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7_20세기100선

037. 풍우란의 중국철학사 1930 - History of Chinese philosophy by Yu-lan Fung

忍齋 黃薔 李相遠 2023. 1. 14.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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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rotqpTSjn9Y

현대 한국을 살아가는 우리는 유교와 불교의 사상과 교리, 그리고 성리학적 사고를 통해 한국 사상의 주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중국철학은 중국이라는 나라의 철학이기도 하지만 고대로부터의 한국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동양철학의 초석임에도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성리학을 비롯한 몇몇 사상은 중국에서보다 한국에서 더찬란하게 빛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인은 중국철학을 알아야 하고, 공부해야할 학문이고 정신입니다. 우리를 알고, 나를 알기 위해서라도 중국철학은 선행되어야할 학습의 중요한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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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풍우란(馮友蘭 펑유란 Yu-lan Fung, 1894-1990)의 중국철학사(Chinese philosophy)/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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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철학을 이해하는데 가장 좋은 책이 풍우란(펑유란)의 '중국철학사'입니다. 이 책은 상·하 두 권이며, 합쳐서 본문만 13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입니다. 식민지 지배 하의 제국주의 서방세계에 대한 증오와 함께 그들의 우수한 문명에 대한 동경이 동시적으로 존재했던 1934년 중국철학사의 초고를 완성한 풍우란의 작업은 의미가 깊습니다. 풍우란의 두 권짜리 중국철학사든, 한 권짜리 간명한 중국철학사든 풍우란이 쓴 중국철학사는 꼭 읽어야 하는 책입니다. 하지만, 한 번 읽고서는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경전을 읽듯이 천천히 오래토록 공부하며 읽어나가야 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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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우란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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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 교수, 철학자. "현대의 신유학자(New Confucianism)"로 일컬어지는 풍우란은 1895년 12월 4일 허난성 탕허현 치의진에서 태어났습니다. 풍씨는 현지의 명문 가문으로, 천여 무에 달하는 토지를 보유한 대지주였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성징(聖徵) 풍옥문(馮玉文)은 지역의 유지였습니다. 부친 수후(樹候) 풍대이(馮臺異)는 1898년에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탕허현 숭실서원 산장을 역임했습니다. 또한 어머니 오청지(吳清芝)는 탕허현 단본여학교의 학감(學監)이었습니다. 1902년, 풍우란은 7살에 소학교에 가서 먼저 시경을 읽고, 다음에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읽었으며, 나중엔 상서와 춘추좌씨전을 읽었습니다. 이때 그는 서적을 다 읽은 후에도 처음으로 돌아가 반복해서 읽으며 암기했습니다. 1907년, 풍씨 가문은 전문 교사를 초빙해 풍우란의 교육을 담당하게 했고, 풍우란은 정규적으로 고문과 산수, 글쓰기 등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펑유란은 여가 시간에도 늘 아버지가 소장한 새 책이나 새 간행물을 읽으며 서구 사상과 접촉했습니다. 12살 때,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자 그는 어머니를 따라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교사를 계속 초빙해 공부했으며 황종희(黄宗羲)의 ‘명이대방록 (明夷待访录)’을 읽고 천문, 역법, 역사 등을 익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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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풍우란은 모친의 권유에 따라 탕허헌 고등 소학교에 입학했고 이듬해 봄에 중주공학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다가 1912년 여름에 우창중화학교로 전입했고 그해 겨울에 상하이 제2중학교 고등학교 예과반 전입 시험을 치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습니다. 당시 상하이 제2중학교는 모든 과목에 영어 원저 교재를 채택했는데, 한 교사는 ‘논리학강요’를 영어 독본으로 삼았습니다. 