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7_20세기100선

036. 정치적 보수주의 나치와 함께 작동했던 마르틴 하이데커의 존재와 시간 1927

忍齋 黃薔 李相遠 2022. 12. 29.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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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gh7wEA3te64

36. 마르틴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1976)의 존재와 시간(Being and Time, Sein und Zeit)/1927 - 정치적 보수주의 나치와 함께 작동했던 하이데거의 이념 '존재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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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중반 세계 철학계를 대표했던 독일의 실존주의(Existentialism)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와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의 영향을 받아 실존을 현상학적으로 분석했으며, 이를 통해 '나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 즉 “'있는 그대로의 나’인 ‘현존재’는, 현재의 기분에 따라 달라지지만, 또한 항상 과거에 조건지어지고, 또 마찬가지로 미래를 미리 생각하려는 데서 드러난다”는 이해를 통해, 인간 존재의 삶이 시시각각 어떤 의미로 나타나는가에 대한 철학인 '기초존재론'을 주장했습니다. 후기에는 현대의 과학적 사고방식을 비판하며, 자연에서 받는 시적 감수성을 가지고 존재의 의미를 파악하는 철학적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그의 ‘기초존재론’은 현상학, 실존주의, 해석학,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대륙철학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이후 거의 모든 유럽 철학자들이 하이데거에게 일정 정도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대륙철학과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하이데커는 나치 참여로 인해 철학적 업적이 부정당하는 등 현재까지도 논쟁 속에 있는 명실상부한 철학계의 뜨거운 감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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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하이데커의 저서 ‘존재와 시간’을 보다 효과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먼저 하이데커의 생애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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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이데거의 생애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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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1889년 9월 26일 독일 바덴 뷔르템베르크 메스키르히(Meßkirch)에서 가톨릭 성마르틴 성당의 성당지기 프리드리히 하이데거와 그 아내 요한나의 장남으로 출생했습니다. 하이데거의 고향 메스키르히는 독일 최남단에 자리한 시골로, 마을이 온통 로마 교회풍의 보수성을 띠고 있어서, 반유대주의 정서가 강하여 훗날 하이데거의 사상 전반에서 유대인에 적대적인 나치에 협력하고 그리스도교적 색채가 짙게 깔리게 된 바탕이 되었습니다. 넉넉지 않은 집안 사정 탓으로 학업을 중도에 포기할 뻔 했으나, 성당의 종을 치던 아이였던 하이데거의 재능을 높이 산 메스키르히 본당의 주임 신부 콘라트 그뢰버의 주선으로 사제가 되기로 하고 장학금을 받아 1903년 김나지움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1909년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성직자 수업을 받기 위해 예수회에 입회했으나, 엄격한 수도자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14일 만에 그만두고, 일반사제가 되기 위해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입학하여 신학 공부를 하다가, 2년 후 철학으로 전공을 바꿔 신칸트주의와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을 공부하였으며, 심리주의에 관한 논문으로1913년에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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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이데거의 생애 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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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에 징집되었다가, 훈련소에서 귀가 판정을 받았고, 이후 후방에서 서신 검열 업무에 종사하면서 대학에서 야간 강의를 맡았습니다. 1916년까지 지급된 학업 장학금은 그가 장차 가톨릭 사제가 된다는 조건이 달려 있었지만, 이때에 수강생 중 한 명인 엘프리데 페트리와 만나 사귀게 되고, 1917년 결혼에 이르게 되어 사제가 되겠다는 콘라트 그뢰버 신부와의 약속은 물건너 가버렸습니다. 1917년 다시 군에 징집된 하이데거는 서부전선에 배치되었다가, 1918년 독일이 패전한 후 프라이부르크 대학에 돌아와 에드문트 후설의 조교로 활동하며 후설에게서 현상학을 배웠습니다. 1923년 마르부르크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2년 후에 정교수로 임용되었고, 1927년 현상학의 기관지에 오늘 설명할 ‘존재와 시간(Being and Time)’을 발표하여1928년 후설의 후임으로 지명받아,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때 교수 자격을 받기 위해 제출한 것이 바로 세기의 명저로 꼽히는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이고 취임강연이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입니다. 1933년 정권을 장악한 나치당이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인 묄렌도르프를 해임시키자, 묄렌도르프는 하이데거를 후임 총장으로 지명했고, 하이데거가 이를 수락하여 1933년 6월 24일에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에 취임했습니다. 그러나, 주(州) 문교부와 충돌하여 1934년 2월에 사임합니다. 