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4_李命稙大監

(25世) 한산이(韓山李)씨 24代孫 (목은19세, 牧隱18代孫)

忍齋 黃薔 李相遠 2018. 10. 16.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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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마지막 진사시에 입격하여 탁지부 주사에 들어서 과거를 볼수 없었다 하여도 족보상 진사시 입격과 주사를 지냈고 성함에 목숨명자만 보이는 족보기록 이외에 다른 관직과 밝을 명자 사용에 대한 고증이 없으므로 다른 관직을 기재하거나 높은 직급의 호칭과 밝을 명자 사용을 삼가라는 일가분의 인터넷상 지적이 타당하나 정확한 사료적 고증 없이 직계 후손들에 의해 보완되지 못한 족보에만 의존하여 직계 후손들이 심혈을 기울여 발굴하고 파악하는 새로운 사실들을 시대적인 변천 사항을 고려하지 않은 체 과거제가 왕성하게 시행되던 시절에 대비하여 과거제가 폐지된 이후에 관직에조차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진사 입격자가 당상관에 오르지 못할 것이란 단정함에 문제가 있고 당상관이 사용하는 쌍학의 흉배의 관복을 입고 사진을 찍은 성우 이명직 선생의 존영만으로도 '정3품 상' 이상의 당상관의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 자명함으로 '진사에 입격한 주사를 당상관을 지냈다고 할 수 없다'는 주장을 고집하여 성우 이명직 선생의 후손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히는 일이 더 없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앞으로 더욱 분발하여 제 고조부님에 대한 자료와 고증이 확보되는 데로 제 고조부 성우 이명직 선생에 대한 내용을 보완하도록 하겠습니다.]  

 

 

 

11-[6] (25) 24(목은19세,牧隱18代孫) 성우공(性祐) 이명직(공문서상 식으로도 기제, 李命稙 혹은 李明稙(?) (공문서상 '이명식'으로도 기제한 이유는 공무원들이 한자 직稙자를 식植자로 잘못 인식하여 한글 토지대장에 식으로 기재된 것임)乙丑1865년1월11일~乙卯1915년9월7일, 수원 동탄면 석우리)은 오산(梧山이승태(李承台)의 5남6녀중 장남으로 태어난 조선의 과거제가 갑오경장으로 폐지된 후 마지막 진사시인 갑오식년시에 3등으로 입격하여 탁지아문 주사로 관직에 들었습니다. 1904년 종2품 내장원경, 1906년 9월 18일 종2품 규장각직학사(奎章閣直學士)에 임명되었고, 1907년에 종1품(하) 숭정대부 궁내부특진관(崇政大夫 宮內府特進官)에 임명되었습니다. 자는 

성우(性祐)로 

사회계몽가이며 사상가입니다. 성명이 한산세보에는 이명직(李命稙)입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명직(命稙)의 함자중 목숨 명(命)자를 밝을 명(明)자로 쓴 것은 당시 궁궐에 드신후 고종 황제의 원래 이름이 목숨 명(命)자에 복복(福)자 였기에 임금의 함자를 피하여 목숨 명(命)자를 밝을 명(明)자로 표기하는 충신 된 신하의 자세를 보인 것이라 합니다. 1980년 초에 작고하신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에 의하면 성우공은 젊은이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해외유학을 독려하는 것을 밉게 본 일제와 친일파들에 의해 1915년 호랑이 사냥꾼으로 위장하여 사랑체에 오래도록 기숙하던 일제 첩자에게 독살당한 애국지사였다고 합니다. 본관은 한산, 고려의 학자 이색의 19대 후손입니다. 공의 사상과 신념은 개화문물주의입니다. 부인 전주 최씨(全州 崔氏)이고 슬하에 3남을 두셨습니다. 동생 형제분 4분은 성직(稙), 충직(稙), 송직(), 만직(稙-아들 舞珪) 인데 동생 충직, 송직, 만직 3분은 자손을 두지 못한 일가분들에게 양자를 가셔서 둘째동생 성직 형제분과 집안 대소사를 돌보셨다고 합니다.  

[http://ko.wikipedia.org/wiki/이명직_(문신)]

 

참고: 

1. [http://ko.wikipedia.org/wiki/이명직_(문신)]

2. 이명직(李命稙) 선생과 이명직(李明稙) 영감

3. 일제의 신하들 -정미칠적과 고종의 마지막 신하 - 이명직.이철규 부자

4. [성우(性祐) 이명직 선생과 노작 홍사용]

5. 나의 고조부 이명직 (李命稙) 

6.  27. 25세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성우공(性祐公) 이명직(李命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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