풍우란은 이 책을 읽고 형이상학 논리에 관심을 가졌고 철학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1915년 9월 베이징대 문과 중국철학반에 입학한 풍우란은 비교적 체계적인 철학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1918년 6월 베이징 대학 철학과를 졸업했고 1918년 가을 후난 제일공업학교의 언문(语文) 수신(修身) 교원을 맡았습니다. 그가 베이징 대학을 졸업하기 직전, 저명한 철학자 후스와 량수밍(梁漱溟)이 베이징 대학을 방문해 철학 토론회를 연 적이 있었습니다. 풍우란은 이 토론회에 참석해 중국과 서양 철학, 특히 중국과 서양 문화의 관계를 깊이 탐구했습니다. 1919년 5.4 운동이 발발해 중국 전역에 확산되었습니다. 그는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몇몇 친구들과 함께 ‘마음의 소리(心声)’ 잡지를 창간했습니다. 그는 발간사에 "잡지의 취지는 외국의 사상을 흡수하고 양심적 주장을 펴는 것"이라며 "사회, 교육상의 낡은 틀을 깨고 진보의 길을 재촉하는 것"이라고 명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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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월 뉴욕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한 그는 존 듀이, 버트런드 러셀 등의 지도 아래 신유학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펑유란은 미국 유학 시기에 ‘앙리 베르그송의 철학방법’과 ‘심력(心力)’ 두편을 집필하여 중국 철학계에 베르그송의 철학 사상을 소개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베르그송의 철학 관점으로 ‘중국은 왜 과학이 없는가?’라는 글을 쓰면서 중국이 근대과학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중국인이 어리석은 게 아니라 사회 자체가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전통은 인간의 품성과 수양을 중시하고 지식과 권력을 중시하지 않기 때문에, 중국 철학은 내면을 추구하고 인간의 본성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반면 서양 철학은 자연을 인식해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 목적이다. 중, 서 철학의 서로 다른 이상과 추구가 중, 서 문화의 차이를 야기하고, 중국 근대 과학의 낙후된 상황을 야기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풍우란은 인도 출신의 저명한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를 만나 동서문화의 여러 문제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그는 담화 기록을 정리해 국내에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1921년 ‘동서문화 및 철학’을 출판하면서 중서문화 논쟁은 고금의 다툼이 아니라 문화가 만들어내는 '의욕'의 근본이 다른 것으로 간주했으며, 이를 이론의 기초로 삼아 논리를 전개했습니다. 한편 풍우란은 중국 철학자 량수밍의 저작을 영어로 번역해 미국 학계에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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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여름, 풍우란은 졸업 논문을 제출해 무사히 통과했으며 이듬해 '인생 이상의 비교 연구'로 박사 논문을 출간하여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는 존 듀이 등의 지도 아래 박사 논문인 '인생 이상적 비교 연구'를 완성했습니다. 그는 이 글에서 세계 철학을 '손도(损道)', 이익, 중도(中道)로 분류했습니다. 그는 이 세가지 철학의 분기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에서 기인하며 인간은 "자연적인 것"과 "인공"을 경험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연적인 것은 자연스럽게 멸하며 인간과 관련이 없는 천역적인 사물이다. 반면 인공은 인간이 만든 것들인데, 자연에 위배되므로 그들의 존재는 인간에 의존해야 한다."며 그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전하고 인위적인 것을 경계한 일부 서양철학의 논지가 중국 고대의 "절성기지(绝圣弃智), "절인기의(绝仁弃义)”, 절교기리(绝巧弃利)"를 주장한 도교와 같다고 여겼습니다. 또한 그는 인간의 경지를 아름답게 여기고 자연을 개조하고 정복하자는 서구 철학은 묵자의 논리와 같다고 주장했습니다. 풍우란은 컬럼비아 대학교 졸업 후 캐나다를 경유해 중국에 귀국한 뒤 서양철학을 중국에 알리려 했으나 뜻과는 달리 칭화대학 등지에서 중국철학사를 강의했습니다. 귀국 초 중주대 철학교수 겸 문과 주임, 철학과 주임을 역임했습니다. 1925년 가을 광저우 중산대 교수 겸 철학과 주임을 맡았으며, 1926년 옌징대 교수에 부임했습니다. 그후 1928년 가을에 칭화대 교수로 자리를 옮겼고 1934년 문학원 원장을 겸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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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철학사’는 풍우란이 1931년 출간한 춘추전국시대까지의 철학을 다룬 '자학(子學)시대'와 그 뒤부터 명.청나라 철학까지를 다룬 1934년 출간한, '경학(經學)시대'를 합쳐 ‘중국철학사 하책’이라 합니다. 자학시대란 하나의 준거틀이 없이 공자.맹자.