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3_미국이야기

멈춰버린 시계(視界)

忍齋 黃薔 李相遠 2006. 9. 7. 0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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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버린 시계(視界) 

실리콘밸리 임마뉴엘 교회 박용갑 장로 (2006년 교회주보 게재)

 ‘이상원’ 이라는 한 현대판 점쟁이를 평소에 존경하며, 알고 지내고 있습니다. 그는 현재 부시행정부에서 환경문제를 컴퓨터 씨뮬레이션 하여 가상 테러와 환경재해를 점쳐주는 확률75%-85%를 자랑하는 대단히 우수한 현대판 점쟁이 입니다. 그의 수필집 “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에 의하면, 이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의 한국나이는 조국을 떠나 오는 순간에 멈쳐버렸다네요. 결국 이 미국에 살고 있는 모든 한국인들의 한국시계(時計)는 멈쳐버렸다는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처음에는 그 점쟁이의 말에 그리 공감이 가질 않았었는데, 최근에 아내(허니)에게서 들은 한 핀잔에 의해서 그 점쟁이의 주장을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천국”에서 진짜 “세상”을 맛보며 삽니다. 지난 2월에 한국을 방문하며 사온 세상 CD가 화근이 되었습니다. 15년 만에 나가 본 한국인지라 샤핑에 푹 빠져서 사온CD 중에 복음성가CD는 탈이 없었지만, 집(천국)에서 송창식의 “피리부는 사나이”(세상)을 들으며, 세상을 음미하노라면, 허니 왈(曰) ‘아니 사올려면, 아이들도 들을 수 있게 요즘 잘 나가는 노래나 좀 사올 것이지, 왜 하필이면 70년-80년대 철지난 유행가야?’ 그 순간 저의 한국 시계가 제가 도미한87년에 서 버린 것을 실감합니다. 알고 있는 유행가가 그것 밖에 없었음을 그제서야 깨닫고는 저의 한국 아이덴터티가 30세 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현대판 점쟁이의 말이 옳다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그리곤 하나님 앞에서의 저의 죄악을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저의 믿음이 작은 관계로, 알게 모르게 형제의 말에, 행동에 많은 상처를 받게 됩니다. 상대방 형제의 무의식적인 언행에 의해, 그 알량한 자존심에 치명타를 입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순간 이후로는 그 형제를 의식적으로 피해 다닌 결과 그 형제에 대한 저의 시계(視界)는 정지해 버립니다. 비록 그 형제가 태도를 바꿔 제게 다가와도 저의 상처받은 자존심으로 인해서, 그 형제에 대한 시계(視界)는 그 현대판 점쟁이의 말마따나 이미 고정된 상태이므로 그 형제가 무엇을 하든 더 이상은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 상태에 이르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돌아온 탕자” 비유 속의 맏아들을 통해서 그 비유의 거울 속에 비친 제 자신을 봅니다. 

 둘째아들이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 왔을때 아버지께서는 풍류와 춤추는 잔치로 환대하지만, 그 맏아들은 노하여 참여하기를 아니 할 뿐더러, 왈 ‘내가 여러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누가복음 15:29-30) 그 맏아들은 돼지냄새가 풀풀났을, 그 창기와 뒹굴던 자신의 회개한 형제를 용서하지 못했던 것이며, 그것이 비록 아버지와의 관계를 멀리 한다고 해도 상관치 않는 그런 아들이였던 것입니다. 

 저의 경우에도 그 맏아들의 행동과 별로 다를 바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더 오래한 사람으로써 제게 상처를 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고 그에 대한 시계(視界)가 과거에 완전히 정지한 상태에서 그를 받아 들이시는 하나님과 불편해진 자리에 선 저를 봅니다. 

 그 돌아온 탕자의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둘째동생을 위한 잔치에 참여 할것을 권 할때 그 맏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본심은 잘 드러납니다. 겉으로는 순종했지만 보상을 바랐던 마음이였으며, 아버지의 집에 거했을지라도 아버지의 마음을 가졌던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줍니다. 그 맏아들은 자신의 동생을 “이 아들”이라고 호칭합니다. 분명 형제이므로 동생이라고 불러야 했는데도, 그냥 제 3자 취급을 해버린 것입니다. 이미 그 돌아온 탕자를 형제로 보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그 맏아들 역시 아버지를 떠난 탕자임 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쯤되면 이 아버지의 집에는 아버지를 떠난 탕자가 하나가 아닌 둘이 되며 이 유명한 누가복음 15장은 2탕자를 가진 아버지의 비유가 됩니다. 

 저의 경우에도 형제에 대한 그 멈춰버린 시계(視界)로 인해서, 아버지께서 받아들인 형제를, 제가 이미 제 3자 취급을 해버린 죄인임이 틀림없습니다. 게다가 ‘아버지 제가 아버지 일을 하다가 형제에게 상처를 받았는데, 아버지 일을 한 보상이 겨우 이 상처 투성이 입니까?’ 라는 보상을 바라는 갈등을 통해서 비록 아버지의 성전에는 거했지만 아버지의 마음과는 전혀 달랐던 또 다른 하나의 “아버지를 떠난 탕자” 임이 분명합니다. ‘하나님, 저를 회개케 하시고, 저의 멈춰버린 형제에 대한 시계를 새롭게 움직이게 하여주옵소서.’ 

 저 또한 지금까지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그리고 집사님에게 많은 상처를 드리며,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을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내 소시(少時)의 죄와 허물을 기억치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시편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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