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카테고리 없음

034. 라다크리슈난의 인도철학사 1923 1927 - 힌두전통을 힌두교로 만들어 인도를 분열시킨 대영제국의 꼭두각시

忍齋 黃薔 李相遠 2022. 12. 16. 17:53
반응형

https://youtu.be/u1qNyIqrJM0

학자이자 철학자이며 정치가였던 사르베팔리 라다크리슈난(Sarvepalli Radhakrishnan)은 20세기에 가장 인정받고 영향력 있는 인도 사상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라다크리슈난은 일생을 통한 광범위한 저술활동을 통해 다양하게 인식한 아베다 베단타(Advaita Vedanta) 및 성령의 종교로서의 힌두교를 정의하고 옹호하고 선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힌두교가 철학적으로 일관되고 윤리적으로 실행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경험에 대한 라다크리슈난의 관심과 서양 철학 및 문학 전통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은 그에게 인도와 서양 사이의 가교 역할이라는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는 종종 인도와 서양의 철학적 맥락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며 글 전체에서 서양과 인도의 출처를 모두 사용합니다. 이 때문에 라다크리슈난은 서구에 힌두교를 대표하는 학자로 인식되었습니다. 그의 긴 저술 경력과 그의 많은 출판물은 힌두교, 인도 및 동양에 대한 서양의 이해를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20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있는 책 100선 중 34번째 책 인문학 부문 4번째 책 “사르베팔리 라다크리슈난 (SARVEPALLI RADHAKRISHNAN)이 1923년부터 1927년까지 출판한 인도철학사 (Indian Philosophy)”를 시작하기에 앞서
.
“사르베팔리 라다크리슈난 (SARVEPALLI RADHAKRISHNAN)의 생애”를 살펴보겠습니다.
.
1. 어린 시절 (1888-1904)
.
사르베팔리 라다크리슈난(Sarvepalli Radhakrishnayya)은 1888년 9월 5일 남인도 마드라스 북동쪽으로 40마일 정도 떨어진 안드라 프라데시(Andhra Pradesh)의 티룻타니(TIRUTTANI)라는 마을에서 가난한 브라흐만 계급 하급 세무 공무원인 부친 사베팔리 비라스와미(Sarvepalli Veeraswami)와 모친 시탐마(Sithamma)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주민이 주로 힌두교도로 이루어진 티룻타니는 성스러운 순례지로 라다크리슈난의 가족은 영적 환경에서 살았습니다. 라다크리슈난의 초기 어린 시절과 교육에 대해서는 거의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라다크리슈난은 또한 자신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
1896년에 그는 인도 전역에서 힌두 방식을 따르지만 신앙적으로 예수만 모시고 증거하는 사람들인 예수 박타 (Yeshu Bhakta)를 끌어들이는 독특한 국제적인 풍미를 지닌 도시인 티루파티(Tirupati) 의 인근 순례 센터에 있는 허만스버그 에반젤리칸 루터란 미션 스쿨(Hermansburg Evangelical Lutheran Mission School)을 4년동안 다녔습니다. 그곳에서 젊은 라다크리슈난은 기독교 선교사들과 개인적인 종교적 경험을 향한 충동으로 19세기 기독교 신학을 처음 접했습니다. 미션 스쿨에서 가르치는 기독교신학은 라다크리슈난의 바탕인 힌두교 티루말라(Tirumala) 사원과 음양으로 비교가 되었습니다.
.
1900년에서 1904년 사이에 라다크리슈난은 미국 개혁 교회의 어메리칸 아르콧 미션(American Arcot Mission)이 운영하는 학교인 벨로르(Vellore)에 있는 엘리자베스 로드먼 부히스 칼리지(Elizabeth Rodman Voorhees College)에 다녔습니다. 미션의 임무는 복음을 전파하고, 모국어 전도지를 발행하고, ‘이교도’ 대중을 교육하는 것이었습니다. 라다크리슈난은 이곳을 "의로운 하나님, 무조건적인 은혜 및 선택을 강조하고 힌두교를 지적으로 일관성이 없고 윤리적으로 건전하지 않다고 비판한 네덜란드 개혁 신학을 소개"한 곳으로 기술했습니다. 동시에 선교단은 기근 구호, 병원 설립,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위한 교육에 참여함으로써 교육, 건강 관리 및 사회 향상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주었습니다.
.
