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_082_五.一八

5.18 민주화 유공자가 된 배경 진술서

忍齋 黃薔 李相遠 2019. 7. 16. 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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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보고: 지난주 유타출장중에 5.18유공자 자격을 유지할 우수인재 복수국적 심사 결과를 통보받앗습니다. 일단 저는 우수인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결과에 승복합니다. 저를 불상하게 여겨 유공자격에 대해 특별귀화로 복수국적인정을 해보겠다고는 하나 5.18당시 수많은 분들이 저보다 더한 고통을 받고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도 많아 기대하지는 않치만 진술서는 제출하여 두고자 합니다. 그동안 살인마 전두환을 처형하자는 과격한 주장에 공감을 표해주신 페이스북 인연분들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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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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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당시 제출서류라는게 불법체포 구금 당한 사실에 대한 인의보증이 저는 미국에 있고 한국에서 함께 고생했던 분들이 만들어 제출했던거여서 제가 가지고 있는게 없군요. 또 미국 정신과 의사에게 발급받은 포스트트라우마 진단서가 있었는데 제가 보상이나 받으려고 하는것 같아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명예회복만 받겠다는 심정으로 5.18민주화유공자 증서를 받았었습니다. 그래서 진술서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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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과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면 하늘의 뜻이라 여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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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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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원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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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 유공자가 된 배경 진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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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이상원 (미국명 Lee, Samuel Sangwon)
생년월일: 1961년 6월 11일
연락처: samuelsangwon@gmail.com, 1-650-644-5158
당시 본적: 서울 종로구 계동 13번지
당시 주소: 서울 용산구 청파동3가 1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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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졸업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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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2월 소사북국민학교 졸업 (부천북초등학교)
1977년 2월 서울 선린중학교 졸업
1980년 2월 서울 영동고등학교 졸업
1984년 2월 전라북도 전주 전북대학교 농과대학 농공학과 졸업
1995년 5월 미국 노스이스턴공대 토목공학 석사졸업
1999년 12월 미국 로드아일랜드 주립 공대 환경공학 박사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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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피해 사항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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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전북대학농학계열 1학년 때 5.17 예비검속에 11공수 부대원의 구타로 종아리 인대가 파열되며 불법으로 체포되어 잡혀가 (1) 체포 당시 농학과 2학년 이세종 선배가 11공수여단 부대원의 정수리 가격으로 사망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이유로 인후 공사 보안대 지하실에서 고문을 통해 이세종사망모습을 기억에서 삭제하도록 강요를 당했고 (2) 서울서 김대중에게 5십만 원을 수령하여 전라도에 대학소요 일으키려 위장 입학했다는 미리 준비된 조서를 암기하도록 고문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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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기간은 1980년 5월 17일 예비검속 이후 1980년 8월 27일 전두환이 11대 대통령에 선출되어 9월 1일 취임하여 대국민 화합 차원의 특별 대사면을 실시하여 인후 공사 보안대 정문에서 본인의 모친에게 인계될 때까지 근 4개월여를 보안대 자하실에서 토목공사라 불리는 각 고목과 쇠파이프 타작과 수도공사라 불리는 물고문 그리고 전기공사라 불리는 전기고문 등과 그 이외에 요도에 볼펜 심 박기와 같은 상상하지 못할 기괴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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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도중 5파운드 쇠파이프로 뒤통수를 맞아 이틀간 시체처럼 거적때기에 덥혀있기도 했습니다. 