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2_한국역사

우골탑 대학, '관보 대학생' - 60년대에도 등록금 때문에 골치?

忍齋 黃薔 李相遠 2019. 1. 10. 03:02
반응형


대학을 상아탑(象牙塔)이라 부른 건 프랑스에서 비롯됐다. "물욕과 현실적 이해를 떠나 진리를 탐구하는 대학 학문세계가 상아처럼 깨끗하고 고고하다"는 뜻이다. 현실감이 떨어지는 한 시인을 비판했던 평론가의 말이 오히려 속세를 떠난 고아(高雅)한 예술의 경지, 학문을 지칭하는 말로 바뀌었다.

학생 정원의 140% 뽑은 대학 논란

대학 초과 모집 파문, 1965. 3. 4 [동아일보] 7면

그 상아탑이 한국에 와서 우골탑(牛骨塔)으로 바뀐 건 1969년이다. "논밭은 물론 아끼던 소를 팔아 자식 대학에 보냈더니, 대학은 등록금으로 성탑 같은 건물이나 쌓으며 돈 불리기에 급급하고 있다"는 지적이 국회에서 나왔다. 40년도 지난 얘기지만 어쩐지 요즘 세태와 비슷한 감이 든다. 사립대 비대화와 고액 등록금, 부정도 서슴지 않는 역사의 뿌리가 결코 짧지 않다는 얘기다.

60년대 문교행정은 그야말로 난맥 그 자체였다. 가령 65년 문교부는 이화여대가 신입생을 모집하며 정원보다 40%나 많은 734명을 추가로 뽑자 이를 즉각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대 측은 "신입생이 3-4학년 무렵이 되면 입학 때의 30%가 준다."며 "그렇다고 지어놓은 시설과 확보한 교수요원을 놀릴 수 없다. 그에 대비한 초과모집을 인정해 달라."고 주장했다.

문교부는 듣지 않았다. 거기서 밀리면 다른 대학도 공개적으로 신입생을 초과 모집할 것이다. 우선 국장회의를 열어 이대에 본때를 보이기로 결의했다. "초과모집을 취소하지 않으면 총장 임명승인을 취소하겠다!" 그래도 이대는 시정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자 문교부는 그해 신설을 허가했던 가정대학을 폐쇄하고 다시 사범대 가정학과로 환원시켜 버렸다.

이대 역시 완강했다. '버티기 모드'에 들어가면서 초과 모집한 학생들의 등록금을 받기 시작했다. '정원 외 모집'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자세였다. 문교부는 정말로 발끈해 이대에 대한 학사 및 회계 특별감사에 들어가겠다고 윽박질렀다. 그리고 "학사, 입학행정에 조금이라도 비리가 발견되면 즉각 사직당국에 고발하고 학교폐쇄까지 검토하겠다."고 초강수를 뒀다.

해당 학교 두둔에 나선 사립대학들

상황이 급속도로 악화한 가운데 이번에는 사립대학 총 학장들이 나섰다. 이대를 두둔하는 거였다. 서울시내 15개 사립 단과 대학장, 10개 사립대 총장들이 잇따라 모임을 갖고 "이대에 관대한 처분을 내려달라"고 요구했다. 말이 '관대한 처분 요구'지 "더 이상 이대를 괴롭히지 말라. 계속 초과모집 시정을 요구하면 우리가 단체행동에 나서겠다."는 일종의 경고였다.

총 학장들은 "문교부의 대학정원 조정은 여러 가지로 불합리하므로 이를 다시 책정하고 이 기회에 사립학교법을 개정해야 옳다"는 결의문까지 내 정부를 압박했다. "이대를 봐 달라"는 요구를 걸었지만 결국은 "당신들이 대학정원제를 만들고 정원책정을 잘못해 사태가 난 것이다. 법을 고쳐 사립대 신입생 모집의 모든 권한을 사립대에 줘라."는 얘기였다.

등록금 인상에 어수선한 대학가, 1965. 3. 9 [동아일보] 7면

그뿐이 아니었다. 대학총장들은 이날 "대학등록금의 인상은 학교운영상 불가피하므로 어떤 반대가 있더라도 인상된 대로 계속 징수하도록 공동보조를 취하자"는 것도 결의했다. 그해 대학 등록금은 학교별로 최대 50%까지 인상돼 학생들이 데모를 벌이는 등 어수선했다. 서울대 한양대에선 이미 가두시위를 벌이고 서명운동도 받고 있었다.