이 시기를 전후로 나치와 접촉하면서 결국 그의 생애 최대의 오점을 남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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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나치에 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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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는 신념을 가지고, 1933년 5월 1일 나치당에 입당하여, 당원번호 3125894번을 부여받은 나치 당원으로 나치의 범죄에 동조했습니다. 나치에 참여한 것으로 하이데거 철학 전체가 부정되게끔 만들기도 했지만, 하이데거는 이러한 과거에 대해 어떤 자부심도, 어떤 회한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히틀러 정권하에서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직을 수락하며 그 취임식 겸 나치에 반대하는 책을 태우는 분서(焚書)식 총장연설에서 학생들에게 나치에 참여하라고 연설을 했고 '하이 히틀러!'라는 구호로 연설을 마쳤을 만큼 히틀러를 추종했습니다. 1년 만에 히틀러의 행적에 회의를 느끼고 스스로 총장직에서 물러나기도 했지만 나치당이 종말을 고하던 1945년까지 나치 당적을 유지했습니다. 이 시절, 나치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 것을 두고 그가 의무적으로 나치당에 가입해야 했던 ‘수동적 방관자(Mitlaufer)’라고 주장하며 그를 옹호하는 사람이 제법 많치만, 하이데거가 그의 스승으로 유대인인 에드문트 후설이 대학에서 쫓겨나는 일을 방관했을 뿐더러 나아가 부채질했다는 설마저 있으며, 자신의 유대인 제자가 교수직에 후보로서 거론되자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적극적으로 반대하기까지 했고, 심지어 에드문트 후설의 장례식마저도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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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좋게도 하이데거는 탈나치화 작업을 통해 5년간 정직처분만 받았습니다. 하이데거는 감옥에 가야 했으나 프랑스 철학자들의 지지와 그의 정부였던 유태인 한나 아렌트의 우호적인 증언 덕분에 감옥행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5월호에 실린 에티엔 클랭의 ‘소르본대 철학교수, 왜 레지스탕스가 되었나(Jean Cavailliès, une pensee explosive)’를 보면 독일 바덴지방을 점령한 프랑스군은 프라이부르크에 군정(軍政)을 설치하고 탈나치화 작업에 들어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피에르 펜느 군정 사령관은 하이데거의 나치 부역 전력에 대한 평가 임무를 장교이며 독일문학 교수였던 자크 라캉에게 맡겼습니다. 라캉은 하이데거가 자신은 ‘수동적 방관자’였다는 관례적인 이유로 자신의 행적을 합리화하려 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내가 하이데거를 오게 해서 면담을 했어요. 그는 오랫동안 생각을 하더니 대학을 새롭게 바꾸고 싶었고 나치의 힘을 빌린다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고 말했어요.” 라캉은 하이데거의 변명을 믿지 않았습니다. 후고 오트, 빅토르 파리아스, 엠마뉘엘 파이에 같은 학자들은 철저한 연구조사를 통해 하이데거가 나치당 행사에 참석하는 것을 비롯해 얼마나 깊게 나치와 관계를 맺었는지, 특히 동료교수들과 스승인 에드문트 후설에게 보여준 태도와 나치 고위층과의 관계, 부인에게 보낸 편지 등을 통해 그가 얼마나 심각한 친나치 반유대주의자였는지 밝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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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하이데거의 아들이 철저하게 아버지의 개인 기록물을 숨겨왔음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가 인종과 독일 민족, ‘총통’의 최후의 해결책(final solution)인 대량학살 등 나치의 이데올로기를 이상화한 글도 찾아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들 덕분에 감옥에 가지 않았음에도 하이데거는 이들에게 특별히 감사의 표시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사후에 발표된 슈피겔과의 인터뷰(1976년)에서 “프랑스 철학자들은 생각하기 시작하면 독일어로 말한다”라고 언급한게 전부일 뿐입니다. 한동안 하이데거의 나치즘 문제는 잊히는 듯싶었으나 2014년 초에 출간된 이른바 ‘검은 노트(Schwarze Hefte)’에 담긴 내용이 자못 충격적이어서 논란이 되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뿌리 없음'을 육화한 존재라고 보고 이들의 '공허한 합리성과 예측가능성'의 정신을 맹렬히 비난했으며, 세계유대주의(Weltjudentum)를 인간성을 말살하는 서구 근대성의 주요 추동요인으로 지목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논하며 노골적으로 반유태주의적 성향을 보였습니다. 특히, 이 노트는 하이데거가 공식 출판을 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밀한 생각을 담은 일종의 일기라는 점에서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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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는 이 여파로 인해 심지어 독일 하이데거 학회의 학회장이 "더이상 이런 자를 대표하는 자리에 있을 수 없다"며 사임하는 사태마저 일어났을 정도였습니다. 사실 하이데거가 나치를 지지한 근본적인 이유에는 나름의 철학적 배경이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대두하던 미국식 자본주의나 소련식 공산주의 모두 기술문명의 산물로서 인간을 경제적 생산의 부품으로 전락시키고 본연의 인간성을 말살한다고 생각했고 소위 '고향 상실 (Heimatlosigkeit)의 문제'로서, 이것은 그의 철학 전반에 놓인 문제의식으로, 이에 대하여 전통적인 민족정신과 자연성의 회복을 부르짖는 나치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가 유대인을 싫어한 근본적인 이유 또한 유대인들이 특유의 '상업적이고 계산적인 정신'을 퍼뜨려 인간성을 타락시킨다고 믿은 데 있었습니다. 그가 나치 패망 이후에도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지 않은 것은 이러한 자신의 사상만큼은 여전히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철학적 이상을 나치가 온전히 실현시켜 줄 것이라고 너무나 순진하게 믿어버린 점은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과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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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이데거의 생애 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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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후, 프라이부르크로 진주한 프랑스군 사령부는 하이데거에게 나치 협력의 죄를 물어 5년간 공식적인 활동을 일체 금지시켰습니다. 