갈증으로 본인이 지하실 바닥에 흘린 피똥 오줌이 섞인 오물을 핥아먹으면서 팔다리 다 잘리고 몸뚱이로 굴러만 다녀도 좋으니 살아서 나가기만을 간절히 기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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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8월 27일 전두환이 체육관 대통령이 된 뒤, 본인의 효용 가치는 없어져 1980년 9월 1일 전두환이 11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베푼 대국민 화합 차원 특별 대사면으로 인후공사 보안대 정문에서 본인 모친에게 인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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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1985년 대구 50사단 전투공병대에서 군 복무를 시작했을 때는 군 녹화사업 대상자로 주말일과후 태백공사 보안대에 끌려가 반성문 쓰기와 대학 선배인 한상열 목사 등의 동향을 감시하라는 회유를 받다 거부하면 무차별 고문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다 무릎연골이 파열되어 대구통합병원에 후송되어 6개월을 입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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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사는 그 이후에도 박용구 사무관을 전담 시켜 본인과 본인 가족을 감시하고 값비싼 서화 등을 갈취하였습니다. 박용구의 감시는 본인이 미국 유학을 나온 1988년 이후까지도 계속되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 유공자는 5차 신청자들이 1980년 5월 17일 자정 금마 11공수 부대에 함께 체포된 분들이 저를 기억하여 신청해주어 2003년 5.18 유공자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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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2018년 3월 인천보훈지청이 본인의 미국 국적 보유로 인한 한국 국적이탈을 사유로 5.18 민주화 유공자 자격을 박탈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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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80년 3월 전북대학교 농과대학 농학 계열에 입학하게 된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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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원 식물원과 경무대 온실을 관리하던 본인의 부친이 6.25당시 이승만 대통령 부부와 함께 이승만 대통령 부부가 아끼는 화초들을 피난 열차에 싫고 이리에 내려와 이승만 대통령 부부는 목포로 피난 가고 부친은 화초들을 가지고 전주로 피난 가 전주임업연구소에 피난 창경원 식물원을 꾸리고 호구지책으로 전북 농림에서 교원으로 원예를 가리키며 지냈습니다. 그러나 6.25 전황이 불리해지자 자진 참전하여 6사단에서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하다 소속연대는 전멸하고 부친은 수류탄 파편창을 입어 6.15상이 유공자가 되었습니다. 현재 동작동 현충원 충혼관에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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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북 농림의 부친의 동료 교원들은 1980년 당시에는 대부분 전북대 농대 교수들로 있었습니다. 본인 큰형은 서울대 의대, 둘째 형은 한양대 문리대, 누나는 한양 여전 미술교육학과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본인은 장학금과 기숙사비가 지원되는 전북대학교 농과대학 농학 계열에 입학하여 부모님의 학비 걱정을 더러 드려야 했습니다. 그것이 전북대학교 농과대학 농학 계열에 입학했던 주된 이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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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80년 3월 대학입학 후 학생운동에 관여하게 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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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영어 공부를 위해 용산 집 근처 미군 부대에서 구한 보도가 검열되지 않은 뉴스위크지와 타임스지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집권을 위한 정권찬탈 과정이 소상하게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전두환이라는 이름도 생소했지만, 불법적으로 정권을 찬탈하고 있다는 내용은 본인이 그 내용을 번역하여 알려야 한다는 소명 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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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본인이 그 내용을 번역하여 갱지에 긁으면, 농학과 2학년 이세종(1980년 5월 17일 예비검속 당시 11공수에 죽임을 당함) 선배와 농학 계열 1학년 김차순이 롤러 스크린으로 찍어내서 교내외에 배포했습니다. 당시 학생들이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외치면 남녀노소 주민들이 ‘전두환이 누구냐?’고 물었는데 본인이 번역한 뉴스위크 타임스 기사의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야심과 음모를 읽고는 ‘전두환’에 대해서 사람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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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980년 5월 17일 자정 금마 11공수에 불법으로 체포당한 당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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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초 주변의 35사단 군인들이 트럭을 앞세우고 무력시위를 벌이다 부대로 돌아가기도 해서 주변에서는 계엄령의 전국 확대를 예견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또 집안에 보안대나 정보기관에 근무하는 지인이 있는 학생들은 그 이후 잠적을 하기도 했습니다. 