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8_黃薔(李相遠)

검은엿 한덩이가 만들어 준 명치대 법대 유학의 꿈

忍齋 黃薔 李相遠 2023. 8. 5.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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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명치대 출신 한창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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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함흥출신으로 김병로, 이인, 허헌 3대 인권 변호사와 더불어 독립지사들이 일경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때마다 수려한 변론으로 수많은 무죄방면을 이끌어낸 한창달(韓昌達, 1896년~1939년) 변호사는 1896년 7월 23일 함경남도 신흥군 가평면 풍상리(豊上里) 307번지에서 서당을 하는 아버지밑에서 여러 형제자매 중에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인천부 내리(內里) 148번지 외숙부 유승흠(柳承欽)의 집에서 거주하며 서울법대의 전신인 경성법학전수학교 2학년을 다니던 한창달은 1919년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3월 5일 서울역에 도착, 서울시내 학생들이 주도한 남대문밖 역전광장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11월 6일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미결구류 90일을 포함 징역 6개월에 3년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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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로 경성법학전수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게됩니다. 구한국 시대에 외숙부 유승흠이 나온 일본 명치대학 법학부로 전학을 가게 되어있었는데 유학은 물거품이 되어버린겁니다. 그래서 한창달은 검은엿 한덩이를 허리춤에 차고 일본인 교장집에 처들어가 단식농성을 하며 어차피 전학을 갈터이니 전학증을 발급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일본인 교장이 거부하자 단식을 감행했습니다. 배고프면 포기할줄 알았던 한창달이 한달이 넘도록 단식을 이어가자 일본인 교장의 부인이 남편을 설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교장집에서 학생이 죽어나가면 득보다 실이 크다고 부인이 교장을 설득한 겁니다. 결국 일본인 교장은 한창달에게 전학증을 끊어 주었습니다. 검은엿 한덩이가 한창달의 명치대 법학부 유학의 꿈을 이루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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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치대 법학부 전문부를 졸업한 한창달은 바로 일본 변호사 시험과 변리사 시험을 동시에 합격하여 학교 교문에 플래카드가 걸렸습니다. 명치대 법학부 학부출신들 조차 쉽게 합격하지 못하는 시험을 합격하였으니 놀라운 성과였습니다. 같은 명치대 출신에 동향인 선배 허헌 변호사는 축하 전보를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으로 돌아온 한창달 변호사는 수많은 독립지사들의 재판에서 변호를 하였고 풀려난 독립지사들의 만주와 극동지역으로 탈출을 도와주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함흥청년동맹의 결성에 자문 변호사를 자처하여 1928년에는 그로 인해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습니다. 부인 유정숙(柳貞淑, 1898~1932) 여사는 일본사범학교 속성과를 마치고 함흥고녀 최초의 여고교사로 임용되어 부군 한창달 변호사와 함께 일제치하 함흥을 이끄는 지식인 부부의 역활을 수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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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 반룡권번(盤龍券番)을 졸업한 경상북도 경주출신 가무악의 대가 문정(汶汀) 이말량(李末良, 1908~2001) 선생은 1926년 19살의 나이에 한창달 변호사의 인품에 반하여 후처로 결혼하기도 하였습니다. 1932년 34세를 일기로 작고한 한창달 변호사의 본처 유정숙 선생과 1939년 43세를 일기로 위암으로 사망한 한창달 변호사를 대신하여 자식들이 성장하여 남한으로 내려온 후 1947년 고향 경주로 돌아갈때까지 자녀들을 지극정성으로 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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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위암으로 1939년 4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등진 한창달 변호사는 작고하실때까지 일제시절 함경남도 함흥지역을 중심으로 인권변호사의 업무를 성실히 수행했으며 함흥청년동맹의 결성에 참여하며 독립운동에 매진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애국독립지사 한창달 선생님의 손녀 한동춘(DC Lee) 여사가 제 외5촌당숙 이재연(Jay Lee) 선생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둔 제 당숙모이십니다. 오래전에 한창달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당숙모에게 언뜻 들었다가 오늘은 당숙모의 고모이신 1929년생 한해경 여사님을 통해 한창달 변호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자세히 들어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한창달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는 더 모으고 보완하는데로 계속해서 업데이트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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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달(韓昌達, 1896년~1939년) 변호사 존영 (손녀 한동춘( DC Lee ) 여사 제공)
 
1931년 서울서 촬영한 한창달(韓昌達, 1896년~1939년) 변호사 가족 사진 - 좌로부터 부인 유정숙 여사, 큰딸, 아들(한태집), 한창달 변호사 작은딸 (한해경) (손녀 한동춘( DC Lee ) 여사 제공)