1964년, 정원 초과모집 논란의 전초전

문제 된 대학 정원 초과, 1964. 2. 20 [경향신문] 3면

그러니까 65년 대학사태는 크게 두 갈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나는 대학의 정원 외 학생모집이고 다른 하나는 등록금 대폭인상이었다. 문교부는 정원 초과모집을 막으려고 대학에 등록금 50% 한도 내 인상을 허락했었다. 이것이 등록금은 등록금대로 올리고 초과모집은 초과모집 대로 이뤄지는 최악의 조합으로 현실화한 것이었다.

대학의 신입생 초과모집은 사실 그 전해인 64년에 더 심각했다. "대학이 등록금을 전년 수준으로 환원하는 대신 당국은 대학의 초과모집을 양해한다."는 소문이 나돈 가운데 치러진 입시에서 대학들은 너나없이 학생을 초과 모집했다. 물가는 오르는데 학교 운영자금으로 써야할 등록금이 동결됐으니 등록금을 낼 학생 수를 늘려 돈을 더 거둬야한다는 생각이었다.

2~3월 문교부가 조사해보니 전기 입시를 치른 홍익대학은 정원의 53%를 초과 입학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연대 고대 이대 중대 등도 상당수 정원 외 신입생을 선발했다.

연대가 30%, 고대 35%, 이대 42%, 중대 30.7% 등이었다. 여론의 비난이 빗발쳤다. 특히 돈이 없어 '뒷구멍 입학'은 엄두도 못내는 서민들의 위화감, 열패감이 심각했다. 문교부도 마찬가지였다. 장관이 수시로 대학총장을 불러 "입학 정원을 준수해 달라"고 한데다 "정원 외 입학이 발견되면 엄벌하겠다."고 했는데 전혀 말발이 먹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문교부는 그해 대학 등록금을 인상해주고 초과모집을 억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물가고에 놀란 박정희대통령이 문교부와 상의도 없이 등록금 인상 분 환원을 지시해 스타일을 구겼다.

문교부의 완패로 끝난 '대학 총장 제재' 강수

문교부는 초과입학이 드러난 연대 윤인구총장, 고대 유진오총장, 이대 김옥길총장의 임명을 취소하겠다고 언론에 흘렸다. 중대 임영신총장에 대한 제재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해당 대학들은 "정부가 사립대 지원은 안 하면서 대학이 재정난을 탈피하려 자구책을 쓴 것까지 따지느냐"고 볼멘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당국의 과도한 간섭 탓에 대학발전이 요원하다는 항의였다.

언론도 비슷했다. 처음 사립대의 정원초과 입학을 비판했던 것과는 별개로 문교 당국의 강압적 자세를 문제 삼았다. 사대 지원도 안 해주고 등록금 문제를 일관성 없이 왔다 갔다 한 게 대통령과 정부가 아니냐고 비난했다. 한 신문은 "대학총장들은 파면될 실질적 이유가 없다"며 "학생 추가 모집은 사립대학 운영상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전국 대학의 2.3.4학년 정원 60% 초과, 1966. 10. 19 [경향신문] 7면

갑자기 여론이 대학 두둔 쪽으로 반전됐다. 그러자 최두선 국무총리가 나섰다. 우선 긴급담화문 형식으로 "대학생 초과모집 문제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데 대해" 사과했다. 그리고 "초과모집처럼 이미 저질러진 문제를 총 학장 승인취소로 해결할 수는 없다"며 "문교부는 대학들이 같은 잘못을 다시 저지르지 않는다는 보장만 선다면 총장 승인취소를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문교부의 완패였다. 그해 9월 문교부가 정밀조사를 해보니 24개 사립대에서 모두 7600명의 정원 외 학생을 뽑았다. 한 학교는 학생 수가 정원의 2배에 이르기도 했다. 사실 이 숫자도 밝혀진 것이 그럴 뿐 더 많을 수도 있었다. 결국 대학교와 언론의 반발, 그리고 이에 못이긴 총리 지시로 정원 외 입학생을 묵인해준 것이 문교부엔 한으로 남았다.

