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7_20세기100선

038. 아널드 조지프 토인비 (Arnold Joseph Toynbee)의 역사의 연구 (A Study of History) 1931-61

忍齋 黃薔 李相遠 2023. 1. 19.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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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7KQpQ77wsBQ

38. 아널드 조지프 토인비 (Arnold Joseph Toynbee, 1889-1975)의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 1931~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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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인비는 세계 3 문명의 교차로(Crossroad of Civilization)로 첫 번째, 지금의 팔레스틴 지방이고, 번째는 실크로드(silk road) 지나는 중앙아시아의 아랄해 지역, 그리고 번째 문명의 교차로를 우리의 조국 한반도로 꼽았습니다. 우리의 조국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문명의 교차로이기 때문에 그만큼 전쟁이 빈발했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조국 한반도는 외세에 의해 남과 북이 갈라져 있고, 여전히 전쟁의 위협 속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지정학적 위험성을 안고 반만년을 살아왔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대인과 한국인이 우수하다는 평가는 없는 도전이 빚어낸 결과입니다. K-pop, K-드라마의 탁월함은 생물학적 우수성이 아니라 끊임없는 외세의 도전 가운데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도 은근과 끈기를 가지고 성공적인 응전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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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널드 조지프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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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널드 조지프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1889 4 14~1975 10 22) 영국의 역사가로1889 4 14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할아버지인 조지프 토인비 (1815 12 30 ~ 1866 7 7) 전형적인 지식 계급 가문 출신으로 이비인후과의사였으며, 백부는 19세기 저명한 경제학자인 아널드 토인비(1852 8 23 ~ 1883 3 9)입니다. 그래서 백부 구별하기 위해 미들네임 ‘J’를 사용합니. 아버지는 사회사업가였고 어머니는 학사 출신의 재원이었습니다. 토인비의 역사에 대한 흥미는 매일 어머니에게 자장가 대신 들은 이야기들에서 싹텄다고 합니. 열세 그리스어와 라틴어 교육을 받기 시작한 그는 윈체스터 칼리지를 거쳐 옥스퍼드 대학교의 베일리얼 칼리지(Balliol College)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고대사를 전공하며 1911년 졸업했습니다. 이어 그리스에 있는 아테네 고고학원의 연구생으로 다녀온 후, 모교 옥스퍼드 대학 고고학대학원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하며 고전고대사 학위를 베일리얼 칼리지 특별연구원 지도교수를 거쳐 외무성에서 근무하며 조사부 이사까지 역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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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 1 세계 대전의 발발로 인하여, ‘우리들은 역사 속에 있다.’라는 실감에 눈을 뜹니. 1918년 킹스 칼리지 런던 대학교에서 동로마 비잔틴 역사학 현대 그리스어 교수로 임명되었고, 동년 파리평화강화회의 전문위원으로 활약했습니다. 1919년부터 1922년까지 벌어진 터키 독립전쟁 당시가디언지의 특파원으로 파견되었고, 경험을 바탕으로그리스와 터키의 서부문제 : 문명의 접촉에 관한 연구’ (The Western Question in Greece and Turkey: A Study in the Contact of Civilisations), 그리스 역사사상’, ‘평화회의 후의 세계등을 저술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그리스 정부를 비난하여 그리스인들의 반발을 샀습니다. 결과 1924년에 킹스 칼리지 런던 대학의 교수직에서 사임해야 했습니다. 1925년엔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의 국제역사학 교수와 왕립 국제 문제 연구소의 연구이사를 역임했습니다. 1929년에는 태평양문제 조사위원으로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1934년에역사의 연구’ (Study of History) 저술하기 시작하여 27년에 거쳐 12편을 완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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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연구의 창작 동기는 1 세계 대전의 발발로 인한 서유럽 문명에 대한 위기의식이었습니다. 