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_091 지운서화

지운 김철수 선생과 울릉도 '고고고고(古枯孤高)' 201~221

忍齋 黃薔 李相遠 2020. 10. 20.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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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리아 새장과 방원 선생 그리고 ...

어린시절 부친 방원 선생의 화훼원예농장 한편에는 카나리아를 비롯한 가지가지 새들을 키우는 장소가 있었습니다. 방원 선생이 꽃을 좋아하니 아름다운 새도 좋아하셨겠지만 새를 키우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젊은시절부터 오랜세월 춤을 전공하신 김백봉(1) 선생과 친분을 나눠오셨는데, 바로 김백봉 선생이 새를 좋아하여 집에 많은 새를 키우셨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새 알러지에 큰아들 안병철, 딸 안병준과 안병헌이 건강에 문제가 생기니 결국 화훼원예농장으로 그 새들을 몽땅 가져오셨습니다. 그덕에 어린시절 여러해동안 카나리아의 울음소리를 벗하며 지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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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어느날, 부안 백산에서 지운 선생이 종다리 여러쌍을 들고 오셨습니다. 지운 선생 말씀이 몇년전 신문에 보니 울릉도에 종다리와 진달래가 없어서 종달새와 진달래를 울릉도에 이식하시겠다고 들고 오신거였습니다. 그 몇년간 보리밭에서 종달새알을 구해다가 부화시킬려고 품고 자기도 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종달새는 어미가 우는법을 가르켜 주어야 운다며 거의 종달새 전문가연 하셨습니다. 카나리아와 함께 종달새도 키우게 되었는데 아쉽게도 집에서 키우는것은 성공하질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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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오랜동안 준비해서 결국 울릉도행 배에 종달새 3쌍과 진달래를 가지고 오르시긴 하셨습니다. 하지만 종달새는 배안에서 모두 폐사하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돌아오셔서는 붓을 들어 서화를 여러편 남기셨습니다. 또 자주 울릉도 초등학교 교정에 심어놓으신 진달래의 안부를 확인하셨던거 같습니다. 그 이후에도 종달새는 울릉도에 보내지 못하고 마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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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남기신 싯구가 바로 '고고고고(古枯孤高)'입니다. 페이스북 담벼락 서화 사진을 올렸더니 1996년 6월 고려대에서 『미당 서정주시 연구 (未堂 徐廷柱 詩 硏究 )』로 박사학위를 받고 우주베키스탄 등에서 코이카 한국학 교수를 지내시다 고려대 조치원분교 교양학부 국어 교수로 은퇴하신 양금섭 교수님이 댓글로 다음과 같이 해설하여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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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울릉도를 유람하며 2500년 된 향나무 등걸을 보고 우러러 본받으며 말하기를

고고고고 (古枯孤高: 오랜 세월 말라 죽어서도 홀로 기상 드높아라)

경신년 설날 아침에 88세의 늙은이 느림보 쟁기질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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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어 고스돕에서 4번 고하는걸 비유하여 양금섭 교수님이 사족해설을 재미있게 하셨습니다.

"쓰리고에 한 번 더 고면, 不遇한 세상에 왕창 피박을 씌우고 싶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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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바로 그 '고고고고(古枯孤高)' 작품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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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1)