그러다가 1951년 활동금지 조치가 해제되면서 다시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강단으로 돌아왔으나, 불과 한 학기 만에 교수직을 사임하고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이후 1976년 5월 26일 심장마비로 타계할 때까지 프라이부르크의 자택과 토트나우베르크에 지은 오두막집을 오가면서 연구와 저술 활동에 몰두하였습니다. 성격이 매우 내성적인 데다 낯가림이 심했던 그와 어지간히 오랫동안 깊이 사귄 사람이 아니면 그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하이데거와 면담을 한번 하려면 먼저 그의 조교에게 신청하여 면담 약속을 받아야 했고, 설령 약속을 받는데 성공한다 해도 하이데거 개인 사정에 의해 면담이 무산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칸트만큼은 아니지만, 마르부르크 시절을 제외하면 거의 평생을 프라이부르크 주변에 머물렀습니다. 외국에 나가본 경험도 주로 프랑스, 스위스 등 인접국들 뿐이고, 가장 멀리 가본 여행지도 1962년과 1967년에 방문한 그리스 아테네였습니다. 알려진 후손으로는 그의 차남 헤르만 하이데거(1920~2020)가 사학자로 활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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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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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하이데거의 사상은 초기시절에는 하인리히 리케르트의 가치 철학에 영향을 받기도 하였으나, 1930년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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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전기 사상 1930년부터 1935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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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사상을 대표하는 저서가 바로 ‘존재와 시간(Being and time)’입니다. 일순간 하이데거를 20세기 철학의 거장 반열에 올려놓은 이 작품은 근대 이후 철학에서 주변부로 물러난 존재론을 다시 논의의 중심으로 불러들이는 강력한 영향을 발휘했습니다. ‘존재와 시간(Being and time)’은 후설의 현상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 딜타이의 생의 철학 등의 영향하에 독자적인 철학을 개척하여 현존재의 존재의미를 탐구하는 실존론적 철학을 수립하였습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하이데거가 몰고 온 사유의 폭풍을 플라톤과 비교했을 정도였습니다. ‘존재와 시간’은 그 영향력만큼 난해하기로도 악명이 높았습니다. ‘존재와 시간’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존재'와 '존재의 시간성'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존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이야말로 모든 학문 중에 유일하게 존재를 존재로서 다루는 학문'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강조했었던 것이지만, 그 이후로 '존재' 자체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기존 근대철학이 '나'라는 '주체'가 '존재자'라는 '대상'의 '존재'를 추상화하고 개념화하여 이를 탐구하는 학문이었다면, 하이데거는 거꾸로 '존재'의 입장에서 '존재자'를 규정지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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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존재'는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존재 그 자체'는 결코 추상화하고 개념화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개념화한 순간, 그 개념은 더 이상 '존재 그 자체'를 가르키지 않습니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입장은, 추상화된 개념을 통해 '존재'를 한갓 고정된 '대상'으로만 바라보았던 근대 철학과 과학의 입장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하이데거는 이때까지 서양철학에서 존재에 대한 연구는 '존재자'와 '존재'를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된 철학적 사유를 할 수 없었던 것이고, 우리는 이를 구분하여 '존재'에 대해서 파악해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존재'란 '역사적'인 존재가 미래를 '선택'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즉, "당신이 무엇을 해왔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는 ‘존재’가 ‘존재자’인 당신을 규정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는 우리가 속한 세계 속에서 주변을 염려(Sorge)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며, 또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헤쳐나가며 선택을 결단하는 존재입니다. 존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존재'라는 말이 포함되는 개념을 100개 이상 새로 만들었기 때문에, 독해하려는 철학도 및 일반인들은 그의 저서를 읽다 보면 미궁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이데거의 전기 철학을 정리해 보자면 방법론적으로는 해석학적 현상학이며 그 대상으로 보자면 현존재, 즉 인간실존에 대한 존재론입니다. 