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3_미국이야기

[그만 들켜버린 한국어도 영어도 엉망인 삶]

忍齋 黃薔 李相遠 2021. 7. 10.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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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2월 서울 88올림픽을 마치고, 겨울학기 입학을 위해 웨스트버지니아에 인접한 버지니아의 시골 블랙스버그의 버지니아텍 대학원 농공학과로 유학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매사추세츠 보스턴의 노스이스턴대학원 토목공학과와 로드아일랜드 프로비던스의 브라운대학 대학원 지리학과 지구물리학 교실을 거쳐 미국 환경청의 불포화대 불균일 층 오염추적 프로그램 개발 프로젝트를 수주하여 개발하는 과정을 통해 1999년 12월 장장 10년의 세월에 걸쳐 로드아일랜드 킹스턴의 로드아일랜드 주립대 대학원 환경공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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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형평상 과외나 학원 같은 보조 교육 없이 한국 중고등학교 교육을 통해 받은 영어 공부 만으로 결행한 영어권 미국 유학으로 이룬 성과였습니다. 당연히 영어 실력은 겨우 수업받고 연구하고 논문 쓰는 정도의 수준이었지요. 부족한 영어 실력은 늘 걸림돌이었습니다. 까다로운 선생을 만나면 부족한 영어 구사 능력으로 뼈아픈 고통과 좌절감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처음 유학 왔던 버지니아텍에서 영어강의를 제대로 알아먹지 못해 수강하던 과목들을 줄줄이 수강 취소했습니다. 영어가 많이 필요 없는 공업 수학과 실험통계학 겨우 두 과목을 남겨놓았습니다. 월급을 주고 학비를 주던 지도교수님이 좌절해 있던 제게 진지하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학교에서 공부를 못해서 쫓겨나는 경우는 있어도 영어가 좀 부족해서 쫓겨나는 경우는 없다”며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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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부터는 누가 영어 실력을 트집 잡으면 문법 같은 건 무시해가며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한국에 갔다면 한국 사람처럼 한국어를 할 수 있겠냐’고 말이지요. ‘한국 사람인 내가 미국에서 영어로 공부하며 살아가는 게 당신이면 미국 사람이 한국에서 나처럼 한국어로 공부하며 살아갈 수 있겠냐’며 항의를 했습니다. 미국 사람들에게 고마운 점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나의 그 항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 덕에 포기하지 않고 마음껏 공부하고 연구하고 겁도 없이 미국 정부의 각종 프로젝트 수행 모집에 닥치는 데로 제안서도 제출했습니다. 제출했던 수백 개의 제안서 중의 하나가 받아들여져 프로젝트를 무사히 수행하며 박사과정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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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프로젝트 덕에 미국 정부의 공무원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삶이 좀 안정되어 가고 한국에서 무고하게 잡혀가 고문받고 했던 그 억울한 심정이 2003년 5.18민주화유공자증을 받고 나니 많이 풀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나니 마음이 풀어져 한국 SNS를 통해 블로그도 만들고 페이스북도 하게 되었지요. 그곳에 억눌렸던 많은 이야기를 쓰고 남겼습니다. 1988년 한국을 떠나오며 끊어졌던 한국과의 정서를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소통하는 한국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어느덧 블로그는 누적 방문 횟수가 4백5십만 명을 넘어갔습니다. 페이스북 친구는 5천 명을 왔다 갔다 하기도 합니다. 한국지역 방송의 다큐멘터리에도 몇 번 나왔습니다. 라디오 방송 인터뷰도 있었습니다. 몇몇 신문과 잡지에 나오기도 했습니다. 한국 국책과제도 여러 해 수행하여 과학기술부 장관상도 수상받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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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의 호스트 겸 작가로 인연을 맺었던 소설가 은미희 작가님은 저를 소재로 신문 칼럼에도 글을 남기셨고 최근에는 문학지에 단편소설도 발표해 주셨습니다. 열심히 살아온 삶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창때는 한국 정치인들 곁에 들러리도 서보기도 했습니다. 인터넷과 우편물을 통해 수많은 분의 복에 겨운 사랑도 받고 있습니다. 이메일을 통해 하루에도 몇 통씩 격려와 응원을 보내오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일일이 그 고마움에 답도 제대로 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능력이 되질 못 해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고마운 마음 내주신 분들에게 사람 구실 못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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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간혹, 정확히 말하면 제법 많은 분이 비난과 비방, 심지어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욕지거리를 퍼붓는 분들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에 아픈 상처를 받았고 자꾸만 생각이 나서 많이 우울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렇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뼈아픈 지적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한글과 영어의 철차 법과 문법이 틀린 걸 지적해 주시는 분들입니다. 어떤 분들은 제가 창피하지 않게 조용히 틀린 부분을 바로 잡아주시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창피하고 모멸스럽게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주시기도 합니다. 제가 되는 데로 쓴 글들을 꼼꼼하게 읽고 바로 잡을 기회를 주시니 고마운 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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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고마운 분 중 제법 많은 분이 제가 한글을 잘못 쓰면 ‘한국 SNS 근처도 얼신거리지 말고 미국 속에 처박혀 살라’고 합니다. 또, 영어를 잘못 쓰면 ‘미국에서 박사하고 공무원 한다면서 영어문장 하나 제대로 못 쓴다’라며 ‘한심하다’라고 합니다. 그런 지적을 받으면 저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 됩니다. 그 수많은 댓글, 메시지, 이메일 중에 꼭 그런 것들만 먼저 눈에 들어오는지 야속합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꼭 물리적 폭행만이 아닙니다. 말속에 날카로운 비수는 아주 치명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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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모 인사가 박사 영문 제목에 “member yuji”라고 썼다고 저도 재미있어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제 영어 실력을 들켜버리고 만 것 같아졌습니다. 한국에서 27년을 살고 미국에서 33년을 살고 있습니다. 제 블로그며 페이스북의 게시글을 꼼꼼하게 읽어주시는 분들 덕분에 그만 저도 형편없는 영어 실력을 들켜버리고 말았습니다. 한국말도 엉망이고 미국말도 엉망입니다. 10년 대학원 공부조차도 구걸과 동냥으로 마쳤습니다. 요즘은 미국에 유학 오는 한국 젊은이들이 거의 원어민 수준의 영어 실력을 보입니다. 이제 환갑을 넘기고 있습니다. 그나마 구걸 동냥으로 만들었던 구차한 영어 실력도 점점 까막까막해집니다. 지적해주시는 분들에게 보답으로나마 초심으로 열심히 영어 공부해보겠습니다. 제 인생 말년에 정말 큰일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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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다행인 건 아들 녀석이 한국말을 제대로 배워오겠다며 여러 해를 한국에서 살아주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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