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_091 지운서화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서화 작품 101~125

忍齋 黃薔 李相遠 2020. 10. 22.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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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원 선생의 유품 보따리 중 지운 선생의 서화중에 세월의 부침에 헤지고 찢어진 작품들이 눈에 띈다. 그 빛바랜 작품들을 접하니 지운 선생이 와세다대학 정치학 실과를 마치고 본과 진학을 포기하고 중국 대만 조선 유학생을 규합하여 신아동맹단, 곡귀단 등을 만들어 본격적인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연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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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이 와세다대 유학시절인 1915년 9월 7일 화성 동탄 석우리(돌머루)에 칩거하며 전국에 똘똘한 자식들을 유학보내 나라 망할것에 대비하라며 사발통문을 돌려 본인 지운 선생과 많은 조선 청년들의 유학을 독려했던 나의 고조부 이명직(http://ko.wikipedia.org/wiki/이명직_(문신)) 선생이 친일세력에 의해 독살 당하여 돌아가신 소식을 접하자 이에 분연하게 일어나, 조국해방을 위해 싸우다가 죽어서 귀신이 되더라도 조선독립을 위해 울자는 뜻으로 1916년 곡귀단(哭鬼團)을 만들어 항일 저항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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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에 온 한국인 도지사가 친일연설을 하는 것을 보고는 단상에 뛰어 올라가 도지사 멱살을 잡고 항의하는 모습을 본 의재 허백련 화백은 그 의기에 감화되어 평생 교분을 이어왔고, 1916년 동경제대실과생으로 입학한, 역적 우범선의 아들 우장춘에게는 부친의 죄에 대한 속죄로 해방후 조국에 돌아가 조선의 농업발전에 생을 바칠 의식화도 시키는 발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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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16년에 지운 김철수 선생은 조선.중국.대만 유학생을 규합하여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도 결성한다. 지운 김철수 선생이 나에게 직접 말씀하시길 1915년 이명직 선생의 억울한 죽음이 없었다면 자신은 학자가 되어 살아갔을 것이라 이야기했다. 그때는 그 이명직 선생이 나의 고조부인지 꿈에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맨 마지막 곡귀단 조직원 단체 사진의 앉아있는 아랫줄 중앙이 지운 김철수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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