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 의원님은 56년생으로 박원순 시장님과 손석희 사장님과 동갑입니다. 부산고 입시에 실패하고 재수를 해서 경기고를 입학했습니다. 그래서 동갑들에게 후배 대접을 받았습니다. 또 대입에 실패하여 바로 사병으로 군입대를 합니다. 제대 후에 79학번으로 고려대를 입학합니다. 경기고 서울대의 같은 나이대 사람들에게 천대를 받는걸 여러 곳 여러 사람이 목도하고 증언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인간 '노회찬'은 약자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운동권과 정치권으로 뛰어든 건 1980년 5.18 때문이라고 언제나 이야기했습니다. 건국 이후 한국에 진보사회주의 정당이 입법기관인 국회의원을 배출하기까지 이승만의 150만 학살과 박정희 전두환의 피비린내 나는 고문과 용공 조작이 있었습니다. 비록 연대하여 이루어낸 원내교섭단체였지만 어쩌면 살아생전에 한국에서 진보정당의 집권도 보고 죽을 수 있는게 아닌가 기대도 해보았습니다. 같은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노회찬 의원님의 죽음은 꿈에 부풀었던 기대감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더 슬픈 건 올해가 노회찬 의원님과 부인 김지선 선생님의 결혼 30주년…. 노회찬 의원님도 저도 1988년에 결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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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김지선 선생님은 노동운동권에서는 부군인 노회찬 의원님보다 선배였고 2년 연상으로 더 유명했던 분입니다. 초등학교 졸업의 학력을 검정고시와 방통대 법학과졸업으로 만든 분이기도 하구요. 가까운 분들은 김지선 선생님께 많은 위로를 부탁합니다. 슬하에 자녀도 못두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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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하기전에는 집에 월 50만원도 가져가질 못했다고 합니다. 한번 80만원을 가져갔다고 하더군요. 국회의원이 되서는 정의당에서 정한 노동자 월급 180만원을 집에 가져가서 형편이 좀 펴져서 부인인 김지선 선생님이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방송통신대를 다닐수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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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더 많은 인권운동, 복지사업을 하기 위해 ‘늦깍이 공부’에 열정을 쏟다
김지선 후보는 만학도(晩學徒), 다시 말해 ‘늦깍이 학생’이 되었다. 평생을 노동운동과 여성인권운동에 헌신해 그 삶의 진정성을 인정받은 40대 후반의 나이에 그녀가 만학도가 된 이유는, 가난 때문에 제때에 배우지 못한 아쉬움과 함께 더 왕성하게 사회활동을 하기 위해 공부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녀는 2001년, 2002년에 차례로 중학교,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그리고 2004년 방송통신대 법학과에 입학해 2008년 졸업했다. 50이란 나이를 훌쩍 넘긴 2009년에 사회복지를 복수전공하고,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 시험에 합격했다.
그녀는 “공부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그동안 헌신해온 사회운동을 더 잘하기 위해 선택한 공부였기 때문에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었고, 힘들 때는 어린 시절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던 그 기억을 떠올렸다. 앞으로도 이런 마음으로 공부할 것이다. 공부에는 끝이 없다”고 말한다.
2. 가난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시작한 노동자의 삶
김지선 후보가 어린시절 자란 곳은 인천시 동구 동인천역 뒤편의 ‘수도국산 마을’이다. 이곳은 지금 버젓한 아파트 단지로 변했지만, 그때 이곳은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던 달동네였다. 지금 그 흔적은 수도국산에 있는 ‘달동네 박물관’에 남아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6남매(2남 4녀)의 셋째 딸인 김지선 후보는 어린나이에 가난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16세의 소녀는 비인가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인천의 한 목재공장에 취직하게 된다. 미성년의 나이 때문에 취직이 안되자 당시 스무 살이던 언니의 신분증을 내밀었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어린 여공의 삶은 전자회사, 악기제조 공장 등에서 이어져 갔다.
김지선 후보는 ‘노동자로 살게 된 계기가 뭐냐’는 질문에 그 시절을 떠올리며 “먹고살기 힘들어서 공장에 취직했다. 그땐 다들 가난했다. 취직해서 돈벌어야 했고, 그래서 적은 월급을 받으면서도 열심히 일했다. 생각해 보면 그때 그렇게 일한 노동자들이 희생이 지금 우리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답한다.
전태일이 분신한 1970년도 이후에도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과 환경은 열악했으며, 김지선 후보의 여공시절 삶에는 그녀 뿐 아니라 그 당시 노동자들의 희생과 70년대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역사가 배어 있다.
