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_091 지운서화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서화 작품 51~75

忍齋 黃薔 李相遠 2020. 10. 21.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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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종끼리만 교배가 가능하다는 다윈의 진화론을 뒤집는 ‘우의 삼각형(U’s Triangle)’을 1935년에 발표해 ‘종의 합성’의 시작을 알린 육종학의 아버지 우장춘 박사는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한국농업에 큰 기여를 했다. 민비(명성황후 추증) 살해를 돕고 일본으로 도망간 역적 우범선의 아들이 자신의 부친의 죄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한국말도 모르면서 죽을때까지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우장춘을 조국에 헌신하도록 의식화시킨 사람이 바로 조선운동권의 시조 지운 김철수 선생임을 알리며 그분의 서화작품 25점을 연이어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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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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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이 배출한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은 성우 이명직 대감님이 돌린 망해가는 나라를 살리는 길은 선진국 유학이라는 사발통문을 보고 1912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학과 실과로 유학을 갔다. 그리고 성우 이명직 대감님이 일제에 독살되던 1915년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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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에는 죽어 귀신이 되어서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울자며 ‘귀곡단’과 ‘열지동맹’을 결성했다. 그리고 1916년에는 한국 대만 중국 유학생을 모아 ‘신아동맹단’을 결성하여 독립지사의 길에 들어섰다. 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해방되어 감옥에서 나올 때까지 14년을 옥살이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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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조선공산당 3차 전당대회 전반기 책임비서로 러시아의 코민테른에 참가하여 거액의 군자금을 받아 독립운동자금으로 전용하였고 전북 임실 내맛출신으로 러시아육사를 나온 이봉섭 선생을 통해 스탈린을 독대했다. 당시 만주를 오가던 때 만주 농림국 미곡 검사관이던 이성구 선생의 도움을 받았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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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 선생은 상해임시정부로부터 미주 한인 독립운동기부금의 횡령착복과 조직원 살해미수 혐의로 암살 위협에 처한 이승만을 위해 횡령금액을 대납하여 목숨을 구해준 보답으로 해방 후 유일하게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목숨을 보존 받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지사이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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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구 선생의 외아들인 방원 이성찬 선생과 전북 임실 내맛의 동학도이자 애국지사인 보굉 이봉욱(러시아 육사출신 이봉섭 선생의 형) 선생의 장손녀 이춘연 여사를 중매하여 부부의 연을 맺어 주었다. 이 이야기는 이성찬 선생과 이춘연 여사의 아들 이상원이 어린 시절부터 지운 김철수 선생으로 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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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은 김철수 선생을 일본 유학과 독립지사의 길로 이끌었던 성우 이명직 대감이 이상원의 고조부이며 이명직 대감의 손자가 만주에서 도움을 받았던 이성구 선생인지 모른 체 세상을 떠났다. 세월이 많이 흐른 여러해전 이상원이 족보 공부를 하다 성우 이명직 대감이 자신의 고조부인지를 알고 전율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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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님에게 감화받은 의재 허백련 화백님과 우장춘 박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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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에 대해서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지운 김철수"라는 자료집도 내고 여러 사람이 지운 김철수 선생에 대해 연구도 하여 많이들 알고 있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이어진 지운 김철수 선생과 의재허백련 화백 그리고 우장춘 박사의 돈독한 우정과 그 인연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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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우장춘 박사는 조선총독부 장학생으로 동경대 농학과 실과 청강생으로 입학했을 때 조선인 도자사가 방일하여 조선 유학생을 격려하고자 강연을 하는 자리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는 일본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던 허백련 화백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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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와세다대학 유학생이던 지운 김철수 선생이 친일강연을 하던 도지사를 향해 연단에 뛰어들어 도지사의 멱살을 잡고 어찌 조선인으로 그런 연설을 할 수 있냐며 거칠게 항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모습에 충격과 감명을 받은 사람이 바로 의재 허백련 화백과 우장춘 박사였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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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장학금을 신청하려던 허백련 화백은 그 길로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자신이 원하던 동양화에 매진하여 남도 산수화의 거목으로 우뚝 섰다. 그리고 작고하는 순간까지 도지사의 멱살을 잡던 김철수 선생의 애국정신에 존경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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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 선생은 우장춘 박사에게 "너의 부친 우범선이 매국한 것에 대해 속죄하려면, 조선의 독립과 조선을 위해 네가 배운 바로 봉사해야 하고 절대로 너의 조선인의 성을 갈아서는 안 된다"는 민족주의 의식을 심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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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시해사건에 가담하고 일본으로 도망간 우범선과 일본인 부인 사이에 태어난 우장춘 박사는 1919년 농사시험장에 취직하여 원예 육종학의 시작을 알리는 ‘종의 합성’이라는 논문을 1935년에 발표한다. 김철수 선생이 말한 데로 성을 갈지 않고 '우장춘의 삼각형(Triangle of U)'으로 식물 육종학의 금자탑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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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우장춘의 삼각형(Triangle of U)'의 성과를 인정받아 동경제국대학으로부터 농학 박사학위를 수여 받는다. 그리고 1950년 한국의 농업발전에 여생을 받치겠다는 심정으로 한국으로 향하는 귀국선에 몸을 싣고 영구귀국하여 죽을 때까지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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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과 의재 허백련 화백 그리고 우장춘 박사는 그 분들이 작고할 때까지 오랜 우정을 유지했고 그 분들의 민족 사랑의 정신은 아직도 우리에게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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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1) http://blog.daum.net/enature/15852869

(2) http://blog.daum.net/enature/15851789

(3) http://blog.daum.net/enature/15853970

(4) https://ko.wikipedia.org/wiki/김철수_(1893년)

(5) http://blog.daum.net/enature/15852876

(6) http://blog.daum.net/enature/15853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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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zbma Yang 夏天氷未釋 日岀霧朦朧 여름날 얼음 아직 풀리지 않아 해가 나도 안개는 몽롱하구나

 

https://youtu.be/DnFZ-fLbg3U?si=OzZU5vB9nV2W21wl

 

https://youtu.be/E7WRPguTV9E?si=LQxFBjQS2dsn1Y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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