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백과에 의하면,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년 ~ 1986년 3월 16일) 선생은 조선공산당 3차 집행부 책임비서로 전북 부안 백산에서 태어난 뒤 1912년 젊은이들의 유학을 독려하는 독립지사 성우 이명직 대감이 돌린 사발통문을 보고 감화되어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과에 유학하였고 1915년 9월 7일 이명직 대감이 일제에 독살 당한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에 투신 1915년 '열지동맹(裂指同盟)' 1916년 '곡귀단(哭鬼團)'과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을 조직하였다. 우범선의 아들 우장춘에게 한국을 선택하도록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의식화 시킨 장본인 이다. 일본과 러시아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과 코민테른 등 사회주의활동을 벌였다. 특히 코민테른에서 지급한 거액의 군자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전용하였고, 상해임시정부로 부터 미주한인 독립운동기부금의 횡령착복과 조직원 살해미수 혐의로 암살 위협에 처한 이승만의 목숨을 구해준 보답으로 해방후 유일하게 이승만 정권으로 부터 목숨을 보존받은 사회주의계열 독립지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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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이승만 정권의 좌익인사 몰살 공작 당시 '일간지에 정치 일선을 떠나 낙향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겠다고 광고를 내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는 이승만의 제안을 받아들여 지방일간지에 광고를 내고 고향인 부안 백산 대수리로 낙향하여 움막을 짖고 칩거하다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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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을 하며 만주를 거쳐 모스크바 등을 오갈 때 만주에서 안전한 은거지와 여비며 군자금을 제공하던 만주국 흥농부 이성구 미곡검사관과 인연이 있었다. 또 전북 임실 내맛에서 동학을 하며 군자금을 보내던 보굉 이봉욱 선생과 러시아 육사를 나온 레닌의 측근이자 보굉 선생의 동생 이봉섭 선생이 레닌과 김철수 선생의 독대를 성사시켜 코민테른의 혁명군자금을 받도록 한 인연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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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인연으로 1955년 이성구 미곡검사관의 외아들 방원 이성찬 선생과 보굉 이봉욱 선생의 장손녀 이춘연 여사의 중매를 섰다. 바로 내 부친과 모친이 결혼하게 된 연유다. 지운 김철수 선생이 63세 되던 해이고 백산에 칩거한 지 9년 되던 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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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이 해방되어 공주감옥에서 나오던 1945년부터 창경궁 식물원장이던 방원 이성찬 선생과 친교를 맺어 10년 뒤인 1955년에 중매를 섰고 방원 선생의 유품으로 남겨진 서찰들은 1956년 5월 10일부터 지운 김철수 선생이 작고하기 한 달 전인 1986년 2월 4일까지 30년간 총 166통이 남겨져 있으니 두 달에 한 통꼴로 보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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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찰의 내용을 살펴보면 지운 김철수 선생은 일상의 대소사와 일본 와세다 대학 시절 인연들과의 친교를 서울에 있는 방원 선생에 의지했고 각종 활동과 서울 나들이에 방원 선생의 경제적 조력을 받았다. 간혹 방원 이성찬 선생이 개인사에 바빠지면 자신의 독립운동 이야기와 사료들을 자신의 사후에 물려주겠다는 다짐도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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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8살의 나이에 경성원예학교를 나와 창경궁 식물원에서 일하기 시작한 방원 선생과 친교 하여 결혼도 시켜주고 백산에서 두 달에 한 번씩 오가는 서울 나들이에 방원 선생은 지운 선생을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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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노인이 넘어져 다치면 드러누워야 하고 그러다 보면 결국 죽음에 직면하게 된다. 지운 김철수 선생도 1985년 1월 23일 자 서신에서 서울 나들이했다가 넘어져 다쳐서 병원에 진찰받기를 원하는 서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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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2월 4일 자, 방원 선생이 고이 간직한 지운 김철수 선생의 서찰 166번째 서신에는 작은 달력 하나 보내 달라는 부탁과 자신이 더는 서울 나들이를 못할 것이라는 자신의 예감된 운명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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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을 맞은 52세의 공산혁명가 지운 김철수 선생과 18살의 창경궁 식물원장의 친교는 1986년 지운 선생이 작고할 때까지 41년간 1956년 5월 10일 시작한 지운 선생의 첫 서신에서 시작해서 지운 선생 작고 1개월 전인 1986년 2월 4일까지 166통의 서신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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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김효명 선생이 운영하는 토수(구들기술자)학교가 있는 강현을 방문했을 때 김효명 선생이 지운 김철수 선생의 마지막 임종을 지켰다는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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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통의 서찰을 주마간산 격으로 훑어보았고 스캔작업을 진행 중이다. 서신의 내용에는 아직도 생존한 인사들의 이름이 많이 언급되어 있어 공개는 어려울 것 같다. 다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순간에 대한 언급이나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근대사의 부분이 언급된다면 제한적으로 알려보도록 노력은 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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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1961년 태어나서 지운 선생이 작고하던 1986년까지 거의 두 달에 한 번꼴로 한 이불 속에서 자며 온갖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내 조부 이성구 선생보다 지운 김철수 선생이 더 내 할아버지 같기는 하다. 그러기에 내용이 더 조심스러워지고 방원 선생의 이 유품이 나에게 남겨진 그 연유를 꼼꼼하게 생각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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