 

한창달 변호사 아드님 한태섭 선생 (따님 한동춘( DC Lee ) 여사 제공)
아드님 한태집과 함께한 한창달 변호사 부인 유정숙(柳貞淑) 여사님 (손녀 한동춘( DC Lee ) 여사 제공)
한창달 변호사 부인 유정숙 여사 어린시절 사진 좌에서 3번째 (손녀 한동춘( DC Lee ) 여사 제공)
 
 
 
참고1

함경남도 신흥군 가평면 풍상리(豊上里) 307번지에 본적지를 두고 인천부 내리(內里) 148번지 숙부 유승흠(柳承欽)의 집에서 거주하던 경성전수학교 2학년생 한창달(韓昌達, 23세 7월 23일생)은 3월 5일 서울역에 도착, 서울시내 학생들이 주도한 남대문밖 역전광장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11월 6일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미결구류 90일을 포함 징역 6개월에 3년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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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문」(1919.11.6., 경성지방법원); “示威 關聯者 豫審調書(韓昌達 신문조서),”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16권 (三一運動 VI)』(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d/hd_016r_0010_0910, 20194.1)

韓昌達 신문조서

韓昌達
위 피고인에 대한 보안법 위반 등 사건에 대하여 대정 8년 5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계 직무대리 조선총독부 판사 掘直喜
조선총독부 재판소 서기 渡部直太郞이 열석하여 예심판사는 피고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신문하다.

 