노자 등이 서로의 사상을 겨루던 시기를 뜻하며, 경학시대란 유가의 책들이 경전이 돼 모든 철학체계가 그것을 벗어나지 못한 시기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이 저서에서 '유학의 독존과 정통성을 대대적으로 추앙했으며 서양철학자들에게 친숙한 관점에서 중국 철학을 소개하고 비평해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중국철학사’가 중국 철학사 연구서의 고전이 된 데는 풍우란이 제시한 이러한 새로운 연구방법론 탓이 컸습니다. 그는 "사료의 진위를 떠나 그 사료에 내포된 시대적.사상적 맥락을 고찰해야" 하며, "문구 해석에 치우치지 않고 전체 사상을 이해하고 체득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거짓 사료는 모두 배척하고 문자의 고증과 뜻풀이에 치중하던 당시 분위기와 사뭇 다른 것이었습니다. 가령 그는 위진시대 철학서 ‘열자’에 대해 "열자가 쓴 것은 아니지만 당시 사상 사료로는 훌륭하다"고 평가했습니다. 1934년, 풍우란은 프라하에서 열린 제8차 국제철학회의에 초청받았습니다. 그는 이 대회에서 "철학은 현대 중국에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회의가 끝난 후, 그는 "러시아 혁명 이후의 상황에 대해 천국, 낙원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고 지옥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떤 모습인지 직접 보고 싶다."며 소련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소련을 살펴본 후 소련이 지상의 지옥도, 천국의 낙원도 아니며 변화하는 인류사회에 불과하고 천국의 낙원으로 통할 수는 있지만 당장의 처지는 곤궁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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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으로 돌아간 뒤, 풍우란은 두차례의 공식 강연을 가졌습니다. 한 번은 소련의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해 자유롭게 서술했고, 다른 한 번은 '진한 역사철학'이라는 제목을 달고 역사 유물주의의 일부 사상을 기본요소로 하는 '신삼통오덕론 (新三统五德论)"을 제기해 사회적 계급에 대해 집중 조명했습니다. 이에 장개석의 국민정부는 그가 공산주의를 설파한다고 간주하고 1935년 10월 말에 정치사범으로 규정하고 11월 초에 체포해 심문을 가했습니다. 그러자 전국 각지에서 항의 시위가 열렸고 펑유란의 동료들은 그가 공산주의자가 결코 아니라는 투서를 보냈습니다. 결국 그는 심문을 받은 지 수일 만에 석방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국민당의 통치에 순응했고 장개석이 펼치는 신생활운동에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풍우란은 창사로 이동했다가 곧 쿤밍으로 자리를 옮겨 서남연대 철학과 교수이자 문학원장으로 재직했으며 국민당 고위층과 자주 교류하여 1939년에 국민당에 가입했습니다. 쿤밍에 있던 시기, 그는 1939년에 ‘신이학(新理學)’을 발표하여, 성리학에 독자적인 해석을 함으로써 자신만의 관념론 철학을 전개했습니다. 그외에도 그는 ‘신사론(新事論)’, ‘신원인(新原人)’, ‘신원도(新原道)’, ‘신지언(新知言)’을 잇달아 출간했습니다. 이렇게 ‘중국철학사’의 고전을 남긴 풍우란은 20세기 중국의 대표적 철학자란 평을 받지만, 그의 삶 자체도 20세기 '중국철학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1942년부터 수차례 충칭으로 가서 국민당 간부들 앞에서 강의했고 1943년 서남연당부의 명의로 장제스에게 '인심 수습'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습니다. 이후 1945년 중국 국민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풍우란은 주석단 성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최우수 교수당원 98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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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남서연대가 해산하자, 풍우란은 칭화대로 돌아갔다가 펜실베니아대의 초청을 받고 미국으로 가서 1년간 석좌교수로 일하면서 ‘중국철학 약사’를 출판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중국으로 귀국하려 했는데, 친구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중국 대륙을 석권할 것이 확실하며 비공산주의자인 그가 가면 반드시 탄압받을 거라며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만류를 뿌리치고 귀국했고 칭화대 교수와 철학과 주임, 문학원장을 역임했으며 중앙연구원 초대 원사와 중앙연구원 평의회 3기 평의원에 올랐습니다. 1949년 국공 내전에서 패한 장개석이 대만으로 떠나면서 함께 가자고 요청했지만, 풍우란은 끝내 중국에 남았습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습니다. 이때 풍우란은 모택동에게 "과거에는 봉건 철학을 강의해서 국민당을 도왔지만, 마르크스주의로 사상을 바꿔 5년 안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입장에서 중국 철학사를 다시 쓰겠다"는 서신을 보내 모택동의 허락을 받고 농장 노동과 자아 비판을 거쳐 1952년 10월부터 모택동의 베이징 대학 철학과에서 교수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정치협상회의에서 공산당원이 아닌 외부인사로서 정치에 참여했고 지식인들의 정치 참여를 촉구했고 1955년 후스, 량수밍 비판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던 중 1957년 반우파 투쟁에 연루되어 '반동분자'의 수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모택동이 보호해주면서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발발하면서, 풍우란은 다시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문화혁명소조는 풍우란의 저술을 '반동', '봉건' 사상이 듬뿍 담겨져 있으니 부정되어야 마땅하다고 비난했고, 그는 외양간에 보내져서 노동 개조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1968년 11월 18일 모택동이 "풍우란은 꼭 필요한 인재다."