1956년에는 컴패니언 오브 아너(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 CH)를 서훈 받고, 1975 10 22일에 영국 요크에서 필립 토인비, 로렌스 토인비 두자녀를 남긴체 사망했습니다. 토인비는 문명에 관한 광범위한 연구를 통해 그리스 이후 쇠퇴한 역사의 반복성에 빛을 부여하고, 고대와 현대 사이에 철학적 동시대성을 발견하였습니다. 40 년에 걸쳐 완성한 그의 대표적인 저서 역사의 연구에는문명의 성장은 계속되는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유명한 가설과 함께 역사의 운명에 대한 그의 예리한 통찰이 담겨 있으며 인종주의적·환경주의적 역사관을 탈피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토인비의 문명사관은 현재까지도 영향력을 잃지 않고 있는데, 문명의 충돌 유명한 하버드대학교 새뮤얼 헌팅턴 교수의 기본 패러다임도 토인비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1987년에 인류에 학문적 공헌을 인물에게 수여하는 토인비 상이 만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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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널드 조지프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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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당시 토인비는 러시아를 비서방 문명으로 간주했고, 러시아 혁명을 서유럽을 위협하는 요소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1952 이후, 생각을 바꾸어 냉전을 서유럽의 종교적인 기독교적 유산과 러시아의 물질적인 마르크스주의 간의 대립으로 보았습니다. 주장은 그의 저서 역사의 연구에 기록 되어있습니다. 1 세계 대전 당시 시오니즘과 유대인 국가를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1922년에 런던을 방문한 팔레스타인 대표의 영향을 받아 견해가 점점 바뀌었고, 1950년대에는 전쟁 발발을 우려하여 시오니즘과 이스라엘에 비판적 입장을 취했습니다. 1961년에는 이스라엘 대사와의 토론에서 이스라엘이 핵전쟁 발발을 막기 위한 전세계의 노력에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임덕규 월간 디플로메시 편집장이 1973 9 영국 정부의 초청으로 런던을 방문한 자리에서 아널드 조지프 토인비는 한국의 () 사상과 경로사상, 가족 제도 등의 설명을 듣고 당시 86세였던 토인비는 눈물을 흘리면서한국의 사상에 대한 설명을 듣고 보니 사상은 인류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사상이라며한국뿐만 아니라 서양에도문화를 전파해 달라 부탁하였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일본은 중국 문명에 의해 영향을 받았으나 후에는 서구열강들의 도전에 응전하며 독자적으로 문명을 발전 시켰기에 별도의 독자적 문명으로 분류했으나, 한국은 일본과 달리 독자적 문명이 아니라 중국 문명의 일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한국의 사상과 경로 사상을 듣고 감격하여 '인류에 가장 필요한 사상'이라고 극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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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 1931~64’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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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들어서서 개별민족이나 왕조나 국가가 아닌문명 연구하는 역사가들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중에서 아놀드 J. 토인비(1889-1975) 역사의 연구 가장 성공적이라 있습니다. 역사의 연구 1 세계대전 이후 서구를 휩쓴 종말론적, 비관적 분위기의 산물이라 있습니다. 1 세계대전의 발발은 유럽의 지식인들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이를 계기로 토인비는 문명의 역사를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왜냐하면 세계의 재앙은, 힘겹게 이룩해온 근대화의 정신이 전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전쟁을 겪으며 지식인들은 미래에 대해 아무런 전망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 1880 5 29~1936 5 8) 1920년에 서구의 몰락이라는 저서를 출판했는데, 책은 1 세계대전을 통해 나타난 현대문명의 병리적 징후들을 비관적으로 그려낸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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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문명이 유기체로서 탄생과 생장 그리고 사망의 필연적 과정을 밟게 된다는 점을 단순한 도식으로 설명했습니다. 책을 토인비는 슈펭글러의 생각은 독단적이고 결정론에 기울어 있고, 지나치게 직관적이고 논증이 부족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토인비는 선험적인 방법이 아니라 경험적인 방법을 채용해서 스승의 이론적 공백을 보강한 산물이 역사의 연구였습니다. 