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_091 지운서화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적벽부 서화 10폭 병풍 작품 240~250

忍齋 黃薔 李相遠 2020. 10. 23.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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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적벽부 서화 10폭 병풍 작품 240~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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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 – 좌우익 소아병을 극복한 정치인이자 독립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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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15 광복의날에 독립장을 추서 받은 지운(遲耘) 김철수(1893~1986) 선생은 일찌기 사회주의 운동이 일제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수단으로 보고 실천에 옮긴 분이다. 지운 선생은 한중일 동양3국에서 가장 먼저 초기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며 일본•러시아•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에 매진하다 13년8개월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분의 독특한 점은 1920년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까지 지내셨음에도 불구하고, 지운 선생은 혼란스런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북조선을 택하지 않고 1986년 돌아가실때까지 남한 땅을 지키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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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회주의자를 연구하는 이들은 “거물급 사회주의자인 지운 선생이 남한 땅에 계속 생존해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이라고 평가를 한다. 1893년 전북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에서 태어난 지운 선생은 1908년 서당을 열고 있던 한학자 서택환 선생의 제자로 들어가 선비정신과 함께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된다. 그리고 구한말 궁궐의 관리를 지내다 이완용 등 친일파의 준동을 보고, 나라 망할것을 예견한 이명직 선생이 돌린 “똑똑한 자식있으면 해외로 공부하러 보내라”는 사발통문을 접하고 유학을 결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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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과로 유학을 간 뒤 1915년 이명직 선생이 일제에 독살당한 소식을 듣고 지운 선생은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에 매진한다. 1915년 재일본 유학생들과 ‘열지동맹’을 결성하고, 이듬해에는 조선인•중국인•대만인과 함께 ‘신아동맹단’을 결성, 대일 항쟁을 선언한다. 그때 동경제국대 농학실과생이던 나가하루우(우장춘)를 만나 “너의 부친, 우범선은 민황후를 살해하고 도망와 살해된 매국노이지만, 너는 조선인으로서 조선의 독립과 조선의 발전에 너의 인생을 바치라”고 5살 어린 청년 우장춘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의식화시켜 해방후 우장춘 박사가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감자, 옥수수, 배추등을 육종하여 한국이 농업강국이 되는데 크게 이바지 하도록 만들기도 한 장본인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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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에는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지운 선생의 주도하에 동양에서 최초로 조선에 사회주의 결사체인 ‘사회혁명당’을 결성을 한다. 이듬해에는 이동휘와 함께 ‘고려공산당’을 창립하고 재무담당 중앙위원을 맡는다. 1923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한다. 1926년에는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로 취임한다. 1927년에는 러시아의 코민테른에 가서 유창한 영어로 조선공산당의 창립을 선포하고, 코민테른의 추인을 받고, 거액의 활동자금을 수령하여 독립운동 제반 단체에 나누어 주는등 사회주의 운동사에 굵직한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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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로는, 지운 선생이 이승만의 목숨을 구명하여 주었다는 거다. 당시 상해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은 이승만을 미주한인 독립운동기부금의 횡령착복과 조직원 살해미수 혐의로 암살하도록 명령을 내렸는데 이때 지운 선생이 이승만이 착복한 기부금을 코민테른에서 받아온 자금으로 대납하여 목숨을 구해주었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우남 이승만은 우리가 알고 있던것 만큼 착한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박사학위 조차도 하바드, 위싱톤, 프린스톤대학에 흥정편지를 보내 받았다고 한다. 또 당시 미국에서 금지되어 있던, 여비서를 고용하여 대동하고 여행을 다니다 체포되어 벌금을 문 기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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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나쁜일은 바로 미주한인들이 상해임시정부를 위해 모금한 독립운동기부금을 착복하여 개인용도로 사용한것이고 이를 탓하는 조직원들을 깡패를 고용하여 살해하려 했다는 거다. 이 내용들은 2013년 초 미국의 문서보관소를 통해 일반에 공개되어 파문이 일기도 했다. 바로 그런 이승만의 목숨을 구명하여 준분이 지운 김철수 선생이셨다. 지운 선생이 이승만을 구명하여준 이유는 방법과 절차가 어찌되었건 미국박사이고 영어를 잘 구사함으로 회심하면 우리민족의 인재로 거듭날 것이라 여겼다. 그렇지 않아도 김구 선생은 코민테른 자금을 차지하기 위해 적지 않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을 암살해 왔는데 지운 선생도 이승만을 두둔한다는 이유로 김구 선생의 암살대상이 되어 김구 선생에게 격노했고 해방정국에서도 서로 만나는 자리조차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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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으로 1930년에 붙잡혀 8년8개월의 옥고를 치룬 지운 선생은 1940년 다시 감옥에 들어가 해방을 맞아서야 공주형무소에서 출옥했다. 