문 성명·연령·신분·직업·주소·본적지 및 출생지를 말하라.
답 성명은 韓昌達.
연령은 23세, 7월 23일생.
신분은 -.
직업은 경성전수학교 학생.
주소는 仁川府 內里 148번지, 柳承欽집.
본적지는 咸鏡南道 新興郡 加平面 豊上里 307번지.
출생지는 咸鏡南道 新興郡 加平面 豊上里 307번지.
문 위기·훈장·종군기장·연금·은급 또는 공직에 있지 않은가.
답 없다.
문 지금까지 형벌을 받은 일은 없는가.
답 없다.
문 몇 학년인가.
답 2학년이다.
문 종교는 무엇인가.
답 없다.
문 仁川에서 통학하고 있는가.
답 기차로 통학하고 있다. 柳承欽은 나의 숙부로 나는 그 집에 기숙하고 있는데, 학비 관계와 또 그 분의 아들 柳元弼이 경성의학전문학교에 통학하고 있어 함께 仁川에서 통학하고 있다.
문 학비는 그 사람에게 받고 있는가.
답 그 분에게서 받기도 하고 또 고향집에서 송금해 오기도 한다.
문 학교에 입학하기 이전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답 대정 5년 4월 17일부터 咸興지방법원 鏡城출장소 고용원으로 근무하다가 대정 6년 3월에 그만두고 전수학교에 들어갔다.
문 이전부터 조선독립에 대하여 생각한 일이 있는가.
답 이전부터 생각한 일은 없으나 금년 2월경부터 조선의 독립에 대하여 생각했다. 그것은 강화회의에서 국제연맹이 성립되고 민족자결주의에 의하여 독립하는 데 좋은 시기라고 생각하였다.
문 어째서 독립하는데 좋은 시기라고 생각했는가.
답 나는 정치에 대해서는 잘 모르나 하여간 조선의 정치는 일본내의 정치와 다르고, 또 학생의 처지에서 생각하여 교육제도가 일본과 같이 완전하지 못하므로 독립하면 완 전한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문 일본 유학생이 독립운동을 한 것을 그 당시에 알았는가.
답 신문지상 등에서 알았다.
문 어떻게 생각했는가.
답 독립이란 것이 실현되면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나는 될 수 있겠는가 하고 의심하고 있었다.
문 그 뒤 조선에서 독립운동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언제 들었는가.
답 2월 말경 학생들이 학교에서 무엇인가 모여 상의하고 있던 일이 있었는데, 그 당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몰랐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이 독립운동에 대하여 상의한 것으로 추측되나 그 당시 나는 들은 일은 없었다.
문 학교에서 학생들이 상의하고 있었다면 피고 혼자만 듣지 못했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답 그래도 나는 들은 일이 없다.
문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이 있다는 것을 언제 들었는가.
답 그 이전에 들은 일은 없으나 3월 2일 仁川에서 그 소동이 있었다는 것을 들었다.
문 全性得을 아는가.
답 동급생이므로 알고 있다.
문 그 사람 또는 그 밖의 사람에게 들은 일이 없는가.
답 들은 일이 없다.
문 3월 1일에 등교했는가.
답 등교했다.
문 그 날 듣지 못했는가.
답 못들었다.
문 몇 시쯤 돌아갔는가.
답 낮 12시 20분 기차로 돌아갔다.
문 기차 안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는가.
답 만난 것 같으나 지금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 않다.
문 그 뒤 서울에 온 일이 있는가.
답 3월 2일에는 고향에서 친척되는 사람이 국장구경을 와 있었으므로 柳承欽의 가족과 함께 서울을 안내하기 위하여 왔었다. 3월 3일에도 안내하여 시내를 돌아다녔다. 3월 4일에도 국장 다음 날이었으므로 휴교한다는 것이었으므로, 나는 3월 4일 아침에 仁川으로 돌아갔다. 3월 5일에는 학교에 등교할 생각으로 오다가 도중에서 체포되었다.
문 학교는 3월 1일 이후 동맹휴교한다는 상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답 나는 가담하지 않았다. 학교 게시판을 보고 3월 10일까지 휴교한다는 것을 알았다.
문 3월 2일 仁川에서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이 있었다는 것을 누구에게 들었는가.
답 柳承欽에게 들었다.
문 피고는 그것을 듣고 어떻게 생각했는가.
답 그때 서울에 있었더라면 참가했을 것인데 없었기 때문에 아깝다고 유감으로 생각했다.
문 柳承欽은 어떻게 알았다고 했는가.
답 경찰에 있는 사람에게 들었다는 것이었다.
문 3월 5일 남대문 역전에서 만세를 부른 일이 있는가.
답 만세를 부른 일이 없다. 그 날 나는 오전 7시 27분 仁川발 기차로 오전 8시 45분 서울 남대문 역에 도착했다. 그때 역전에 많은 사람이 있었으나 만세소동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太平町 파출소 근처에까지 갔는데 남대문역 쪽에서 만세 소리가 들렸으므로 거기에 참가하려고 생각하여 돌아왔는데, 내가 그 군중과 마주치기 전 경성일보사 부근까지 가다가 경관에게 체포되었기 때문에 나는 마침내 만세를 부르지 못하고 끝났다.
문 경찰관 및 검사에게는 남대문역에 도착하니 군중이 만세를 부르고 있었으므로 거기에 가담하여 함께 만세를 부르면서 남대문 안에까지 군중과 같이 오다가 경성일보사 근처에서 체포되었다고 공술했는데 어떤가.
답 그렇게 경찰관과 검사에게도 진술한 것이 틀림없다.
문 왜 그러한 공술을 했는가.
답 그때 나는 조선독립운동에 대하여 매우 찬성하고 있었으므로 그런 것을 진술했던 것이다.
문 그러면 지금은 찬성하고 있지 않은가.
답 지금도 찬성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문 독립운동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답 독립을 선언하고 그 선언한 것을 세상에 발표하는 것을 말한다.
문 3월 5일 남대문역에서 학생이 집합하여 만세를 부른다는 것을 언제 들었는가.
답 들은 일이 없다.
문 朴潤夏를 아는가.
답 알고 있다.
문 어떻게 아는가.
답 같은 학생이고 또 나와 동급생인 崔基星과 동숙하고 있어서 안다.
문 그 사람이 공술한 것에 의하면 3월 5일에 남대문 역전에서 독립만세를 부른다는 것을 피고에게 들었다고 했는데 어떤가.
답 朴潤夏에게 그런 말을 한 일이 없다.
문 그 사람은 검사에게도 그렇게 말하였고 그 공술은 변하지 않고 있는데 왜 그렇게 공술한다고 생각하는가.
답 그래도 말한 일이 없다.
문 피고는 이번 독립운동에는 찬성했지만 참가하지 않았다고 공술하고 있는데 장래에도 그런 운동을 할 생각인가.
답 장래도 기회만 있으면 운동할 작정이다.
문 독립선언서 기타 인쇄물을 본 일은 없는가.
답 선언서는 본 일이 없다. 독립신문 제1호가 학교 문 근처에 떨어져 있는 것을 3일인지 4일 아침에 주워서 보았다.
문 검사에게 3월 5일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서울을 떠났다고 공술한 것은 틀림없는가.
답 그렇게 말했다. 그것은 고향에 있는 어머니가 병환중에 있으므로 돌아가려고 생각하고, 그 허가를 학교에서 받으려고 생각하여 왔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문 그때 元山까지의 기차표를 사 왔는가.
답 그렇지 않다. 학교의 허가를 받고 돌아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元山까지의 차표를 사지 않았다.
문 元山까지의 기차비는 가지고 왔는가.
답 가지고 오지 않았다.
문 柳承欽에게 元山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말했는가.
답 학교에서 허가를 받으면 돌아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피고인 韓昌達 위를 읽어 들려 주었더니 틀림없다고 진술하고 서명하다.
경성지방법원 서기 조선총독부 재판소 서기 渡部直太郞
신문자 예심계 직무대리 조선총독부 판사 堀直喜