그는 인류 전체의 역사를 대상으로 과연 어떤 일반 법칙이 존재하는지를 찾아내고자 했습니다. 이를 통해 서구 문명의 미래를 예언하고자 했습니다. 서구 문명의 미래에 대한 위기의식이 집필 동기가 되었습니다. 사멸했던 로마 문명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서구 문명도 결국 몰락하는 길만이 역사의 법칙상 주어진 운명인지 아닌지를 밝혀보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역사의 연구(Study of History)30 문명의 흥망성쇠와 독자적인 문명사관을 담은 서유럽 중심의 역사관이 아닌, 이슬람교, 불교에 더하여 특수한 존재로써 일본에까지 주목하여 문명국의 발전을 그리며 총12권으로 구상에서 완결까지 40, 1934년부터 1961년까지 27년동안 저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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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독자에게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미국인 D. C. 서머벨에 의해 10권까지를 요약한 축쇄판이 권으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책의 내용을 보면, 역사 연구의 단위는 국가나 시대가 아니라 문명 사회여야 한다는 입장에서 세계사의 문명을 21개로 분류합니다. 토인비의 역사관은 사회의 진보가 않이라 역사 또는 문명의 순환입니다. 문명의생에서 문명의 성장으로 그리고 문명의 쇠퇴에 이어 문명의 붕괴 과정을 거치는 문명의 공통된 역사법칙성을 구명하면서, 거시적이고 포괄적인 문명사관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세계사를 비교문명론적으로 고찰하는 독특한 문명순환론적인 문명사관을 제시했습니다. 토인비의 문제 의식은 오스발트 슈펭글러와 마찬가지로 서구 문명의 운명에 대한 회의적인 물음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중간에 2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기독교 본래의 정신으로 복귀하는데, 미래를 기대하고 있던 그의 종교적 비전이 7 이후부터는 한층 어두운 그림자에 덮이게 되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 문명의 흥망 원인을 설명하는 독자적인 이론으로서 '도전(挑戰challenge) 응전(應戰response)', '창조적 소수자(創造的少數者) 지배적 소수자(支配的少數者)', '내적(內的) 프롤레타리아트와 외적(外的) 프롤레타리아트' 등은 탁월한 것이며, 이것은 서구중심사관을 탈피한 해박한 지식에 바탕을 보편적인 관점과 함께 책의 최대 공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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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 1931~64’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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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연구문명의 백과사전입니. 소멸했거나 살아있는 모든 문명을 탐사했습니다. 인명, 지명, 색인을 별책으로 출판할 정도로 양이 방대합니다. 내용은 대부분의 역사적 사실에 관한 서술과 분석이고, 철학이나 이론을 펼치는 지면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책의 가장 약점은 분량이 너무 방대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전문 연구자들 말고는 원본을 읽는 이가 거의 없고 일반 독자들은 주로 축약본을 읽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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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34년에 집필된 1역사의 모습에서, 먼저 그는 역사 연구의 단위를 탐색하는 것부터연구 시작하고 있습니다. 토인비는 역사를 국민, 국가라는 입장에서 연구하는 통상적 방법을 피하고 있습니다. 이는 크게 보면 국민, 국가란 보다 문명속의 단편에 지나지 않고, 문명이라는 단위 쪽이 국민 국가라는 작은 단위보다 역사적 왜곡이 적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토인비는 이처럼 역사 단위를 정의하고 문명 이전의 사회를 살펴본 그리스와 중국, 유대의 역사 과정을 길잡이로 문명의 역사모델 정립하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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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에서는 문명의 탄생 논하고 있습니다. 토인비는 인종이나 환경은 불충분하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생명을 통해 이를 설명하며 해답을 신화와 종교에 대한 통찰에서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창조는 만남의 결과이며, 만남의 과정이 도전과 응전으로 묘사됩니다. 도전과 그에 대한 응전은 실제로 효과적 창조를 가져올 있는 한계를 자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결과 어느 문명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강한 자극이 필요하고, 도전은 창조성을 질식시킬 정도로 심각한 것이지 않아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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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문명의 성장 대해 논한 부분입니다. 