이러한 활동은 종종 개종을 위한 인센티브 역할을 했기 때문에 미션의 임무와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라다크리슈난은 자신의 힌두교 감성에 대한 심각한 공격으로 보일 수 있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그는 또한 선교부가 기독교 복음 전파라는 이름으로 수행한 사회 프로그램의 긍정적인 기여를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라다크리슈난은 8세기 인도 철학자인 상카라(Śaṅkara)의 아드바이타 베단타(Advaita Vedanta)에 대한 암묵적인 수용과 스마타 전통(Smarta Tradition)과 관련된 헌신적 관행의 중심성에 대한 인식을 그의 양육으로부터 물려 받았습니다. 티루파티에서의 루터파 기독교 선교사들과 접촉한 그의 경험은 기독교와 힌두교 사이의 공통점을 찾았고 이런 라다크리슈난의 사회 복음의 문화적 규범과 종교적 세계관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
2. 결혼 생활 (1904-1956)
.
라다크리슈난은 벨로르(Vellore)에 살면서 전통에 따라 가족이 주선하여 16세때인 1904년에 먼 사촌인 시바카무암마 (Sivakamuamma)와 결혼했습니다. 이 둘 사이에 파드마바티(Padmavati), 루크미니(Rukmini), 수실라(Sushila), 순다리(Sundari) 및 샤쿤탈라(Shakuntala)라는 다섯 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역사가로서 주목할만한 경력을 쌓은 사베팔리 고팔(Sarvepalli Gopal) 이라는 아들이있었습니다. 그의 손자와 증손자를 포함한 라다크리슈난의 많은 가족 구성원은 전 세계 학계, 공공 정책, 의학, 법률, 은행, 비즈니스, 출판 및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시바카무암마 (Sivakamuamma)는 라다크리슈난과 약 53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하고 1956년 11월 26일에 사망했습니다.
.
3.마드라스 기독교 대학(1904-1908)
.
라다크리슈난은 결혼한 해인 1904년에 ‘마드라스 크리스천 칼리지(Madras Christian College)’에 들어갔습니다. 이때 라다크리슈난은 물리학에 관심이 있었고 1906년에 석사 학위를 받기 전에는 법학을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라다크리슈난은 형편이 어려워 같은 대학을 나온 사촌이 철학 교과서를 물려주면서 전공이 철학으로 결정됐습니다. 그래서 철학을 전공하여 1907년에 학사와 석사과정을 마쳤습니다. 라다크리슈난이 힌두교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글로 적기 시작한 것도 이 대학에서 기독교를 경험한 뒤였습니다. 라다크리슈난은 이곳에서 버클리(Berkeley), 라이프니츠(Leibniz), 로크(Locke), 스피노자(Spinoza), 칸트(Kant), JS 밀(Mill),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피히테(Fichte), 헤겔(Hegel),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및 플라톤(Plato)등의 유럽 철학을 접했습니다.
.
라다크리슈난은 그의 석사 지도교수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비인도인 멘토인 AG 호그 (Hogg) 교수로부터 철학적 방법과 신학적 견해를 전수받았습니다. 호그는 알브레히트 리츨(Albrecht Ritschl)의 제자인 아서 티티우스(Arthur Titius)에게서 신학 교육을 받았고 철학자 앤드류 세스 프링글-패티슨(Andrew Seth Pringle-Pattison) 밑에서 공부한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였습니다. 주관적 인식에 중점을 둔 종교적 가치 판단과 궁극적 실재의 본질을 발견하려는 이론적 지식 사이의 리츨리안(Ritschlian)식 구분은 라다크리슈난의 철학적, 종교적 사고에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라다크리슈난이 학문에 격렬한 종교적 논쟁이 시작된 곳도 이 대학에서 부터입니다. 그의 석사논문인 “베단타의 윤리와 그의 형이상학적 전제들”은 은사인 호그 교수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
4. 초기 교육 및 저술 (1908-1912)
.
1908년에 석사 학위를 마친 라다크리슈난은 가족에 대한 부양의무 때문에 영국에서 공부하기 위한 장학금 신청을 포기하고도 마드라스에서 일자리도 구하지 못한 채 고군분투했습니다. 다음 해인 1909년 4월 21살의 나이로 모교인 마드라스 크리스천 칼리지(Madras Christian College)의 윌리엄 스키너(William Skinner) 학장의 도움으로 라다크리슈난은 마드라스(Madras)의 프레저던시 칼리지(Presidency College)에서 임시 강사직을 확보하여 처음으로 유럽 철학뿐만 아니라 심리학의 다양한 주제에 대해 강의를 시작하면서 베단타, 불교, 자이나교 등의 인도철학 뿐만 아니라 플라톤, 플로티누스, 칸트, 브래들리, 베르그손, 막스, 실존주의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 전반에 대해 더욱 깊게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임시 강사로서 논리, 인식론 및 윤리 이론 등을 강의해야 해서 이 대학에서 산스크리트어도 공부해야 했습니다.
