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4_李命稙大監

'눈물의 왕' 노작(露雀) 홍사용(洪思容)과 노작의 외숙부 성우(性祐) 이명직(李命稙) 선생

忍齋 黃薔 李相遠 2018. 11. 8. 00:21
반응형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중략)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러나 눈물의 왕!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 

 

◀ 휘문의숙 시절의 홍사용

 

노작(露雀) 홍사용(洪思容)

 

문예지 《백조》를 창간하고 ‘토월회’와 신극 운동에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쳐가며 사그라져 가는 민족정신을 일깨우고자 했던 민족시인 노작(露雀) 홍사용(洪思容)은 1900년 5월 17일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 용수골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노작(露雀)·소아(笑啞)·백우(白牛)였다. 아버지는 대한제국 통정대부 육군헌병 부위를 지낸 홍철유(洪哲裕)이며, 어머니는 능성구씨(綾城具氏)이다. 홍사용은 생후 100일 만에 서울 재동(齋洞)으로 옮겨 자랐으나, 9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돌모루)로 이사한 뒤 백부 홍승유(洪承裕)와 백모 한산이씨(韓山李氏, 성우 이명직 대감의 여동생)의 양자로 들어가 친일파에 항거하여 석우리에 은거한 외숙부인 성우(性祐) 이명직(李命稙) 대감에게서 친구 정백(鄭栢)·박종화(朴鍾和) 등과 함께 한학을 수학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다 외숙부 이명직 대감이 친일파에게 암살을 당하던 17세에 다시 홀로 상경, 휘문의숙에 입학한다. 휘문의숙을 졸업하던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된다. 3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나 귀향하여 수필 「청산백운(靑山白雲)」과 시 「푸른 언덕 가으로」를 썼고 재종형 홍사중(洪思中, 어머니가 백모이자 양모인 한산이씨의 친동생이다)을 설득해 ‘문화사’를 설립하고 문예지 《백조》와 사상지 《흑조》를 기획, 《백조》만 간행했으나 3호로 단명하고 만다. 

 

 

◀ 탁지부 본위주사로 대궐에 들어 보은.밀양.연안군수 등 외직과 내직 내장원경.규장각직학사.궁내부특진관을 지낸 성우(性祐) 이명직 대감 존영

 

 탁지부 주사로 대궐에 들어 당상관의 반열에 올랐던 성우(性祐) 이명직 대감, 관복에 당상관의 신분을 알리는 학 두마리가 선명하게 보인다.

 

천석꾼 홍승유의 양아들로 유복한 유년기를 보내지만 ‘이슬에 젖은 참새’, 노작(露雀)이라는 호처럼 일생은 비참했다. 조지훈은 《인간 노작》에서 폐결핵으로 47세에 생을 마친 홍사용을 ‘청빈과 고절 속에서 일생을 마쳤다’고 회상했다. 그는 장남 규선의 집에서 1947년 1월 7일 죽을 때까지 평생 시집 한 권 출간하지 못했다. 그는 1922년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문예 동인지 《백조》 창간의 중추적인 인물로 박종화 현진건 박영희 등과 함께 활동하나 그들 보다 평가받지 못했다. 시 소설 희곡 수필 등 다양한 글쓰기를 한 탓도 있지만, 그는 대다수 낭만주의 시인들이 외국 풍조에 휩쓸릴 때 민중 의식이 스민 민요에 관심을 두고 민족적 서정성을 끝없이 탐구하고 형상화한 민족시인 이었다.

 

 

1923년 9월 18일부터 일주일 간 조선극장에서 2회 공연을 마친 뒤 '토월회' 회원들과 함께 찍은 모습. 원내가 홍사용(왼쪽)

 

▲ 1923년 9월 18일부터 일주일 간 조선극장에서 2회 공연을 마친 뒤 '토월회' 회원들과 함께 찍은 모습. 원내가 홍사용(왼쪽)

 

