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_091 지운서화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서화 작품 1~25

忍齋 黃薔 李相遠 2020. 10. 20.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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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에 의하면,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년 ~ 1986년 3월 16일) 선생은 조선공산당 3차 집행부 책임비서로 전북 부안 백산에서 태어난 뒤 1912년 젊은이들의 유학을 독려하는 독립지사 성우 이명직 대감이 돌린 사발통문을 보고 감화되어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과에 유학하였고 1915년 9월 7일 이명직 대감이 일제에 독살 당한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에 투신 1915년 '열지동맹(裂指同盟)' 1916년 '곡귀단(哭鬼團)'과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을 조직하였다. 우범선의 아들 우장춘에게 한국을 선택하도록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의식화 시킨 장본인 이다. 일본과 러시아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과 코민테른 등 사회주의활동을 벌였다. 특히 코민테른에서 지급한 거액의 군자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전용하였고, 상해임시정부로 부터 미주한인 독립운동기부금의 횡령착복과 조직원 살해미수 혐의로 암살 위협에 처한 이승만의 목숨을 구해준 보답으로 해방후 유일하게 이승만 정권으로 부터 목숨을 보존받은 사회주의계열 독립지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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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제2차 적색공포로 인한 미군정과 함께 1947년 이승만 정권의 좌익인사 몰살 공작 당시 '일간지에 정치 일선을 떠나 낙향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겠다고 광고를 내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는 이승만의 제안을 받아들여 지방일간지에 광고를 내고 고향인 부안 백산 대수리로 낙향하여 움막을 짖고 칩거하다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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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을 하며 만주를 거쳐 모스크바 등을 오갈 때 만주에서 안전한 은거지와 여비며 군자금을 제공하던 만주국 흥농부 이성구 미곡검사관과 인연이 있었다. 또 전북 임실 내맛에서 동학을 하며 군자금을 보내던 보굉 이봉욱 선생과 러시아 육사를 나온 스탈린의 측근이자 보굉 선생의 동생 이봉섭 선생이 스탈린과 김철수 선생의 독대를 성사시켜 코민테른의 혁명군자금을 받도록 한 인연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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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인연으로 1955년 이성구 미곡검사관의 외아들 방원 이성찬 선생과 보굉 이봉욱 선생의 장손녀 이춘연 여사의 중매를 섰다. 바로 내 부친과 모친이 결혼하게 된 연유다. 지운 김철수 선생이 63세 되던 해이고 백산에 칩거한 지 9년 되던 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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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이 해방되어 공주감옥에서 나오던 1945년부터 창경궁 식물원장이던 방원 이성찬 선생과 친교를 맺어 10년 뒤인 1955년에 중매를 섰고 방원 선생의 유품으로 남겨진 서찰들은 1956년 5월 10일부터 지운 김철수 선생이 작고하기 한 달 전인 1986년 2월 4일까지 30년간 총 166통이 남겨져 있으니 두 달에 한 통꼴로 보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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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찰의 내용을 살펴보면 지운 김철수 선생은 일상의 대소사와 일본 와세다 대학 시절 인연들과의 친교를 서울에 있는 방원 선생에 의지했고 각종 활동과 서울 나들이에 방원 선생의 경제적 조력을 받았다. 간혹 방원 이성찬 선생이 개인사에 바빠지면 자신의 독립운동 이야기와 사료들을 자신의 사후에 물려주겠다는 다짐도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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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8살의 나이에 경성원예학교를 나와 창경궁 식물원에서 일하기 시작한 방원 선생과 친교 하여 결혼도 시켜주고 백산에서 두 달에 한 번씩 오가는 서울 나들이에 방원 선생은 지운 선생을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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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노인이 넘어져 다치면 드러누워야 하고 그러다 보면 결국 죽음에 직면하게 된다. 