순조롭게 태어난 문명은 탄생 자체가 최초의 높은 장애를 뛰어넘어야 합니. 하지만, 이후 저절로 발전의 동력이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반드시 자동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탄생 직후에 성장을 멈추어 버린 몇몇 사회가 증거입니다. 이들 사회의 성장에 관한 특질을 조사해 보면, 이곳에서는 어떤 도전에 대한 응전이 성공하고, 그것이 새로운 도전을 불러일으킨다는 단순한 동작이 시리즈로 진행될 , 그것을 사회가 계속 성장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서 도전과 응전이 연속해 일어나고 있을 , 움직임이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를 문제 삼지 않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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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문명의 쇠퇴 다루고 있습니다. 토인비 문명은 쇠퇴라는 숙명을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토인비는 결정론에 빠지기보다 문명이 성장을 유지하는 과정 속에는 많은 위험이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회를 이끄는 창조적 지도력은 창조력이 없는 대중을 이끌어가기 위해 그들을 사회적으로훈련시키는 방법을 택하지 않을 없지만, 지도자가 창조적 영적 능력을 갖추지 못했을 때는 자신의 의도와는 어긋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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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문명의 해체입니. 문명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도 있지만, 쇠퇴는 불가피한 것이며, 대체로 방치된 해체로 이어지는 동일한 형태를 밟고 있습니다. 대중의 힘이 지도자에게서 분리되면 지도자는 과거의 견인력과는 성질이 다른 폭력을 사용해 지위를 확보하려고 합니. 과정에서 사회는 소수의 지배자와 내부 프롤레타리아트 그리고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야만족으로 구성된 외부 프롤레타리아트로 분해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며, 이들 집단이 해체의 시련에 대해 사회적으로 어떤 대응을 보이는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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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에서는세계국가 논하고 있습니다. 사회가 분열 과정에 들어가면 대체로 개의 분파로 분열되며, 각자 나름대로 제도를 만들어 냅니. 소수의 지배자는 적대적 국민을 통합해 세계국가를 만들고 그를 통해 위험하게 권력을 유지하고자 합니. 세계국가는 세계 전체를 망라한 것은 아니지만 문명의 전체 영역을 속에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토인비는, 세계국가는 자체가 목적인지, 아니면 그를 초월하는 어떤 것을 위한 수단인지를 자문합니다. 세계국가는 불멸한다는 깊은 믿음을 갖게 되는 근거로 로마 제국이 신성로마 제국과 그리스 정교 권의 동로마 제국 그리고3 로마 모스크바 대공국 러시아 제국으로 부활했고, 중국에서도 진과 제국이 수와 제국으로 부활한 데에서 이유를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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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계교회입니. 토인비에 의하면, 고도의 수준 높은 종교의 출현은 인간 역사에 중대한 획을 그은 것이므로 이를 문명으로 취급해 충분히 논할 만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토인비는 고도의 수준 높은 종교란, 자체로 구성되는 새로운종류 사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신적 열망은 성취되지 않았지만, 목표는 인간과 우주의 저편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를 직접적 인격 관계로 발전시키는 것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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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에서는영웅시대 논하고 있습니다. 토인비는, 문명은 항상 자신의 결함과 실패 때문에 파산해 것일 , 외부로부터의 작용으로 인해 파멸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가 스스로에게 치명적 타격을 가해 사멸 직전까지 이르렀을 , 사회의 경계 외부에 있던 야만족들의 침입을 받아 결정적으로 파멸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야만족들은 성벽을 굳건히 문명에 비해 자유롭게 행동하며 결국 승리를 얻습니다. 그들은 황폐해진 과거의 문명의 본거지를 차지하고 잠깐영웅시대 즐깁니다. 그러나 영웅시대는 고도로 수준 높은 종교와는 달리 문명의 역사에 어떤 새로운 장도 열지 못합니다. 