.
임시 강사 기간 동안 라다크리슈난은 인도 뿐만 아니라 유럽 저널에 논문을 기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마드라스(Madras)의 가디언 프레스(Guardian Press)에 그의 석사 논문이 발표됐고 같은 논문이 모던 리뷰(Modern Review) 및 마드라스 기독교 대학 잡지(The Madras Christian College Magazine)에 실렸습니다. 라다크리슈난의 노력은 이런 인도 저널에는 실렸지만1911년 국제 윤리 저널(The International Journal of Ethics)에 "바가바드 기타와 칸트의 윤리(The Ethics of the Bhagavadgita and Kant)"라는 논문이 실리기 전까지는 유럽진출은 못했습니다. 그의 편집된 심리학 강의 노트는 심리학의 기초(Essentials of Psychology)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습니다.
.
5. 전쟁, 타고르, 마이소르(1914-1920)
.
드디어 1914년부터 학자로서 라다크리슈난의 명성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임시 조교수직에서 1916년 3개월 동안 그는 마드라스를 떠나 안드라프라데시(Andhra Pradesh)의 아난타푸르(Anantapur)에 일반직으로 배치되었고 1917년에 다시 라자문드리(Rajahmundry)로 또 전근가서 일반직으로 1년을 보낸 후 1918년에야 마이솔(Mysore) 대학 철학과 교수로 임명되어 직업적 안정을 찾았습니다. 라다크리슈난은 더 이상 단순히 일원론적 형태의 우파니샤드 교리에 기초한 베단타(Vedanta)를 정의하고 방어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베단타의 서구 경쟁자뿐만 아니라 그가 본 서구 철학적 기독교와 서구 정신 일반에 직접 맞서려고 했습니다.
.
이러한 그의 힌두철학에 대한 연구는 식민모국 영국의 필요에 맞물려 과분한 지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전까지 여러 종파와 여러 철학이 느슨하게 결합된 풍습과 관습에 불과했던 힌두교를 오만가지의 철학을 모아 종교와 비슷한 것으로 만들고 카스트 서열을 굳건하게 하려던 영국 식민지배 의도와 맞아 떨어졌습니다. 영국은 “인도인은 철학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너무 분할되어 인도를 국가로 발전시킬수 없다”는 생각을 인도인에게 주입시키고 싶었습니다.
.
라다크리슈난의 논쟁적인 주장은 인도와 유럽 모두에게 정치적 혼란을 주었고 이 기간 동안의 논문과 저서는 힌두교가 철학적으로 기독교에 버금가는 종교로 탄생하는 바탕을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때 영국은 인도의 자치권을 미끼로 인도군의 도움을 받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약속을 저버리고 인도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롤라트법’을 만들었습니다. 그 여파로 1919년 4월 13일 1만여 명의 인도인들이 인도 북부 암리차르의 영국군 요새 앞 자리왕와라 바그 광장에서 롤라트법 철폐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영국군의 시위군중에 대한 무차별 사격으로 4천명이 죽고 1천명이 부상당하는 학살사건이 발생했습니다.
.
그 첫저서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철학(The Philosophy of Rabindranath Tagore)”을 시작으로1920년까지 18권을 저술했고 저명한 유럽저널에 힌두교의 해석을 다루고 확장한 10개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라다크리슈난의 1920년 발표한 “현대철학에서의 종교의 통치(The Reign of Reign in Contemporary Philosophy)”는 “기독교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처럼 “힌두교는 전생의 업보와 이생의 업보가 내생의 탄생을 주도한다”라는 윤회사상등을 동원한 힌두적 사상과 관습의 힌두교라는 종교화가 가속화되었습니다.
.
라다크리슈난은 벵골 시인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의 시와 산문을 통해 타고르의 미학까지 자신의 철학적, 종교적 성향에 대한 인식론적 해석에 사용하여 평생을 타고르의 글을 반복적으로 인용했습니다. 기독교적 배경을 바탕으로 비교해가는 라다크리슈난의 힌두교에 대한 철학과 종교화는 영국제국의 식민철학과 그 괴를 함께하며 영국의 절대적 지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
6. 캘커타와 조지 5세 석좌 교수 (1921-1931)
.