라고 발언하고 그를 복권시키면서 풍우란은 겨우 자유의 몸이 되어 베이징 대학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풍우란은 문화대혁명 등 시기에 정치체제가 '철학을 탄압하는 철학'을 내세움에 따라 가장 왕성한 지적 활동기 대부분을 무위로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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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임표 (린뱌오, 林彪)가 쿠데타를 일으키려다가 실패하고 비행기를 타고 소련으로 달아나다가 몽골에서 추락사한 9.13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후 강청(장칭) 등 4인방은 임표와 공자를 규탄하는 명목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주은래(저우언라이)를 실각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비림비공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때 풍우란은 4인방이 장악한 량사오(梁效)의 고문을 맡아 ‘공자 비판과 과거의 자신에 대한 자아비판’과 ‘복고주의와 반복고주의 두 노선의 투쟁에 관하여’를 출판해 4인방에게 힘을 실어줬습니다. 그러나 1976년 9월 말 4인방이 실각하여 량사오는 철저히 청산되었고, 풍우란 역시 장기간 구금심사를 받았습니다. 풍우란은 등소평(덩샤오핑)의 개방체제와 더불어 불어온 '해금'을 맞아 1982년부터 ‘중국철학사 신편’을 쓰기 시작해 1990년 세상을 뜨기 전에 마침내 전7권을 완성했습니다. 그는 이 저서에서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중국 철학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나의 이해와 경험을 직접 쓰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실제로 이 서적은 마르크스주의와 계급투쟁 관념을 비중있게 다뤘습니다. 1990년 11월 26일 풍우란은 향년 95세를 일기로 베이징에서 병사했습니다. 아내 숙명(叔明) 임재곤(任载坤)은 1894년 3월 28일 허난성 신차이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상하이 제2중학교에 입학했다가 1914년 동창생의 소개로 풍우란과 면담했습니다. 이후 두사람의 관계는 급격히 진전되어 1915년에 약혼했습니다. 이후 임재곤은 당시 중국에서 최고의 여성 명문학교로 알려진 베이징 여자 사범학교에 입학했고 1918년 여름 베이징 여자 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풍우란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때 풍우란은 23살, 임재곤은 24살이었다. 이후 그녀는 평생 풍우란과 함께 했다가 1977년 가을에 사망했습니다. 장녀 펑종롄(冯钟琏)은 서남연대 어국어과를 졸업했고 베이징 중학교 국어교사로 일했으며, 1975년에 사망했습니다. 장남 펑종랴오(冯钟辽)는 랴오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보일러 전문가로 일하다가 미국에서 가정을 이루고 현재까지 미국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차녀 펑종박(冯钟璞)은 중국의 유명 작가이며 차남 풍종월(冯钟越)은 중국 항공 우주공업부 주임 엔지니어, 비행기 제작 전문가였으나 51세에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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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우란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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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우란은 ‘철학과 철학사에 대한 의견(對於哲學及哲學史之一見)’에서 철학에 대해 아주 간단하게 정리했습니다. 그는 “사람은 태어나면서 욕구를 가지고 이러한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을 좋다고 한다”고 정리하면서 인간은 좋지 않은 것(evil)을 피하고 이상적인 인생을 추구하는데, 이것이 바로 철학의 용도와 목적이니 이상적인 인생을 추구하는 것, 바로 좋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철학이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그는 중세를 거치면서 철학과 종교의 구별, 과학과의 구별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으며 과학 연구는 여전히 현상 세계에 국한된다고 보는 칸트, 베르그송과 이와는 달리 과학적 기계주의, 객관적 진리, 미와 선의 존재를 주장하는 스피노자 등과 같이 두 가지 흐름으로 나뉜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철학은 good을 추구하고 과학은 true를 추구한다고 여겼습니다. 