전기의 주요 저작으로는 1927년 ‘존재와 시간’, 1929년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 1935년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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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후기 사상 1936년부터 1976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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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재로부터 존재 자체로 핵심적 주제가 옮겨간 후기로 갈수록 하이데거는 '시적 언어'를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전기 하이데거에서 '존재'는 be동사 다음의 어떤 것, 즉 Es ist (it is) 였지만, 후기 하이데거로 가면 '존재'는 주어지는 것, 즉 Es gibt (it gives, 또는 there is) 입니다. 말(레데: Rede) 역시 말(자게: Sage)로 바뀝니다. 여기서 전기 하이데거의 말(레데: Rede)는 그냥 소리나 언어로 이루어진 말에 불과하지만, 후기 하이데거의 말(자게: Sage)는 '존재의 의미를 가리키고 있는 말'이 됩니다. 심지어 침묵조차 '존재 의미'를 전달하기 때문에 말(자게: Sage)라고 합니다. 이러한 말(자게: Sage)는, 평소에 사물들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하고 있는 것이라고 후기 하이데거는 주장합니다. 자연 속 사물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말(자게: Sage)하고 있어서 우리는 그 말(자게: Sage)를 '듣고', 시를 쓴다든지 하며 그것에 대답하는 말을 합니다. 후기 하이데거는 이처럼 자연이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는 식으로 '존재'를 서술합니다. 따라서 '존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Es gibt)이며 우리는 이를 '시'적 언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 일상의 언어들도 사실 한 때는 '시'적 언어였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후기 하이데거에서는 '일상'의 언어가 존재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써 격상됩니다. 현대의 시대정신을 '고향 상실 (Heimatlosigkeit)'이라고 보았습니다. 맹목적인 기술과 유물론적인 이데올로기를 통해, 그동안 집착했던 가치와 사물들이 사실은 다 헛되고 무상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소중히 하고 그랬던 것들에게 사실은 고유한 존재의 무게가 전혀 없었구나를 깨닫고 '경악(Erschrecken)'하게 됩니다. 존재자들에게서 존재가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하는 현존재가 이 시대의 인간상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기에 있기 때문에' 또는 '살아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방식, 즉 존재자들에게서 존재를 느끼는 방식을 새로이 터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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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후기 하이데거는 인간이 진정으로 존재를 느끼고 거주할 수 있는 터로서 자연을 살펴볼 것을 강조합니다. 자연은 소박하고 순환하는 속에 모든 약동하는 생명들을 품습니다. 그리고 그 정적이면서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흐름에 주목할 때 인간은 '존재의 울림'을 들을 수 있습니다. 존재자들이 자신을 열어 밝히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며 한없는 존재의 의미를 가져다주는 그 '울림'을 말입니다. 이런 '경이(Erstaunen)'로운 경험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충만하게 살게끔 하는 그 '무엇'이 됩니다. 전기에서는 '실존적 선택'이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이라면, 후기에서는 '사물(자연)이 하는 말을 듣는 것', 즉 익숙해서 그냥 지나쳤던 그 자연에서 매번 '경이'를 느끼고 그걸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자신의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현존재로부터 존재 자체로 핵심적 주제가 옮겨간 후기 철학은 역사적으로 존재 자체가 인간 현존재에게 어떻게 스스로를 현시하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플라톤 이래의 역사는 존재망각으로 점철되었으며 특히 오늘날과 같은 기술시대는 존재망각이 극단에 이른 시기라고 합니다. 하이데거는 서양 철학이 플라톤 이후로 "어떠하다”라는 성질의 뜻을 "존재"라는 개념을 써서 접근하려고 했지,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즉, 존재에 대한 모든 연구가 특정한 성질에만 국한되어있고, 존재 자체를 어떤 성질이 있는 형질로 취급했습니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이미 상정하는 전제"를 분석하는 것이 어떤 대상을 탐구하는 데 우선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철학자와 과학자가 더 기본적이고 이론에 앞서는 존재를 무시했기 때문에 그들의 이론을 보편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잘못 되었으며, 우리가 존재와 인간 존재를 그릇되게 인정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뿌리깊은 몰이해를 피하기 위하여, 하이데거는 철학의 역사를 하나 하나 되짚어 보면서 철학적인 질문을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후기의 주요 저작으로는 1936년부터 1938년 ‘철학에의 기여’, 1942년 ‘횔덜린의 송가’, 1949년 ‘기술에 대한 물음’, 1950년 ‘숲길’, 1955~6년 ‘근거율’, 1955~7년 ‘동일성과 차이’, 1959년 ‘초연함’, 1961년 ‘언어로의 도상에서’, ‘니체’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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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시간(Being and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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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는 저술 당시 본래 총 3부를 기획하였으나 완결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르네상스 이래 이어진 합리주의와 실증주의 같은 서구 철학의 전통을 거부하고 전혀 다른 각도에서 사고한 이책의 철학은 인간의 존재, 그 중에서도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없는 개인의 독자적인 실존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실존주의(Existentialism)라 불렸습니다. 