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2_한국역사

[스크랩] 할머니, 공부가 재미있어요?(3) 제1장 4~5

忍齋 黃薔 李相遠 2007. 5. 3. 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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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꿈 속에서 5년간 다닌 중학교

    

   중학교에 등록을 못했지만 아침마다 중학교에 진학한 동네 친구들이 집 앞에 와서 “영숙아, 학교 가자”하며 기다리자, 친구들을 따라 장성중학교에 등교하였습니다. 선배 졸업생에게 빌린 큼지막한 교복을 입고 4개월 가까이 출석도 부르지 않는 학교를 다녔지만 학교에 나오지 말라는 선생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벼룩도 낯짝이 있지’하는 생각에 아침 일찍 집을 나가서 친구들을 피해 한동안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은 그래도 하교 후에 집에 찾아와서 그날 학교에서 배운 것을 알려주곤 하였습니다.

   생각다 못해 한 번은 30리나 되는 길을 걸어서 자녀가 없는 고모를 찾아갔습니다. “딸을 한 사람 낳았다고 생각하고 중학교 입학금만 좀 내 주세요” 하고 철없는 말을 하니, “아들이 있어야지, 딸은 필요 없다”고 거절하셨습니다. 또, 이모에게도 찾아가서 “딸이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하고 입학금만 내주세요”하니, “내 자식을 가르쳐야지, 조카를 가르쳐서 뭐하느냐”면서 거절하였습니다. 


   친구들에게 미안한 생각에 여름방학을 얼마 앞두고 아예 이모집에 식모살이겸 피신해서 2년간 있었습니다. 이모네 딸은 1살 많은 언니로서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언니 교복을 빨아주면서 부러워서 눈물을 흘리곤 하였습니다.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 친구가 “서울에 올라가자”며, 제 차비까지 마련하여 왔지만 끝내 따라가지 못하였습니다. 홀어머니 딸이 집을 나가면, 어머니가 집안 어른들에게 “딸 잘못 키웠다”는 꾸지람을 들을까 하는 걱정이 들어서, 중학교도 보내주지 못하는 집을 나가고도 싶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모네서 식모살이를 할 때, 집에서 키우는 돼지 2마리가 한꺼번에 임신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큰 돼지가 작은 돼지막에 들어가서 다리를 물어, 작은 돼지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돼지는 한 번 다리가 부러지면 이을 수가 없습니다. 이모는 인심이라도 쓰듯이 “작은 돼지가 낳은 새끼 한 마리를 1년 새경으로 주마” 하셨습니다. 그런데, 큰 돼지가 먼저 새끼를 13마리나 낳았지만 모두 잡아먹고, 보름 후에 작은 돼지도 새끼 11마리를 낳았는데, 10마리를 잡아먹고 딱 1마리만 남았습니다. ‘돼지도 내 맘을 알아 영숙이 몫 1마리는 남겨 두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작은 돼지가 낳은 새끼는 큰 돼지막, 작은 돼지막을 오가면서 두 어미의 젖을 얻어 먹어 돼지 새끼 1마리에 1,600원 하던 때에 4,700원이나 받았습니다. 그 때에 중학교 입학금과 교재비가 2,500원이었는데, 이모는 1,500원만 주었습니다. 원망스러웠지만 돈을 받아 동생의 3개월치 중학교 등록금을 내주었습니다.

   이모집을 나와 친정에 들어가서도 한 2년은 교복 입은 여학생만 보면 꼭 미친 사람처럼 마음이 안절부절하여, 집에 와서 울면서 ‘중학교에 보내 주세요’라고 시위라도 하는 듯이 영어로 된 노래를 부르곤 하였습니다. 어쩌다 집에 들러서 그런 딸을 보는 친정 어머니 속은 또 얼마나 상하셨을런지.....

   친정 집에서 수놓는 일과 바느질로 생계를 도왔는데, 열아홉이 되도록 매년 봄만 되면 학교가고 싶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마음만 찢어질 지경이었습니다.   

           

    5. 성실한 동네 총각과 결혼을 하다 


   친정 어머니는 논밭을 다 잃고 제가 열 일곱이 되던 해에 구읍의 성산으로 이사를 와서 그 때부터 각처로 대나무 바구니를 팔러 다니고, 집에는 2, 3달만에 한 번씩 들어왔습니다.

   제일 큰 언니라서 두 남매들 가장 노릇을 하였는데, 작은 오빠가 수시로 찾아와  행패를 부려 도저히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동생은 서울로 보내고, 여동생은 시집간 언니네로 보내고 저는 시집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시집가겠다고 하니 손창문 선생님이 누이를 시켜서 당시 대학생이던 처남과 결혼을 청해오셨습니다. 그러나, 배움이 없는 자격지심에다가 그 집에 시집가면 근처에 사는 작은 오빠가  또, 행패를 부릴 것 같아 거절하였습니다.

    이모 집에서 일할 때 보았던 성실하고 심성이 고와 보이던 총각에게 호감이 있었는데 양조장에서 서기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총각의 아버지는 양반 출신이라고 하는데, 매일 낚시만 하고 집안 살림을 전혀 돌보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그런 남편을 원망하지 않고 식사 때에 아이들을 불러 모아 찬물을 한 사발씩 떠다 놓고 마시게 하였다고 합니다. 총각은 장성 성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입학을 못했다가, 홍수에 떠내려오는 중톳(중간 크기의 돼지)을 건져 팔아 입학금과 한학기 등록금을 마련하였습니다. 고등공민학교에 교복만 간신히 얻어 입고 모자도 신발도 없이 등교를 하였는데, 반장에 당선되어 “용의가 단정치 못하여 반장을 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가 동네 친구들에게 “너 때문에 우리 동네에서 반장이 나지 못했다”며 몰매를 맞았답니다. 2학기 때에는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하여 수시로 “공납금을 마련해오라”면서 집으로 쫒겨나면서도 수석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총각이 머리도 좋고, 공납금도 없이 1학기나 학교에 다닐 배짱이라면 끈기도 있는 사람이라고 보아 집안 사람을 통하여 청혼을 넣었습니다. 총각 집안에서도 1주만에 바로 날을 정하여 와서 7주만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한 후에야 알게 되었지만 남편이 열 다섯 살 때부터 13년이나 신경통을 앓고,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가 늑막염까지 얻어 힘든 일을 못해서 양조장 서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편 집안에서는 혼사말이 나오자마자 결혼을 서둘렀던 것입니다. 


    남편 집안에서는 결혼 말이 나올 때에는 ‘금반지를 하네, 장롱을 하네’ 하였는데, 결혼식 날이 닥치도록 아무 소식이 없어서, 언니가 매파에게 야단을 치니, 마지 못해 오동나무 장을 사왔습니다.


출처 : 복사2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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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 송내역전에서 김동섭 변호사 사무실을 하는 초등학교 친구 어머님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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