풍우란은 각종 학설의 목적은 경험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를 세우는 것으로, 그 방법은 논리적으로 과학적이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논리와 과학방법을 반대하는 사람들 역시 과학과 논리학을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그는 철학을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세 분야로 나누면서, 현재의 언어로 나누어본다면 우주론, 인생론, 지식론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정리했습니다. 특히 우주론이 달라지면 결국 그에 따른 인생론도 달라지고 철학은 이상적인 인생을 추구하면서 우주론과 세계관을 정립하려 하니 반드시 과학을 종합하여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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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중국철학에서는 지식 문제를 중요한 철학 문제로 여기지 않았지만, 이것이 중국철학이 철학으로 이해되기에 커다란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풍우란은 중국에는 비록 구미의 정교한 형식적인 체계의 철학은 없을지 모르지만, 마치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통해 그의 철학을 알 수 있듯이 중국 전통사상에도 실질적 내용으로서의 체계는 존재한다고 여겼으며, 중국철학 연구의 과제는 형식적으로는 체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중국사상에서 실질적인 철학의 체계를 분석해 내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풍우란 철학사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역사를 두 가지로 나누어 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는 실재 존재했던 역사 본연의 모습인 실재로서의 역사와 그러한 활동에 대해 역사가에 의해 서술된 역사가 있다고 봤습니다. 또한 풍우란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철학과 역사의 관계에 대해 "역사는 바로 철학의 실현이며 철학은 역사의 정신이다."라고 확언했습니다. 풍우란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철학은 하나로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철학은 그 자신의 특별한 정신을 가지고 특별한 면모를 보인다고 정리했습니다. 풍우란은 역사와 서술된 역사의 구별은 철학사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며 실제로서의 철학사가 존재하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서술된 철학사이며 이러한 철학사의 근거 자료들 역시 완전하다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그 때문에 연구자들은 가능한 원시자료를 통해 그러한 한계성을 극복하려고 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실제 사실 간의 선후·인과 관계를 고찰하여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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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우란의 독창적인 철학 '신이학'은 전통 유교사상의 핵심 방법론이라고 할 격물지치(格物致知)를 구미의 논리분석 방법과 개념으로 치환하고 논리적 이해를 통한 깨달음을 자신의 철학체계의 핵심 통로로 삼았습니다. 그는 칸트가 "지각 없는 개념은 빈 것이며, 개념 없는 지각은 맹목적이다."라고 서술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개념은 빈 것일 수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름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체험적·실질적 경험의 합치를 거쳐 비로소 진정한 이해가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후스는 풍우란이 신비주의에 빠졌다며 비판했지만 풍우란은 이러한 신비주의적 경향이 바로 '중국 철학'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철학은 무엇 때문에?’와 같은 질문에 대답할 수 없으니 ‘우주는 왜 존재하는가? 인생은 왜 무엇 때문에 있느냐?’와 같은 질문에는 답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철학이 이야기하여야 할 것은 그것이 무엇인지 어떤 일인지를 알아보는 것이며, 우리가 그러한 것에 대한 이해가 생길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에 대해 의의를 가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개념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이러한 이해를 진행하는 자각은 일종의 심리 상태로, 우리가 이해의 활동을 할 때 우리 자신이 깨어 있는 명각(明覺)한 상태를 바로 자각이라고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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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우란은 중국철학의 형이상학을 연구하는 방법론과 관련하여서는 필머 노스럽(Filmer Stuart Cuckow Northrop, 1893∼1992)의 관점을 인용하면서 개념에는 두 유형이 있으며, 하나는 직관을 이용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가설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중국철학은 