지운 김철수 선생도 1985년 1월 23일 자 서신에서 서울 나들이했다가 넘어져 다쳐서 병원에 진찰받기를 원하는 서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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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2월 4일 자, 방원 선생이 고이 간직한 지운 김철수 선생의 서찰 166번째 서신에는 작은 달력 하나 보내 달라는 부탁과 자신이 더는 서울 나들이를 못할 것이라는 자신의 예감된 운명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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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을 맞은 52세의 공산혁명가 지운 김철수 선생과 18살의 창경궁 식물원장의 친교는 1986년 지운 선생이 작고할 때까지 41년간 1956년 5월 10일 시작한 지운 선생의 첫 서신에서 시작해서 지운 선생 작고 1개월 전인 1986년 2월 4일까지 166통의 서신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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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은 장손자가 삼판허가를 받아도 군청에 찾아가 그 허가를 반납할 정도로 가난을 숙명처럼 알고 살았다. 움막을 떠나 오갈때 마다 신세진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지운 김철수 선생의 서화가 지운 김철수 선생의 지폐, 돈 처럼 전해졌다. 지운 선생의 서화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생전에 지운 선생에게 식사나 차 또는 숙소를 제공하고 용돈을 드린 분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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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부친 방원 선생은 지운 선생의 지폐인 서화를 무려 천점이 넘도록 가직하고 있었다. 앞으로 25편씩 그 서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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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과 방원 선생이 생전에 즐거운 담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내 성품이 많이 참아야 한다며 지어준 호, 참을 인자를 쓴 인재다. 내 큰형은 신재, 작은형은 노재던가. 양금섭 교수님 해설: 인재(忍齋) *인제 X 齋 : 재실, 연구실 齊 : 가지런하다, 정리하다 ; 제 제가(齊家) 가정을 잘 꾸려나가다 齊(제)+示(시)=齋(재)인데, '천도제'로도 쓰는 모양이지만, 천도재가 더 적실할 듯. 문자학적 분석은 아래와 같다. *齊자의 원형을 입력할 수 없어서 유감. 1.祭 : 月(肉)+又(手)+示(=神) 2.齋 : 齊(고대엔 마름모 세 개가 가로로 나란하고 아래로 각각 꼬리가 붙은 모양의 글자로 보리나 밀 모가지를 상형하였으며, 뜻은 가지런하다. )+示 1은 고기를 손으로 신에게 바치는 모양. 일반적인 제사 의식. 제사 ;제 2는 곡식을 신에게 바치는 의식. 불가의 의식에서는 살생의 결과인 고기 대신 곡식을 사용했다. 재계할;재 따라서 속가의 제사와 불가의 재례는 모음을 반드시 구별해서 써야 한다. 齊字의 고대 형태는 마름모 연(가오리연) 가로로 세 개를 나란히 늘어놓은 모양. 곡식 모가지가 나란히 놓여서 '가지런하다'는 뜻을 지니게 됨. -- 밑에 꼬리가 붙은 모양. 전각문에서는 전서로 새겼을 터. +++ 
양금섭 교수님 해설: 樂山水以養志 吟風月而休神 *樂山樂水 댓구 위해 뒤의 樂는 생략 (강산을 벗하여 의지를 굳건히하고 자연을 노래하여 정신을 안정시키다)
양금섭 교수님 해설: 석란[*風蘭처럼 바윗 벼랑에서 자생하는 石斛(석곡)이라고도 하는 dendrovium과의 난초]은 어디에서 찾아 그리나?절벽 기어올라 만년이끼 낀 곳이라네.
양금섭 교수님 해설: 석란[*風蘭처럼 바윗 벼랑에서 자생하는 石斛(석곡)이라고도 하는 dendrovium과의 난초]은 어디에서 찾아 그리나?절벽 기어올라 만년이끼 낀 곳이라네.
양금섭 교수님 해설: 渡水復渡水(도수부도수)看花還看花(간화환간화)물 건너고 또 물을 건너꽃 보고 또 꽃을 보네.
양금섭 교수님 해설: 渡水復渡水看花還看花(앞 휘호 起承句)春風江上路不覺到君家(봄바람의 강물길 따라그대 집에 어느새 다달았구나.)明代の詩人 高啓 (1336-1374)の詩「尋胡隠
양금섭 교수님 해설: . 蘭之貴, 何? 香耶? 非也. 四時不變與? 亦非也. 氣也? 節耶? 幽也? 淡耶? 皆非也. 極其言俱此衆美而友其善者之致也. 若非屈原無以爲蘭之友亦無蘭難以爲屈原之友矣. 噫! 是千古之大貴也歟 遲耘先生詩 (난초가 귀한 것은 왜일까? 향기 때문인가? 아니다. 사시불변하기 때문인가? 역시 아니다. 기품 때문에? 절조 때문에? 그윽함 때문에? 담박함 때문에인가? 다 아니다. 이런 뭇 아름다움을 다 갖추고 그 선인을 벗삼았기 때문이다. 만약 굴원이 아니었다면 난초의 벗이 될수없었을것이요 또한 난초가 아니었다면 굴원의 벗이 되기 어려웠을것이다. 아아! 이것이 천고에 가장 귀한 것이로다. 지운 선생의 시. . +++
양금섭 교수님 해설: 論語 단사표음(簞食瓢飮) 원문
Kyzbma Yang: 울릉도 절벽에 2,500년 된 늙은 향나무가 있다
양금섭 교수님 해설: 소동파 적벽부 중 一句 삿대 기대 놓고 시를 읊조렸다

 

https://youtu.be/DnFZ-fLbg3U?si=OzZU5vB9nV2W21wl

 

https://youtu.be/E7WRPguTV9E?si=LQxFBjQS2dsn1Y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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