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2_한국역사

[스크랩] 할머니, 공부가 재미있어요?(2) 제1장 1 ~ 3

忍齋 黃薔 李相遠 2007. 5. 3. 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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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 장 성장기

                       [1938년  ~ 1958년]



     1. 우리 집안 

    저는 전남 장성군 장성읍 청운동에서 3남 3녀 중 4째로 태어났습니다. 친정 집은 장성역에서 도보로 2분 거리에 있고, 장성에서 제일 큰 황룡장(황룡면 월평리)도 1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읍내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친정은 논 11마지기, 밭 3마지기에, 집도 읍내에 2채나 있어서 먹고 살만한 형편이었습니다.

    친정 아버지는 한량기가 있어서 농사는 주로 친정 어머니가 짓고, 아버지는 읍내 가게에 돈을 대주고 이익을 나누어 받기나 하셨습니다. 

 

    2. 행복했던 장성 중앙초등학교 시절


   친정 어머니는 교육에 관심이 많아 시골에서는 드물게 오빠들과 언니를 모두 8살에 학교에 보냈습니다.

   올캐 언니가 “학교에 가면 손바닥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회초리로 때린다”고 겁을 주어서 학교에 가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언니가 “야이 무식쟁이야” 하면서 꼬집고 학교 가라고 졸라댔습니다. 9살이 되어 입학 원서를 사러 장성 중앙초등학교(당시는 장성 영천공립국민학교 1945. 12. 개교)에 가니, 선생님은 “네가 학교 가는거냐? 언니가 가는거냐?”하고 물을 정도로 키가 작았습니다.

  

   [영천초등학교는 호남 제일의 약수라는 방울샘이 있는 영천리(鈴泉里)에 자리 잡고 있는데, 바닥에서 물이 방울처럼 솟구쳐서 얻은 이름입니다. 방울샘은 전쟁기에는 붉은 물이, 전염병기에는 흑빛 물이, 국가 경사시에는 하얀 뜨물 같은 물이 솟구친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현재 보해양조 공장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내내 아버지와 선생님의 사랑을 듬뿍 받아 여자 반장이 드문 시절에, 1학년 2학기부터 5학년까지 계속 반장을 하여 즐겁고 행복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학교에는 원래 둘씩 짝을 지어 앉는데, 저는 2학년 때부터 4학년 때까지는 교유꾸 마마들이 청탁해서 양쪽에 급우를 거느리고 앉았습니다. 3학년 때 정권조 선생님이 칠판 가득하게 내놓은 수학 문제를 급우들이 나가서 풀었는데, 제가 나가서 급우들이 못 푼 문제를 다 풀고, 틀린 것까지 고치자, 정선생님은 남학생들 고추를 따서 영숙이한테 붙여준다고 하고, 급우들은 도망다니는 우스운 일도 있었습니다. 그 날부터 정선생님이 붙여준 ‘똑똑이’는 내 별명이 되었습니다.


   다른 학교와 운동 경기를 하면 응원단장을 하고, 학교 합창단의 지휘자도 하고, 웅변대회에 단골로 나가서 학우들을 약속된 수신호로 지휘하기도 하고, 국군위문 공연 연극에도 나가는 등 과외 활동도 활발히 하였습니다. 친정 아버지는 둘째 딸이 연극에 경찰로 출연한다고 하자, 수소문하여 가장 작은 경찰복을 얻어 와서 몸에 맞게 줄여주었습니다.

   아버지는 다른 자녀와는 거의 대화가 없고, 둘째 딸인 저하고만 말씀을 나누고 즐거워 하셨습니다. 벌어진 앞니를 드러내고 히죽 웃으며 “아버지, 시집갈 때 옷 한 벌 덜 해입을 터이니 금이빨하여 줄꺼지”하고 어리광을 부리면 아버지는 “그러마”하고 껄껄 웃곤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다보니 게으름도 많이 피웠습니다. 8살 많은 올케 언니, 6살 많은 친언니가 “설거지 하라, 불 때라”하고 일을 시키면 아버지 방으로 도망 가버려, 언니들이 일을 시킬 엄두를 못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창고에 몰래 숨어서 잠을 더 자다가 식사 준비가 끝나면 슬그머니 아버지 밥상에 같이 앉아 식사를 하여도 아무도 나무랄 생각을 못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야 고작해야 감자를 찌거나, 부침개를 만들거나, 빵 만드는 정도였고, 남동생이 숙제를 대신해 달라고 조르면 방 벽에 ‘불 때 줄게, 숙제해 줘’라고 각서를 쓰게 하고서야, 숙제를 해주었습니다. 어려서 실컷 농땡이 부린 벌을 받아 결혼한 후에 온갖 고생을 다 하고, 지금까지 일을 놓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재미 삼아 황룡장에서 연필과 공책을 사다가 급우들에게 팔아 학비를 보탰습니다. 다른 반 담임인 박내춘 선생님까지 조회시간에 “김영숙이가 연필과 공책을 팔고 있으니 사세요”하고 광고도 하여 주셨습니다.

