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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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편지 32 - 어머니

忍齋 黃薔 李相遠 2005. 5. 6.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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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편지 32 - 어머니
글쓴이 skywaywalker  2005-04-26 16:03:03, 조회 : 87

어머니 이영숙

남성동 오십 칠 번지 토담 넘어
청산 갔던 나비 날아들고
울안의 늙은 뽕나무들
푸른 옷을 꺼내 입으면
연례행사 누에치기가 시작된다.
봄비 오듯 사각사각
뽕잎 갉아먹는 소리 무성해지면
누에는 한 잠 자고 두 잠 자고
불어난 잠박에 울안의 뽕잎으로는
일용할 양식이 모자라
어머니는 멀리 뽕 따러 가신다
젖먹이 동생을 어린 내게 맡기고
집을 떠난 어머니는
정분 나눌 님이 따로 있을 리도 없는데
밤이 이슥해서야
가난만큼 무거운 뽕 부대를 이고
불은 가슴 비비며
헐거워진 치마 말기 추스리며
바위모퉁이를 돌아
지친 모습으로 대문을 들어서신다
누에와 더불어 살아오신 한 세월
강물 따라 흘러 가고
성긴 머리카락 올올이
명주실 되어 눈부시네
오디처럼 진한 속사정 울음 울던
인고의 흔적 굽이굽이 주름지니
이제사 내 깊은 이랑에서
아픔으로 물결 친다

제 어머니가 쓰신 시입니다.
제 어머니의 어머니는 그렇게, 이 땅의 다른 모든 어머니들처럼, 식민지와 전쟁을 겪으며 자식을 낳고 길렀습니다.
가난하고 남루한 삶이었지만 최선을 다한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어머니는,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의 삶을 희생하며 저희 3남매를 낳고 기르셨습니다.
어머니가 되고도 남아야 했을 나이의 저는 모질기만 해, 아직도 늙으신 어머니를 잠 못 들게 하며 먼 땅을 헤매고 있습니다.

이혼하던 해, 이른 봄날이었습니다.
어머니를 찾아갔을 때, 구순을 바라보는 외할머니께서 와 계셨습니다.
그날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동네 야산에 쑥을 캐러 다녀온 길이어서 쑥을 다듬고 계셨습니다.
어머니의 어머니,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의 딸, 그렇게 3대가 나란히 햇살 받는 평상에 걸터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제게는 잊혀지지 않는 따뜻한 봄날 풍경으로 남아있는 추억이지만,
이혼하고 막 혼자가 된 외딸을 보며 어머니는 아마도 속울음을 삼키고 계셨을 겁니다.

그해 추웠던 겨울, 어머니는 제가 혼자 살 집을 보러 다니고 계셨습니다.
정 많고 눈물 많은 제 어머니는 그 추운 겨울 거리에 무수한 눈물을 흘리셨을 테지요.
집을 구한 후, 어머니와 저는 시내에서 영화를 보았습니다.
아사다 지로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철도원’을 보며 어머니도, 저도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눈부시도록 하얀 설경 속에서 간혹 빨간 코트며 인형이 피처럼 붉게 도드라지던 영화가 슬프기도 했지만, 그 겨울, 우리 가슴 속에 쌓였던 설움과 두려움이 울음으로 터져 나온 것이었겠지요.
그 울음을 마지막으로 어머니는 다시는 제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제 삶을 인정해주시고, 묵묵히 지켜봐주시고, 격려해주셨습니다.
이 땅의 어머니들이 이 땅을 일구어왔음을, 어머니 없이는 지금의 제가 없음을, 이 세상에서 눈물 없이 부를 수 없는 이름 하나가 어머니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이곳 파키스탄, 이슬람의 율법이 지배하는 땅.
1400년 전에 아랍 사회에서 만들어진 이슬람 계율을 현실에 적용시키려는 율법학자들과 근본주의자들로 인해 수많은 여성들의 자유로운 삶이 억압당하고 있는 이 땅에서, 저는 지구 위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과 아픔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얼마 전, 전기도 수도도 게스트 하우스도 없는 산간 마을을 찾아가 2박 3일을 동네 사람 집에 머무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연속된 트레킹으로 인해 제 발은 물집 투성이였습니다.
그 날 밤, 소금을 푼 더운 물로 제 더러운 발을 꼼꼼하게 씻어주시던 어머니의 손길에서 제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외국인 손님이 찾아왔다고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그 날, 한 여인이 서투른 영어로 제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 평생을 이 동네에서 보냈는데,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네가 너무 부러워.”
마흔은 훌쩍 넘겨 보이는 그녀는 이제 겨우 서른에 이미 네 아이의 엄마였고, 그녀가 접한 다른 세상은 단 한 번 다녀온 근처의 도시뿐이었습니다.