이어1921년 2월에 캘커타 대학 철학과에 조지 5세 석좌 교수로 임명되어 인도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자가 되어 마이솔 대학 교수된지 2년 반 만에 처음으로 남인도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캘커타에서 라다크리슈난은 초기에 경험한 기독교와 대비한 힌두교적 인도 철학사 두 권을 작업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책은 마이소르에서 시작하여 1923년에 출판되었고 두 번째 책은 4년 후에 출판되었습니다. 영국식민제국의 후원으로1920년대 내내 라다크리슈난의 학자로서의 명성은 인도와 서구에서 하염없이 높아졌습니다. 1926년에는1927년에 ‘삶에 대한 힌두교의 견해(The Hindu View of Life)’로 출판된 업튼 강의(Upton Lectures)를 하기 위해 옥스포드 맨체스터 칼리지에 초대 되었습니다.
.
1929년에 한 히버트 강의(Hibbert Lectures)는 나중에 ‘인생에 대한 이상주의적 견해(An Idealist View of Life)’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라다크리슈난의 대표적 연구주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힌두철학을 인도의 대표적 종교로 제시했습니다. 이러한 무반성적 교조주의는 모든 종교의 참된 기초인 '경험적 종교'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힌두철학을 통한 비판적이고 과학적인 태도가 힌두교라는 종교를 기독교와 동등한 반열에 세울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가 정의한 힌두교인 ‘아드바이타 베단타(Advaita Vedanta)’로 인도가 서양의 진정한 철학적, 신학적, 문학적 전통과 맛설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
옥스포드에서 라다크리슈난의 학문적 명성이 높아지는 동안 캘커타에서는 갈등과 대립이 커져갔습니다. 간디(Gandhi)의 무저항 운동은 비난을 받았고, 칼리파트 운동은 인도 무슬림 공동체를 분열시켰고, 인도의 힌두교와 힌두교가 아닌 종교간에는 적대감이 증가되어 갔습니다. 1927년에는 사이먼 위원회(Simon Commission)를 통해 힌두교적 가부장주의를 강화시키고 종교간 갈등을 촉발시켰습니다. 영국에 대한 인도의 저항이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지만 1930년 3월 12일부터 4월 30일까지 벌어진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인 소금 행진 언론 보도로 인해 민족적 무력 저항은 무산되었습니다. 인도인간의 분열과 권력 투쟁은 가속화되었고 대영제국의 신보수주의는 1930년대 초 런던 원탁 회의를 무력화시켰습니다. 라다크리슈난을 통해 힌두풍습을 종교로 승화시키고 각 종교로 분열시켜 인도의 정치적 불안정을 강화하고 영속화시켰습니다.
.
7. 1930년대와 1940년대
.
라다크리슈난은 대영제국의 의도한 데로 힌두철학을 힌두교로 발전시킨 공로로1931년6 월에 조지 5 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같은 해에 새로 설립된 월테어(Waltair)의 안드라 대학교(Andhra University)에서 1936년까지 행정 부총장직을 맡았습니다. 1932년 4월 그는 총독으로부터 "윌링던 백작(Earl of Willingdon)"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그 후 "경(Sir)"라는 칭호가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이어1936년부터 5년 동안 캘커타 대학의 부총장으로 재직했으며 동시에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옥스퍼드 대학의 비교 종교학 교수에 임명되었습니다. 라다크리슈난은 기사작위 호칭은 인도 독립 후 사용을 중단하고 '박사'로 불리길 선호했습니다.
.
1939년에는 ‘영국 학술원 특별회원(FELLOW OF THE BRITISH ACADEMY)’으로 선출되었습니다. 1939년 후반에 라다크리슈난은 뉴델리에 있는 베나레스 힌두대학교(Benares Hindu University, BHU)에서 부총장직을 맡아 간디(Gandhi)가 암살되기 2주 전인 1948년 1월 중순까지 근무했습니다. 베나레스 힌두대학교를 사임한 직후 라다크리슈난은 대학 교육 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위원회의 1949년 보고서는 대학 교육의 상태를 평가하고 새로 독립된 인도의 개선을 위한 권장 사항을 제시했습니다. 라다크리슈난은 ‘대학교육과 종교교육의 목적(The Aims of University Education and Religious Education)’을 통해 인도를 힌두교국가로 만들 생각을 했습니다.
.