당시 항소를 하자는 주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지운 선생은 “일본 제국주의 법률을 인정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1999년 ‘김철수 자료집’을 낸 한국정신문화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일제시대 지운 김철수 선생의 활동에 대해 ‘전통적인 유학의 선비사상에 기초한 민족주의 운동’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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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은 해방 이후 “자발적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좌•우익의 통일정부 수립과 모든 파당은 통일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늘 주장하며 이승만과 박헌영의 회담을 추진하는 등 좌익과 우익의 가교역을 자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운형 선생이 이승만의 사주를 받은 이필형등 백의사(김구 암살범 안두희도 백의사 단원이다)단원들에게 암살 당한 후, 이승만이 친구 설산 장덕수를 통해 언론에 정치를 떠나 조용히 살겠다고 광고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는 제의를 받아드려 1947년 모든 정치활동을 접고 낙향한다. 물론 좌•우익 대결과 세력 다툼 등 혼란스런 해방 정국에 대한 환멸도 큰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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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은 “원래 좌나 우가 같이 필요하다. 보수도 있고 진보도 있어야 발전하는 것”이라며 당파성을 초월해 활동했다. 하지만 선생의 노력은 빛을 보지 못했다. 박헌영과 당내 갈등을 빚은 뒤 당으로부터 정권 처분을 받은 선생은 사회노동당 창당에 이름을 올리지만 1947년 2월 이승만에 의해 사로당이 해체되자 ‘그만 죽고싶은 심정’이라 토로하고 이승만이 제안한 목숨보존책을 수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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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지운 선생에게 신문에 정치은퇴를 선언하고 낙향하면 예전에 빚진 목숨값으로 목숨만을 살려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여 지운 선생은 지방일간지에 정치은퇴를 선언하고 부안 백산으로 낙향하여 움막을 짖고 칩거하다 1986년 생을 마쳤다. 이승만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보은의 차원으로 해방후 유일하게 이승만 정권으로 부터 목숨을 보존받은 유일무이한 사회주의계열 독립지사라는 의미가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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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사학과 임경석 교수는 김철수 선생에 대한 평에서 “식민지 사회 또 해방 공간에서 민족과 공공의 가치를 개인적 이해 관계보다 앞세워 추구했다”면서 “ 선생은 사회주의운동, 독립운동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권력자적인 지위를 갖지 못했다”며 나름대로의 낙향 배경을 설명하기도 한다. 김철수 선생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전 부안 백산고 교장 고산 정진석 선생은 생전에 선생에 대한 평에서 “그는 좌익 중심의 정치 행태를 극복하려 했다”면서 “비록 통일정부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 모두에게서 존경을 받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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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은 낙향 뒤에는 자연과 벗하며 농사에 전념했다. 지운 선생은 의제 허백련, 오지호 화백 등 지역의 예술인과도 교류했다. 지운 선생은 사회주의자로서의 면모와 남한 사회 개혁에 대한 관심을 잃지는 않았다. 지운 선생에 관한 논문을 집필한 정혜경 박사는 지운 선생에 대해 “해방 이후에 북으로 가지 않고 남한에서 사회 개혁을 이루려고 노력했다”면서 “지역에서 개인적인 차원에서 조봉암 지지 활동을 했으며 지금으로 보면 일종의 시민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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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백산면 대수리 한 야트막한 구릉에 자리잡은 10평 안팎의 초라한 토담집은 지운 선생의 생애를 잘 말해주고 있다. 앞으로 논밭, 뒤로는 소나무숲이 이어진 토담집은 지운 선생이 1968년 손수 지은 거다. 지운 선생은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고 통일을 염원하며 작은 고통이라도 나눈다는 자세로 ‘이 정도면 편안하다’는 뜻으로 ‘이안실(易安室)’이라 이름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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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의 삶은 그다지 편안하지는 못했다. 명백한 독립운동 공적이 있고 별다른 친북활동의 전력이 없었음에도 사회주의자였다는 이유만으로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사정권하에서 1급 감시대상으로 분류돼 한평생 해외여행 한번 못하고 공안당국의 감시를 받았다. 또 사회주의자이면서도 ‘민족적이고 유교적’인 성향 때문에 북한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한, 남북 분단 현실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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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지운 김철수 선생이 설파하시던 “원래 좌나 우가 같이 필요하다. 보수도 있고 진보도 있어야 발전하는 것”이라던 말씀이 떠올라 그 뜻을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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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이트:

1. http://ko.wikipedia.org/wiki/이명직_(문신)

2. http://ko.wikipedia.org/wiki/김철수_(1893년)

3. http://ko.wikipedia.org/wiki/우장춘

4. http://blog.daum.net/enature/15850324

5 .http://blog.daum.net/enature/15851296

6. 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78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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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부(赤壁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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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戌之秋 七月旣望 蘇子與客 泛舟遊於赤壁之下. 淸風徐來 水波不興.