서론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의 설명’에서 나타나 있듯이 마르틴 하이데거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서구 철학의 핵심 과제였던 ‘존재’의 의미를 밝히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존재에 관한 고민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아무도 이것을 철학적으로 그 의미에 매달렸던 적이 없었을 뿐입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전통을 철저히 들여다 봄으로써 전통을 극복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기존 전통 서양 철학에서 ‘존재’가 잘못 이해되어 왔다고 비판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서구의 철학자들은 ‘존재’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를 거듭해왔지만 정작 ‘존재’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등안시했습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것이어서 철학적으로 논의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의 의미 또한 관심이 없었고 그 결과 존재와 관련된 삶이나 죽음, 시간성이나 본래성 같은 개념들은 과학에서는 다루어질 수 없는 철학 고유 주제들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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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점이 마르틴 하이데거가 기존 서구 철학에 의문을 갖기 시작하고 실존주의를 정립해나가게 된것입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19세기까지의 서양 철학사를 ‘존재 망각의 역사’라 정의하며 독단적 철학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인간을 당연히 존재하는 사물처럼 여김으로써 인간소외를 불러왔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서구 철학의 흐름을 바로잡고 인간 존재의 의미, 나아가 존재한다는 것의 일반 의미를 밝히고자 했고 10여 년에 걸친 철학적 성찰 끝에 플라톤으로부터 프리드리히 니체에 이르는 형이상학을 새롭게 조명하며 새로운 사유의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서구 철학의 중심을 인식론에서 존재론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덕분에 인간, 세계, 시간, 존재 같은 이제까지 철학에서 대답해주지 못했던 문제들이 철학의 틀 안에서 새롭게 다루어지기 시작했고 이후 실존주의는 현대 철학 및 문학, 예술론, 언어학, 인간학, 생태학 등 정신문화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시간과 존재’에서 현존재(Dasein)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안했습니다. 책의 1부는 ‘현존재에 대한 준비적인 기초분석’이고 2부는 ‘현존재와 시간성’일 정도로 현존재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사상을 집약적으로 상징하는 키워드입니다. 현존재란 과거 인간으로 통칭되던 것에 시간과 존재의 의미를 더한 개념입니다. 내가 현재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의 의미, 그리고 나를 현재에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의 의미를 시간성이라는 틀 안에서 밝혀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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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상태가 좋지 못한 것은 바로 전 '과거'에 나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고, 오늘의 상태가 좋은 것은 바로 전 '과거'에 좋은 사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인간은 '자신의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존재해왔다'는 ‘현사실성’, 사실로부터 '지금의 상태'의 ‘기분’을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를 아는 것이야말로 지금의 상태를 파악하는 가장 기본지침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세계 속에 현재 존재하는 인간을 ‘현존재’라 하고, 현존재가 존재하는 그 자체를 ‘실존’이라고 하였습니다. 현존재가 어떻게 실존하는가는 미리 예정된 인간의 보편적 본질에 의해서가 아니고 그때그때 현존재가 실존하는 바로 그 자체에 의해서만 결정됩니다. 즉 ‘현존재의 본질은 그 실존에 있는’ 것입니다. 현존재를 이러한 각도에서 분석하는 것이 실존론적 분석이고 그 분석을 통하여 실존의 비본래성과 본래성이 구별됩니다. 비본래적인 실존이란 본래의 자기를 잃고 ‘사람(das Man)’ 속에 몰입하여 세계 내부에 나타나는 눈앞의 사물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인간의 일상적인 모습입니다. 이것은 시간에 입각하여 말하면, 과거를 망각하고 미래를 예기하면서 그때그때 현재에 분산하여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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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과거로부터의 자기를 되찾아 장래를 향하여 앞서가면서, 순간을 두고 결의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본래적인 실존이며 이것은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을 원형으로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기의 하이데거는, 인간이 존재 그 자체의 밝음 쪽으로 나가는 것이 실존이며 ‘존재와 시간’에서의 본래적 실존에 나타나는 비극적·영웅적 색채는 사라졌으므로, 종래의 실존 대신 개존(開存; Ek―sistenz)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실존철학은 문학뿐만 아니라 여러 학문분야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즉, 변증법신학은 키에르케고르·하이데거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실존분석법은 정신병리학에 이용됩니다. 