인도의 전통을 힌두교라는 종교의 틀속에 넣은 라다크리슈난의 이러한 노력은 결국 인도의 공산주의는 바이 파르마난드(Bhai Parmanand)와 그의 후계자 VD 사바르카르(Savarkar)의 지도 아래 힌두 마하사바의 이데올로기적 개화로 더욱 강화되었고, 무함마드 이크발(Muhammad Iqbal)의 무슬림적 주장에 대한 요구는 무함마드 진나(Muhammad Jinnah)에게 독립 파키스탄을 주장할 명분을 제공했습니다. 결국 라다크리슈난은 인도를 종교와 민족간으로 분열시켰습니다. 라다크리슈난에게 있어 대학 교육은 개인의 발전을 촉진하고 인도를 결속력시키고 국가 비전의 명료성을 창출하는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걸쳐 라다크리슈난은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들만이 인도를 건설하고 지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8. 독립 후: 부통령 및 대통령
.
인도 독립 후 라다크리슈난은 인도의 정치와 국제 문제 적극 참여했습니다. 라다크리슈난은 1946년부터 1951년까지 인도 유엔대표단을 이끌었고 유네스코(유엔 교육, 과학 및 문화 기구)에도 적극 참여했습니다. 라다크리슈난은 또한 인도 독립 직후 2년 동안 인도 제헌의회 의원으로 재직했습니다. 라다크리슈난은 대학 위원회의와 옥스포드의 스폴딩(Spalding) 교수, 유네스코와 제헌의회에서 바쁘게 1940년대말을 보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6년부터 1952년까지 유네스코 인도대표를 지내며 모스크바 주재 인도 대사로 재직했습니다. 1952년에 인도 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1953년부터 1962년까지 델리 대학 총장을 역임했습니다.
.
1954년 인도 최고훈장인 바라트 라트나(Bharat Ratna)를 수여받았고, 1962년에는 독립 인도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프라사드(RAJENDRA PRASAD)의 뒤를 이어 제2대 대통령이 되어 1967년까지 재직하였습니다. 1963년에는 영국 왕립 공로 훈장을 받았습니다.
라다크리슈난가 부통령에 취임할 때는 한국전쟁이 한창이었고, 1960년대 초에는 중국과 정치적 긴장이 있었고, 이어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적대감이 팽배했습니다. 더욱이 냉전은 동서양을 갈라놓았고 서로를 의심하고 수세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라다크리슈난은 통합적 경험의 영적 토대에 기초한 창조적 국제주의 촉진을 촉구했습니다. 그래야만 민족 간, 국가 간 이해와 관용이 증진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
라다크리슈난은 그는 힌두교를 직관이나 종교적 경험을 통해 이해되는 사실에 기초한 과학적 종교로 보았습니다. 그는 79세 되던1967년 대통령의 임기를 다하고 일체의 공직에서 은퇴한 뒤 마드라스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 8년을 마드라스의 밀라포어(Mylapore)에 지은 집에서 보냈습니다. 라다크리슈난은 1975년 4월 17일에 87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라다크리슈난은 소위 서양 표준에 따라 세계 앞에서 인도 철학을 시연하고 동양의 지혜와 서양 물질주의 사이에 이해의 다리를 만든 저명한 인도 철학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
사르베팔리 라다크리슈난 (SARVEPALLI RADHAKRISHNAN)의 사상
.
라다크리슈난의 사상은 전반적으로 아베다 베단타(Advaita Vedanta) 철학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고전적 해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대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인도철학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한 단계 높인 것으로 평가됩니다. 그는 ‘무식한 서구의 비판’에 맞서 힌두교를 옹호했으며, 현대 힌두교의 정체성 형성에 기여했습니다. 그는 인도와 서양 모두에서 힌두교에 대한 이해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으며 인도와 서양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한 사람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동서양의 종교와 철학을 비교하는 가운데 오리엔탈리즘 즉 서구 중심적인 일반적 학문 성향에 반대하여 동양 특히 인도의 종교와 철학이 서구에 미친 영향을 강조함으로써 인도 사상의 세계화에 커다란 공헌을 했습니다.
.
인도철학사 전4권
.