이런 과거가 있었기에 문교부는 65년의 이화여대 초과사태를 묵과할 수가 없었다. 강수를 둬야만 했다. 결국 이대 김옥길 총장은 3월 학교 재단이사회에 사표를 내 수리됐다. 대신 초과 모집한 신입생은 이미 이대생으로서의 자격을 갖췄고 등교하고 있었다. 6개월 후. 이대는 김 총장을 다시 총장에 임명하며 승인을 요청했다. 문교부는 별 말없이 이를 승인했다.

관보에 게재된 학생만 대학생으로 인정하겠다?

덤 입학 없애려고…관보 대학생, 1966. 6. 16 [경향신문] 3면

이런 굴곡을 거쳐 66년엔 '관보(官報)대학생'이란 용어가 등장했다. 2년 연속 사립대에 펀치를 맞은 문교부가 내놓은 새 방침이었다. 대학정원 한도 내에 입학한 신입생 명단을 관보에 게재하고 이들에게만 전학 전과 복교 학사학위 취득 등 일체의 학적 상 권리를 인정한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관보에 이름이 실리지 않은 학생은 정부가 대학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문교부는 그 전해 대학정원을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대학정원 령'을 선포했고 이른바 '학사등록제'를 문교부령으로 공포했다. 문교부장관은 그러면서 "대학망국론까지 나올 정도로 우리나라 대학의 양적 팽창과 질적 저하는 심각하다"며 "부정입학 허위졸업장 남발 등 대학가에 기생하는 독버섯을 차제에 뿌리 뽑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관보 대학생의 등장은 그때까지 '정원 외'나 '청강생'으로 대학에 다니던 '학생 아닌 학생'을 양성화시켜주는 결과를 빚었다. 문교부가 발표한 그해 대학 총 정원은 12만3천1백50명이었다. 그러나 대학정원 령을 실시하며 "선의의 피해자는 구제할 것이므로 각 대학은 재적생 숫자를 정확히 보고하라"고 했더니 15만5천5백 명이 되었다. 정원보다 3만2천 명이 더 청강생 등 이름으로 학교에 다녔던 것이다.
오히려 '정원 외 청강생'을 양성화 시킨 대책

자, 이렇게 정원 외 청강생을 양성화시켰으니 대학은 그 후 법대로 정원을 지켰을까? 물론 아니다. 67년에도 68년에도 정원 외 입학은 대학의 공공연한 수입원이었다. 68년 사립대학들은 정원보다 4만3천 명이 초과돼 있었고 국공립대학도 1589명이 정원 외 숫자였다. 문교부 검찰은 매번 합동단속반을 편성, '정원 외'를 단속한다고 했으나 항용 말로 끝나곤 했다.

68년. 급기야 문교부장관은 정원 외 학생 근절을 위한 특별담화문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①대학 합격자는 문교장관이 확인한 입학허가 통지서를 교부받아 보관해야한다.②청강생 등 정원 외 입학한 자에겐 졸업 때 학사학위 등록증을 교부하지 않는다.③학위등록증이 없는 자는 대학을 4년 다녔다 해도 국가 지자체 공공기관의 채용시험이나 자격 면허시험에 응시할 수 없게 규제한다는 것이었다.

정부서 입학허가 통지, 1968. 1. 16 [동아일보] 7면

69년에 처음 실시한 대학입학 예비고사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나왔다. 게다가 문교부는 "대학의 정원 외 입학을 막을만한 힘이 없으니 제발 국회에서 사립대학 특별감사라도 해 달라"고 청원하는 웃지 못 할 일까지 생겼다. 이제 국회가 나설 차례였다. 사립대학이야말로 "소뿔로 세운 우골탑이 아니냐?"고 호통치고 대학 설립자들에겐 "당신들이 학원모리배가 아니고 무엇이냐?"고 추궁하는 사태로 한발 한발 다가서고 있었다.

민병욱
글 민병욱 / 전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
1976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편집국 사회1부장, 정치부장, 부국장, 논설위원을 거쳤다.

2009년 7월까지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들꽃 길 달빛에 젖어> <민초통신 33>이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