인간은 정해진 존재가 아니라 '선택의 자유'를 가진 가능성의 존재이며 그것을 의식하고 살아갈 때야 비로소 진정한 삶을 누리는 것이라는 실존주의의 주장을 근현대에 처음으로 주요하게 주장한 사람이 하이데거입니다. ‘존재와 시간’이라는 그의 책에서 이런 주장들이 분명하게 확인되며, 이러한 점에서 초기 하이데거가 실존주의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을 미완성으로 남겨두고, 후기로 갈수록 실존주의보다는 존재론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러한 점에서는 기존의 실존주의자들과 구분되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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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존재와 존재자, 현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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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의 이마누엘 칸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데카르트의 관점에서 이 말은 '생각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존 서양철학은, '외부의 대상이 내 머리 속에서 어떻게 인식되는가'의 문제로부터, '머리 속의 인식, 생각'과 '외부 대상'의 '일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밝히는 '인식론'입니다. 이러한 '인식론'을 통해, 서양철학은 결국 '과학'을 탄생시켰습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이러한 서양철학의 흐름에 반기를 들어, 거꾸로 '존재'에 포커스를 맞춰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존재'가 없다면 '인식'을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인식' 이전에 '존재'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를 먼저 이해하고 난 이후에야 '인식'을 논할 수 있는 것인데, 과학적 탐구방법은 거꾸로 ‘존재 이해가 없이’ 인식론으로 존재를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삶을 보편적으로 파악하는 철학이 되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해 '관찰'을 하는 인식론을 넘어서서, 무엇보다도 우선 '존재'가 무엇인지부터 '이해'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앞에서의 데카르트 말을 '하이데거'식으로 바꾼다면 "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다." 이를 '존재론'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론'이란 무엇인고 하면, 여기서 '존재자'와 '존재'를 엄격히 구별합니다. '존재자'는 '눈에 보이는 대상 -사람이나 사물- (he, she, it, there)'을 말하고, '존재'는 '존재자의 존재방식, 존재자의 시시각각 변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를 쉽게 알기 위해서 '존재'를 의미하는 'be동사'가 서구권인 독일과 영국에서 어떻게 쓰여지는지를 살펴보면 알수 있습니다. be동사는 보통 이런 방식으로 쓰여집니다. She is pretty. She is tall. 이 문장을 그냥 해석보면, 한국어로는 '그녀는 예쁘다', '그녀는 키가 크다'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우리는 여기서의 'is'를 '존재한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녀는 예쁘게 존재한다', '그녀는 키가 크게 존재한다'라고 다시 해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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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She'는 '눈에 보이는 대상'인 '존재자'에 해당하고, 'pretty'와 'tall'은 '어떤 상황에서 존재하는 상태'인 '존재'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이를 일반화해보면, '존재자'는She, 존재하는 상태로pretty, '존재한다'is 로 바꿔서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존재'는 '존재자의 시시각각 변하는 상태'나 '존재자의 존재방식'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존재자의 상태를 나타낸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난 아파', '너는 건강해', '그는 병원에 있어'. 이런 식으로 '존재자'가 어떠한지, 어떤 상태에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 대한 설명은 '언어'로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Die Sprache ist das Haus des Seins)'라고 말했습니다. 이 때문에 '존재'는 '언어'나 '그 존재가 포함된 세계'에 의해 한계지어 집니다. 또한, '일상에서의 대화'는 그 대상의 '존재'를 끊임없이 말해주는 일이 되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일상에서는 '그는 잘생겼어', '그녀는 매력적이야' 등으로 끊임없이 be동사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잡담', '호기심', '애매함'에 불과합니다. 하이데거는 이 지점을 주목합니다. 평상시 우리는 '일상'에서 '타인'과 함께,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며 살아갑니다. 사실 이러한 '쓸데없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잡담', '호기심', '애매한 태도'를 가지는 '비본래적'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불안'에 휩싸이게 되고, 그 불안의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게 되며,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리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 '존재'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는 '존재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동물 가운데서도 오직 '인간'만이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는 '존재자'인 '사람'을, 하이데거는 '현존재'라고 정의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존재'가 '일상'에서 '잡담, 호기심, 애매함'으로 쓰여질 때는 쓸모없는 이야기로 소모되지만, '존재'가 특수한 상황에서 스스로에 대한 '질문'으로 쓰여질 때는 그러한 질문을 하는 '존재자'는 '현존재'가 되어,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실존의 영역으로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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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계 내 존재, 피투, 기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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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존재'의 의미가 '존재자'의 존재방식이거나 '존재자'의 시시각각 변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존재'는 시간적 존재임과 동시에 공간적 존재입니다. 