낭만주의 사조를 대표한 홍사용의 감상적 비애는 ‘단순한 감상’이 아니며 외숙부이자 한학의 스승인 이명직 데감으로부터 이어받은 선비 기질의 면모와 과묵한 태도, 열정적인 모습을 지닌 굳은 신념의 소유자였다. 홍사용 작품의 특성에 대해 동국대 홍신선 교수는 ‘자전적 요소와 향토성’으로 정리된다고 평했다. 홍사용은 1915년 정신적 지주이자 은사인 외숙부 민족지사 성우(性祐) 이명직 대감이 일제에 독살을 당하자 고향을 떠나 말년까지 가족을 돌보지 않았고 시 쓰고 연극하며 가산을 탕진했다. 그러나 결국 돌아갈 곳은 오직 어머니와 고향에서 보낸 동심의 세계밖에는 없었다. 이러한 그리움은 작품 곳곳에서 돌모루(석우리) 주봉(朱鳳) 뫼 장군바위 등 고향마을의 이름이나 산, 내, 둑의 이름을 빌려 표현했다. 또한 쥐불놀이나 통발잡이 같은 풍속의 서술이나 지역 방언에도 동탄에서 보낸 청소년 시절이 반영됐다. 
.
1923년 신극단 토월회(土月會)에 가담하여 문예부장을 맡았고 1927년 박진(朴珍)·이소연(李素然)과 함께 산유화회(山有花會)를 조직했다. 또 1930년 홍해성(洪海星)·최승일(崔承一)과 함께 신흥극장을 조직했다. 
.
그는 직접 서양극 번역과 번안 그리고 연출도 했고 자신이 손수 희곡작품을 써서 직접 출연하는 등 연극 활동에 정열을 쏟았다. 1929년경부터 친구 박진의 집에서 기거하며 5년간 방랑생활을 하다가 1935년경부터 자하문 밖 세검정 근처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며 다시 작품활동을 시작, 민요시와 수필 등을 발표하고 희곡 <김옥균전>을 쓰기도 했으나 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주거제한을 받는 등 일제 말기를 험난하게 보내야 했다. 그 뒤 8·15광복을 맞아 근국청년단(槿國靑年團)운동에 가담하였으나, 그 뜻을 펴지 못하고 지병인 폐질환으로 사망하였다. 살아생전에는 작품집이 나오지 않았고 1976년 유족들이 시와 산문을 모아 『나는 왕(王)이로소이다』를 간행했다. 

 

 

▲ 홍사용 아들 규선씨의 결혼사진(오른쪽)

 

▲ 홍사용 아들 규선씨의 결혼사진(오른쪽)

 

홍사용의 낭만적인 향토성과 민족적인 민요적 율조는 당시 시대상황과 긴밀하다. 그는 나라를 잃은 망국민의 비애와 한을 전통민요라는 형식에 담아 스러져 가는 민족정서의 명맥을 잡고자 했다. 이런 이유로 홍사용은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고 친일의 글 한 편을 남기지 않았다.

.
그의 민족정신에 탄복한 유치환은 조시에서
.
가장 어진 조선의 심장이
이날 또 하나 멎었나니 
조선의 아들이며 
다친 새 모양 다리 오그리고
가오셨을 영원한 소망의 길
.....
아쉽게 불탄 그 애달픈 청춘의 실상
죽지 않는 하나 호롱으로
이 땅의 뒤따른 젊은 예지를 길 밝혔나니
.....
주름주름 남아 스민 겨레의 흐느낌을
아아 당신 어찌 못다 울고 가셨나이까
.
라고 칭송했다.
.
조병화시인도 ‘당대 가장 절실했던 문제에 대해 온 겨레의 심금을 울리고 위로한 진정한 시인’이라고 칭송했다.
.
아쉬운 점은 작품에도 구구절절 그리움으로 그려진, 청소년기를 보낸 화성군 동탄면 먹실골 큰집의 빈 터전은 밭으로 바뀌어 채소만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이다.


 

▲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 노작 홍사용의 시비(왼쪽)

 

 

▲ 2000년 6월 18일 '노작 홍사용 탄생 100주년 기념 문학제'의 하나로 열린 홍사용 시비 참배. - 2000년 6월 17, 18일 오산대학과 홍사용이 묻힌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 묘지에서 한국문인협회 경기도지회가 주최한 ‘노작 홍사용 탄생 100주년 기념문학제’가 열렸다. 그의 삶과 문학세계를 새롭게 조명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이 자리에는 ‘홍사용 문학전집’ 출판기념회를 비롯해 비디오 방영, 1인극 공연, 자료전시 등 다양한 행사가 마련됐으며 묘소를 찾아 참배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지역 학계를 중심으로 홍사용의 재조명과 생가 복원 문제 등이 조용하게나마 논의되고 있는 점은 다행한 일이다. 

 

 

한산이씨 족보에 나타난 노작 홍사용과 성우 이명직 대감과의 관계&nbsp;
한산이씨 족보에 나타난 노작 홍사용과 성우 이명직 대감과의 관계 
성우공 이명직 대감의 형제자매


[참고]
1. 신현상(경기일보 기자), 2000년 07월호 vol 83, 한국문화관광연구원보 너울'
2. 성우(性祐) 이명직 대감
.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