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2_한국역사

[스크랩] 할머니, 공부가 재미있어요?(4) 제2장 1~3

忍齋 黃薔 李相遠 2007. 5. 4. 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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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2 장 결혼 후 장성 생활
                   [1959년 ~ 1971년]


     1. 시댁에서 신혼 생활

   남편은 양조장에서 번 돈을 모두 집에다 바쳤는데도 결혼할 때 도와준 집안 어른은 양단 옷 한 벌 마련해 준 먼 친척 밖에 없었습니다. 남편은 빚을 얻어 양단 옷 한 벌과 오동나무 장을 샀는데, 급히 장농을 맞추어 채 마르지도 않은 장농이 첫날 밤부터 ‘뚝딱 뚝딱’ 소리를 내더니 조각이 떨어지는 엉터리 물건이었습니다.

        

   남편은 결혼하고도 양조장에 1년 정도 더 일을 했는데, 숙직실에 살면서 1주일에 한 두 번 낮에만 집에 오고 월급도 주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그 때 몸이 많이 상하여 힘든 일을 할 수도 없고, 잠잘 때는 죽은 사람처럼 몸을 꼼짝도 못했습니다. 친정 어머니는 남편에게 지병이 있는 것을 알고 “시집 와서 생긴 병도 아니니 네 잘못이 아니다. 오래 살지 못한다고 하니 동거하지 마라”고 하였고, 남편도 몸이 아파서 동거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시댁은 방이 2개 있었는데, 큰 방에서 큰 시숙네 식구들과 시누이가 살았고, 시아버지가 쓰던 작은 방을 우리 부부가 쓰게 되었습니다.

   시아버지는 따로 나가 살면서도, 매일 새벽이면 신혼 방에 와서 식사부터 모든 것을 해결하고 저녁 늦게야 갔습니다. 새댁이 시아버지가 계시는 방에 같이 있을 수가 없어서 4개월여를 하루 종일 밖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남편은 지병을 고치려는 의지도 없고, 월급도 시아버지에게 다 드려, 삶이나 생활에 의욕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2. 분가를 하다

  

   시댁의 불편함은 견딜 수 있지만 신랑이 시댁에 얽매여 월급도 못 갖다주는 무기력함에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동네 최종옥 언니에게 작은 방을 내달라고 부탁하여 보증금도 없이 남자 품삯 3일치만 주고 이사를 갔습니다. 이 때에 큰 시숙이 어려운 형편에도 쌀 1말, 솥 1개, 밥그릇 2개, 대접 2개, 짚단 10다발을 마련하여 주었으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남편은 이사하고도 직장에서 자고 며칠에 한 번씩 낮에 잠깐 집에 들렀지만 생활비를 전혀 주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미안해서인지 “서모가 빈 자루를 들고 와서 쌀이 다 떨어졌다고 해서 주었다”고 말했지만, ‘나는 왜 생활비도 안 줘요’하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한 말 쌀이 다 떨어져 굶고 있으니, 주인 집에서 ‘임신해서 입맛이 없나보다’ 생각하고 불러서 밥을 주고, 다음날 동네에 임신하였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하늘을 보아야 별을 따지’, 남편하고 동숙하지도 않는데, 얼토당토 않은 말이 돈 것입니다.     굶어 죽더라도 남의 집 밥 빌어먹기는 싫어서 밥하는 것처럼 빈 솥에 물을 붓고 불을 땠는데, 시아버지가 연기를 보고 식사하러 왔다가 허탕을 치고 잔소리를 하여,

주인 집에서도 제가 굶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인집 딸인 종옥이 언니가 “굶지 말고 식량이라도 팔아오라”면서 저고리 4감을 주어서 그것을 팔아 쌀 1가마를 샀고, 친구 심영자가 “결혼할 때에 찾아가지 못해 미안하다”면서 옷 1벌을 주어서, 이것도 팔아서 간장을 담았습니다. 종옥이 언니나 영자 같은 좋은 사람들 덕분에  굶어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남았습니다.