인도는 수천 년 동안 풍부한 철학적 유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양 철학은 특정 사상을 나타내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우선시합니다. 동양철학, 특히 인도철학은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시크교, 이슬람교 등 여러 사상의 결합을 이루고 있습니다. 더 풍부하고 수용 가능하며 강력합니다. 인도에서 철학은 본질적으로 영적입니다. 인도가 발전시켜온 것, 그리고 역사의 수많은 사건과 오랜 세월 속에서도 인도가 멸망하지 않게 한 것은 어떤 위대한 정치 체계나 사회 조직이 아니라 바로 인도의 심원한 영성(靈性)입니다. 전통지향적인 자유주의야말로 인도의 문화와 문명이 거둔 성공의 비결입니다. 라다크리슈난은 각 학파의 사상을 주석함에 있어 '가치있는 주석이란 비판과 평가를 의미한다'고 하면서 창조적인 직관과 비판적인 지성이야말로 주석가가 지녀야 할 기준입니다. 이것은 곧 동양의 심원한 종교성과 서양의 냉철한 합리성의 만남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
역사가는 단지 기계적인 '넝마주의'가 아니라, 비평자요 해석자여야 합니다. 자기만이 모든 진리를 지니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어둠 속을 더듬고 있다는 확신에 사로잡힌 문화적 혹은 종교적 제국주의자는 결코 비교연구에 있어서 안전한 안내자가 될 수 없습니다. 철학적 해석에 있어서는 가장 일관된 견해가 가장 참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등 라다크리슈난의 강한 주장이 책 곳곳에 비칩니다.
.
제1권 - 동서철학의 위대한 만남
.
1권에서는 인도사상의 토대인 베다와 우파니샤드를 다룹니다. 야마(Yama)는 루시앙이 헤라클리투스의 입을 통하여 말한 '인간이란 무엇인가? 필멸의 신들이다. 신들이란 무엇인가? 불멸의 인간이다’라는 진리를 잘 설명해 줍니다. 우리는 인간의 정신에 반영된 신의 그림자가 아니며, 생명의 중심인 신을 믿어야 합니다. 신은 모든 방면에서 우리를 감싸고 있는 그지없는 빛입니다. 무엄장엄하며 만유의 원칙이요 원력인 궁극자에 대한 불충분한 형상을 고안해내는 것은, 스스로의 속박에 묶여 있는 인간에게는 불가피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만족을 위하여 우상들을 만들어 냅니다. 사회 체계가 붕괴, 소멸되는 것을 막기 위한 이 장치는 불행하게도 사회가 정상적으로 성장해가는 것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
그것이 사회 체계 그 자체를 보전함에 있어서는 공헌하였다 할지라도, 나라 전체의 발전에는 기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카스트 제도 그 자체를 비난할 권리를 우리에게 주는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종족들이 아무런 갈등없이 더불어 공존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은 오직 카스트 제도였습니다. 다른 민족들이 살육의 법령으로 해결하였던 이민족간의 문제를 인도 사람들은 평화적으로 해결한 것이었습니다. 유럽 종족들은 이민족을 정복했을 때, 이민족들의 인간적 존엄과 자존을 말살하려 획책하였습니다. 카스트 제도는 베다 시대의 인도 사람들이 피정복민들 뿐 아니라 정복민들의 완전과 독립을 보전케 하였으며, 또한 상호 신뢰와 조화를 촉진하였습니다. 불멸의 내적 자아와 장엄한 우주력은 하나아며 동일합니다.
.
브라흐만이 아트만이며, 아트만이 브라흐만입니다. 일체 만유를 생겨나게 한 유일지고한 힘은 개개인의 가슴 속에 있는 내밀한 자아와 동일합니다. 인간은 오직 신과 하나 되었을 때 최고의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참된 자아와 저 참된 욕망을 알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는 자들의 경우에는, 모든 세계에 있어서 아무런 자유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자아와 저 참된 욕망을 알고 이 세상을 떠나는 자들의 경우에는 모든 세계에서 자유를 누리며 삽니다. 신과 하나 되는 것이 최상의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신과 가까울수록 우리는 점점 더 자유롭게 되며, 우리가 속해 있는 전체에 대한 이해를 상실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이기적이 되고, 이의 결과로 카르마의 속박은 점점 더 강해집니다.
.
인간은 물질과 영혼 사이를 오가며 흔들리기 때문에 때로는 자유를 누리지만, 또한 때로는 필연에 끌려다니기도 합니다. 손에 한 움큼의 나뭇잎을 들고 붓다는 모인 비구들에게 설명했습니다. 숲 속에 있는 나뭇잎은 그의 손에 있는 것보다 월등히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알고 있으나 가르치지 않은 진리는 그가 가르쳤던 진리보다 월등히 많습니다. 붓다는 자기가 알고 확신했던 것보다 적게 가르쳤지만, 그의 제자들은 그가 그들에게 가르쳤던 것보다 더 적게 믿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
제2권 - 반(反)베다적 자유사상의 성립과 ‘바가바드기타’의 통합
.
