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_071 서화보따리

운암(雲菴) 조용민(趙鏞敏, 1926-2017) 선생 작품

忍齋 黃薔 李相遠 2020. 10. 26.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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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 방원 선생 유품보따리에는 행초서의 대가 운암(雲菴) 조용민(趙鏞敏) 선생의 시절엽서와 작품이 보인다. 원래 보따리를 뒤지다보면 큰 작품이 여러개 나오면 그때 소개할까 했는데 기억했던 생각과 사연을 잊어버릴까봐 꺙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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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진체가 뭔체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른들 말씀이 운암 선생의 필체는 동국진체의 맥을 잇는다고 했다. 운암 선생은 함안조씨의 집성촌인 전남 곡성군 죽곡면 봉정리에서 1926년 9월28일 조선초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려(趙旅)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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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선생은 원래 광주에서 가업인 자동차부품 판매업을 하다가 나이 마흔이 넘어 송곡(松谷) 안규동(安圭東)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밤낮으로 서예술을 연마하여 서예대가의 반열에 든 특이한 이력을 가진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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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선생은 외상값을 다 받으면 가업을 정리하고 서예에 전념하고자 했는데 몇년이 지나도 외상값을 받지를 못했다. 차일피일 하기 싫어서 1970년초 4천원만에 달하는 외상차용증을 다 태우고 서예를 시작하셨다. 그 신념으로 한국 서단을 대표하는 서예가의 한 분으로 남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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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선생은 늦각이로 서예를 시작하셨지만 연습한 화선지가 몇 트럭분이 되도록 용맹정진 하셨다. 생전에 좌우명은 우공이산(愚公移山)이었다. 누우면 천정에다 글씨를 쓰고, 밥을 먹을 때도 젓가락으로 밥상에 글씨를 연습했다. 어디서건 좋은 글귀가 보이면 담배종이 안쪽에다가도 글을 적어 모으곤 하였다. 벼루의 구멍을 내고 수백 자루의 붓을 닳게 하는 용맹정진이 운암 서예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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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태조비왕후오씨유적비(高麗太祖妃王后吳氏遺蹟碑), 정절공조려선생사적비(貞節公趙旅先生史蹟碑). 장흥위씨시조회주군사적비(長興魏氏始祖懷州君史蹟碑), 진각국사유적비(眞覺國師遺蹟碑), 도갑사사적비, 경복궁현판(膺祉堂), 백양사와 도갑사 일주문 등 전국 각지에 굵직한 비와 현판에 글씨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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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선생은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 대한민국 서예대전 초대작가, 광주시전, 전남도전 등 각종 공모전의 초대작가와 심사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중국 무릉대학 명예교수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또 한국 서예 100년전, 88올림픽 기념전, 광주 비엔날레 기념전, 한국서예 백인전, 전라남도 개도 100년 기념전, 호남 미술 100인전, 광주시립미술관 개관 기념 전국 중진 작가 초대전 등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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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광주비엔날레 기금 마련전, 5·18 부상자 동지회 기금 마련전, 민가협 기금 마련전, YMCA건립 기금 마련전, 노동문화제 지원전, 맹인 복지회 기금 마련전, 농아 복지회 기금 마련전, 언어 재활 기금 마련전 등 각 단체에 대한 지원과 불우 이웃돕기 기금 마련전에도 적극적으로 출품하여 이웃 사랑 실천에도 앞장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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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선생은 광주 예술의 거리에서 운암서예원을 운영하며 후진을 양성하다 서예원을 제자들에게 물려주고 10수 년 전 나주시 남평읍 오계리 진옥헌(振玉軒)에서 만년을 보내고 계셨는데, 2015년 5월 마당에서 넘어지신 이후에 병치례를 해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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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내 부친 방원 선생이 작고하시기 딱 1년전인 2017년 4월 7일 운암 선생도 세상을 달리하시고 곡성군 죽곡면 선영에 영면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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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선생은 운암서예원 제자들로 구성된 일묵회(一墨會)를 통해 매월 월례회시 부여한 공부과제 중 우수작을 표창하고 한 획 한 획 글씨 지도를 통해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대한민국서예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애일당 김효순을 비롯하여, 우계 조병춘, 목인 곽서흠, 연재 조송래, 마천 김현웅, 수현당 김영혜, 하곡 서경종, 하림 김국상, 고암 송경무, 한솔 임형, 죽오 김두수, 석현 이준형, 담현 서동국 등 국전과 시전, 도전 등에서 초대작가로 활동하는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이들은 매년 일묵회전을 열어 운암의 서맥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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