   3. 남편의 병을 고치다

 

   큰 언니가 성수암이라는 절에 있는 보살이 사주를 잘 본다며 가보자고 하여, 세 자매가 같이 갔습니다. 보살은 제게 “소가 새 풀을 만난 격이요. 이 병은 수술하지 말고 약으로 다스리면 꼭 병을 이각하겠소. 큰 자식을 2명 둘 것이오”하고는 눈을 꼭 감았습니다. 보살은 동생에게는 “자유 결혼을 하겠소”하여, 자매들이 모두 웃었습니다. 여동생은 세상에 둘도 없이 착하고 누구와 이야기도 못하고 땅만 보고 다니는 조신한 사람인데, 자유결혼을 한다니 우스웠습니다. 보살은 형부 사주를 보고는 “평생에 큰 재물이 두 번 있겠소”라고 하였습니다. 성수암을 나와 다른 집에 가서 또 사주를 보았는데, 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며칠 후에 두 언니는 생각도 못하였는데, 동생이 당시에 흔치 않던 여군에 입대하였습니다. ‘보살님 말씀대로 동생이 진짜 자유 결혼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고, 못 배운 것이 한이 되었는데, 큰 자식을 둘이 아니라 하나만 둔다고 하더라도 다행이다 싶어서 남편의 병부터 고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남편은 총각 때 번 돈으로 논 3마지기를 사 두었는데, 우선 그걸 팔아 병원비로 쓰려고 하였습니다. 시아버지가 그 소식을 듣고 남편을 불러 “네 병은 죽을 병이다. 그 돈을 나를 달라. 고무신 가게를 차려서 먹고 살아야겠다”고 하였습니다. 남편이 바로 언니네 집에 있는 저를 찾아 왔는데, 혀가 굳어서 말을 못하였습니다. 친정 어머니가 따뜻한 물을 주니 받아 마시고 나서 시아버지 말을 전하였습니다. 저는 속으로 ‘해도 너무 한다’ 싶었지만 논을 팔아 받은 30만원 중에서 시아버지에게 10만원을 드리고, 2만원으로 시아버지 빚잔치를 하였습니다.

  

    남은 돈 18만원을 가지고 남편과 전남 도립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보니 신경통, 늑막염에 폐도 좋지 않다며 15일치 약을 받았는데도, 돈이 5천원이나 부족하였습니다. 병원 인근 식당에 가서 남편이 “국밥 2개요”하고 주문을 해서, ‘국과 밥을 함께 먹으면 비싸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백반 먹을께요”하니, 남편이 국밥을 취소하고 백반 2개를 주문하였습니다. 나중에 계산할 때 보니까, 국밥은 15원인데, 백반은 30원이라서 계산을 잘못한 것 같아서 “왜 곱으로 주어요” 하고 물으니, 남편은 “국에다 밥 한 술 말아먹는 것과 조기, 불고기가 다 나오는 백반의 가치가 어찌 같단 말이오”하였습니다. 그 때까지 국밥과 백반도 구별할 줄 모르는 왕쑥맥이었습니다.

      

    남편의 병을 고치려고 빚을 내도 약을 살 돈이 부족하여 몸에 좋다는 이런 저런 비방을 만들었습니다.

    태어나다가 죽은 새끼 돼지는 시장에 내다 팔 수 없고 먹기도 힘들어서, 그냥 땅에다 묻어 버립니다. 돼지가 새끼 낳는 집을 미리 알아보아 빨래비누를 몇 장씩 갖다 주고 죽은 돼지 새끼를 얻어다가 깨끗이 씻어 솥에 물을 붓고 솥 가운데에 옹기를 뒤집어서 놓고, 그 위에 놓은 바구니에 새끼를 놓고 중탕을 하여 나온 물을 남편에게 먹게 하고, 젓가락으로 고기는 따로 골라 주었습니다.