   4학년 때는 중국집에 가서 국화빵 17개를 100원에 사서 급우들에게 1개에 10원씩 팔아 저와 동생 학비까지 조달하였습니다.

   4학년 때, 학교에 처음 발령받아 담임을 맡았던 선생님은 언니와 결혼하여 형부가 되었습니다. 형부는 “영숙이가 공부를 잘해서 그 언니랑 결혼했다”고 하셨는데, 평생 잊지 못할 은사이고 보디가드입니다. 학교 친구들이 전근 온 선생님에게 집을 세로 주기만 해도 부러워했는데, 담임 선생님을 ‘형부’라고 부르니 친구들에게 뽐을 낼만 했습니다. 형부는 처음 제자였던 저에게 “영숙아”하고 부르더니, 언니와 결혼하고도 어색해서인지 “처제”라고 부르지 않고, 제가 결혼하고나자 그나마 조금 높힌 말이 “영숙이”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3. 친정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다


   아버지는 화병으로 제가 6학년 1학기였던 52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친정 어머니는 40대 후반에 홀로 되어 빚 뒤처리를 하느라 그 많던 재산을 다 팔아서 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에는 집 한 채 밖에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6학년에 올라 2반에 배정되었는데, 5학년 때 담임이고, 6학년 1반을 맡으신 손창문 선생님이 찾아와서 “우리 반으로 오너라(반을 바꾸어라)”하셔서, 새 담임 선생님 기분이 상하실까봐 못 간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쉬는 시간에 1반 아이들이 몰려와서, 선생님이 “김영숙이가 우리 반에 왔으면 좋겠다는 사람 손들어 봐라” 해서 전부 손들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6학년 2반 담임 선생님은 완고한 분이라서 “여자들 말이 울 너머로 넘어가면 그 집안은 망한다”면서 여자들은 손을 들어도 대답을 시키지도 않고, 치마 바람을 날리는 학부모 아이들만 시켰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도 있어서, 수업시간 내내 교실 바닥만 쳐다보고 학교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6학년 2학기가 되자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손선생님을 찾아가 반을 바꾸어 달라고 하여 1반으로 옮겼습니다. 손선생님은 홀어머님과 단 둘이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었는데, 학부모 2명이 과외공부를 부탁하자 “2명만 따로 가르치면 남은 더 많은 학생들은 어떻게 하냐”면서 바로 거절하여버린 양심 있는 교육자이셨습니다.

   당시 중학교 입시는 전국적으로 동시에 실시되었습니다. ‘미국 대통령 이름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자신 있게 ‘아이젠하워’라고 쓰고, O-X형 문제도 금방 다 풀어서 ‘중학교 입시 별 것도 아니네’ 하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험관 선생님이 등을 툭 치면서 “자세히 봐” 하시길래, ‘왜 그러시나’ 하고 다시 시험지를 살펴보아도 틀린 게 없어서 가슴을 펴고 시험장을 나왔습니다.

   다음날, 손 선생님이 저를 껴안고 “너 좋고 나 좋고”만 연발하시며 눈물을 쏟았습니다. O-X형 문제에서 맞는 것에만 O를 표기하고 틀린 것에 X를 표기하지 않아 만점을 놓쳤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별안간 돌아가시고, 논밭을 다 팔아버리자, 친정 어머니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작은 딸이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기를 바랐고, 그래서 저도 모르게 실수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3형제를 먹여 살리기도 어려운 어머니에게 입학금을 달라고 말할 수 없어서 중학교 등록을 못하고 말았습니다.   


출처 : 복사2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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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 송내역전에서 김동섭 변호사 사무실을 하는 초등학교 친구 어머님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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