2권은 불교와 '바가바드기타'를 다룹니다. 거룩한 자의 노래 '바가바드기타'는인도에서 가장 널리 애송되는 경전입니다. 인도의 모든 지역, 모든 계층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경전은 오직 '바가바드기타' 뿐입니다. 경전의 권위로 본다면, 천계서에 속하는 베다와 우파니샤드가 이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일반 대중들에 대한 영향력이라는 면에서는 오히려 이들을 능가하는 것이 바로 '바가바드기타'라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전통적으로 베다와 우파니샤드는 하층 천민들이 접할 수 없는, 따라서 이들의 삶과는 동떨어진 세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바가바드기타'는 언제나 일반 대중의 삶 속에서 호흡해온, 대중들의 경전입니다. 특히 '바가바드기타'는 불가촉 천민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해탈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도 사상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
말하자면 베다와 우파니샤드에서 버림받은 하층민까지도 '바가바드기타'는 감싸안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분명 인도인들의 살아 있는 성경입니다. 각 개인는 모두가 육신과 영혼의 복합체입니다. 여기서 육신은 영혼의 비활동적이고 수동적인 짝인 반면에, 영혼은 육신의 활동적인 짝입니다. 자이나교는 정신과 물질의 상대성을 인정함으로써, 유심론과 유물론이 결함을 극복합니다. 그러나 자이나교는 자아와 비아의 구분이 정신의 본질적 속성의 산물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식을 자아와 비아 간에 일어나는 과정과는 별개의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명백하게 두 실체 이론(two substance theory)을 받아들입니다. '바가바드기타'는 산야사와 티야가를 구분합니다. '산야사는 이기적인 모든 행위를 포기하는 것이며, 티야가는 모든 행위의 결과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후자가 보다 포괄적입니다. '바가바드기타'는 일상적인 삶을 거부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기적인 욕망을 제어하라고 촉구합니다.
.
'바가바드기타'가 강조하는 것은 행위와 무위의 조합입니다. 단순히 행위를 그만두는 것은 진정한 이욕행이 아닙니다. 손발은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면서, 마음속의 욕망은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행위하는 정신입니다. '무지한 자에 의한 행위의 포기는 실로 적극적인 행위이며, 현자의 행위는 실로 무위미합니다.' 영혼의 내적인 삶은 세속의 현실적인 삶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바가바드기타'는 그 둘을 우파니샤드의 정신으로 조화시킵니다. '바가바드기타'에서 제시되는 행위는 숙련된 행위입니다. '요가는 행위의 훈련입니다.' 열반은 마음의 정화, 즉 단순명료하고 투명한 본래심을 복귀하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하여 우리는 모든 편견을 없앨 때, 대상의 형태를 띠는 온갖 환영을 여읜 지식이 일어나며, 이것은 위대한 고양 혹은 해방이라고 불립니다.
.
3권과 4권은 (인도철학사)의 제3부를 옮긴 것입니다. 여기서 다루는 것은 기원전 5세기부터 1천년에 걸쳐 형성된 힌두교 정통사상의 여섯 갈래, 곧 '육파철학'입니다. 이들은 신앙의 근거와 최종 규범을 힌두교 최고의 경전인 '베다'에 두고 윤회로부터의 해탈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하지만 각각 독자적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
제3권 - 육파철학의 성립과 발전
.
3권에서는 니야야(논리학.인식론), 바이셰쉬카(자연철학), 상키야(과학.심리학), 요가(실천수행법)의 사상을 다룹니다. 무희의 춤이 진행되는 동안 관객들은 무희에게 몰입하며, 무희가 곧 자신인 양 착각에 빠지기도 하지만, 춤이 끝나는 순간에 이 모든 것이 그릇된 것임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곧 해탈입니다. 니야야의 신은 존재, 지식, 지복을 지니는 인격적 존재입니다. 그는 '과실, 그릇된 지식, 부주의와 같은 속성을 지니지 않으며, 공독, 바른 지식, 침착과 같은 속성을 지닙니다. 그는 비록 자신이 창조하는 존재에 의하여 행해진 행위의 결과들에 영향을 받느다 할지라도, 자신의 창조에 관해서는 전능합니다. 그는 자기가 행한 행위의 모든 결과들을 획득했으며, 자기의 피조물을 위하여 계속적으로 행위합니다. 아버지가 아이들을 위하여 행위하는 것과 똑같이, 신은 살아 있는 모든 존재를 위하여 아버지처럼 행위합니다.
.