직관의 개념을 사용하고 이것이 바로 부(負)의 방법이고, 구미철학은 가설의 개념을 사용하고 이것이 바로 정(正)의 방법이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서술에 있어서는 특히 중국의 도가, 불교와 같은 경지에 관한 것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언설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오직 그것은 무엇이 아니다와 같은 부정적 정의를 통해서 다가갈 수밖에 없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중국의 도가와 불교의 선종의 관점에서 보자면 구미의 신비주의는 여전히 덜 신비주의적인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풍우란은 이와 달리 논리 분석의 방법은 형이상학의 정(正)의 방법론으로 보았습니다. 이 부분이 바로 중국철학 영역에서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것으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장차 중국철학은 점점 이성주의 논리 분석적 연구 방향으로 다가가야 할 것이며 구미철학은 조금 더 신비주의 쪽으로 다가가면서 상호 보완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즉, 그는 중국철학의 신비주의적 요소는 구미보다 더 멀리 나아간 것이며 상대적으로 중국철학의 논리 분석적 요소는 구미보다 부족한것이니 향후 두 철학적 방향이 서로 상호 보완하며 좀 더 통합된 세계 철학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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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우란은 이러한 연구방법을 사용하여 중국철학을 바라보며 자연, 공리, 도덕, 천지의 네 가지 경지(境界)를 제안했습니다. 이러한 경지는 인륜과 일용생활 속에서 개인의 각성(覺解)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풍우란이 제기한 이 네 가지 경지는 각성(覺解)의 많고 적음을 통해 자연·공리·도덕·천지의 경지로 순차적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자연의 경지에서 사람은 아무런 이해 없이 주어진 일들을 해나가지만 공리의 경지에서는 자신을 위해서 모든 일을 하고 도덕의 경지에서는 자신을 버리고 도덕적 목적을 위해 행동하며, 마지막 단계인 천지의 경지에서는 천지와 하나가 되어 자신이 천지간의 한 사물이면서 천지간의 일들을 행하는 최고의 경지라고 보았습니다. 풍우란은 유심론에서 언급하는 우주의 마음 및 우주의 정신과 종교에서 말하는 창조주 역시 감각의 대상으로서 형이하학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풍우란은 존재의 본연의 모습을 진제(眞際)로, 자연의 모습을 실제로 구분하면서 진제가 실제를 포함하는 것이며 진제는 철학의 관념·명제·추론·형식논리를 포함하면서 반드시 실제와 경험에 국한될 필요는 없으며 이를 넘어설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실제에 치중할수록 과학에 가까워지며 진제에 치중할수록 철학에 가깝다고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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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우란의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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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우란은 일찍이 자신이 일생동안 집필한 작품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들을 ‘삼사고금(三史釋古今)’, ‘육서기정원(六書紀貞元)’으로 분류했습니다. 삼사는 ’중국철학사’, ’중국철학 약사’, ’중국철학사 신편’ 등 세 권의 중국 철학사 저작이며 육서는 '정원 6서', 즉 신이학, 신세훈, 신원인, 신원도, 신지언 등 여섯 권의 철학 저작입니다. ‘중국철학사 하책’은 각각 1931년, 1934년에 완성되어서, 서방 철학의 개념으로 최초로 완성한 중국 철학사 저서입니다. 그 중 많은 개념은 이미 정설이 되어서, 이른바 중국 현대 철학사의 초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국 철학 약사’는 1948년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수업할 때 만든 영어 서적입니다. 이 책은 10여 개 국어로 번역되어, 수백만 권의 서적을 판매했다. 현재 이 책은 서양 각국 대학의 중국 철학사 수업에 꼭 필요한 교과서이자, 서방이 중국 철학을 이해하기에 가장 좋은 입문서로 꼽히고 있습니다. ‘중국 철학사 신편 7권’은 풍우란이 84세부터 집필을 시작해 죽기 직전인 1990년에 완성한 대작입니다. 그는 이 시기 매년 수차례 병원에 입원하는 등 몸상태가 안 좋은 상태에서 제자가 대신 쓰고 자신은 구술하는 방식으로 책을 집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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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우란의 중국철학사 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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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은 자연철학에서 출발했으며, 세상 만물의 공통적인 요소를 찾는 철학인 반면, 동양철학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고, 하늘의 뜻에 따라 어떻게 정치를 해야하는지를 찾는 보다 형이상학적인 철학이었습니다. 