야만족들이란 역사의 무대에서 죽은 문명의 기와 조각을 긁어내는 빗자루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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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문명들의 공간적 접촉이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같은 시대에 한두 문명이 빈번히 문화적으로 접촉할 , 어떤 사건이 일어납니다. 같은 형태의 접촉이 특히 중요시되는 점은, 고도의 수준 높은 대부분 종교는 문명이 서로 엇갈려 있는 장소에서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공격적 문명은 희생자에게 문화적이자 종교적인 것은 물론, 인종적으로도 열등자라는 낙인을 찍는 경향을 지닙니다. 희생자인 공격을 받는 쪽은 이질적 문화에 자기 자신을 강제로 동화시키려고 노력하든가 과도한 방어적 자세로서 이에 대응하게 됩니. 9권은 동시대의 문명 접촉이 가져온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결과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많은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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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54년에 출간 된 10문명들의 시간적 접촉 테마로 삼고 있습니다. 동시대의 문명 접촉만이 문명이 다른 문명과 마주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닙니다. 현존하는 문명이 죽은 문명을 르네상스라는 형태로 살려내며 그와 접촉합니다. 토인비가 사용한르네상스라는 말은 이탈리아에서 그리스 문명을 재생시킨 사실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 넓은 의미에서 다른 많은 사회에서도 르네상스적 현상은 공통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1권부터 제10권까지가 역사의 연구본문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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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에는 역사 지도를 담은 11 완성되었습니다.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출간되자마자 학계를 비롯한 각계각층에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열렬한 찬사와 호응이 이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격렬한 비판도 제기되었습니다. 이러한 비판적 견해들을 반성적으로 고찰하면서 반론을 책이 12권으로 1961년에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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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1961년애 출간 된 12 역사를 연구하는가입니.  토인비는역사의 경과를 조사한 , 스스로역사는 무엇인가?’ 또는어떻게 하여 역사가 쓰이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대답하지 않는다면 역사연구는 완전한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토인비는 결코 모든 사실이 시간적 순서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 역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역사 기술 역시 이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생각한 역사가는 다른 모든 인간에 대한 관찰자들과 마찬가지로 실재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내는 역할을 부여받은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같은 사고방식은 역사가가무엇이 진실인가, 무엇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라는 연속적 판단을 하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역사가는 이를 위해 모든 사실의 연구를 개관하며 분류, 비교하지 않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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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挑戰challenge) 응전(應戰respo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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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인비는 문명은 도전(challenge) 대해 성공적으로 응전(response)해야 탄생과 성장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원리에 따라 문명은 탄생 · 성장 · 쇠퇴 · 붕괴의 4단계 사이클(cycle, 주기) 겪는다는 이른바 문명순환론을 주장했습니다. 문명을 움직이는 원동력을 고차원 문명과 저차원 문명 간의 도전과 응전’, ‘내적 프롤레타리아트와 외적 프롤레타리아트’, ‘창조적 소수와 대중의 모방 등으로 분석했습니다. 토인비는 이러한 이론을 토대로 인류가 창조한 문명을 유형화했습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인류역사에 알려진 문명은 모두 30개인데, 그중 정상적인 순환과정, 탄생 · 성장 · 쇠퇴 · 붕괴 4단계를 거친 이른바 성장문명은 21개입니다. 