김백봉(金白峰, 김충실(金忠實), 1927년 2월 12일 ~ )1927년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에서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무용가의 꿈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6살 때 아버지가 밤 늦게 들어와 잠자는 백봉울 깨워 보여준 것은 최승희의 무용사진이었습니다. 그 이후 무용가에 대한 꿈을 키우며 14세가 되던 해, 아버지와 함께 진남포의 최승희 무용공연장을 찾아가 제자 되기를 청하고 승낙을 받았습니다. 1941년 6월 최승희를 찾아 일본 도쿄(東京)로 갔고 ‘최승희무용연구소’의 제자로 기본훈련을 받은 후 조금씩 무대에 서기 시작했습니다. 1943년 명목상으로는 연구소를 졸업했지만 백봉은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고 계속 남아 일본·만주·중국·동남아시아 각국을 순회공연하며 최승희의 춤맥을 잇게 되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북경 '최승희 동방무도연구소' 연구원으로 해방을 맞았습니다. 최승희의 남편인 안막(安漠, 본명 안필승(弼承), 1910년 4월 18일 ~ ?, 경성제2고보 와세다대 노어노문학과)과 김백봉의 남편인 안제승(安濟承, 1922년 10월 28일 ~ 1996년 10월 19일, 일본대 영화연출)은 형제간이었습니다. 지운 김철수 선생과 안막 선생 그리고 최승일 선생은 1929년 조선공산당 재건설 위원회 동지였습니다. 최승희 선생의 오빠 최승일은 안막의 친구였습니다. 아무튼 김백봉·안제승 부부는 1946년 6월 평양에 있는 최승희·안막 부부에게 가서,1947년 평양국립극장에서 제1회 김백봉 무용발표회에서 계월향, 농촌풍경, 지효, 고전형식(화관무)와 군무를 선보였고, 1948년부터 동구권과 러시아 순회공연을 시작해서, 1949년 방중예술단 주역, 1950년 6월 러시아 레닌그라드 순회공연중 6.25전쟁 소식을 접했습니다. 김백봉 부부는 1951년 1.4 후퇴때 고정훈 국군장교의 "대한민국 예술발전에 기여해 달라"는 제의를 받아들여 차를 제공받아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1953년 서울에 정착하여 그뒤 김백봉은 박기홍에게서 승무를, 이동안에게서 태평무와 승무를 전수받았습니다. 백봉은 서양무용의 기본을 배우고 우리 정서의 춤을 만들어온 스승 최승희의 작품세계를 그대로 이어 가면서 거기에 자신의 세계를 창조해 가는 한 사람의 무용가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1953년 서울에 ‘김백봉무용연구소’를 설립하였고 1954년 11월 26일 1회 작품발표회에서 부채춤과 고전형식을 발전 승화시킨 화관무를 선보였고 1988년 서울올림픽 식전행사에서 남녀 2000명의 군무로 화관무를 선보였습니다. 1965년∼1992년 경희대학교 무용과 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1981년∼1985년, 1987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1992년 경희대학교 무용과 교수를 정년 퇴임한 뒤 명예교수가 되었습니다. 직접 무대에 올라 춤을 추는 활동 외에도 1958년 한국예술사절단 동남아 순회공연의 안무를 시작으로 1962년 파리 세계민속예술제 참가단 안무, 1985년과 1991년 두차례 김백봉무용단 미주공연 안무, 1986년 아시안게임 축하공연 '신천지' 안무, 제24회 서울올림픽 개막식 '좋은 날' 안무 등을 통해 민족적 색채를 띤 한국무용을 세계에 알리는 활동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1995년 김백봉춤보존회가 결성되었고, 1996년에는 예악당에서 최승희의 춤만을 재현하는 대공연을 열어, 최승희가 추었던 '초립동', '격(格)', '연인도', '보살춤', '낙천(樂天)' 등을 재조명하기도 하였습니다. 1999년에는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에서 뽑은 ‘20세기를 빛낸 예술인’으로 선정되었습니다.

1950년 최승희 무용연구소 졸업

1953년 수도여사대(首都女私大) 강사

1954년 김백봉 무용연구소(한국예술무용연구소) 운영

1959년 서라벌예술대학 강사

1964년 한양대학교 강사

1965년 경희대학교 교수

1981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1983년 미국 유니온대학 명예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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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zbma Yang: 울릉도 절벽에 2,500년 된 늙은 향나무가 있다
Kyzbma Yang: 일찍이 울릉도를 유람하며 2500년 된 향나무 등걸을 보고 우러러 본받으며 말하기를 고고고고 (오랜 세월 말라 죽어서도 홀로 기상 드높아라) 경신년 설날 아침에 88세의 늙은이 느림보 쟁기질꾼 * 쓰리고에 한 번 더 고면, 不遇한 세상에 왕창 피박을 씌우고 싶었던 것일까?

 

https://youtu.be/DnFZ-fLbg3U?si=OzZU5vB9nV2W21wl

 

https://youtu.be/E7WRPguTV9E?si=LQxFBjQS2dsn1Y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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