서 토요일 오전 일과가 끝나면 태백공사 보안대 지프가 부대 안으로 흙먼지를 날리며 달려와 나를 태우곤 보안대 지하실로 향한다. 녹화사업. 몇 시간을 반성문을 쓰고 한구절 한구절 시비를 걸며 구타와 고문과 회유가 이어진다. 대학 선배 한상열을 옆에서 감시하며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라고. 

'나 군대 끌려간 거 나 아는 사람 다 안다. 그런데 몇 달 만에 군대에서 나와 얼쩡거리면 내가 밀정인 거 삼척동자도 다 안다.' 그 거부에 토목공사(각목구타), 전기공사(전기고문), 수중공사(물고문)가 난무하는 중에 무릎연골이 깨지고 무르팍은 엉덩이만큼 부어 대구통합병원으로 긴급후송. 죽지 않고 입원을 했으니 하늘이 도왔다. 

대학 입학해서는 5.17 예비검속에 잡혀가 보안대에서 5파운드 쇠파이프로 뒤통수 내리쳐 뒤통수가 깨지고 혼절을 했었고 군대에서는 무릎을 빠개놓았다. 지긋지긋한 한국. 병원에서 나는 한국을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 영어 콘사이스 한 권을 달달 외우기 시작했다. 

이래저래 군대를 제대하고 영어 실력 하나로 국제회의가 많은 한국잡지협회 잡지연구소 연구원으로 취업하며 토플(TOEFL), 지알이(GRE) 시험 점수를 만들고 미국대학 교수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비점오염(Non-point source pollution)문제를 함께 연구하고 싶다는 열정을 알렸다. 

87년 여러 대학원에서 연구조교 자리를 제안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문교부 유학시험을 치르고 통일원의 안보연수도 받고 88년 9월 학기에 맞추어 유학준비를 했다. 그런데 88서울올림픽 잡지풀기자단을 운영하는데 영어 할 줄 아는 내가 총무로 취재 협조를 하란다. 그래서 입학을 한 학기 늦추고 올림픽을 무사히 치르고 88년 12월 교수님이 보내준 델타항공 원웨이 티켙을 들고 한국을 탈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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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그 뒤로 한국 쪽을 향해서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행복하게 살았다. 한국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길 바라면서. 아들이 태어나 한국에 관해서 물으면 독재자들이 국민을 괴롭히는 지옥 같은 나라라고 이야기해주고 한국말조차 가르치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에 기적이 일어나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이 되고 2003년 나는 5.18 민주화 유공자로 명예가 회복되었다. 한국을 미워하는 아들에게는 사죄하고 늦었지만, 한국을 몸에 심어주기 위해 기를 쓰기 시작했다. 대학 2학년을 마치곤 원어민 강사로 충청도에서 1년간 봉사했고 고려대학으로 편입해서 졸업했다. 그리고 아직도 한국에서 영어학원 선생을 하며 색싯감을 구하고 있다. 

나도 '#살인마전두환 을 처형하라! 한 손엔 몽둥이 한 손엔 짱돌을 움켜쥐고 연희동으로 몰려가 #살인마 #전두환 을 주살(誅殺)하라!'고 선동하면서 SNS상에서 한국과의 정서를 메꾸어 가고 있다. 

그런데 어제 인천보훈지청이라며 내가 미국 시민권자라고 5.18 유공자 자격을 박탈하겠다고 내 전화번호까지 알아내어 통보를 해왔다. 

내가 5.18 유공자 자격을 유지하려면 한국국적을 회복해야 한다고 한다. 내가 환경공학의 지하수 오염 모델링 시뮬레이션으로 박사를 했으니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그걸 가르칠 수는 있겠으나 어느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내줄 수 있을까? 

더군다나 한국에서는 전북대학교 농대 농공학과를 나와서 누가 거들떠보지도 않을 터인데 말이다. 참으로 이런저런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보훈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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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미 주무관의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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