그리고 자연재해나 전쟁 같은 불의의 요인으로 인해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고 일부만 거친 정체(停滯)문명은 5개이며, 탄생 요인을 잉태했다가 태어나지 못한 유산(流産)문명은 4개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성장문명 21 중에서도 이미 사라진 ()문명이 14개이며, 아직 살아 있는 생존문명이 7(인도 · 이슬람 · 극동 · 비잔틴 · 동남유럽 · 그리스정교 · 서구 문명)라고 분석하였습니다. 이러한 초유의 문명유형화는 대체적으로 사실에 부합되는 것으로 지금도 문명사 연구에 이용되고 있습니다. 문명의 탄생 요건에 관해 종래의 통념은 자연환경적으로 인간 생활에 유리한 곳에서 탄생이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토인비는 이와 반대로 오히려 자연환경이 불리한 것이 문명 탄생의 필요조건이라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불리한 환경은 일종의 도전이므로, 이러한 도전에 응전해 극복할 때만이 문명은 탄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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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고대 4 문명을 탄생시킨 4대강 유역은 모두가 범람의 위험이 크고, 기후가 건조하거나 고온인 악조건 지역이어서, 인간이 고도의 지혜를 발휘해 그러한 도전을 성공적으로 극복하는 과정에서 고대 4 문명이 비로소 탄생하게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성공적인 응전을 가능케 하는 요인은 인간의 창의력이라고 하면서, 창의력이 있는 인간만이 도전을 이겨내고 문명을 탄생시킬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토인비는 탄생한 문명의 성장도 도전에 대한 응전이 성공해야 가능하며, 그러한 성장은 단순한 영토의 확장이나 경제적 기술적 발전만은 아니고 중요한 것은 정신적 승화(etherealization)라고 보았습니다. 문명의 붕괴는 결국 문명의 최종 단계인 해체로 마무리되는데, 때로는 붕괴가 중지되어 해체가 아닌 장기적인 화석기(化石期) 도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토인비는 이집트와 동양문명이 바로 이런 경우라고 여겼습니다. 단계에서는 창조성은 자포자기나 자기억제로, ‘흉내 보이콧이나 순교로 변해 결국 영혼의 분열도 일어나게 됩니. 단계에서는 적대국가나 적대사상 간에 전쟁이 발발하게 마련인데, 전쟁에 기진맥진한 대중은 세계국가나 평화를 갈구하게 됩니. 문명의 해체기나 화석기가 지나서 새로운 문명이 탄생하기까지는 상당히 보내게 되는데, 토인비는 기간을공위시대’(空位時代, interregnum)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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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는 민족이동과 대중운동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며 영웅호걸들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일명영웅시대’(heroic age)라고도 합니. 그는 또한 시대를 400 동안 지속되는고난의 시기’(a time of troubles)라고도 표현합니다. 공위시대의 혼란 속에서 새로운 문명의 여명은 밝아옵니다. 토인비는 문명의 동시대성과 유형화 순환론을 밝혀냄으로써 문명사 연구의 새로운 방법론을 도출했고, 문명필멸이라는 비관주의를 지양하고 순환에 의한 문명의 재생이란 낙관주의적 역사관을 제시했습니다. 아놀드 토인비는 서문 첫머리에서 저술 동기를 밝힙니다. “ 책은 표제가 암시하는 바를 이루고자 하나의 시도이다. , 나는 인류의 역사를 하나의 전체로서 조망해 보려고 시도한 것이다. 이는 출발점에서부터 1972년까지의 역사를 조망해 본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을 세계적으로 조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의도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이 속에 살고 있으므로 우리의 특정한 국가나 문명 또는 종교를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매우 뛰어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환영에서 스스로 해방되어야 한다.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종래의 서유럽 중심의 역사관과 문명관을 초월해 세계의 모든 지역의 역사와 문명을 동등한 가치로 바라보는 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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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인비의 청어(靑魚, Herring)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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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인비는 자신의 역사이론인도전과 응전 법칙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기에 안성맞춤인 청어(靑魚)소재로 사용했습니다. 청어는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고급 어종입니다. 하지만 청어가 잡히는 곳은 북해나 베링해협 같은 바다였기에 싱싱한 청어를 먹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배에 싣고 오는 동안에 대부분 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살아있는 청어가 런던 수산시장에 대량으로 공급되기 시작했습니다. 