본인은 학교 기숙사에 기거했었고 불법으로 체포되던 학생회관과 기숙사가 지척이라 학생회관 3층에서 보도검열로 삭제되지 않은 뉴스위크지와 타임스지를 번역하여 갱지에 그 내용을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농학과 2학년 이세종 선배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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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7일 자정, 박달나무 곤봉과 착검한 M16을 휴대한 금마 11공수 부대원들이 마치 엔테베작전을 감행하듯 들이닥쳤습니다. 많은 학생이 2층에 모여있었는데 비명을 지르며 잡혀갔습니다. 갱지로 유인물 인쇄작업을 하던 본인과 이세종 선배가 3층 서클룸을 나서자마자 11공수 부대원 한명이 M16 개머리판으로 이세종 선배의 정수리를 가격했고 이세종 선배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고목처럼 쓰러져 버렸습니다. 본인은 또 다른 11공수 부대원이 내리친 박달나무 곤봉에 종아리를 맞고 종아리 인대가 찢어진 체 잡혀서 무기를 싫고 다니는 밀폐된 트럭에 실렸다가 전주경찰서 버스로 다른 학생들과 함께 실려 전주경찰서에 갔다가 인후동 인후 공사 보안대로 가서 매타작부터 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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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980년 5월 17일 자정 불법 구금 당하며 보안대에서 고문받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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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다른 학생들이 잡혀간 35사단 헌병대 유치장에 입감되어 그곳에서 인후동 인후 공사 보안대로 조사를 받는다며 오가며 고문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농학과 2학년 이세종을 아느냐?”, “이세종이 맞는 걸 보았느냐?”는 등 이세종 선배에 대한 질문만 몇 주를 이어갔습니다. 직감적으로 이세종 선배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고 직감했습니다. 내가 이세종 선배를 잘 알고 M16 개머리판에 정수리를 맞고 고목 쓰러지듯 쓰러진 모습을 이야기한다는 건 나도 살아나갈 수 없을 것 같다는 걸 직감했습니다. 그래서 “이세종 선배를 잘 모른다”, “이세종 선배가 맞는지 어떤지 정신없어 보지 못했다”고 고문 속에 일관되게 이야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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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에 정도가 덜할 때는 35사단 유치장에서 잠을 자며 오갔지만 “이세종 선배” 건이 마무리되자 이번에는 100여 장 되는 미리 작성된 조서를 외우라고 고문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내용의 골자인즉 “집안이 가난하고 불우하여 사회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바, 김대중을 모처에서 만나 50만 원을 수령하여 순진한 전주 학생들을 선동하여 학생소요를 일으킬 목적으로 전북대학교에 위장 입학하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김대중을 만난 장소와 시간 등이 너무 세밀했고 김대중에게 들었다는 이야기며 내가 그 이야기에 감동했으며 했다는 이야기도 적혀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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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본인은 김대중을 한 번도 본적도 만난 적도 없었습니다. 1980년 8월 27일 전두환이 11대 대통령에 선출되기 전에 그 조서를 외워서 내가 쓴 것처럼 착각했다면 나는 계엄분소로 넘어가 판결을 받고 기결수가 되어 실제로 감옥살이를 했을 겁니다. 하지만 상식에도 어긋나는 말도 안 되는 소설 같은 조서를 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내가 제대로 외우지 못한다고 스스로분에 넘친 고문하던 중사(?)쯤 되는 이가 5파운드 쇠파이프로 본인의 뒤통수를 가격하여 이틀간 시체처럼 거적때기에 덥혀있기도 했습니다. 그 흉터는 온몸의 고문 자국과 함께 아직도 내 뒤통수에 그날을 상징하듯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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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별 희귀한 고문들은 1980년 9월 1일 전두환이 11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베푼 대국민 화합 차원 특별대사면 이후 피골이 상접한 몸을 다시 복원시킨다고 한 달가량 35사단 헌병대 유치장에서 고문 없이 지내다가 10월 초 인후 공사 보안대 정문에서 내 모친에게 인계될 때까지 최소 일주일에 이틀을 그 별 희귀한 고문들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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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980년 9월 1일 풀려나고 난 뒤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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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7일부터 1980년 9월 1일까지 근 4개월여를 불법 구금된 동안 그 어떤 형사소추도 받지 않았고 또 기소되어 전라남북도 계엄분소로 넘어가지도 않아서 본인은 범법행위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는 체로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한상열 선배를 비롯한 운동권들은 본인을 정보부나 보안대의 프락치로 오해하고 본인은 그 오해를 풀기 위해 학생운동이나 마당극에도 앞장서야 했습니다. 또 풀려나서 학교로 돌아와 보니 내 눈앞에서 죽어간 이세종 선배의 죽음은 11공수 부대원을 피해 도망가다가 학생회관 옥상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혹시나 내 입에서 이세종 선배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지 보안사에서는 박용구 사무관이라는 자를 보내 나와 내 가족을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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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50사단 전투공병대에 입대하여서는 주말마다 태백공사 보안대로 불려가서 반성문을 쓰고 한상열 선배 등 전북대 운동권을 감시하라는 회유를 받았지만 그렇지 않아도 프락치라는 오해를 받았고 또 군대에 간 걸 다 아는데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했지만, 보안대의 시도는 거의 막무가내였습니다. 