임술지추 칠월기망 소자여객 범주유어적벽지하. 청풍서래 수파불흥.

임술(壬戌)년 가을 7월 기망(旣望)에, 소자(蘇子;소동파)가 손[客]과 배를 띄워 적벽(赤壁) 아래 노닐새, 맑은 바람은 천천히 불어오고 물결은 일지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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擧舟屬客 誦明月之詩 歌窈窕之章. 少焉, 月出於東山之上 徘徊於斗牛之間.

거주촉객 송명월지시 가요조지장. 소언, 월출어동산지상 배회어두우지간.

술을 들어 손께 권하며 명월(明月)시를 외우고, 요조(窈窕)의 장(章)을 노래하니, 이윽고 달이 동산 위에 솟아올라, 북두성(北斗星) 견우성(牽牛星)사이를 서성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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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露橫江 水光接天 縱一葦之所如 凌萬頃之茫然.

백로횡강 수광접천 종일위지소여 능만경지망연.

흰 이슬은 강에 비끼고, 물빛은 하늘에 이어졌고, 한잎의 갈대같은 배가 가는 대로 맡겨, 일만 이랑의 아득한 물결을 헤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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浩浩乎 如憑虛御風 而不知其所止

호호호 여빙허어풍 이부지기소지.

넓고도 넓구나, 허공에 의지하여 바람을 탄듯하니 그칠 데를 알 수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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飄飄乎 如遺世獨立 羽化而登仙 於是 飮酒樂甚 扣舷而歌之

표표호 여유세독립 우화이등선 어시 음주락심 구현이가지

초연히 나부껴 인간 세상 버리고 홀로 서서, 날개 돋치어 신선(神仙)된 듯 오르는 것 같더라. 이에 술마시고 흥취 도도해 뱃전을 두드리며 노래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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歌曰 桂棹兮蘭漿 擊空明兮泝流光 渺渺兮予懷 望美人兮天一方.

가왈 계도혜난장 격공명혜소류광 묘묘혜여회 망미인혜천일방

노래에 이르기를 "계수나무 노와 목란(木蘭) 삿대로 물에 비친 달을 쳐서 흐르는 달빛을 거슬러 오르네. 아득한 내 생각이여, 아름다운 사람(美人)을 하늘가에 바라보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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客有吹洞簫者 倚歌而和之 其聲嗚嗚然 如怨如慕 如泣如訴

객유취통소자 의가이화지 기성오오연 여원여모 여읍여소.

손님중에 퉁소를 부는 이 있어 노래를 따라 화답(和答)하니, 그 소리가 슬프고도 슬퍼 원망하는 듯 사모하는 듯, 우는 듯 하소연 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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餘音嫋嫋 不絶如縷 舞幽壑之潛蚊 泣孤舟之嫠婦.

여음요요부절여루 무유학지잠문 읍고주지리부.

여음(餘音)이 가늘게 실같이 이어져, 그윽한 골짜기의 물에 잠긴 교룡(蛟龍)을 춤추게하고, 외로운 배를 의지해 살아가는 과부를 울릴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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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者 추然正襟 危坐而問客曰 何爲其然也?

소자추연정금 위좌이문객왈 하위기연야?

소자(蘇子)가 근심스레 옷깃을 바르고 곧추앉아 손에게 묻기를 "어찌하여 그러한가?"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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客曰 : 月明星稀 烏鵲南飛 此非曹孟德之詩乎?

객왈 : 월명성희 오작남비 차비조맹덕지시호?

손님이 말하기를 "'달은 밝고 별은 성긴데, 까막까치가 남쪽으로 날아간다.'는 것은 조맹덕(曹孟德)의 시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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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望夏口 東望武昌 山川上繆 鬱乎蒼蒼. 此非孟德之困於周郞者乎?

서망하구 동망무창 산천상무 울호창창. 차비맹덕지곤어주랑자호?