즉,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존재'란, 칸트의 '물자체'처럼 내 머리 속의 표상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리 바깥에서 실재로 '공간'을 점유하며 '시간'성을 가지는 '존재'를 말합니다. '존재'는 결코 생각 속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과 시간 속에서 실재로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존재'가 위치하는 '세계' 역시 이미 '공간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며, 여기에서 하나의 '존재자'는 이 세계 속의 다른 '존재자'들과 관계맺으며 '존재'합니다. 세계 내 각각의 존재자들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를 '열어 밝힘' 또는 '개시'라고 합니다. 세계의 사물들은 '분위기'를 뿜어내고, 타인과 나는 잡담을 통해 '말'을 뿜어내며, '나인 현존재'는 '기분'에 젖어 그 기분에 근거한 '존재 가능성,이해'를 세계를 향해 뿜어내고 드러냅니다. 즉, 각각의 존재자들은 그가 속한 세계 내에서 '자신의 존재감, 존재'를 외부로 뿜어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매번 그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며, 시간과 상황에 따라 숨기고 은폐도 하고 드러내기, 탈은폐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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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사람, 현존재(existence)'인 우리는, 이미 주어져 있는 세계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는 존재들의 그 단면만을 파악할 뿐입니다. 이 때 우리는,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는 존재들에 대해 마음을 쓰는 염려(Sorge) 상태에 놓여 있으며, 이 마음씀, 염려(Sorge)는 현존재의 존재방식이 됩니다. '사람, 현존재'마다 마음을 쓰는 관심분야가 다르므로, '사람, 현존재'들은 '같은 세계' 속에 살아가도 '각자' 다른 '자기만의 존재, 내-존재'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세계를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모나 국적, 우리가 사는 사회 등을 '선택'해서 태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이라는 '현존재'는 이미 만들어진 세계에 '내던져져 있습니다.' 다만 '현존재'는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는 세계 속 '존재'의 의미들을 '선택'적, 단편적, 일면적으로 밝혀낼 뿐입니다. 여기서 '내던져져 있는 것'을 '피투'라고 말하고, 그러한 세계에서 '선택적으로 의미를 밝혀내는 것'을 '기투'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자신이 속한 세계에 한계지어질 수 밖에 없는 존재를 일컬어 '세계 내 존재'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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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세계 내 존재’의 구조와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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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존재자'의 존재방식이나 상태를 말하는 것이므로, 일단 하이데거가 '존재자'를 어떻게 정의내리고 그것을 구분하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존재자'는 '눈에 보이는 대상'을 말하는 것으로, 실제로 '내 눈 앞에 있는 것, 현전'을 말합니다. 영어나 독일어 문장에서 'he, she, it, there' 등 '주어'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들을 하이데거는 '도구인 사물, 사람인 타인, 현존재인 자신'으로 나누어서 분류합니다. 반면에 '존재'는 '존재자'의 상태나 존재방식을 말하는 것이므로, '나의 삶 속'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존재하는가를 말합니다. 하이데거는, '사물'의 존재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쓰임'을 말하였습니다. 나무 작대기는 나무에 불과하지만 이 나무 작대기로 못을 내려치면 이 순간 작대기는 '망치'가 됩니다. 곧, '사물'의 존재는 '쓰임'으로 말할 수 있으며, 이 '쓰임'을 통해 그 '지시하는 바'가 정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망치를 든 목수가 집을 짓고 있다고 보면, 여기서 망치는 그 쓰임에 따라 못을 지시하고, 못은 판자를 지시하며, 판자는 집을 지시하고, 집은 거기에 사는 목수를 지시합니다. 이렇게 도구인 사물들은 그 쓰임에 따라 지시하는 바가 잇따라 정해집니다. 이를 '쓸모의 전체성'이라고 하며, 이러한 쓸모가 마지막으로 지시하는 바는, 바로 '현존재인 목수’입니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사물의 존재는 쓸모의 의미 연관 관계 속에서만, 현존재에 '존재로서' 있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사물을 사용할 때 그 사물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쓸모'에 따라 '사용'하는 겁니다. '존재'는 '존재자'의 상태설명을 말하므로, 우리가 도구인 사물의 상태를 이해하려고 하지않는 한, '도구인 사물'의 '존재'는 '눈에 안 띄며' 우리의 생각을 '방해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도구인 사물의 '존재'는 그냥 '그 자체로 있음'이 됩니다. 이를 하이데거는 '손안에 있음'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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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이 사물이 나의 삶의 일부분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때 목수가 못질을 실수해서 망치를 자신의 손에 내리쳤다고 생각해보면, 그 순간 목수는 '왜이리 망치가 무겁지?', '망치가 엄청 단단하구나'라면서 '망치'의 성질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서 목수는 망치라는 존재자의 변하지 않는 '성질'을 생각하게 되지, 인간의 삶인 현존재와 연관되어 있는 망치의 '쓸모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므로 '존재'에 대해서 말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는 망치의 '성질'을 말하는 것이므로, '존재론'이 아니라 '인식론'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눈앞에 있음'이라고 말합니다. 