3. “동일방직문제 해결하라”고 외친 인천노동운동의 큰 누나, 큰 언니
김지선 후보는 1970년대 중반을 지나며 노동자에서 노동운동가로 변신한다. 먹고살기 위해 시작한 노동자의 삶이었지만 그냥 한사람의 노동자로 살아가기에 당시의 노동조건은 열악했고, 노동자들의 권리는 너무나 무참히 짓밟혔다.
김지선 후보는 “저임금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 섬유공장안의 온도는 늘 32도가 넘었다. 솜먼지가 심하게 날렸으며, 커다란 기계에서 내는 굉음 때문에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고 회상한다. 또, 회사와 어용노조, 정부는 노동조합을 와해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1978년 2월에 일어난 인천 ‘동일방직 똥물사건’은 노조파괴를 위한 조직적 폭력사건의 대표적 사례이다.
김지선 후보와 5명의 여성노동자들은 1978년 3월 26일 부활절 새벽 50여만명이 모인 여의도광장 연합예배 도중 단상에 올라가 CBS라디오 생방송 중계 중 마이크를 잡고 “노동3권 보장하라”, “동일방직문제 해결하라”, “우리는 똥을 먹고 살 수 없다” 등을 외치며 동일방직 사건의 진실을 알리다가 연행되어 구속되었다.
김지선 후보는 이렇게 부당한 현실을 바로 잡아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누리며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매진했으며, 이후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한 차례 더 구속되고 수배되는 어려움을 견디면서 ‘인천해고노동자협의회 사무국장’, ‘인천여성노동자회 회장’ 등을 맡아 활동했다. 김지선 후보는 이 과정에서 자신이 얻은 ‘인천노동운동의 큰 누나, 큰 언니’라는 별명에 대해 “그저 마음 뿌듯하다”는 짧은 한마디를 환하게 웃으며 말한다.
4. 여성노동자들의 문제를 전문화하기 위해 여성인권운동 시작
성공회대학교 노동대학 학장이자 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인 하종강 소장은 김지선 후보의 노동운동 선배이다. 그는 김지선 후보가 여성인권운동을 시작한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김지선씨는 여성노동자들이 활동을 오래 하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여성노동자들의 문제를 전문화화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인천에서 ‘민중연합 여성위원회’와 함께 ‘여성의 전화’를 설립하는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인천 여성의 전화’에서도 운영위원과 부회장을 맡았다”
그 후 김지선 후보는 1990년대 중반, 활동무대를 서울로 옮긴 후 본격적인 여성인권운동을 시작한다. 1997년부터 강서양천지역의 주민들과 함께 ‘(사)서울강서양천 여성의전화’ 설립을 주도해 이듬해 창립하고 초대회장 직과 ‘가정폭력상담소’ 소장 직을 맡는다.
2005년 김지선 당시 상담소장을 인터뷰했던 중앙일보의 모 기자는 “차분하게 상담하는 김지선 소장의 나직한 목소리와 몸짓에서 제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만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이 넘쳤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김지선 후보는 가정폭력 피해여성들을 상담하며 들었던 생각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당시 여성에 대한 가정폭력, 성폭력으로부터 여성들을 지키려면 사회적으로 더 많은 보호장치가 있어야 하고, 그 만큼 진보정당이나 시민운동의 더 많은 관심과 교육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5. 상계동 공동체를 일궈나가는 지역일꾼, 김지선
김지선 후보는 지난 2008년 1월 상계동으로 이사했다. 남편인 노회찬 의원의 상계동 지역 총선출마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난 5년여 동안에도 김지선 후보는 자신만의 상계동 삶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김지선 후보는 지난 2010년부터 현재까지 매주 한번 상계복지관의 독거노인 도시락 배달사업 자원활동을 하고 있다. 김지선 후보는 이 일을 시작한 이유에 대해 “외롭고 소외된 독거노인을 지역사회가 돌보는 일이야 말로 지역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한 시작인데 재원도 부족하고 행정에만 맡겨두는 것도 맞지 않는 것 같아 우선은 말보다는 작은 행동으로라도 실천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김지선 후보는 상계동 지역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는 대표적 풀뿌리 조직에서 활동하고 있다. ‘함께걸음 의료생협’에서 이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마들주민회의 운영위원 일을 하고 있다. 상계동지역에서 활발하게 주민사업을 하고 있는 마들주민회의 이지현 대표는 김지선 후보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추진하기로 한 주민사업에 대해서는 꼼꼼하게 챙기고 앞장서서 추진하는 선배다. 주민과의 약속을 지키고 주민들로부터 신뢰를 얻은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하고...”
김지선 후보의 현재 모습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면 상계동 공동체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지역일꾼이다.
김지선 후보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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