결국 매타작을 당하는 토목공사 중에 오른쪽 무릎을 잘못 맞아 연골이 깨지며 무릎이 엉덩이만큼 부어버리자 공병부대에서 작업하다 다쳤다고 꾸며서 대구통합병원에 입원하여 6개월을 입원했습니다. 그때 대구통합병원 성당에서 만났던 간호사관학교 4학년 생도가 지금의 제 각시여서 본인은 전두환이 중매를 섰다고 생각하며 녹화사업 대한 분노를 녹이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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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그 이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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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이후에도 본인을 감시하는 보안사 박용구 사무관은 우리 집안에 드나들며 값나가는 서화와 동양화를 갈취하며 집안 식구(?)처럼 지냈습니다. 군 복무 후에는 한국잡지협회 잡지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였는데 보안사의 감시와 종로서 정보과의 감시로 직장생활조차 동료상사들의 눈치가 보여 새로운 삶을 찾아 1988년 미국 유학을 감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한국을 잊은 체 열심히 살았습니다. 외아들에게도 한국 이야기만 나오면 나쁜 나라라 이야기하며 한글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미국 정신과 의사는 본인이 중증 포스트 트라우마 환자라는 진단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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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기간 동안 미국연방 환경청의 프로젝트도 수주하여 교수님들 월급도 들여가며 박사학위를 마쳤고 그 덕으로 미국시민권을 받아 미국연방 공무원으로 특별임용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2003년 함께 잡혀가 35사단 헌병대에 불법 구금되었던 동료 학생들의 인의 보증 등으로 5.18 민주화 유공자로 명예가 회복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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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2018년 3월 인천보훈지청에서 본인이 미국 국적취득으로 한국 국적 이탈자로 5.18 민주화 유공자 자격을 박탈한다고 미국까지 전화로 통보하고 한국 본가로 박탈 공문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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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들은 5.18 유공자 자격을 유지하고 싶으면 미국 국적을 포기하고 한국 국적을 회복하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현재 직장인 미국연방 공무원도 그만두어야 합니다. 또 미국연방 공무원 연금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5.18 유공자도 보상등급을 위한 신체검사도 받지 않고 명예만 회복하겠다고 하여 등급이 기타로 보상금액도 9백여만 원이 나왔고 한국의 지인에게 부탁하여 불우이웃돕기에 쾌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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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 유공자 자격은 본인에게 중증 포스트 트라우마 증세를 완화해주었고 본인의 외아들에게 한국을 모국으로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명문대학에 잘 다니고 있는 아들을 설득하여 한국의 고려대학교 국제학부로 편입하게 하여 한국을 심어 주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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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국적 이탈자로 5.18 민주화 유공자 자격을 박탈한 것을 돌이키고자 우수인재 복수 국적 인정신청도 하였으나 심사위원회에서 우수인재가 아니라고 하여 신청이 거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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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 담당자께서”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국적법 시행령 제6조 제1항 제3호 그 밖에 제1호 및 제2호에 준하는 공로가 있다고 법무부 장관이 인정하는 사람에 해당하는 지 여부 (특별귀화)를 검토하고자 하오니 선생님께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심의위원회에 제출한 자료가 필요하오니 적극 협조 부탁드립니다. 저희가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심의위원회에 자료 요청이 가능한지 문의하였으나 개인정보 보호법에 제한된다고 하여 이렇게 요청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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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이 진술서를 작성하여 제출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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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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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원 (Lee, Samuel Sangwon)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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