 

참고2

신문명 중외일보, 기사제목 咸靑동맹원 등 일회 공판 연기, 기사형식, 일반기사, 발행년월일 1928년 07월 18일, 발행구분 무, 면수 02, 단수 06

색인어 이름 : 방치규(함흥청년동맹 집행위원),박연(함흥청년동맹 집행위원),홍달수(함흥청년동맹 집행위원),이몽웅(함흥청년동맹 집행위원),김준식(함흥청년동맹 집행위원),유태설(변호사),한창달(변호사),신석정(변호사)

관서 : 함흥경찰서, 단체 : 함흥청년동맹, 학교 : 함흥고등보통학교

주제분류 민족해방운동,대중운동 > 청년운동 > 일반청년운동단체 > 조선청년총동맹

민족해방운동,대중운동 > 학생운동 > 집단행동 > 동맹휴학

 

참고3

함흥 반룡권번(盤龍券番)을 졸업한 경상북도 경주출신 가무악의 대가 문정(汶汀) 이말량(李末良, 1908~2001) 선생은 1926년 19살의 나이에 한창달 변호사의 인품에 반하여 후처로 결혼하기도 하였습니다. 1932년 34세를 일기로 작고한 한창달 변호사의 본처 유정숙 선생과 1939년 43세를 일기로 위암으로 사망한 한창달 변호사를 대신하여 자식들이 성장하여 남한으로 내려온 후 1947년 고향 경주로 돌아갈때까지 자녀들을 지극정성으로 키웠습니다.

2. 경주 예술인 이말량 선생의 가무악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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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달의 후처 이말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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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 강사로 경북 문화재 전문위원인 김성혜가 쓴 ‘이말량의 가무악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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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 이말량(1908~2001) 선생은 1908년 경주에서 태어나 일제시대와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등을 두루 겪은 근.현대 음악인이다. 이말량은 아동기에 함흥으로 가서 10대에 전통 가무악을 교육 받고, 20~30대까지 거기서 활동했다. 그러다 1947년 40살에 다시 고향 경주로 돌아와 1984년 은퇴기념공연을 하기까지 줄곧 경주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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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말량은 1925년 18살에 정남희에게 가야금산조를 배웠고 함흥 권번을 졸업한 1926년 19살에 변호사 한창달의 후처로 결혼했다. 남편 한창달이 43세의 나이로 위암으로 죽자 고향 경주로 돌아왔다. 이말량은 함흥에서 익힌 아악부 계통의 음악과 경주에서 읽힌 경주향제를 모두 보유했다. 이말량의 승무는 한성준 -> 김계선 -> 이말량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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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4

부인 유정숙(柳貞淑, 1898~1932) 여사는 일본사범학교 속성과를 마치고 함흥고녀 최초의 여고교사로 임용

 

조선총독부 관보 제2633호 원문 발행일 大正10年 5月 23日 기사제목 官立學校卒業者-平壤女子高等普通學校本科 면수 005 분야분류 彙報>學事 관보분류 彙報>調査及報告>學事 색인어 金燦英 韓天模 安誠淑 金租玉 朴明士 鄭燦英 金處鳳 崔燦珠 姜君淑 任文淑 金性媛 劉眞淑 洪秉珠 朱榮淑 柳貞淑 趙玉實 金實彈 李貞眞 金寶妃 鮮于福産 金寶府

 

1. 1919 柳貞淑
지방관서>함경남도>공립학교>원산공립보통학교 訓導 (월17)
2. 1920 柳貞淑
지방관서>함경남도>공립학교>함흥공립보통학교 訓導 (월22)
3. 1921 柳貞淑
지방관서>함경남도>공립학교>함흥공립보통학교 訓導 9
4. 1922 柳貞淑
지방관서>함경남도>공립학교>함흥제1공립보통학교 訓導 8
5. 1923 柳貞淑
지방관서>함경남도>공립학교>함흥제1공립보통학교 訓導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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