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_082_五.一八

[1980518 나와 소년시민군 강용주와 고 김영국]

忍齋 黃薔 李相遠 2019. 1. 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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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7일 자정 저는 대학 1학년의 나이로 농학과 2학년 이세종 선배의 죽음을 보며 금마 7공수에 잡혀가 길고 긴 죽음과도 같은 감금과 고문과 두려움을 돌아 나온 80518 생존자 중에 한 명입니다. 그래도 살다 보니 자식이 있고 그 자식을 보니 대학 1학년 19살의 나이가 자기 앞가림조차 벅찬 얼마나 어리고 연약한 나이인지를 실감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 처절한 80518의 와중에 총을 들고 살인마 전두환과 맞서 싸운 소년시민군들이 있었습니다. 고등학생의 나이에 비분강개함만 가지고 살인마 전두환 반란군 저격병의 총알과 헬기 기총소사를 피해 살아난 어린 전사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강용주와 김영국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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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주 

 

 

 

서울 대림동 안아파의원 원장으로의 삶을 사는 강용주


80년 5월 소년시민군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전남대 의대로 진학하였습니다. 유학은 가본적도 없는 전남대 의대생 강용주는 85년 구미 유학생 간첩단 조작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1999년 2월 14년 6개월 만에 출소합니다. 그리고 사상전향을 거부하여 세계 최장기 최연소 미전향 장기수로 기록됩니다. 

전남의대에 복학한 강용주는 2000년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되어 광주 트라우마센터장을 역임하고 지금은 서울 대림동 안아파의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전향거부를 빌미로 2018년 12월까지 19년간 보안 관찰을 받았고 영장 없이 진료하던 병원에서 긴급체포를 당하고 기소되어 무죄선고를 받았습니다. 

백방의 노력으로 2018년 12월까지 보안 관찰이 해제될 때까지 이생은 '투쟁하다 가는 거로' 생각했습니다. 비록 처절한 삶을 살았지만, 소신과 신념을 지키며 바른길을 걸어준 강용주는 우리 민족에게 횃불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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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국 

 

 

80518카페 장학회 봉사단 활동 중 5.18 국립묘지 참배 (앞줄 왼쪽이 고 김영국) 


80년 5월 소년시민군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범죄자 취급을 받으며 막노동, 농업, 어업 닥치는 대로 밥벌이를 위해 살았습니다. 고문의 고통을 술로 잊었습니다. 그러다 결혼도 했습니다. 고문으로 인한 포스트 트라우마 신드름은 술만 마시면 약한 자에 대한 폭력으로 비화 그만 가정폭력 사범으로 형사처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길고 긴 시간을 돌아 마음을 다잡고 2003년 저와 함께 5.18대동정신을 계승할 순수한 시민운동 80518 카페에 참여하여 장학회와 봉사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보길도에 정착하여 전복양식사업에 온 정열을 바쳤습니다. 2013년 2월 태풍이 몰아친 어느 날 전폭 양식장을 지키기 위해 비바람에 맞서다가 그만 뇌출혈로 쓰러졌습니다. 

어린아이들을 남겨둔 체 황천객이 되고 말았습니다. 5.18 국립묘지는 김영국의 묘지 안장을 거부했습니다. 트라우마로 힘겹게 살 때 술 먹고 분노를 아내에게 풀어 가정폭력 사범으로 처벌받은 전과 때문이랍니다. 유공자로서의 품위위반으로 안장이 거부된 것입니다. 그래서 유해를 광주 영락공원 2 추모관에 모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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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원 

 

 

 

근 4개월간 고문받고 풀려나 찍은 이상원의 사진


저는 소년시민군은 아닙니다. 그리고 총을 들고 살인마 전두환 반란군과 맞서 싸우지 못했습니다. 5.18 직전 금마7공수의 예비검속에 이세종 선배의 죽음 앞에서 불법적으로 체포되어 살인마 전두환이 1980년 9월 1일 11대 체육관 대통령이 되어 국민 대화합 사면으로 풀려날 때까지 장장 근 4개월여에 걸친 처절한 고문 속에서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리곤 너무 두려워 유학을 빌미로 도미하여 토목 환경공학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연방 공무원으로, 미국 시민으로 살고 있습니다. 작년 2018년 3월 인천지방보훈처는 제가 미국 시민권자임을 이유로 5.18 유공자 자격을 박탈했습니다. 

2018년 4월 저는 우수인재 복수 국적 회복신청을 하여 2019년 3월쯤에 있을 법무부 심사위원회 심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복수 국적 회복허가로 한국 국적이 살아나면 다시 5.18 유공자 자격이 회복될 것입니다. 우수인재가 아니라고 거부될 수도 있겠지요. 

1980년 5월 살인마 전두환이 정권을 찬탈하기 위해 광주에서 자행한 양민 학살을 중심으로 강용주, 고 김영국, 그리고 제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살았는지 보아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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