비결은 청어를 운반해오는 수조에 청어의 천적인 물메기 마리를 함께 넣는 것이었습니다. 청어가 물메기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힘껏 도망 다니다 보니, 그런 긴장이 청어를 살아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것입니다. 토인비가 청어 이야기를 자주 인용했던 것은 가혹한 환경이 문명을 낳고 인류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었다는 자신의 역사이론을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토인비는 문명이 만나는 도전을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습니다. ①척박한 땅이 주는 자극, ②새로운 땅이 주는 자극, ③갑작스런 외부의 공격, ④외부의 계속적인 압박, ⑤그리고 사회 내부 집단에 대한 압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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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도전이 없으면 폴리네시아, 에스키모, 유목민 사회처럼 문명이 성장을 멈추고 맙니. 도전이 가혹할수록 응전하는 힘도 커지지만 지나치게 가혹하면 문명 자체를 말하기 때문에 지나치지 않은 수준의 도전이 문명의 성장에 자극을 줍니. 역사를 봐도 그러합니다. 자연조건이 지나치게 좋은 환경에서는 문명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토인비는 문명을 일으킨 자연환경은 안락한 환경이 아니라 대부분 가혹한 환경이었다고 말합니다. 역사적으로 자연환경이 좋은 나라는 발전에서 뒤처졌다는 지적입니다. 고대문명과 세계 종교의 발상지가 모두 척박한 땅이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이집트 문명을 예로 들어보면 이집트 문명을 일으킨 민족은 원래 아프리카 북부지역에서 수렵 생활을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5,000~6,000 아프리카 북부를 걸치고 있던 강우 전선이 북유럽 쪽으로 이동해 가자 아프리카 북부와 남아시아 지역은 빠르게 건조, 사막지대로 변해갔습니다. 이들에게는 이론상 가지 선택이 있을 있었습니다. 그곳에 남아 기존의 수렵 생활을 영위하면서 연명하거나, 자리에 남아있으되 수렵 생활 대신 유목이나 농경 생활로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거나, 거주지역과 생활방식을 모두 바꾸는 ,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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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응전 어느 것을 택했느냐에 따라 이들의 운명이 갈렸습니다. 자리에 남아 조상들의 방식대로 수렵 생활을 계속했던 부족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고, 생활방식을 바꾼 부족은 아프리카 초원 지역의 유목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독사가 우글거리는 나일강 밀림 지역으로 옮겨 농경과 목축을 선택한 부족들은 마침내 찬란한 이집트 문명과 수메르 문명을 일구었습니다. 19세기까지 동서고금의 역사가들은 민족, 가문, 왕조, 사회, 국가를 단위로 역사를 연구하고 서술했습니다. 역사의 연구는 숙명론에서 벗어나 창조적 소수에 의해 진보할 있다는 낙관론을 전개합니다. 이러한 낙관적 역사관을 피력하기 위해 역사의 연구 역사를 민족이나 국가 중심으로 파악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문화적 실체, 문명을 역사의 단위로 설정합니다. 문명이란 개인들 사이에서 관계의 결과이며 인간의 정신적 결정체로 점은 문명을 단순한 유기체로 이해한 슈펭글러와의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역사의 연구 인종이나 환경 결정론적 요인도 도전을 제기하는 범위 내에서만 의미가 있음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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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소수자(創造的少數者) 지배적 소수자(支配的少數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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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성에 젖은 사회집단 속에서 소수가 창조적 의지를 갖고 반응하게 됨으로써 문명이 도약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문명의 성장과 소멸과정을 보면 성장기에는 사회의 다수가 창조적 소수를 기꺼이 모방해 일체감을 형성하게 됩니. 그러나 일단 도전에 성공한 소수가 자신과 자신이 창조한 제도를 우상화함으로써 창조성과 지도력을 잃게 되면서 문명의 쇠퇴에 들어서게 됩니. 창조적 소수가 지배적 소수로 전락하는 상황에서 소수와 다수의 조화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의 자기 결정력을 상실하게 됩니. 고전에서는 매우 많은 역사철학적 주제들이 쟁점화될 있다는 점에서 인류사회에 공헌도가 매우 큽니. 사회의 진보는 언제나개인에서 출발했습니다. 여기에서 개인은 모든 개인이 아닙니다. ‘소수의 창조적 천재들입니다. 어느 사회나 소수의 창조적인 천재가 있습니다. 그들은 비창조적인 다수가 자신의 비전을 받아들이고 따를 때에만 사회적 창조 행위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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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창조적인 다수자가 창조적 소수자를 모방하고 따르는 현상을미메시스(mimesis)’ 합니. 