그리고, 70년생 동갑내기 제 친구 야스민.
이곳 훈자의 ‘카리마바드 걸스 컬리지’ 교장선생님.
북부지역에서는 가장 어린, 서른이라는 나이에 교장이 된 여성입니다.
똑똑하고, 독립적이고, 강인해 보이는 그녀.
수도에서 일하는 남편과 떨어져 두 아이를 키우며, 성공적으로 교장직을 수행해온 그녀는 이 땅의 현실을 갑갑해했습니다.
그녀의 집에서 자고 오던 밤, 그녀는 내게 말했습니다.
“파키스탄만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아.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어. 거기서라면 이렇게 끝없이 남의 눈을 의식하거나 남의 손가락질을 겁내지 않고, 더 용감하고 당당하게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여긴 날 숨 막히게 해.”

스카프를 쓰지 않으려는 일상의 사소한 부딪힘부터, 자유롭게 입고, 여행하고, 이야기할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눈물겨운 싸움을 계속해온 제 친구 야스민에게 힘을 주고 싶어졌습니다.
공부하고 싶고, 사회로 진출하고 싶고, 꿈을 이루며 살고 싶어 하는 파키스탄의 소녀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고 싶습니다.
야스민의 학교인 ‘카리마바드 걸스 컬리지’(우리나라의 여고)에 ‘Korean Scholarship'을 만들고 싶습니다.

공립학교인 이곳의 1년 등록금은 1200루피(한화 20000원)입니다.
성적 우수자 10명과 가난한 집안의 학생들 10명, 이렇게 스무 명의 학생들에게 1년 치 등록금을 장학금으로 수여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우선은 제 수입에서 500불을 내놓습니다.

제 친구들은 오는 27일 학교의 행사에서 장학금 수여식을 행하자며, 제게 그 자리에서 장학금을 직접 수여하고, 짧은 연설을 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저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한 성경의 구절을 인용하며 사양했지만, 또 다른 교사인 파잘(야스민과 파잘, 저는 모두 70년생 동갑으로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가 되었지요.)의 설득에 졌습니다.
그는 학부모들에게 되묻고 싶어 했습니다.
‘이 땅의 딸들의 교육에 외국인이 애정과 관심을 쏟는데, 우리는 어떠한가?’라고.

여성의 식자율이 남성의 절반이고, 여성의 전문대학이나 대학으로의 진학률이 30%를 넘지 않고(이곳 산간마을인 훈자의 경우는 더 심해 15%의 여성만이 상급학교에 진학합니다), 아직도 1년에 천 건의 명예살인(가족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남편이나 아버지, 남자 형제들이 아내나, 딸, 여동생을 살해하는 행위)이 일어나는 이 땅의 끔찍한 현실에 대해, 파잘은 남자이지만 진정으로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리고 그릇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여성의 입을 막고,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현실을 몹시 가슴아파하고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가난한 나라들은 여성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나라들이라고.

최소 3년은 계속해서 장학금을 주고 싶은 마음에 여러 선,후배님, 벗들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한국의 경제사정도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해주시는 기분으로, 그렇게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돌아가서 밥 사달라고 떼쓰지 않겠습니다.^.^)
오천원이든 만원이든 액수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 지구의 절반인 여성들이, 어머니가 되어 다음 세대를 낳고 키울 파키스탄의 여성들이, 차별과 억압을 딛고 당당하게 설 수 있도록,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사회를 일굴 수 있도록,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주셨으면 합니다.
제 계좌는 ‘조흥은행 349-04-219319 김남희’입니다.
(모금날짜에 제한은 없지만 제가 떠나기 전에 가능한 액수를 알려주고 싶으니, 1차 모금은 이번 달 말일까지로 하겠습니다.)
제 가까운 벗들이 제 마음을 헤아려 주셔서, 이 먼 나라 파키스탄의 훈자라는 산간마을, 한 여학생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살구꽃 진 자리에 사과꽃과 복사꽃이 만발한 훈자에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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