    또, 개가 낳다가 죽은 새끼나 개머리뼈를 얻어다가 칠나무(옻나무) 껍질과 함께 24시간 동안 푹 고아서 마포 보자기에 싸서 짜내어 국물을 내서 마시게 하기도 하였습니다(개칠개). 이때에 옻을 많이 만져서 지금도 옻이 옮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한 1년을 병수발 하다보니 남편의 몸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저는 그 때 경험으로 사람들을 이런 생각으로 대해 왔습니다.

      o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주자

      o 남에게 의존하여서만 살려는 사람은 인간 좀벌레이니 상대하지 말자

      o 참는 자에게 복이 온다

    어린 조카가 진학을 원하는 것을 알면서도 꿈을 앗아가버린 이모나 셋째 아들 병에도 아랑곳 않고 맨날 쌀 달라고 찾아오는 시아버지 태도에 섭섭하였지만 달라는대로 다 주었으니, 제 속마음을 몰랐을 것입니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이모나 시아버지를 욕보이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시절에 제게 고통을 주었던 사람들은 두 분 말고도 훨씬 더 많지만 다 빼고 안 썼습니다. 그 시절에는 없는 집에 그나마 남아 있는 쌀 한 톨까지 찾아내서 긁어가려는 사람들만 주위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려서 친정 아버지로부터 평생 다해도 갚지 못할 사랑을 받아 게을러 터졌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한으로 결혼해서도 한동안 내 생각에만 빠져 있어서 다른 사람 마음을 모르는 바보 쑥맥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냉정하게 대하였던 이런 어른들은 자나깨나 학교밖에 몰랐던 철없는 새댁에게 세상을 가르쳐준 선생들입니다.   

   우리 가족이 부천으로 이사가고 4년 남짓만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맏동서는 임종을 할 때에 “부천 셋째네도 연락을 해야지요” 하니, 시아버지는 “게네들도 먹고 살아야지”하였다고 합니다. ‘시아버님도 돌아가실 때가 되니 셋째 아들에게 얼마나 심하게 하셨는지 아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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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     례 --


* 작은 책을 내면서


제1장 성장기(1938년 ~ 1958년)

   1. 우리 집안

   2. 행복했던 장성중앙초등학교 시절

   3. 친정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다

   4. 꿈 속에서 5년간 다닌 중학교

   5. 성실한 동네 총각과 결혼을 하다


제2장 결혼 후 장성생활(1959년 ~ 1971년)

   1. 시댁에서 신혼생활

   2. 분가를 하다

   3. 남편의 병을 고치다

   4. 벽돌공장에서의 새로운 출발

   5. 큰 딸이 세상을 떠나다

   6. 농사를 시작하다

   7. 남댕이로 이사를 가다

   8. 남댕이 할머니 집으로 들어가다

   9. 아이들 학교 입학

   10. 야당 선거운동을 하다

   11. 고향을 떠나다


제3장 노점, 행상 생활 (1972년 ~ 1976년)

   1. 생선, 야채 행상을 시작하다

   2. 자유시장으로 이사가서 자리잡다

   3. 우리 가게를 하기 시작하다

   4. 덧버선으로 대박이 나다

   5. 경인약국 앞에서 마지막 노점 생활


제4장 영광스런 영광상회 (1977년 ~ 1993년)

   1. 부천에서 처음 마련한 우리집

   2. 영광상회를 열다

   3. 우리 가게를 사게 되다

   4. 종업원 관리 요령

   5. 장사하는 요령

   6. 아이들 중고교, 대학 진학

   7. 평생 은사이자 은인인 형부

   8. 수영과 노래를 배우다


제5장 내 인생을 찾아서(1994년 ~ 2006년)

   1. 자녀들이 취직하고 결혼하다

   2. 중검, 고검, 대검을 차례로 합격하다

   3. 방송대학교에 들어가고, 영감이 대수술을 6번이나 받다

   4. 다시 일하면서 공부하다


* 독후감 ----- 어머님에 대한 생각 ----------  차남 김의섭

* 칠순과 자서전 발간을 함께 축하드립니다 ------  딸 김선희

* 독후감 ------ 어머니의 품 ---------------- 삼남 김정섭

* 편집후기 ---- 어머님의 힘 = 자존심 --------- 장남 김동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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