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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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 (東明王)

忍齋 黃薔 李相遠 2006. 9. 19.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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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 (東明王) 고구려의 시조로서, 이름은 주몽(朱蒙;부여의 속어로 '활을 잘 쏜다'는 뜻) ·추모(鄒牟) ·상해(象解) ·도모(都慕) 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부여왕(東扶餘王) 해부루(解夫婁)가 죽고 금와(金蛙)가 즉위하였는데, 이때 금와왕은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만났다. 유화는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가 자기를 유인하여 사통(私通)하고는 돌아오지 않아 부모에게 쫓겨나 우발수에 살고 있다 하므로, 금와왕은 유화를 데려다 궁중에 유폐시켰다. 어느날 유화는 햇빛을 받고 임신하여 알 하나를 낳았다. 그 알에서 남아(男兒)가 나와 성장하니 이가 곧 주몽이다. 주몽이 7세 때 이미 활을 잘 쏘는 등 영특하고 총명하자 금와왕의 장자 대소(帶素) 등 일곱 왕자 및 여러 신하들이 시기하여 죽이려 하였다. 이에 유화부인의 뜻을 따라 화를 피하여 마리(摩離)·오이(烏伊)·협보(陝父) 등과 함께 졸본부여(卒本扶餘)로 남하하였다. 이 때 졸본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 셋만 있었다. 그는 주몽이 보통인물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주몽의 딸로 삼게 하였다. 얼마후 졸본 부여왕이 돌아가자 주몽이 그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주몽은 아들 둘을 낳았다. 맏아들을 비류(沸流)라 하고, 둘째는 온조(溫祚)라 하였다. 그 후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때 낳은 아들 유리(琉璃 재위; BC 19∼AD 18년)가 와서 태자가 되었다. BC 37년 나라를 세워 국호를 고구려라 칭하고, 성(姓)을 고(高)라 하였다. BC 36년 비류국(沸流國)의 왕 송양(松讓)의 항복을 받고 그곳을 다물도(多勿都)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 우두머리로 삼았다고 한다. BC 34년에는 성곽과 궁실을 건립하였다. 또 오이(烏伊)·부분노(扶芬奴)를 보내어 BC 33년 행인국(荇人國)을 정복하고, BC 28년 북옥저(北沃沮)를 멸망시켰다. BC 19년 4월 동부여에서 첫부인 예씨(禮氏)와 아들 유리(類利)가 도망쳐와 유리를 태자로 삼았다. 그해 9월에 죽자 용산(龍山)에서 장사지내고, 시호를 동명성왕이라 했다. 한편, 동명왕에 서술한 다른 역사책을 살펴보면 먼저, 551년 북제(北齊) 사람 위수(魏收)가 저술한 ‘위서(魏書)’ 열전 가운데 고구려전 앞머리에 실려있는 고구려 건국의 역사적 서술은 다음과 같다.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으니 자기네는 그 선조가 주몽(朱蒙)이라고 말한다. 주몽의 모친인 하백(河伯)의 딸이 부여 왕에 의해 방안에 갇혔는데, 햇빛이 들이비췄다. 몸을 비켜 피했으나 해의 그림자는 또 쫓아왔다. (중략) 자란 뒤 자를 ‘주몽(朱蒙)’이라고 하였으니 그네들의 속어로는 주몽이란 활을 잘 쏜다는 말이었다.… 주몽이 물을 향해서 소리치기를 ‘나는 해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날 도망을 가는데, 뒤쫓는 군사가 가까이 이르렀으니 어떻게 해야 건널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이에 물고기와 자라들이 모두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하략)” 그리고 서기 414년, 광개토대왕(재위;391~413)의 아들 장수왕(재위;413~491)에 의해 세워진 광개토왕릉비[사진]에서 건국 시조 주몽은 다음과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옛적 추모왕(皺牟王)이 터전을 잡을 때 북부여로부터 나왔으니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다. (중략) 왕이 나루에 이르러 말하기를 ‘나는 하늘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해 띠를 잇고 거북을 띄우라’고 하니, 말이 떨어지자 곧 띠를 잇고 거북을 띄웠다..” 마지막으로 동명왕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 고구려의 평양에 있었다. 그리고 백제에서도 백제의 역대 왕들이 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왕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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