서양이 대상에 대한 철학으로 시작하였다면 동양은 주체에 대한 철학으로 시작하여 국가와 군주 그리고 정치에 대한 사상이 주된 철학의 주제였기에 동양철학은 쓸데없이 주변을 둘러가지 않고 곧바로 사람과 국가로 직진합니다. 중국철학은 자주 현대 과학의 주축을 이루는 양자역학을 제자백가 중 도교에서 찾거나 비교하는 움직임까지 있을 정도로 중국철학은 심호하지만 획일적이지 않다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중국철학은 상대적으로 더 형이상학적이며 그래서 각양각색의 특징들을 지니거나 포괄하기에 구분지어지면서도 그 구분이 어렵기도 합니다. 현대 한국을 살아가는 우리는 유교와 불교의 사상과 교리, 그리고 성리학적 사고를 통해 한국 사상의 주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중국철학은 중국이라는 나라의 철학이기도 하지만 고대로부터의 한국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동양철학의 초석임에도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성리학을 비롯한 몇몇 사상은 중국에서보다 한국에서 더찬란하게 빛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인은 중국철학을 알아야 하고, 공부해야할 학문이고 정신입니다. 우리를 알고, 나를 알기 위해서라도 중국철학은 선행되어야할 학습의 중요한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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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철학사 상권은 공자를 비롯한 제자백가로부터 회남왕에 이르는 다양한 체계와 사상을 논하는 내용으로 이름하여 '자학시대'의 철학이며, 하권은 동중서로부터 강유위에 이르는 내용의 '경학시대'의 철학으로 자학시대 철학의 술어이자 확장판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풍우란은 자학시대와 경학시대의 철학 모두를 서양철학 기준의 고대와 중세철학 즉 근대이전의 철학으로 보며 중국철학에서의 근대철학의 실종 또는 결여를 안타까워했습니다. 물질적, 정신적 제한을 받는 인간의 사상이라는 측면에서 중국철학의 사조적 흐름과 그 차이및 분류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이해시키려 애쓰고 있습니다. 중국철학에 대한 이 모든 설명의 방법은 고전의 제시를 통한 실증적인 방법을 통합니다. 이는 풍우란의 또다른 저서인 '간명한 중국철학사'와의 가장 큰 차이입니다. 보다 많은 분량의 책인 '중국철학사'를 통해서는 실증적 자료의 핵심 본문 및 주석을 줄이지않고 그대로 제시하여 독자가 스스로 이해하고 깨닫게 하는 방법을 이용하고, 보다 적은 분량의 책인 '간명한 중국철학사'를 통해서는 핵심 내용의 직접적이고 해설적인 제시를 통해 풍우란 스스로가 독자에게 그 내용을 이해시키고, 주지시키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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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철학사는 중국인을 대상 독자로 하여 중국어로 쓴 책이니 당연히 제자백가를 비롯한 개별 철학자의 저서 속 핵심 본문을 그대로 제시하는 것이 동어반복을 피하면서도 그 뜻을 전하는데 보다 효과적입니다. 반면 '간명한 중국철학사'는 처음부터 영어로 씌여진 서구 독자를 위한 책이었기에 직접적인 내용의 전달보다는 보다 더 해설서 또는 핵심 요약집에 가까운 성격을 지닐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동양적인 사상에 보다 더 경도되어 있음을 안다면 그래도 한 권짜리 책보다는 두 권으로 이루어진 책이 좀 더 풍부하면서도, 제대로 된 이해를 시키는데 더 효율적이라 볼 수 있을 겁니다. 한글로 번역된 중국철학사는 1쇄를 1999년에 발행했고 현재까지 개정이나 증보없이 20쇄넘게 처음 내용, 활자체 그대로 출판되어 판매되고 있더군요. 처음 책을 펼쳐서 한번 훓어보면 이 번역서는 촌스럽고 어색합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읽어나가면 결코 어색하거나 겉도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는 이 책이 이미 고전에 반열에 들어섰기 때문일 겁니다. 풍우란이 이 책을 처음쓴 지 90 년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러셀의 '서양철학사'가 1945년에 출판되었고 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1930년대에 발행된 풍우란의 ‘중국철학사’는 러셀의 ‘서양철학사’에 버금가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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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철학사’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풍우란은 동양철학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고, 하늘의 뜻에 따라 어떻게 정치를 해야하는지를 찾는 보다 형이상학적인 철학임을 알게해줍니다. 20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있는 책 100선 중 37번째 책 인문학 부문 7번째 책 “풍우란이1930년대에 출간한 중국철학사(Chinese philosophy)”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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