서쪽으로 하구(夏口)를 바라보고 동쪽으로 무창(武昌)을 바라보니 산천(山川)이 서로 얽혀 빽빽하고 푸른데, 여기는 맹덕이 주랑(周郞)에게 곤욕(困辱)을 치른 데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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方其破荊州 下江陵 順流於東也 軸艫千里 旌旗蔽空

방기파형주 하강릉 순류어동야 축로천리 정기폐공

바야흐로 형주(荊州)를 격파하고 강릉(江陵)으로 내려감에, 흐름을 따라 동으로 가니, 배는 천 리에 이어지고 깃발은 하늘을 가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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釃酒臨江 橫槊賦詩 固一世之雄也 而今安在哉?

시주임강 횡삭부시 고일세지웅야 이금안재재?

술을 걸러 강가에 가서 창을 비끼고 시를 읊으니 진실로 일세(一世)의 영웅(英雄)일 진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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況吾與子 漁樵於江渚之上 侶魚蝦而友糜鹿

황오여자 어초어강저지상 여어하이우미록

하물며 나는 그대와 강가에서 고기 잡고 나무하며, 물고기와 새우를 짝하고 고라니와 사슴을 벗함에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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駕一葉之輕舟 擧匏樽而相屬 寄蜉蝣於天地 渺滄海之一粟.

가일엽지경주 거포준이상촉 기부유어천지 묘창해지일속.

한 잎의 좁은 배를 타고 술잔 들어 서로 권하고, 하루살이 삶을 천지(天地)에 의지하니 아득히 넓은 바다의 한알의 좁쌀알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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哀吾生之須臾 羨長江之無窮 挾飛仙以遨遊 抱明月而長終 知不可乎驟得 託遺響於悲風

애오생지수유 선장강지무궁 협비선이오유 포명월이장종 지부가호취득 탁유향어비풍

우리 인생 짧음을 슬퍼하고 장강(長江)의 끝없음을 부럽게 여기노라. 날으는 신선 끼고 즐겁게 노닐며, 밝은 달을 안고서 길이 마치는 것은 갑자기 얻지 못할 줄 알 새, 끼치는 소리를 슬픈 바람에 부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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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者曰: 客亦知夫水與月乎?

소자왈: 객역지부수여월호?

소자 말하되 "손님꺼서도 대저 물과 달을 아시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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逝者如斯, 而未嘗往也. 盈虛者如彼 而卒莫消長也.

서자여사, 이미상왕야. 영허자여피 이졸막소장야.

가는 것은 이와 같으되 일찍이 가지 않았으며, 차고 비는 것이 저와 같으되 마침내 줄고 늚이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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蓋將自其變者而觀之 則天地曾不能以一瞬

개장자기변자이관지 칙천지증불능이일순

무릇 변하는 것에서 보면 천지도 한 순간일 수 밖에 없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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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其不變者而觀之 則物與我皆無盡也 而又何羨乎?

자기불변자이관지 즉물여아개무진야 이우하선호?

변하지 않는 것에서 보면 사물과 내가 모두 다함이 없으니 또 무엇을 부러워하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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且夫天地之間 物各有主

차부천지지간 물각유주

또, 대저 천지 사이의 사물에는 제각기 주인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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苟非吾之所有 雖一毫而莫取 惟江上之淸風 與山間之明月

구비오지소유 수일호이막취 유강상지청풍 여산간지명월

진실로 나의 소유가 아니면 비록 한 터럭일지라도 가지지 말 것이나,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간(山間)의 밝은 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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耳得之而爲聲 目遇之而成色 取之無禁 用之不竭

이득지이위성 목우지이성색 취지무금 용지불갈

귀로 들으면 소리가 되고 눈에 뜨이면 빛을 이루어서, 가져도 금할 이 없고 써도 다함이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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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造物者之無盡藏也 而吾與者之所共適

시조물자지무진장야 이오여자지소공적

이는 조물주(造物主)의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나와 그대가 함께 누릴 바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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客喜而笑 洗盞更酌 肴核旣盡 杯盤狼藉 相與枕藉乎舟中 不知東方之旣白.

객희이소 세잔갱작 효핵기진 배반낭자 상여침자호주중 부지동방지기백

손이 기뻐하며 웃고, 잔을 씻어 다시 술을 드니 안주가 다하고 잔과 쟁반이 어지럽더라. 배 안에서 서로 팔을 베고 누워 동녘 하늘이 밝아 오는 줄도 몰랐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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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zbma Yang 지운선생任帖 무명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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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DnFZ-fLbg3U?si=OzZU5vB9nV2W21wl

 

https://youtu.be/E7WRPguTV9E?si=LQxFBjQS2dsn1Y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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