그리스어미메시스모방또는재현이라는 뜻입니다. 역사의 연구 분명히 세계적인 문명의 비교연구를 노린 것이지만, 핵심의 요약인서양 문명의 앞날이라는 집필 동기, 나아가 인류 존속 조건으로서 생각해낸세계국가 구성에 이르기까지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요청에 호응한 것이었습니다. 토인비는 자신의 민족적 체험이나 이해에만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세계사적인 깊이와 눈으로 문제의 본질과 무게를 가늠하려 했습니다. 예를 들어 토인비가 복잡하게 움직이는 오늘날의 국제 정세를 분석하여 세계사의 나아갈 길을 이야기할 , 또는 인류의 지혜를 걸고 해결해야 핵전쟁의 위협이나 남북문제를 생각할 , 중동전쟁을 지켜볼 , 확대되어가는 도시문제나 공해문제 등을 생각해볼 , 전반적인 현대문명의 위기에 대한 발언은 어느 것이나 세계사적인 배경에서 해명되어야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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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교차로(Crossroad of Civil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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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연구에서 문명의 교차로(Crossroad of Civilization) 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문명의 교차로 다름 아닌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길목인 전쟁터를 말합니다. 토인비가 세계 3 문명의 교차로를 말할 번째는 지금의 팔레스틴 지방이고, 번째는 실크로드(silk road) 지나가는 중앙아시아의 아랄해 지역, 그리고 번째 문명의 교차로를 우리의 조국 한반도로 꼽았습니다. 우리의 조국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문명의 교차로이기 때문에 그만큼 전쟁이 빈발했다는 뜻입니다. 반만년 역사 속에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으로부터 크고 작은 도전과 전쟁들이 수없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조국은 외세에 의해 남과 북이 갈라져 있고, 여전히 전쟁의 위협 속에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지정학적 위험성을 안고 반만년을 살아왔습니다. 자타가 인정하는 세계적으로 유대인과 한국인이 우수하다는 평가는 없는 도전이 빚어낸 결과입니다. 이러한 탁월함은 생물학적 우수성이 아니라 끊임없는 외세의 도전 가운데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도 은근과 끈기를 가지고 성공적인 응전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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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주목을 받지 못했던 아시아 문명의 역사에도 주목하여 1 세계 대전 서유럽 문명에 위기가 도래한 상황에서 아시아 문명으로부터 배울 점이 많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인류 문명사를 다각도로 통찰한 토인비의 이론은 기존 서구 중심의 전통사관에서 탈피한 독자적이고 새로운 사관으로 평가받으며, 전후 역사가들에게 일종의 패러다임과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토인비의 이론이 학계에 미친 영향은 컸지만 학계에서 그의 이론에 대한 반박도 많았습니다. 결국 그의 이론은 1960년대 후로 잊혀졌습니다. 하지만 그의 고전 연구는 저명한 고전 역사가인 투키디데스와 헤로도토스와도 비슷한 점이 많았기 때문에 현재도 그의 작품은 고전 역사가들에 의해 많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역사는 무엇이며, 누가 역사를 쓰는 것일까? 모든 인간은 모두 역사의 주인공인가? 인류의 역사는 계속 진보하는 것인가? 국가나 집단이 제대로 역사를 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역사를 움직이는 힘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대한 답이 바로 이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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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 12권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토인비(Toynbee)30 문명의 흥망성쇠와 '도전(挑戰) 응전(應戰)'을 통해 서구중심사관을 보편적 관점으로 조정해주어 3대문명의 교차로중 하나인 한반도가 K-popK-drama같이 세계문명을 주도할 희망을 보여주고 있는게 아닌가 군침을 삼키게 합니다.

20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있는 책 100선 중 38번째 책 인문학 부문 8번째 책 아널드 조지프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1931년 부터 1964년에 걸쳐 12권으로 출간한 역사의 연구 (A Study of History)”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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