신은 바른 지식, 즉 실재에 대한 독립적인 이해를 지니고 있으므로 모든 것을 아는 자입니다. 신은 영원한 지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의 인식은 영속적이기 때문에 기억이나 추론적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간헐적인 영적 지각이 있으며, 요기(yogi, 요기수행자)들에게는 후천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신에게는 파악의 지속적인 양태가 있습니다. 신 또한 욕망을 지닙니다. 신은 순수 무장애의 지성과 영원한 지복을 지닙니다. 인도 사상에 대한 니야야의 가장 큰 공헌은 비판적이고 과학적인 논리학에 있습니다. 니야야의 방법론은 다른 철학 체계들에 의하여 수용됩니다.
.
이러한 수용 과정에서 각 철학체계가 지니는 형이상학적 개념들 때문에 니야야의 방법론이 다소 변형을 겪은 것은 물론입니다. 니야야는 지식이 세계를 본질적인 모습으로 주도면밀하게 체계화했으며, 그것의 주요 구분들에 대하여 지금까지도 여전히 인도사상에서 통용되는 명칭을 부여했습니다. 이것은 니야야가 인간 지성의 심원한 차원을 정복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경험하는 필요에 어떤 만족을 주는 상키야의 이론은 객관적인 존재의 관찰에 대한 과학적인 동기가 아니라, 오히려 형이상학적인 성향의 영향 하에서 도달된 철학적 개념입니다. 그것에 따르면, 신의 빛에 대한 명상은 신애(信愛)의 거룩한 행위입니다.
.
제4권 - 미망사와 베단타의 종교철학
.
4권에서는 '정통 중의 정통'이라 할 미망사와 베단타의 종교철학을 다룹니다. 미망사는 다르마의 본질을 묻는 탐구를 중심교의로 삼고 있으며 베단타는 베다의 철학적 정수를 담고 있습니다. 푸르바 미망사에서 강조는 윤리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세계의 궁극적 실재는 항구 불변한 행위의 원리(the constant principle of karma)입니다. 신은 정의, 즉 다르마입니다. 다르마의 내용은 베다에서 구체화되며, 베다는 단지 신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플라톤, 플로티노스, 스피노자, 그리고 헤겔 등의 위대한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샹카라에게 철학은 영원한 진리에 대한 엄격한 총찰이며, 인간의 덧없는 삶에 대한 시시한 애착으로부터의 자유에서 그 장엄한 빛을 발하는 작업입니다.
.
샹카라는 옷감의 예로 자신의 견해를 설명합니다. 옷감이 두루마리 형태로 보관되어 있는 한, 우리는 옷감인지 혹은 다른것인지 알 수 없으며, 설사 그것이 보인다 할지라도 그 폭이나 길이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펼쳐질 대,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뿐만 아니라 그 길이와 폭을 알 수 있습니다. 두루마리 형태로 보관된 옷감과 펼쳐진 옷감은 다르지 않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원인과 결과는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의 실체는 어떤 다른 측면으로 나타난다고 해서 그 본질이 손상되거나 다른 실체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변화는 어떤 것의, 그리고 어떤 것 안에서의 변화일 뿐입니다. 어떤 공통된 본질에 의해서도 결합되어 있지 않는, 무관한 내용들의 단순한 연속은 결과 변화라고 볼 수 없습니다.
.
발생하는 모든 것은 형태의 변화입니다. 응유(凝乳) 속에 우유의 실체의 지속, 혹은 나무 속에 씨앗의 지속은 그것이 전자의 경우처럼 지각할 수 있는 것이든 후자의 경우처럼 지각할 수 없는 것이든 간에 인정되어야 합니다. 심지어 원인만이 유일한 실재이며, 결과는 단지 현상에 불과하다고 주장될 수도 있습니다. 샹카라는 원인과 결과가 다르지 않다는 이론을 채택합니다. 그는 원인들로부터 실재의 역동적인 전개 과정의 근저에 놓인 결과의 전이를 논리적, 이론적인 관련의 어떤 양태들로 특징지어지는 정태적인 연속의 관계로 만듭니다. 샹카라에게 철학은 당위(what ought to be)의 산물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what is)에 대한 파악입니다. 실재로서 무한자에 대한 영적인 지각은 평화와 환희로 귀결됩니다.
.
인도철학사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도의 스승이라는 라다크리슈난을 통해 대영제국은 힌두풍습을 종교로 승화시키고 각 종교로 분열시켜 인도의 정치적 불안정을 강화하고 영속화시켰습니다.
20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있는 책 100선 중 34번째 책 인문학 부문 4번째 책 “사르베팔리 라다크리슈난 (SARVEPALLI RADHAKRISHNAN)이 1923년부터 1927년까지 출판한 인도철학사 (Indian Philosophy)”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