즉, 사물은 '도구'의 쓰임으로 그 자체가 내 손 안에서 쓰여질 때 존재론적으로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며, 따라서 현존재의 삶에서부터 쓸모의 지시연관관계를 깨뜨리고 '사물이 무엇인가'에 대한 '성질'을 탐구하거나 관찰하는 것은, '삶'의 '존재론적 사고방식'이 될 수 없는 '인식'의 '과학적 사고방식'이라는 것입니다. 타인, 타자의 경우는 어떠한가를 보면, '타인'은 '나'와 함께 살아가는 '현존재' 입니다. 타인 역시 '현존재'의 특성을 대부분 동일하게 가지고 있으므로 '현존재'를 설명하는 것이 '타인'을 설명하는 것이 됩니다. 이를 '공동 현존재'라고 정의합니다. 타인과 내가 어떻게 관계맺고 있느냐에 따라서 간단하게 두가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선은 '타인를 돌보아주고 보살펴 주는 것'입니다. 타인과 좋은 관계에 있으면 우리는 그와 더불어 '함께' 일상을 공유하게 됩니다. 이렇게 '함께 있음'이 긍정적 양상이라면, 그 반대로 반목, 무시, 그냥 지나침, 서로 모르는 체함으로써 상대를 대할 수도 있습니다. 이 부정적인 양상이 '수수방관'에 해당합니다. 이는 '함께 하지 않는' 존재 방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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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사상에 대한 철학적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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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철학은 20세기 중후반들어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다양한 관점의 철학적 비판들이 있었으나 그들이 공통적으로 비판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하이데거의 사상은 죽음을 실존의 근거로 만듬으로써, 삶에서 죽음을 강제로 마주하게끔 만들고 이를 통해 영웅적 삶을 위한 선택의 결단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도리어 개인의 자유를 해치는 전체주의적 특성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찾아오는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걸 생각하는 것이 존재론적 반성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주장입니다. '있다는 것'은 '없다는 것'이 인지될 때 더 뚜렷하게 다가오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이데거는 '인간의 유한성을 마주하고 스스로의 삶을 반성'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죽음'을 말했던 것이지, 죽음을 통해 선택을 강요하려고 한 의도는 아니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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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철학적으로 '죽음이 반성적 계기가 되는 것이 과연 옳으냐', '죽음이 과연 진정한 반성을 이끌어낼 수 있느냐'는 학자들의 비판은 유효합니다. 죽음을 염두에 둔 반성이란 그렇지 않은 반성보다 더 극단적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으며, 전체적인 맥락에서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하여 그 어떤 희망도 허무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선 오히려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는 선택이 실존적으로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에, 한나 아렌트는 '죽음'을 실존의 근거로 두지 말고, '탄생'을 실존의 근거로 두자고 제안했습니다. 또한 부르디외가 보기에 하이데거의 철학은 '순수 철학'이 아니라 당대 정치적 보수주의와 함께 작동했던 이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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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가 나치당에 가입한 이력과 그의 철학의 논의 구조나 용어가 당대의 보수혁명가의 논의와 공명한다는 것 등이 그 증거입니다. 또한 하이데거는 철학함에 있어서는 애매함에서 벗어나 결단하는 삶을 주장했지만, 반대로 정치적 입장에 있어서는 애매한 태도를 견지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입니다. 만약 그의 정치적 입장이 애매하지 않다고 한다면, 그가 나치에 가입한 것도 순수한 그의 결단이고 신념인가에 대해서도 부르디외는 그 결단도 '기초 존재론'에서 나오는 '자기 정초'적 순수 신념이 아니라, 그가 처한 사회적 상황에 의존하는 '정치적 존재'로서의 애매한 결정이었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즉 애매한 비본래적 삶을 한순간에 바꾸는 그런 본래적 결단의 삶이란 사실 애초에 없습니다. 우리는 '정치적 존재'이고 그런 의미에서 항상 애매한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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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시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마르틴 하이데커는 유럽 문명에 절망하던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알게 모르게 자각하고 있던 과학과 기술의 눈부신 발전 이면에 인류의 존재를 위협하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을 것이라는 인간의 실존을 예리하게 짚어 내며 커다란 공감을 얻어냈지만 정작 자신은 나치의 미망에 빠지는 실수를 하고 말아 아쉬움을 남기고 있습니다.
20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있는 책 100선 중 36번째 책 인문학 부문 6번째 책 “마르틴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가 1927년에 출간한 존재와 시간(Being and Time)”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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